아버지가 임금이 아니었더라면
어머니 품안에서 자랐을 텐데
단지 임금님의 아들로 태어난 죄로
어머니를 생이별한 단종,
발이 있어도 찾아갈 수 없고
입이 있어도 부를 수도 없다.
아무리 어머니가 그리워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아기 새도 엄마 곁을 따라다니고
송아지도 엄마소를 부르면
마음대로 새끼를 찾아가는데
짐승이 부러운 단종.
하늘만 쳐다보고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단종.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려고
머루 다래를 따러 갔던 마을 사람.
태백산 여기에서
머루 다래는 땄지만
미처 영월까지 가기도 전에
단종은 사약을 받았다.
'조선국 태백산 단종대왕의 비'
비각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를 그리는 가련한 아들 ,
아들을 그리는 애처로운 어머니.
(새로 쓴 날짜 5/11)
(102) 백담사 계곡
다시 쓴 날 01.6/7
굽이쳐 돌아가는 백담 계곡 시냇가
굽이굽이 선경은 하느님의 솜씨다.
한 굽이 돌아갈 때마다
마음이 열린다.
한 골짝 돌 때마다 나타나는 봉우리들
저마다 다른 모습 하느님의 조화다.
누구나 이 계곡을 걸으면
욕심이 사라질 거야.
새소리, 물소리, 솔 소리, 바람소리
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면
사람도 자연이 된다
마음이 비워진다.
(103) 선열공원의 나무들
다시 쓴 날 9/20
대나무야, 너는 왜 거기 서 있니?
소나무야, 향나무야, 무궁화야!
이 자리엔
아무도 너희를 대신할 수 없단다.
너희가 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야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 바친
선열들의 얼이 되살아난단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단다.
목련, 연산홍, 백일홍, 해당화도
여기에 와 서 있으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누구나 와 보면 안다.
( 이후문학 01)
(104) 몸살 앓는 지구
9/20
추분에는 약속이 많다.
낮과 밤이 서로 욕심 부리지 말고
똑같이 12시간씩 갖기로 했다.
여름과 겨울이 서로 욕심부리지 말고
더위 반, 추위 반 나누기로 했다.
감나무는 감 맛을,
배나무는 배 맛을,
사과나무는 사과 맛을,
대추는 대추 맛을,
다래는 다래 맛을 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겨울을 여름같이 살고
여름을 겨울같이 산다.
수박이 겨울에도 나오고
딸기가 아무 때나 나온다.
지구는 몸살을 앓는다.
겨울에 개나리가 피어도
한 곳에, 한 시간에
300mm 폭우가 쏟아져도,
남극의 얼음이 녹아서
육지가 물에 잠겨도
사람들은 할 말이 없다.
(105) 감나무는 언제나
9/27
감나무는
삼동 겨울잠을 자면서
주렁주렁 감을 익힐 생각을 한다.
감 맛들이기에 알맞는 잎을 만든다
색깔을 생각하며 햇볕을 받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감 모양을 생각한다.
비를 맞으면서
감 맛을 생각한다.
너무 가물까 봐 걱정
장마로 햇볕이 모자랄까 걱정
태풍이 닥칠까 걱정
감 맛이 들 때까지는
마음이 안 놓인다.
(128) 저마다 꿈이 다른
9/27
대추나무는 언제나
대추 꿈을 꾸기 때문에
대추 닮은 잎을 피운다.
고구마 줄기가 땅을 기며
고구마 꿈을 꿀 때
대추나무는 대추 꿈을 꾼다.
대추나무 옆에
사과나무가 있어도,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가 좋아도
저마다 다른 꿈을 꾼다.
남다른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저마다 꿈이 달라서
가지가지 모양이 다르다.
그래서 세상이 아름답다.
내가 못 하는 일은
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살맛이 난다.
(106) 떡잎부터 다르다
9/27
해바라기 키가
저렇게 큰 것은
어릴 때부터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채송아 키가
저렇게 작은 것은
어릴 때부터 생각이 작았기 때문이다.
해바라기는 언제나
큰 생각을 하며 자라서
꽃도 저렇게 크다.
채송아는 언제나
자잘한 생각을 하며 자라서
꽃도 저렇게 자잘하다.
(107) 화왕산 억새꽃
9/30
화왕산 너른 산비탈에
억새꽃이 한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너도나도 좋다고 소리친다.
볼 만한 구경거리다.
억새꽃이 혼자말로
'너희들도 우리처럼
한마음이 돼 봐라.
마음만 맞으면
다 아름답다." 한다.
(108) 뱃속 아가
9/30
아가야, 엄마가 불러주는
고운 노래 들리니?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 듣고 있니?
엄마 목소리
익혀 두었니?
엄마 냄새, 아빠 생각
알아 맞추겠니?
아가는
엄마도 닮고 싶고
아빠도 닮고 싶다.
얼굴도 닮고 싶고
생각도 닮고 싶다.
아가는 목소리가 닮고 싶어
엄마, 아빠 정답게 나누는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는다.
아가는 더 큰 일이 하고 싶어
날마다 조금씩
생각을 쌓아간다.
몸무게가 불어간다.
(109) 그믐날
9/30
그믐날 달력은
그냥은 못 있다.
지나온 발자국이 저절로
되돌아 보인다.
자국자국 잘한 일,
자랑스런 일로 이어졌으면
마음이 홀가분하다.
즐겁게 다음 달로 넘어간다.
못 다한 일, 못 갚은 일
부끄러운 일로 이어졌으면
발걸음이 무겁다.
다음 달 맞기가 겁난다.
(110) 상달
10/1
옛날부터 시월을 상달이라 했다.
날씨가 환하게 웃어 주니
코스모스도 환하게 웃는다.
오래 참고 있던 국화도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다.
감나무는 숨겨 두었던 감을
푸른 하늘에 드러내놓았다.
사과나무, 배나무, 밤나무도
익힌 열매를 드러내놓았다.
고운 색깔로 마무리하고 있다.
태풍에 시달리던 벼들이
마음놓고 이삭을 살찌운다.
따가운 햇살 속에서
맛을 받아 채운다.
끝마무리 손길이 바쁘다.
풀벌레들도 여름내 익힌
다듬어진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 잔치를 벌였다.
단군 할아버지 하늘 여신 달엔
온 세상 잔치다. 즐겁다.
(111) 자리를 비켜주고
비탈에 선 코스모스
10/6
해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더니
올해는 채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코스모스는 자리를 비켜주고
비탈에 서서 활짝 웃는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들국화도
웃음이 찰랑찰랑 넘친다.
양로원에서 노인을 돌보고 돌아온
어머니처럼 얼굴이 환하다.
(112) 하늘 문
- 월출산 천황봉에서
10/10
월출산 천황봉 가는 길에
하늘 문(통천문-通天門)이 있다.
이 문을 지나야
하늘의 옥황 상재를 만날 수 있다.
하늘 문을 지나면서
사람들은 천사로 바뀌어졌다.
얼굴도 몸도 마음씨도
동글동글 아름다워졌다.
천황봉에 올라서서
옥황 상재가 된 마음으로
동서남북 아래를 굽어본다.
"참 잘 만들어졌다."
닮은 듯 닮지 않고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고
용케도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무리무리 조화로운 바위들.
(113) 화분이 생글생글
10/14
우리 엄마는
내 동생 울음소리만 듣고도
기저귀가 축축한 지
배가 고픈지 다 안다.
우리 엄마는
화분의 난초 모양만 보고도
화를 내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다 안다.
난초가 상을 찡그렸을 때도
목이 말라 보채는지
배가 고파 그러는지
말 안 해도 다 안다.
'목이 많이 탔겠구나.'
엄마가 혼자 하는 말
난초는 용하게 알아듣는다.
물을 마시고 생글생글.
(114) 할아버지와 떡버들
- 흙 (63)
10/16
할아버지가 나만했을 때
배가 고팠을 때
맛있게 따먹었단다.
옛날이 떠오른다며
할아버지는 어린이가 되어
떡버들을 따먹는다.
