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을유문확사, 2018(초판 37쇄)(2015초판 1쇄)
머리말
우리는 해외의 유명 도시로 여행을 가면 그곳을 대표하는 유명한 건출물 앞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 파리에 가서는 에펠탑에서,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어야 숙제를 한 듯 맘이 편해진다. 에펠탑 앞에 서야 비로소 파리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건출물이 그 나라와 장소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건출물이 왜 그 나라 그 장소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건출물만큼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들어간 결정체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서 피라미드의 위치 바로 옆에 공사 인부를 위한 도시를 건설하고, 당시 왕족이 받던 것과 동일한 당대 최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우리가 어려서 배웠던 것처럼 노예를 부리면서 마구잡이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를 생각하면서 체계적으로 건축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피라미든느 당대 이집트 건축 기술뿐 아니라 사회, 의료, 경제가 어우러진 결정체이다. 피라미드처럼 모든 건축은 그 나라의 경제를 견인하고 문화를 이끄는 주체였다.(15~16쪽)
제2장 현대 도시들은 왜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아파트 단지의 계획안은 이를 흉내 내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근 아파트 광고 전단지를 보면 중앙에 조경 처리된 공간이 있고, 주변으로 고층 건물이 들어선 아파트 단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온통 광고의 초점은 자신들의 아파트 단지가 얼마나 공원 조경이 달 되어 있는가를 자랑하는 데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사기성이 존재한다. 이 디자인이 공원을 제공한다고 광고할 때 실제로 우리는 도시 속의 가장 큰 중요 요소인 길이나 골목을 잃었다. 우리의 옛 도시 속에서 다른 집에 갈 때는 골목을 따라서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아파트에서는 복도나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길을 찾는다. 아파트 단지에는 골목은 없고 복도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골목과 복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근본적인 차이는 하늘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우리의 대형 아파트 단지는 우리에게서 우리 머리 위의 하늘을 빼앗아 갔다.(54~55쪽)
머리 위 하늘을 빼앗긴 도시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하늘이 보이는 골목길은 없다. 대신 태양광 대신 형광등이 달린 천장이 있는 복도와 엘리베이터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태는 세대 간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막았다. 과거 대문 앞 골목길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골목에 모여서 축구와 야구를 했다. 그 동네에는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같은 것이 필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작은 골목에서 온갖 스포츠를 다했는지 의아하다. 이것만 봐도 어린이의 스케일은 확실히 어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놀 때,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연스레 어머니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골목길이라는 외부 공간은 우리에게 길 이외에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는 하늘을 향해 열린 공간이었다. 건축가 크르뷔지에는 자신이 설계한 도안은 고층 건물과 고층 건물 사이를 녹지로 만들어서 고층 건물의 발코니에서 바라보면 넓은 자연을 볼 수 있게 계획하는 등 각각의 세대에서 바라보는 자연이 많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그저 바라보는 자연일 뿐이었다. 옛 도시에는 마당에 나무가 있었고, 방문을 열고 나가면 어디서나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옛 도시에서 자연은 바라보는 것을 넘어 더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연과 항상 소통하면서 세대 간의 교류를 촉진했던 골목길 없이 복도와 엘리베이터로 연결된 세대는 과거에 비해 더 분리되고 소외될 뿐이었다. 르 코르비지에의 디자인에서 자연은 일상에서 체험되기보다는 보기만하는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계획안은 실패하였다. 자연을 바로보는 대상으로만 이해했을 때 건축 디자인은 실패한다.(55~56쪽)
언제부터인가 발코니를 확장해서 집을 넓힐 수 있게 법적으로 허용되면서 우리의 도시에는 발코니가 없어지고 모두 창문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아파트가 삭막하긴 하지만, 그나마 발코니가 사적인 외부 공간으로서 약간의 개인 마당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발코니마저 창틀을 통해서 내부 공간화시키고, 발코니 확장으로 방을 만들어 버리면서 우리의 도시 풍경은 사람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 삭막한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된 것이다. (중략) 최근 들어서 몇몇 아파트 브랜드들이 테라스식 집합 주거를 광고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마당과 골목을 빼앗긴 우리 자녀들에게 테라스라도 선물해 주고 싶다.(59쪽)
한강의 만리장성 :
서울은 세계의 다른 도시가 하나도 갖고 있기 힘든 두 개의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서울 외곽을 둘러싼 산이고, 다른 하나는 한강이다.(중략) 그리고 이 아파트 단지 내로는 공공의 상업가로가 관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한강으로의 접근을 막는 가장 큰 문제이다. 가끔씩 있는 공공 도로도 강변도로로 만들어진 둑으로 향하는 막다른 길뿐이다. 사람들이 상가도 없는 그 막다른 길을 걸어갈 리 만무하다. 그래서 한강은 우리 일상의 삶과 더 밀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주민 외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아파트 단지로 막혀 있다.
