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을 누비던 전차
“쇠막대기로 전기를 잡아먹고 그 힘으로 달리는 괴물”, 부산에 전차가 등장하면서
부산사람들은 전차를 '전깃불 잡아먹고 달린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처음 전차가
달릴 당시, 공중의 전기 케이블에서 방전되는 섬광을 본 사람들은 그 불빛을
번갯불로 여겼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일정한 정차장도 없었다. 굳이 정차장을 정해
놓고 운행을 할 만큼 손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데서나 손을 번쩍 들고서
전차를 세워 탈 수도 있었고 내리고 싶은 곳에 내릴 수도 있었다.
부산전차(釜山電車)는 1915년에서 1968년까지 부산 시내에서 운행하던 노면
전차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남선(南線)전기주식회사(한국전력의 전신)가 운영
하던 노선이었기 때문에 남전(南電)이라 불리기도 했다. 총 연장은 21.7km,
궤도 폭 1,067㎜에 33개의 역이 있었다.
1915년 11월 1일 부산우체국~동래 온천장 간의 노선에 첫선을 보인 전차는 주로
일본인들이나 여행객들이 위락 시설이 많은 온천장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그 뒤 1916년 대청동선, 1917년 광복동선이 개통되고 1928년 대신동선, 1933년 범일동선,
1935년 영도선이 연장 개통되면서 그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대 부산에는
서면을 기점으로 하는 3개 전차노선이 운행됐다. 서면~구덕운동장, 서면~영도 남항동,
서면~동래 온천장 노선이 그것이다.
전차는 대중교통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18년 부산부(釜山府 : 부산시)의 인구가
6만 2천567명이었는데 1년간 전차를 이용한 승객은 203만 3천27명으로 한 사람이 연간
33번 가량 전차를 이용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차 삯도 만만찮았다. 처음 전차가 운행될
무렵, 부산역~동래 온천장까지 왕복 운임은 50전, 당시 날품팔이 하루 품삯 40~50전과
비슷했다. 1962년의 요금은 1구간이 2원 50전, 2구간이 3원이었다.
[옛날 서울의 전차표]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특히 전찻길을 건너다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
했다. 1918년 여름에는 지금의 자성대 동문 근처인 영가대(永嘉臺) 언덕길에서 좌천동
으로 내려오던 전차에 한국인 어부가 치여 즉사했는데 일본인 기관사가 전차를 몰고
뺑소니를 쳤다. 회사 측에서 성의 있는 수습대책을 내놓지 않자 울분에 찬 민중들이
영가대에 정차 중이던 전차로 몰려가서는 전차에 로프를 매고 언덕 아래로 끌어내려
박살을 냈다고 한다.
53년의 세월 동안 서민의 발이 되어온 전차도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시내버스가
등장하면서부터 적자폭이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전반적인 시설의 노후화가 주된 요인
이었다. 1968년 5월 19일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부산 사람과 함께 해오던 전차는 한
시대를 마감했다.
[서면을 누비던 전차의 모습] [전찻길을 건너는 할머니, 194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