배고팠을 때가 생각나서
그때 더 따먹고 싶었던
욕심을 채우려는 듯
떡버들을 떠나지 못한다.
흙과 더불어 사시는 할아버지는
흙이 주는 건 다 좋단다.
흙내 나는 건 다 좋단다.
베풀어주는 흙이 고맙단다.
(할아버지는
닭 겨릅 보듯 바라보는 우리가
이상하다는 눈짓이고
동생과 나는
할아버지가 이상하다.)
(115) 나도 신선이 된 듯
-선유동 계곡 학선대
10/18
신선이 내려와 즐기라고
조물주가 마련해 놓은 자리
학같이 깨끗한 신선들이
학처럼 춤을 추었겠지.
고요한 달밤 맑은 물소리
흐느적흐느적 춤사위
옥석 너럭바위에 오르니
나도 신선이 된 듯.
(116) 용추폭포
10/18
용이 힘차게 물을 차며
하늘로 올라간다
옛날 어느 누가 본 대로
여기 오는 사람마다 똑같이
용이 하늘로 오르는 걸 본다.
용추 폭포에 온 덕에
나도 용을 만날 수 있었다.
* 용추 (龍湫): 용소.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에 있는 용이 사는 웅덩이.
(117) 입동
11/7
햇볕이 엷다
햇볕이 엷어진 두께만큼
더 두터운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 발붙이고 사는
대추나무, 밤나무, 배나무, 감나무
햇볕 두께를 용하게 안다.
햇볕이 두터울 때를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열매를 키웠다가
햇볕 엷기 전에 맛을 다 들인다.
과일 나무만 그런 건 아니다
뱀, 개구리, 풀… 저마다
햇볕 엷기 전에 겨울 준비를 한다.
(118) 남성현의 겨울 감
11/17
잎 진 나무들만 남아
입 다물고 무뚝뚝하게 서 있다.
곱게 웃어 주던 꽃도
울긋불긋 단풍도 다 사라졌다.
내가 익힌 열매만이라도 남겨
덜 쓸쓸하게 해야지.
손이 시려도 꼭꼭 붙들고 있다.
감나무들의 따뜻한 마음으로
남성현 골짜기가 환하다.
따슨 정이 골짜기를 흐른다.
버스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나그네 얼굴에 웃음이 가득.
동서남북 곳곳으로
따슨 정이 실려 간다.
(119) 낙엽 깔린 길을 걸으며
4/15
온 산에 흔한 낙엽
땔나무가 귀할 때였다면
눈이 번쩍 띄게 탐 날 갈비
손도 안 댄 체 그대로 쌓여 있다.
흔한 낙엽을 밟으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탐나는 것도 없어지고
조바심도 사라진다.
우거진 숲 속 오솔길
한 발자국씩 발자국을 옮기면
보리 고개 넘던 길로 빨려든다.
풀뿌리, 나무 껍질로
입에 풀칠을 하다가
부황이 나 쓰러졌던 할배, 할매들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으로
헐벗고 배를 곯았던 조상들
아무 죄 없이 벌을 받았었다.
(120) 내 그림자
12/1
내 그림자는
언제나 나를 따라 다닌다.
말없이 나를 지켜보기만 한다.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사이에
굴러간 공을 주우러
잔디밭에 들어갔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가 지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내 그림자가 나를 시달린다.
사람은 안 봐도
나무가 보고 새도 본단다.
들어가서는 안 될
잔디밭에 왜 들어갔느냐?
(121) 내 그림자 (2)
12/1
내 그림자는
햇빛, 달빛, 불빛이 없어도
몰래 내 뒤를 쫓아다닌다.
깜깜한 밤에
길거리 담벼락에
오줌을 누었다고
그래도 되느냐고 따진다.
지켜보기만 하다가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내 그림자는 잊지도 않고
달라붙어 따진다.
(1/9 시와 동화 제출)
(122) 내 그림자(3)
12/1
오늘 밤 잠자리에도
내 그림자는 어김없이 찾아오겠지.
마음 편한 잠자리가 될까?
오늘 아침 혼자 학교 갈 때
떨어진 휴지를 줍는 걸 보고
네 그림자가 된 것이
나는 무척 자랑스러웠단다.
내일의 착한 일 한 가지
'외톨이 한갑이와 친구해 주기'
미리부터 즐겁구나
마음 편한 잠자리가 되겠다.
(대구불교문학 발표)
(123) 썰렁한 바람
12/3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다
책방 문을 열었다
썰렁한 바람뿐
손님은 아무도 없다.
책 한 권을 사 들고 나오는데
바람 한 자락이 따라왔다.
슈퍼에 가서 이것저것 살피다가
돈이 모자라 그냥 나왔다.
주인 혼자 썰렁하게 앉아 있다.
그냥 나오기가 안쓰러웠다.
바람 한 자락이 따라왔다.
나선 길에 백화점에 갔다.
북적대리란 짐작과는 딴판이다.
점원들만 자리를 지킨다.
어쩌다가 구경나온 사람만
나처럼 서성거린다.
썰렁한 바람이 인다.
아빠 공장이 문을 닫고
온 집안이 웃음을 잃었다.
밖에서 돌아오는 식구들마다
썰렁한 바람이 따라온다.
온 집안 구석구석
썰렁한 바람이 일고 있다.
(124) 내 신이 다 잘 있다
12/8
오늘의 공부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신장에 있어야 할 신이 없다.
복도, 화장실, 운동장, 화단
구석구석 다 찾아도 없다.
아직도 새 신인데,
내가 가장 아끼고 자랑하던
내 발에 딱 맞는 운동화인데,
달리기도 잘 되고
공도 잘 차졌는데…….
운동장엔 땅거미가 낀다.
운동장에 놀던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다 돌아갔다.
어머니께 꾸중들을
걱정이 태산이다.
무거운 한 짐 걱정을 하다가
오줌이 마려워 깨었다.
웅크리고 앉아 걱정하던
철봉대 밑이 아니다.
신장에 내 신이 얌전히 있다.
(125) 쏜살같이 달려오는 뱀
12/10-1/3
산 고개 오솔길을 걷다가
차마 눈뜨고 못 볼
엄청나게 놀라운 걸 봤다.
둥지 안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부리 노란 귀여운 아기 새를
징그러운 뱀이 덮치고 있다.
'저런 저런! 저놈의 뱀…….'
발을 동동 구르며
조바심하는 사이 갑자기,
뱀은 나를 보고
쏜살같이 내리꽂는다.
새파랗게 질렸다.
'억!'하고 놀라서 깨었다.
온 몸에 땀이다.
살을 꼬집어보았다.
살아 있다.
(126) 물 맑은 울릉도
1/3
저마다 다른 모습과 색깔의 바위
푸른빛이 묻어날 듯 맑은 물
바위가 있어 물이 더 아름답고
맑은 물이 있어 바위가 더 아름다운
하느님께서 태초에 점지해 주신대로
긴 세월에도 바래지 않았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산새들도 태초의 노래를 부르고
호박나무, 굴거리나무, 마가목
취나물, 흑비둘기
태어난 자리에서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맑은 물이 있어
마음도 맑아져야 한다.
빛바래지 않는 산이 있어
전설이 살아 숨쉰다.
산으로 들어오는 거북 덕에
재산이 불어 간다.
(127) 나를 위한 세상
1/9
어제까지 흐리던 날이
오늘 아침 맑게 개었다.
걱정하는 내 마음을
용하게 미리 안다.
즐거운 소풍이 되라고
나를 위해 웃어 주었다.
나뭇가지 참새들도
노래를 불러 준다.
나뭇잎도 팔랑팔랑
손을 들어 배웅한다.
오늘은 나를 위한 세상
하느님이 고맙다.
(126) 자신 있는 가을 합창
흙
최춘해
흙님의 입김으로
생명들이 태어난다.
남에게는 많아 보여도
하나같이 귀한 식구들
흙님의 입김이 배어 들면
그것이 곧 힘이 된다.
호박 넝쿨 벋어 가고
미루나무 키가 큰다.
힘차게 나아가는
나무들의 발자국 소리.
저마다 맺은 열매는
흙에서 배운 마음의 표시.
