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은 청진을 점령한 뒤 남하하고 해상으로 원산에 상륙해서 8월말까지 북한 전역을 장악했지만, 38도선에서 남하를 멈췄다.
소련군이 멈춘 것은 미국과의 협의에 따른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8월 15일 스탈린에게 한국 점령을 38도선을 경계로 하겠다고 통보했고, 스탈린은 다음날 이를 수용했다.
미국은 소련군의 남하를 저지할 필요성이 있어 검토한 끝에 한국의 수도 서울과 주요 항구를 확보하는 선에서 38도선을 제의한 것이다. 실제 38도선 아래에는 수도 서울과 주요 항구인 인천, 부산이 포함됐다.
소련군은 철의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 남북한을 통하는 모든 선을 끊고 북한으로의 방문을 차단했다.
8월 24일 남북을 잇는 철도인 서울-원산간 경원선을 끊었고 26일에는 토해선, 즉 개풍군 토성과 황해도 해주 사이를 잇는 철도를 끊었다. 25일에는 사람과 물자가 오가지 못하게 하고 9월 6일에는 전화 등 남북간 통신선을 차단했다.
이후 소련군은 38도선에 경비부대를 배치해서 남북간 사람의 이동과 물자의 교류를 통제했다.
소련군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당초 목적을 넘는 과잉행동이었다.
원래 남북간 38도선은 한국에서 미소 연합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관할 구역의 경계선을 의미했다. 북한에서 소련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남한에서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 해제토록 했다.
그런 만큼 38도선은 분단선이 아니었다. 그런데 소련군이 이 38도선을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사람의 통행과 물자의 교류, 통신을 막으면서 분단선이자 국경선처럼 된 것이다.
이로 인한 남북한 주민의 불편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북한은 광공업이 발달하고 전력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남한에서는 농업생산이 많아 상호 보완적이었는데, 분단으로 인해 서로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일본인들도 큰 고초를 겪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건준을 만들어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았지만, 정작 일본인의 남하를 막은 건 소련군이었다. 소련군은 일본인들을 평양, 함흥, 흥남, 진남포, 원산 수용소에 가두었다. 이로 인해 일본인은 형편없는 조건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며 겨울을 보내느라 1945년 겨울에만 2만 3천여명의 일본인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미군은 한국민이 원래 살던 대로 38도선을 오가게 하고 교통, 통신, 물물교환을 허용해주자고 소련군에 제의했지만, 소련군은 공산화를 위해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다만 전기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이행 가능성이 있던 1947년까지는 보내줬으나 1948년 5월에는 단전했다.
첫댓글 유튜브 동영상 강의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SDGRXTVLYpk&t=2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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