꽃이 풍기는 향기도
흙에서 배운 마음이다.
흙의 입김이 고여서
귀여운 감이 된다.
풋감의 불어 가는 무게를
흙이 받아 안고 있다.
빗방울이 내리면서
5/11
빗방울이 내리면서
어디가 좋을까 생각합니다.
목이 타는 배춧잎에나
화단이면 좋겠다.
보람이 있는 빗방울,
도와주는 손이고 싶다.
물새들이 품고 있던
귀여운 물새알에나
소풍 나와서 그림 그리는
도화지엔 더구나 안돼.
닿을까 두려워하는,
빗방울은 되기 싫다.
강물이 흐르며
5/16
먼저 가려고 다투지도 않고
처져 온다고 화도 안 낸다.
앞서간다고 뽐내지도 않고
뒤에 간다고 애탈 것도 없다.
탈없이 먼길을 가자면
서둘면 안 되는 걸 안다.
낯선 물이 끼여들면
싫다 않고 받아 준다.
금방 만나도 한마음이 된다
마음이 넓어서 다툼도 없다.
지구가 태양을 돌 듯
세월 따라 쉼 없이 흐른다.
패랭이꽃도 만나고
밤꽃 향기도 만난다.
새들의 노래가 꾀어도
한눈 팔지 않고 갈 길을 간다.
큰 일을 이룩하기 위해
참고 견딜 줄 안다.
(128) 내 뿌리 찾기
4/14
내 뿌리를 찾으러 갔다.
이천오십팔 년 전 진한 땅
알천 언덕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새 임금을 뽑고 있었다.
"알천양산촌장이 적당합니다."
"아니오, 취산진지촌장이 좋습니다."
"아니오, 무산대수촌장이 좋습니다."
"아니오, 금산가리촌장이 좋습니다."
"아니오, 명활산고야촌장이 좋습니다."
저마다 자기네 촌장을 추대했습니다.
고허촌장 소벌도리공은
"하느님이 내려 주신 불구내를
우리들의 새 임금으로 추천합니다.
내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우물가에서 환한 빛이 번쩍였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말이 알을 품고 있다가
하늘로 날아가고,
그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소.
사람들은 불구내라고 불렀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하느님이 내려 주신 임금님'이라 했소.
불구내를 새 임금으로 추천합니다.
짝짝짝짝짝
모두가 크게 박수를 쳤다.
박혁거세가 신라의 첫 임금이 되었다.
소벌도리공은 임금님으로부터
최씨란 성을 처음으로 받았다.
최씨의 시조, 우리의 뿌리가 되었다.
양산촌은 이씨
대수촌은 손씨
진지촌은 정씨
가리촌은 배씨
고아촌은 설씨
이때 여섯 성씨 시조가 처음 생겼다.
뿌리 깊은 나무는 꽃도 좋고
열매도 튼실해야 한다.
(129) 진달래
4/14
산등성이에도 산골짜기에도
우리 나라 산 어디를 가도
진달래꽃이 번지고 있다.
웃음꽃이 찰랑찰랑 넘치고 있다.
환하게 웃어 주는 고모를 만난 듯
떨어져 있던 엄마를 만난 듯
진달래 환한 얼굴을 만나면
내 마음도 환하게 밝아진다.
진달래 환한 얼굴
활짝 웃는 웃음소리
새들도 즐거워 노래를 부른다.
꽃노래, 새 노래 합창을 한다.
산에 산에 진달래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할아버지 할머니 노래 소리
북으로 북으로 울려 퍼진다.
(130) 복숭아꽃
4/18
복숭아꽃 앞에 서면
그리운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해 달라면 무엇이나
마다 않고 들어주시던 할머니
복숭아꽃 고운 얼굴만큼
마음이 곱던 우리 누나
복숭아꽃 그늘 아래서
얼굴 마주 보고 버들피리 불었지.
그때 쳐다보던 그 얼굴
그때 듣던 그 피리 소리.
나처럼 할머니도 저 하늘 어디서
내 얼굴 그리며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누나도 나처럼 저 산너머 어디서
버들피리 불며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131) 사랑스런 손녀, 예지야!
-두었다가 나중에 보아라.
이 사진은 2001년 3월 31일(토)에
대구시 동구 신암5동 134의 10번지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집에서 할아버지가 찍었다.
네가 2월 21일 오전 8시40분에 태어났으니까
39일째 되는 날이다.
내일(4월 1일)은
강원도 강릉시 입암동
입암 현대아파트 105동 1405호
너의 집으로 가야 한다.
소백산이 있는 죽령을 넘어서
치악산이 있는 원주를 지나
대관령 고개를 넘어야 한다.
승용차를 타고 줄곧 달려도
6시간도 더 걸리는 머나먼 길이다.
날씨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바깥바람이 찬데
천리 타향 먼길을 떠나보내려니
마음이 안 놓인다.
지금 네가 떠나면
사랑스런 너의 모습을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고 견뎌야 한다.
네가 보고 싶을 때
이 사진으로 마음을 달래련다.
숨소리, 목소리를 들으련다.
사랑스런 몸 냄새를 맡으련다.
백 날이 하루같이
지금처럼 젖줄을 힘차게 빨아라
잠도 늘어지게 자거라
무럭무럭 자라는 푸른 꿈도 꾸어라
목청 높여 힘차게 소리도 질러라.
사랑스런 예지야,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이것과 똑같은 사진을 갖고 있단다.
사진을 자주 본단다.
할머니는 네가 자꾸 보고 싶단다.
이 사진과 글은
네가 1학년이 되었을 때 보아라
초등학교 졸업할 때 다시 보아라
중학교 졸업할 때 다시 보아라
대학교 졸업할 때 다시 보아라
시집갈 때도 다시 보아라.
할아버지 할머니는
때가 되면 다른 세상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도 사랑스런 예지를 생각할 것이다.
푸른 앞날이 열리기를 빌 것이다.
(2001. 4. 22)
너의 할아버지가 씀
(132) 흙 (62)
- 5월
5/10
팔공산 봉우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갓 태어난 어린잎들
재잘재잘 즐거운 소리
귀엽다 쓰다듬어주는
해님의 다사로운 손길.
호호호 깔깔깔깔
연두 빛 웃음소리
어린 잇몸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연둣빛 바람
싱싱한 싱그러운 향기
휘파람을 불고 싶다.
(133) 두견새
5/4
구욱국 구욱국 소쩍새 소리 듣고
높은 산 진달래 소스라쳐 깨어나고
늦을라 서둘러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송이.
보리 고개 긴긴해에
굶주리던 할아버지들
아카시아 진달래꽃은
더 없이 반가운 손님
그때의 할아버지들 생각나
때맞춰 피는 꽃들.
구욱국 구욱국 두견새 울면
돌아가신 할머니 얼굴이 보고 싶다.
못 먹어 부황이 나서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134) 황룡사 터
6/16
둘레의 중심이 되겠다는 큰 뜻으로
황룡사를 짓고 구층탑을 쌓았다.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쳤다.
오호오 달구야 고구려가 조아리고
오호오 달구야 백제가 굽어든다.
우렁찬 터다지는 소리
저절로 힘이 솟는다.
맞추자 목소리를, 다지자 단단하게
나라 일이 내 일이라 스스로 일한다.
누구가 시키지 않아도
정성을 다한다.
일층 목탑 지어지면 왜놈들이 풀이 죽고
이층 탑이 올라가면 때놈들이 주눅든다.
구층탑 완성되는 날
세계의 강국 된다.
(대구불교문학 발표)
(135)경주 남산의 이요당
6/16
수많은 부처님이 보살펴 주시는
든든한 금오산이 뒤에서 굽어본다.
잔잔히 흐르는 물결에
고운 연꽃 피는 소리.
연못 속에 드리운 금오산 숲에서는
이름 모를 산새들 노래 소리 들린다.
못에서 솟아난 할아버지
편지 봉투 내민다.
말하는 까마귀와 쥐들이 언뜻언뜻
용감한 돼지들 싸움도 언뜻언뜻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라
목숨 건진 소지왕.
(대구불교문학 발표)
488년 신라 21대 소지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천천정(天泉井)에 행차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어대며 사람처럼 말을 했다. 이상히 여긴 임금은 장사 한 사람을 시켜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다. 장사는 까마귀를 따라서 피촌(또는 양피촌) 못 가까이 왔는데, 그곳에선 두 마리의 돼지가 무섭게 싸우고 있었다. 장사는 그만 돼지 싸움을 구경하느라 까마귀가 간 곳을 놓쳐 버렸다. 임금님의 명령을 거역한 장사는 당황하여 이 못 가를 돌며 까마귀가 간 곳을 어떻게 찾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이 때 못에 큰 물결이 일더니 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장사를 불러 봉투에 든 글을 주면서, 그것을 임금에게 전하라 하고는 다시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장사가 돌아와서 임금에게 그것을 바치니 봉투에는,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아니하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소지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지 않기로 하였다. 이 때 나라 일을 예언하는 일관이 아뢰었다.
"한 사람이라 함은 임금님이옵고, 두 사람이라 함은 평민을 가리키는 것이오니 열어 보시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여러 신하들도 일관의 말이 옳다 하고 열어 보기를 간했으므로 왕도 그럴 듯하여 봉투를 열어 보았다. 봉투 속에는 '사금갑(射琴匣)'이라 씌워 있었다. 거문고가 들어 있는 상자를 활로 쏘라는 뜻이다.
왕은 급히 대궐로 돌아와서 왕비의 침실에 세워 놓은 거문고가 든 상자를 겨누어 화살을 날렸다. 쿵! 화살이 금갑에 박히자 금갑 속에서 끔찍스럽게 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왕실 내전에서 불공을 보살피던 중이 왕비와 통하고는 임금이 나간 뒤에 금갑 속에 숨어 있다가 왕을 해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왕비가 사형 당하니 두 사람은 죽고 왕은 위기를 면해 살게 되었다. 이 날이 바로 정월 보름날이었다. 임금은 이 날을 기념하여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집집마다 오곡밥을 조금씩 떠서 담 위에 얹어 까마귀와 까치를 위하게 했다.
(136) 망초꽃
6/24
초대를 받지 않아도
미리 찾아간다.
채워지길 바라는
빈자리의 개망초.
품삯을 바라지 않는
고향의 천씨 같다.
아무 데나 흔하게
나타나는 개망초
겉보다 마음이
진실해서 좋은 꽃
궂은 일 가리지 않는
착한 맘 본받자.
우리 나라 어디서나
지천으로 핀 꽃
누구나 부담 없이
만나 주는 개망초
나라꽃 만들었으면
백성 편에 설 텐데.
(137) 논개
6/27
여기는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호
사백여 년 전 논개가 태어나는 울음 소리.
이 골짝 산들은 들었으리
꿈이 큰 목소리를.
큰 뜻을 품었을 줄 어머니도 몰랐지만
저기 저 첩첩 산들은 다 알고 있었으리.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입술 물고 참았으리.
논개가 숨쉬던 공기는 향기롭다.
물소리 새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논개가 이야기를 나누던
하늘과 골짜기
(138) 호미곶
7/11
한반도의 가장 동쪽
햇빛이 가장 먼저 오는 곳
좋은 일, 기쁜 일도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
상스러운 땅으로
하느님이 점지해 주신 곳
동쪽을 바라보면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꿈
거침없이 뻗어갈 길이 보인다.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할머니 마음 같은 따슨 햇살
좋은 일 일어날 것을 알리는
안개 같은 베일.
(139) 연오랑과 세오녀
7/10
눈이 모자라게 펼쳐진 푸른 바다
수평선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꿈이 큰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위 타고 꿈을 이뤘다.
우리 나라 가장 동쪽 제일 먼저 해 돋는 곳
동해를 향하여 두 손을 모으면
연오랑 세오녀가 아니라도
소원이 이뤄지겠다.
(140) 산새 알
7/9
귀여운 산새 알 두 개
내 새끼손가락 손톱보다 작다.
맥문동보다 가는 풀잎 사이
한껏 공이 든 둥지
하늘보다 더 큰사랑
더 없이 편한 보금자리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풀잎이 감싸주고 있다.
바람이 그냥은 지나칠 수가 없어
어루만지며 머물다 간다.
한밤중 별들이 내려와
속삭이다 갈 테지.
팔공산을 오르다가
산 중턱에서 만난 산새 알
깨어서 둥지를 떠날 때까지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집에 돌아와서도 걱정이 된다.
앞서 간 고마운 분을
산길에서 만난다.
길 따라 가다보면
산나리 산수국
모두가 반가운 얼굴들
볼 때마다 반갑다.
한 포기 다래 덩굴
한 포기 무명의 풀
이름 모를 산새 소리
쓰러진 죽은 나무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될
팔공산의 식구들.
(7/20)
(142) 여름
7/21
더워서 짜증 난다.
선풍기를 돌렸다.
에어콘도 켜 놓으니
가을보다 서늘하다.
하루를 지났을 즈음
감기에다 두통이다.
여름이 더운 것은
여름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햇볕으로
곡식들이 여문다
내 몸도 더위를 이겨내야
곡식처럼 여문다.
아무리 더운 날도
골짝 물은 시원하다
깊은 산 숲 속은
더운 사람 부른다.
자연을 따르는 사람은
한여름도 즐겁다.
(143) 동틀 무렵
7/24
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좀처럼 풀리지 않던 문제
동틀 무렵 잠이 깨었을 때
실마리가 보였다.
내가 가진 어려운 숙제도
친구를 위해 풀어야 할 문제도
언제나 새벽녘에 실마리가 보였다.
(166) 소나기
7/25
(144) 상사화
7/27
훤칠한 몸매에 아름다운 꽃송이
누구를 그리는 듯 생각에 잠겨 있다
짝 잃은 원앙새처럼
수심에 찬 얼굴 모습
그리운 얼굴을 못 만나는 괴로움
그 동안 쌓인 말은 얼마나 많을까
고통을 견디며 일어서는
아름다운 얼굴 모습.
(145) 한더위
7/30
한더위 찜통 더위
불볕 더위 삼복 더위
닭들이 돼지들이
잇달아 죽어 간다.
죄 없는 짐승들인데,
하느님은 무심하다.
사람들은 땀구멍으로
더위를 이겨낸다.
조물주는 어떻게
땀구멍을 생각했을까
짐승도 땀구멍을 주었으면
죽지는 않을 텐데.
(146) 가을 문턱
닭들이 돼지들이
더위를 못 참아
숨을 할딱이다
쓰러졌다.
언제까지나
푸른 기세를 휘두를 듯
힘이 넘치던 더위
어느 날 갑자기
풀이 죽었다.
나뭇잎도 풀잎도
여전히 싱싱한데
지는 해의 햇살이
스산하다
어제가 입추.
간간이 들리던
가을 벌레 소리가
오늘 새벽엔 합창을 한다
어김없이 찾아 온 가을.
11/2 탈고
(147) 우담바라
- 보탑사에서
삼천 년 만에 한 번
이 세상에 찾아온다는 꽃
우담바라를 내가 만났다.
돋보기로나 보이는
작디작은 꽃
요렇게 작은 꽃은
처음 만났다.
보기 드문 귀한 꽃
참 귀한 인연이다.
우담화가 필 때
살기 좋은 세상이 온다는데
우담화를 만나서 즐겁다.
내가 즐겁듯
남들도 나처럼 즐거울 거야.
많은 사람에게
우담화 만나러 가라고 해야겠다.
억울한 사람 없이
누구나 즐겁게 살았으면.
(01. 12. 탈고)
(148) 새해
(02.1.14)
나무에 나이테가 생기듯이
나한테도 나이가 새겨진다.
나이테가 하나 더 생긴 만큼
나이 값을 해야 한다.
우리 집 앞 골목길에
아버지, 어머니가 줍던 휴지를
이제는 내가 먼저 줍고 싶다
나이테가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일까?
이른봄부터
목이 말라도 참고
세찬 바람도 참으며
애써 가꾼 열매를
아낌없이 나누어 준 감나무
감나무를 닮고 싶다.
(149) 무를 먹으며
1/15
흙의 사랑을 먹고
흙의 품에서
흙 냄새를 맡으며
흙의 마음으로 자란 것
거짓이 없다
아무 것도 섞인 것이 없다.
오로지 흙의 마음으로
하얀 살이 되었다.
무를 먹으면
내 몸도 무처럼 깨끗하고
내 마음도 무처럼 맑아진다.
나는 무를 즐겨 먹는다.
(150) 구지봉에서
1/29
해같이 둥근 알 여섯 개
뜻을 새기며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르니
하늘의 말씀이 들린다.
백성들이 땅을 파며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놓아라."
입 모아 부르는 노래도 들린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뭇사람 소원으로
어진 임금 김수로왕이 내리셨다.
가락국이 세워졌다.
(151)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
2/2
"거북아, 거북아!
네 머리를 내 놓아라"
김수로왕이 내려오시고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놓아라
수로부인을 모셔 왔다.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옛말은 다 맞는다.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 해설 : 주술성을 강하게 띤 <구지가> 계통의 작품으로 신라 성덕왕 때(구지가 후 700여 년) 수로 부인이 해룡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강 언덕에서 땅을 치며 이 노래를 부르니 수로부인을 내어 놓았다 한다.
[배경설화] 신라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문득 해룡이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이 때,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옛날 말에 여러 입[口]은 쇠도 녹인다 하였으니 이제 바닷속의 물건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랴? 경내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하였다. 공이 그 말대로 하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부인의 옷에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이향(異香)이 풍겼다. 절세 미인인 수로 부인은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 해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출전 : [삼국유사] 권2
(152) 입춘
2/2
햇살이 뭔가 수상하다
몰래 무얼 감춘 것 같아
색깔이 아무래도 달라졌어
아무도 못 알아듣게
복숭아나무와 속삭이고 있어.
바람도 아무 일 없는 듯
겨울 바람 시늉을 해도
어쩐지 전과는 달라.
몰래 벚나무와 속삭이고도
안 그런 척 시치미뗀다.
(153) 경포대
2/14
1. 살아 있는 바다
겨울 바다는
더욱 부지런하였다.
그냥 가만히 엎드려
있을 수가 없다.
잇달아 파도를 만들어
해변으로 보낸다.
더 크게
더 높게
더 힘차게
더 우렁차게
얼마나 힘이 센가
보여 주려는 듯
방파제를 때린다.
수만으로 부서지는 물보라.
파도가 해변에만 오면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되어
하얀 물보라를 만든다.
물장구 치듯이.
(154) 일요일
2/17
전동차 안에도
사람들이 넉넉하고
길거리에도 산에도
사람들이 북적댄다.
사람마다 넉넉함이 보인다.
줄을 서서 기다려도
서둘지 않는다.
바쁘게 동동거리지 않는다.
새 학기에 쓸 공책도 넉넉하게
화단에 뿌릴 꽃씨도
이웃집에 나누어 줄 만큼 넉넉하게
일요일은 모두가 넉넉하다.
(155) 우수
2/18
날카롭던 서릿발이
사그라진다.
까칠까칠하던 바람이
눅눅하게 부드러워졌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품안에 감싸안고 싶다.
남의 실수도 덮어 주고 싶고
잘못도 용서해 주고 싶다.
아름다운 꽃도 안고
가시 돋힌 아카시아도 안고
구린내도 감싸 안아 주는
흙이 닮고 싶다.
(156) 귀
2/24
사과나무도 귀가 있어
노래 소리를 듣는다.
노래를 듣고 즐거워서
우쭐우쭐 춤을 춘다.
어린 사과 눈빛이 맑다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릴 테지
사과가 쑥쑥 자란다
나날이 단맛이 채워진다.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얼마나 갑갑할까?
궁금한 것만 쌓이겠지.
자꾸만 짜증이 나겠지.
(157) 보름달
2/26
더 크고 살찐 달
복이 가득 든 달
밝고 맑고 건강한 달
올해는 보름달 같은
싱그러운 일이 있을 것 같다.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158) 정월 대보름
3/2
흙이 기지개를 켠다
잠에서 깬 흙은
눈을 지그시 감고
올해에 할 일을 생각하고 있다.
이제 곧 잠에서 깨어날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입맛에 맞는 먹이를
넉넉히 마련해야 한다.
목이 말라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참고 견디는
끈기를 길러 주어야 한다.
때맞춰 꽃을 피우고
넉넉한 열매를 익히는 것은
나누어주는 데
보람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159) 경칩
3/3
흙이 부드러워진다
문을 꼭꼭 잠그고
마음도 꼭꼭 잠그고
틈이 없던 흙이
조금씩 가슴을 연다.
따스한 공기가
가슴을 데운다.
뱀도 개구리도
잠에서 깨어난다.
풀들이 눈을 뜬다
씨앗도 벌레 알도
나무들도 눈을 뜬다.
장님도 눈을 뜨고 싶다.
가만히 앉아 있던 앞산이
움찔움찔 몸을 흔든다
꿈적 않고 앉았던 바위도
자리를 뜨고 싶다.
(160) 겨울과 봄
3/4
겨울과 봄은
이어달리기할 때처럼
배턴을 주고받는 게 아니다.
겨울 속에 봄이 들어와 있다
겨울 속 한 귀퉁이에서
조금씩 봄이 자란다
겨울이 밀려날 준비를 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내어준다.
미리 잘 차려진 봄은
때맞춰 탐스런 꽃을 피운다.
물러서는 겨울이 샘을 해도
더욱 더 빛나는 꽃 잔치.
<베트남 캄보디아 기행시>
(1) 오토바이 물결
3/24
호치민 시의 거리
중앙선도 차선도 없다
빈틈없이 길을 꽉 메운 오토바이
교통 정리하는 공안원도 안 보인다.
거침없이 달리는 오토바이 물결
교통신호 하나로 잘도 흐른다.
베트남 사람들은 갈 길이 바쁘다
할 일이 많고 마음이 바쁘다
남의 나라에서 양식을 들여오다가
이제는 세계 제3위의 쌀 수출국이다
이것만으로는 모자란다.
더 잘살기 위해 발빠르게 달린다.
가스, 석유, 목재 등 자원이 많고
넓은 들엔 농사가 잘 된다.
우리 나라 '한강의 기적'을 보고
우리 나라를 본받는단다
잘살아보자고 허리끈을 졸라맸던
'새마을운동'을 본받고 있단다.
어느 나라 사람보다
우리 한국 사람을 좋아한단다.
어느 나라 차보다
우리 한국 차를 좋아한단다.
우리 나라에서 쓰던 중고차
오토바이, 차들이 흔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빠르게 달리는 것도
한국 사람의 부지런함을 닮았다.
오토바이 물결 속에
잘사는 길이 보인다.
앞날의 꿈이 부푼 환한 얼굴들.
(2) 메콩강과 사이공강
3/26
3/26
티베트에서 시작하여
중국,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5개국을 거쳐 베트남을 지난다.
저리도 넓고 큰 강은 본 적이 없다
저렇게 큰 강은 품도 넓고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겠다.
한강은 너보다 작아도
기적을 일으켰는데
4,500km 머나먼 길을 흐르며
한 일이 무어냐?
네가 지나온 나라 백성들은
모두가 헐벗고 굶주린다
무정한 메콩강아,
네 이웃을 감싸안아 주어라.
(3) 나무에도 돌에도
- 베트남에서
3/26
절에는 물론이고
길거리 곳곳에
가구, 늘 만지는 물건
어디에나 조각이 돼 있다.
온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려는
인자한 관세음보살 상을
돌에도 새기고
나무에도 새기고
마음에도 새긴다.
지금의 삶은
전생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결코 남을 탓하지 않는다.
행복한 다음 세상을 위해서
착하게 살려고 애쓴다.
브라만이여!
관세음보살이여!
학교도 못 가고 땅콩을 팔려고
"땅콩 사세요."
애처롭게 외치는
어린이의 목소리가 듣기지 않습니까?
( 02 불교문학)
(4) 캄보디아
3/29
들도 넓고 물도 흔하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추수를 한다.
비닐하우스가 없어도
채소, 과일을 언제나 먹는다.
석유, 가스, 목재 같은
자원도 넉넉하다.
한 때는 이웃 나라
베트남, 라오스, 타이, 인도 등
여러 나라에 힘을 뻗쳤다.
앙코르 유적은 당시의 힘이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자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렸을까?
왕들의 욕심이 지나치지 않았던들,
백성들 편에 서서 생각을 했더라면
오늘처럼 못사는 나라는 안 되었겠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된 차들이
자랑스럽게 거리를 누비고
우리 나라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우리 나라가 자랑스럽다.
(5) 도마뱀
4/1
일년 내 날씨가 덥고
축축한 습지도 많아
파리, 모기가 무척 많겠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 속에서 어떻게 살까?
생각지도 않았던
도마뱀이 흔하다.
도마뱀이
파리, 모기를 잡아먹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마뱀을 보호한다.
이곳의 풀과 과일을 먹으면
사람 몸에서 냄새가 난단다.
모기는 그 냄새를 싫어한단다.
베트남 사람들은
모기향이 필요 없다.
(6) 구찌 땅굴
4/2
베트콩은 대단했다.
미군이 주둔한 가까이에
감쪽같이 땅굴을 팠다.
15살 소녀와 같은 백성들이
낮에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밤에는 땅굴을 팠다.
파낸 흙은 미군 눈치 못 채게
강물에다 버렸다.
초등학생이 학교 갈 때
책보자기에 싸다 버렸단다.
온 국민이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마음이 되어 있었다.
7년 전쟁 동안 아무도 몰랐다.
굴속에서 밥을 해 먹어도
구찌를 삶아 먹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 했다.
작전 회의실, 주방과 식당
응급치료실 들이 굴에 있었다.
미군이 굴 안에 들어왔을 때
적군을 물리치려고 만들어 놓은
쇠창살 같은 원시 무기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섬짓하다.
한 치도 어김없이 짜여진 계획이다.
현대 무기가 아무리 발달해도
온 백성이 하나로 뭉치면
원시 연장으로도 물리칠 수 있다는
증거가 바로 이 땅굴이다.
7년 전쟁 끝에 미군을 물리쳤다.
(7) 정글
4/3
영화에서나 보던 정글에
지금 내가 서 있다.
코끼리, 호랑이, 멧돼지, 악어, 독사
사나운 짐승들이 득실거리었지.
빽빽한 밀림 속 어디에서
엄청난 소리를 지르며
힘을 겨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코끼리가 배고픈 어린 호랑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은 볼 수 없을까.
코끼리, 호랑이, 멧돼지가 어울려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을까?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을 도운 우리는
베트콩의 적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미군은 용서 못 해도
우리 한국은 용서하고 있다.
미군이 뿌린 고엽제에
병신이 된 베트남 사람과 우리들.
똑같이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를 용서할 만하다.
(8) 메콩 델타
4/7
메콩강 구룡이 물어온
엄청난 보물들.
바다처럼 넓은 강물
황토 물이 살아서 넘실댄다.
메기, 숭어들 헤엄쳐 다니고
고깃배들이 보물을 건진다.
강 섶에 우거진
하늘 높이 자란 야자, 바나나
섬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쪽배를 저어 가면
코코넛, 바나나, 포도, 열대 과일들.
구룡이 티뱃 공원에서
오랜 세월 물어 나른 흙으로
보물 창고가 되었다.
여기에 오면 마음이 넉넉하다.
배가 부르다.
세계에서 쌀이 가장 많이 난다
수출도 세계 으뜸이다
여기서 나는 쌀로
굶주린 사람들의 목숨을 건진다..
(9) 잭 프루츠 란 과일
4/8
감, 사과, 배들은
가지에 달려 있고
바나나, 파인애플, 야자도
꼭대기 순에 달렸다.
잭 프루츠 너는 어찌하여
둥치에 달릴 줄 알았니?
엄마 품에 안겨서 젖을 빠는
막내 동생같이 귀엽구나.
잭 프루츠 Jack Fruits 카눈
겉보기엔 두리안과 흡사하지만 그냥 울퉁불퉁할 뿐 뾰족한 돌기는 없다.
열어보면 노란색의 과육이 겹겹이 들어 있다. 매우 달고 향긋하며 쫄깃쫄깃하다.
(10) 지는 해를 붙잡다
4/8
호치민 공항 오후 6시
캄보디아 시엠 렙으로 가는 비행기
저녁놀을 보며 비행기가 뜬다.
비행기가 높이 오르면서
지평선이 멀어진다.
사라진 해가 다시 나타난다.
비행기가 지는 해를 붙잡았다.
비행기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붙잡았던 해는 다시 사라진다.
비행기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시엠렙 공항.
(11) 앙코르톰
4/9
대단한 예술품이다.
아마도 그때의 왕은
하늘만큼 큰마음이었을 게다.
이렇게 크고 잘 짜여진 궁전을
어떻게 엄두를 냈을까?
천여 년 전에.
이런 궁전을 지을 만한 나라는
하늘 밑에서 가장 힘이 셌겠다.
저 많은 돌은 어디서 났으며
무슨 힘으로 저렇게 높고 크게
요모조모 딱 들어맞추었을까?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조각가요 건축가였나 봐
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빈틈없이 조각이 돼 있다.
할 이야기도 많고
꿈도 많았나 봐.
벽, 기둥, 천장, 방 안팎, 회랑
어디나 새겨진 이야기 그림들.
웅성웅성 이야기 소리들.
부처님을 받들고
영원히 살아가려는 사람들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어
좋은 일을 쌓기 위해서
이웃을 도와 가는 이야기들.
천여 년 전에 살던 사람들이
그대로 살아있다.
그들의 꿈이 여기에 담겨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그림이 말한다.
그들은 영원히 살아있다.
(02 불교문학)
(12) 앙코르왓
4/14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신들의 집
신들이 사는 집은
신만 오르내릴 수 있게
가파르고 높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보아도
뛰어나게 아름다워야 한다.
신들의 집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
춤추는 천녀 압사라 같은.
보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여신 락슈미 같은.
신들이 사는 집에는
이야기가 많다
앞에도 옆에도 위에도
가는 곳마다
소곤소곤 이야기 소리.
신들이 악마와 싸우는
'우유의 바다 휘젓기' 이야기.
신들이 사는 집은
놀랄 만큼 커야 한다.
가로 1.5 km
세로 1.3 km의 집
아무나 드나들어선 안 된다
길이 190m로
집 둘레를 막아 놓은 해자.
누구나 아름다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
이 세상에서 베푼 만큼
다음 세상에 태어난단다.
남에게 해를 많이 끼치면
지옥으로 간단다.
(13) 굽은 가로수
4/17
총알을 맞고
상처투성이가 된 나무들
한 그루도 성한 게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을까.
죄 없이 사라져간
영혼들의 아우성.
나무들은 상처를 안고
아무 말은 안 해도
뼛속 깊이
원한이 맺혀 있을 게다.
14) 킬링필드
4/19
2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폴포트를
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하느님이 있다면
당시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것.
나는 손에 못도 안 박히고
교육을 받았다.
외국 책을 가지고 있고
영어를 할 줄 안다.
벌써 이것만으로도
네 가지 죄가 겹쳤다.
뚱뚱하지 않은 것,
안경을 끼지 않은 것은
그나마 죄인이 아니란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어린 소년의 죽창에 찔려
피를 펑펑 쏟으며
개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 구덩이 속에서
흙에 묻혀 죽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아는 사람 셋이
더 끌려와 죽었을 게다.
또 그들을 아는 세 사람들도
더 끌려와 죽었을 게다.
곳곳에 세워진 위령탑
그 속에 든 수많은 해골들
끔찍하다.
그 때 거기서 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15) 비행기에서
-호치민에서 인천공항으로
4/23
새날 새로 떠오르는
깨끗하고 눈부신 햇살
힘차게 솟아오른다.
비행기 창유리를 뚫고 들어와
내 가슴을 데운다.
내 아래 가까운 데에는
부드럽고 포근한 솜덩이.
새로 피어나는 깨끗한 솜
큰 덩이 작은 덩이
참 잘 어울린다.
모두가 눈 아래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내려다보기가 부끄럽다.
햇살보다 덜 따뜻한 내 마음
솜덩이보다 덜 포근한 내 마음.
<우리 나라 문화 유적지 답사>
○ 개태사
4/28
내가 찾아온 땅은 황산 기슭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천호리.
천 년 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다시 살아난다.
땅 속에 묻혀 있는 석조에
맑은 물이 가득 채워지고
철확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삼존석불도 본 자리로 돌아오고
오층석탑도 경내 제자리에 앉는다.
오백 명이 넘는 스님들이
큰 법당에서 법회를 열고 있다.
고려 태조가 부처님 앞에서
나라 안 온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게 해 달라고 빈다.
수조에는 맑은 물이 찰랑찰랑 넘치고
철확에는 국이 그득 끓고 있다.
평화로운 종소리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맑고 밝은 햇살이 가득하다.
(02 불교문학)
○ 계백 장군 묘
4/28
황산 벌에 오면
먼저 계백 장군을 만난다.
부릅뜬 눈
우렁찬 함성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말발굽 소리.
나라를 위해서라면
가족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
나라 위해 목숨을 던질 사람은
나를 따라라
백제 오천 군사가
신라 오만 군사를 무찌른다.
황산 벌에는 계백 장군의 함성이
바람으로 일고 있었다.
장군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나무가 되어 자라고 있었다.
○ 성삼문의 묘
5/1
*'나는 가서 지하에서
옛 임금을 보리라.'
가야곡면 양촌리 산 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성삼문의 곧은 넋은
영원히 살아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빛을 낸다.
옳고 바른 일은
더욱 더 향기가 나고
한때의 그릇된 욕심은
점점 더 썩은 내가 난다.
* 성삼문이 수레에 실려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좌우를 보고 한 말.
풀꽃
6/3
내가 전학 오기 전에
골목에만 나가면 만났던
연이, 기핵이, 진용이, 소열이……
뜻밖에 길거리에서 만나면
왜 그리 반가운지
딱지 치다가 싸웠던 일
우리 아버지가 더 세다 고
서로 다툰 일들은 다 묻히고
심심할 때 동무가 돼 주었던
반가운 얼굴만 남아 있다.
어릴 때 할머니 따라
산으로 들로 다니며
정들었던 얼굴들
강아지풀, 개비름, 꼴, 꽈리, 냉이, 망초, 무릇, 바랭이, 방동사니, 봉선화, 부추, 비름, 쇠비름, 상치, 수세미, 시금치, 씀바귀, 아욱, 아주까리, 오랑캐꽃, 잔디, 조롱박, 질경이, 찔레나무, 피마자, 고사리, 담쟁이, 더덕, 도깨비바늘, 도꼬마리, 도라지, 억새, 칡…….
도시에 와서 한참 잊고 살다가
그때 그 얼굴 다시 만났다.
흐르는 냇물도 방향이 바뀌고
집도 길도 사람도 모두가 바뀌었는데
너희들 얼굴은 예대로 이구나
소꿉동무 얼굴을 본 듯 반갑다.
풀꽃들
6/16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나도 한 몫 보태 주고 싶다.
이 빈자리를 채울 꽃은 나뿐
이름 없는 꽃이지만 정성을 다했다.
후미진 데일수록
버려져서는 안 된다
외로운 산짐승도 찾아오고
나비와 벌들도 찾아온다.
저마다 최선을 다해 피운 꽃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하나된 마음들
이름 없는 작은 꽃들의 어울림
얼굴보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듯이
겉모양보다
향기가 아름다울 수도 있다.
(노인문학)
하나된 마음
- 월드컵 경기
6/16
세계 배 축구 경기로 온 겨레가
한마음으로 뭉쳤다.
세계 16강으로 가기 위해
'대-한민국'을 외쳤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서울 광화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제주도에서
우리 나라 구석구석 어디서든지
전광판을 바라보며
텔레비전을 지켜보며
부글부글 가슴이 달아올랐다.
붉은 색깔로 달궈진 배달 겨레
온 나라가 들썩들썩
온 세계가 들썩들썩
다른 나라 사람들도
다 함께 '대-한민국'
굵어진 목소리가
우리 나라 선수들의 힘이 된다.
선수들 누구나 신바람이 난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하나로 뭉쳐진 소원이
골로 터졌다.
대한민국이 드디어 해냈다.
16강을 넘어서 8강이 되었다.
좋아서 가슴 벅차서
서로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다.
처음 만난 옆 사람을 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널 뛰듯 땅을 구른다.
보현산을 오르며
6/18
푸름으로 뭉쳐진 산 등
편안하게 엎드려 있는
살아 있는 커다란 등줄기
금방이라도 일어나
구물구물 걸어갈 듯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
힘들고 숨이 차도
발 밑에서 푸른 소리로 응원하는
든든한 푸른 등을 바라보면
저절로 힘이 솟는다.
하나된 마음2
6/25
선수가 숨이 차서 흑흑거릴 때
온 겨레도 함께 숨이 차다.
선수가 힘이 빠졌을 때는
내 힘을 보태 주고 싶어
'대-한민국'을 외치기도 하고
파도타기로 힘을 불어넣는다.
선수가 피를 흘릴 때는
온 겨레가 함께 아프다
피 흘리며 찡그린 황선홍과
응원하며 찡그린 얼굴이 똑같다.
실추로 안타까워하는 안정환과
응원석에서 아쉬워하는 얼굴도 똑같다.
우리 나라가 세계 4강이 되는 순간
우리 나라가 자랑스럽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다.
우리의 태극기가 더 소중하다
애국가을 부르고 싶다
1절 2절 3절 4절,
5절이 있다면 끝까지 부르고 싶다.
(노인문학)
하나된 마음 (3)
준결승전에서 독일과 대결이다.
잠시도 공에서 눈을 못 뗀다
공을 차지하려는 몸싸움
불꽃이 튄다.
독일이 골문을 향해 슛팅을 할 땐
조마조마 가슴이 조인다.
우리 선수를 믿으면서도
미리부터 겁이 난다.
준결승에 들기까지
죽을힘을 다해 싸운 선수들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
대한민국을 지킨다.
전반전을 잘 지킨 우리 선수들
악착같은 마음과 남은 뚝심으로
독일을 꺾으리라 믿었다.
잠깐 실수로 한 골을 당하는 순간
손에 땀을 쥐고 '대-한민국' 을 외치던
붉은 악마들 뺨으로
주르르 흐르는 눈물
온 국민이 하나되어 눈물을 흘렸다.
6·25 전쟁 52주년
6/25
어른들은 언제나 우리보고
'사이좋게 지내라.' 타이르면서
같은 배달 겨레끼리
왜 싸움을 일으켰을까?
어른들은 언제나 우리보고
'화해하라. 손잡고' 타이르면서
52년이나 지나도록
왜 가슴을 열지 못할까?
어른들은 언제나 우리보고
'양보할 줄 알아라.' 타이르면서
52년이나 지나도록
그때의 욕심을 왜 못 버릴까?
(노인문학)
견훤 왕과 지렁이
6/27
흙이 씨앗을 품고 있으면
새싹이 돋아나듯
1300여 년 전 옛날 흙은
지렁이도 사람이 되게 했다.
굴속에서 백 날을 참고 견뎌
사람이 된 곰처럼
사람이 되고 싶은 지렁이는
흙의 정성스런 도움으로
밤에만 잘난 소년이 되었다.
아름다운 소년은 밤이 되면
농가의 외동딸을 사랑하였다.
날마다 둘레의 나뭇가지에서
갖가지 새들이 노래불러 주고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내려 주었다.
철철이 풀꽃들이 번갈아 피어서
둘레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아름다운 바람이 스쳐 가는 사이
후백제 왕이 될 견훤이 태어났다.
(노인문학)
비탈에 선 코스모스
6/28
길을 내느라 깎아낸 산비탈에
굶주린 야윈 코스모스가
목이 말라 입술이 타들어 가고 있다.
코스모스야,
너는 왜
메마른 비탈에다 자리를 잡았니?
조그만 것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모두들 싫다고 비켜 가는 데
내가 있어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큰 보람이냐?
팔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에게
짝이 되어 준 우리 옆집 아저씨 같다.
마음이 아름다운 코스모스.
목마르고 배고픈 나날을
어떻게 견뎌낼까?
(노인문학)
울타리로 서 있는 옥수수나무
7/2
배추 밭 둘레에
옥수수나무가 울타리로 서 있다.
밤낮 없이 꼿꼿이 서서
배추를 지키고 있다.
가운데 좋은 자리에서
사랑 받고 자라는 배추.
옥수수는 즐거운 마음으로
배추를 지키고 있다.
언제나 뒷자리에서
눈에 띄지 않게 도와주시는 어머니. (열린아동문학 2002 가을호)
(노인문학)
(우리 엄마는
내가 공부를 잘하면 웃음이 난다.
우리 엄마는 내가 상을 타면
좋아서 못 견딘다.
우리 엄마는
내가 운동회 때 1등을 하면
자기가 1등 한 것처럼 좋아한다.
우리 엄마는 내가 선생님께 칭찬을 받으면
무척 좋아한다.
늘 내 둘레에 있으면서
잠시도 눈길을 떼지 않고 보살펴 주신다.
울타리가 된 것을 보람으로 여기기다.)
내 마음속의 날씨
7/3
내 마음속 날씨가 맑은 날엔
모두가 아름다워 보인다.
아무 데나 흔하게 핀
망초꽃도 아름답다.
꽃이 진 지 오래된
목단 잎에도 향기가 난다.
꽃사슴은 꽃무늬가 있어 아름답고
꽃말은 목덜미 털이 길어 아름답다.
코끼리는 몸이 커서 아름답고
생쥐는 몸이 작아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세상은
내 마음속 날씨가 맑은 날.
(이후문학)
내 마음속 날씨가 흐린 날엔
7/6
참새 소리가 즐겁지 않은 것은
내 마음속에 그늘이 져 있음을
알려 주는 것.
패랭이꽃이 말을 걸어 와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먹구름이 일기 때문이다.
짖어대는 개를 탓하기 전에
내 얼굴에 구름이 낀 탓이라고
먼저 나를 꾸짖어야지.
내 마음속 날씨가 흐린 날엔
흐르는 물소리도 내 흉을 본다
따르던 강아지도 나를 피한다.
문주란 꽃과 나비
7/6
대문도 잠기고
아무한테도 소문내지 않았는데
나비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문주란이 꽃을 피울 때부터
눈독을 들이던 것은
키다리 해바라기다.
저렇게 높은 데서
문주란이 꽃을 피웠다고
소문을 냈을 게다.
바람에 실려서 사방 팔방으로
퍼져나갔겠지.
저녁 어스름에
먼 데 살던 나비가
남몰래 혼자 찾아왔다.
몸을 맞대고 속삭였다. (열린아동문학 2002 가을호)
(이후문학)
수선화과의 상록 다년생 풀. 뿌리줄기는 극히 짧고 밑으로 수많은 가는 털. 줄기는 굵고 곧음, 키는 50cm 내외. 잎은 줄기 끝에 사방으로 많이 뻗어나고 광택이 있음. 6-7월에 잎 사이에서 높이 70cm 가량의 꽃대를 생성, 그 끝에 10 수 개의 백색 꽃이 산형( 形)으로 핌. 열매는 산과. 관상용으로 재배, 한국에서는 제주도에 많음.
사자
7/10
사자야, 사자야.
우리에 갇힌 사자야.
사냥을 하지 않아도
먹이가 있어 좋겠다.
사자야, 사자야.
힘은 뒀다 뭐 할래?
우리 아빠 벽돌 나르는 데
보태 주지 않을래?
(이후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달성공원 코끼리
7/12
하루종일 할 일이 없어
왔다갔다 서성이는 코끼리
남는 시간은
고등학교 3학년 우리 누나한테
보태주지 않을래?
남는 힘은
손수레 끌고 가는 할머니께
보태주지 않을래?
(대구아동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노래하는 도자기
7/14
부산광역시 장기군 장기읍 대변리
노래하는 도자기들이 모여 있는 산기슭
도자기들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노래하는 입에서 고운 소리를 듣는다.
2002 도자기들의 아름다운 합창 소리
둘레의 나무도 풀도 즐거운 마음이다.
노래하는 도자기를 보고 있으면
아픈 것도 없어지고 욕심이 사라진다.
(대구아동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물새알
7/19
달걀보다는 작고
메추라기 알보다는 큰
한쪽이 더 뾰족하게 둥근 (동글갸름한)
알맞게 점이 찍힌 물새알 여섯
금호강 둑 길섶에
보기 좋게 포개 놓았다.
품고 있던 알을 잃고
애타게 찾고 있을 어느 물새
길섶에라도 고이 둔 것은
물새가 다시 알을 찾으란 뜻일까?
자식을 잃고 찾아다닐
어미의 마음을 떠올렸나 보다.
사람이 잇따라 다니는데
어떻게 알을 품고 있으란 말인가.
소낙비는 쏟아지고 있는데
알속에 든 아기 새는 탈이 없을까?
(대구아동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물새알 (2)
7/22
흐르는 물에 다듬어진 돌처럼
만져 보고 싶은 물새알 여섯
노란 부리에 보송보송한 털
어미를 부르는 귀여운 소리
아기 새는 어미 새의 전부요,
어미 새만 믿고 사는 아기 새.
어미 새와 아기 새가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사랑
물새알 속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주가 들어 있다.
대곡 수목원
7/20
대곡 수목원에 오면
고향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다래 덩굴이
얼른 얼굴을 내밀고 반갑게 맞이한다.
박하가 불쑥 나타나서
옛 맛 그대로라며 씹어 보라 한다.
머리 곱게 빗고 각시가 되었던 무릇
수줍은 듯 살짝 나타나서 방긋 웃는다.
얼굴은 익었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던 노랑제비꽃.
고향이 그립고 동무가 보고 싶을 땐
대곡 수목원을 찾을 것이다.
(대구아동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흙
- 품에 안기면
7/30
할머니 품에 안겨 조르면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다 들어주듯이
흙의 품에 안기면
싹이 트고 싶은 씨앗은
싹을 틔워 주고
꽃이 피고 싶은 무궁화는
때를 맞춰 꽃을 피워준다.
열매를 달고 싶은 나무한테는
달고 싶은 열매를 달아준다.
살구, 복숭아, 자두, 사과, 감…….
갖가지 과일을 단 나무들이
흙의 품에 안겨 콧노래를 부른다.
(대구아동문학)
해질 무렵
7/31
빗긴 햇살은
농부가 하루의 일을 마치고
흐뭇한 보람에 젖어 있는 색깔이다.
빗긴 햇살 속에는
욕심을 버린 색깔이 들어 있다.
햇살이 기울면
탄소동화작용을 하던 나뭇잎도
하던 일을 멈추고
하루의 일을 가다듬고 있다.
새들도 집을 찾아 돌아간다.
빗긴 햇살을 보고 있으면
송사리 떼 몰려다니는 냇가에서
발가벗고 물장구치며 놀던
고향 마을이 생각난다.
그때 놀던 동무가 그립다.
(이후문학)
경천대
8/4
하늘을 떠받쳐 솟아오른 바위
가물가물한 낭떠러지 밑으론 푸른 소
강 건너엔 넓은 사장이 펼쳐 있다.
예사롭지는 않아 보인다.
사람마다 도깨비를 품고 다녔을 때에
하느님이 용마를 보냈을 법하다.
사장에 뛰어다니던 용마가
정기룡 장군을 만났다.
말의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는
장군의 모습이 선하다.
그리운 할아버지
8/16
산비탈 뙈기밭에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고춧대
종일 할아버지 생각에 잠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