강남의 경우 이 같은 문제의 시작은 최초에 토지공사에서 토지 매각 시 돈을 더 받기 위해서 도로를 만들지 않고 건설사에 큰 덩어리로 땅을 매각한 데 있다.(중략) 땅을 매입한 건설사는 당연히 세대수를 최대한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단지 내로 시민이 관통할 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다만 아파트 주민만을 위한 단지 내 도로만 만들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두꺼운 아파트 단지는 한강에 접근을 막는 서울의 ‘만리장성’이 되었다. (231~232쪽)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면 과거의 문명들이 살아남는 데는 식량 확보가 최우선적으로 해결할 문제였다. 기근을 못 넘기면 그 종족은 모두 없어지게 된다. 연구에 의하면 기근을 넘기기 위한 방식으로 좀 불편해도 그들은 멀리 떨어진 여러 장소에 분산해서 농사를 했다고 한다. 다른 기후대와 다른 작물을 나누어 농사를 함으로써 한 지역에 피해가 와도 다른 지역의 작물로 살아남기 위한 위험 대처 방식이다. 현대의 주식 투자자들이 다양한 업종에 분산 투자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외에도 각 문화는 식량을 오랜 시간 저장하는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기근을 넘기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김치와 각종 젓갈들도 대표적인 식량 저장 기술 중 하나이다. 또 다른 식량 저장 기술을 가축을 키우는 것이다. 고대의 농부들이 돼지를 키우는 것은 남는 식량을 오랫동안 보존 가능한 식량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소비 후에 남는 감자나 고구마를 돼지에게 먹이고 수년 후 기근 때에 돼지를 도살해서 식량으로 전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보신탕을 먹는 풍습도 이와 비슷하게 부족한 단백질 공급원을 해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식량이 풍부할 때에는 먹다가 남은 음식을 개에게 먹이면서 보안용으로 개를 이용하다가 단백질이 필요한 순간에 개를 보신용으로 먹었던 것이다.
과거에 식량은 곧 생존이었다. 현대 사회에는 돈이 그 역할을 한다. 과거에 식량 저장의 한 방편으로 돼재를 키웠다면 현대에는 돈을 저장하는 방식으로 부동산을 산다. 부동산도 돼지나 발효식품처럼 부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돼지가 기근을 넘기는 방식이 되듯이 현대인들에게 돈이 부족한 시기를 넘기는 방식은 부동산을 처분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문화에서 아파트는 환금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돼지의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중산층 국민들은 은퇴 후 아파트를 처분해서 돈의 기근 시기를 넘긴다. 우리가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사고 매월 대출금을 갚는 것은 옛 선조가 자신의 식량을 아껴서 돼지를 키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돼지와 아파트는 다르지만 같은 기능을 하는 사촌지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고령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를 감안하면 수많은 아파트 돼지들이 도살을 기다리고 있다고 느껴진다.(235쪽)
10장에서
이러한 아파트 중심의 건축 시장의 배경이 우리나라 건출을 죽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파트 가격이 오르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아파르를 선호하지 않는다.(중략) 지금은 웬만한 신축 주택도 냉난방과 온수는 다 해결이 된다. 이러한 기술적 변화 외에도 항상 실내에서만 생활하는 현대인이 최근 들어서 자연을 그리워하는 욕구가 커지면서 한국인들도 점차로 주택을 선호하기 시작하고 있다.(246쪽)
제11장 왜 사람들은 라스베이서의의 네온사인을 좋아하는가
<정보로서의 건축>
라스베이거스 간판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건축은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서 다르게 경험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건축 공간이라는 것은 사람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렇듯 주관적인 관점에서 공간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관점은 건축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큰 변화를 준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공간을 완전히 다른 개체의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간이라는 거이 하나의 물리적인 객체로 보아 왔다. 뉴턴 같은 과학자는 시간과 공간을 따로 독립된 객체로 본 상태에서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근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들을 고안해 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독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된 개념인 시공간님을 증명해 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 같은 21세기의 물리학자는 그의 책 『우주의 구조』에서 시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실존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의식에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의 틀일지로 모른다고 말한다. 이런 최신 물리학의 개념은 건축 공간을 주관적 인식의 산물로 바라보는 시각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251~252쪽)
건축 공간을 주관적 인식의 산물로 보는 시각은 현대인에게 필요한 공간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인터넷 안에서 구축된 가상 공간과 우리가 태초부터 살아온 현실 공간을 넘나들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252쪽)
가상과 현실의 이중적 삶을 사는 것은 사실 오래전부터 해 오던 익숙한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루 중 7~8시간 정도를 잠을 자면서 보낸다. 만약에 우리가 여덟 시간을 잔다면 이는 하루 24시간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시간으로, 우리의 삶의 3분의 1은 꿈의 공간에서 3분의 2는 현실 공간에서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옛 선현 중 장자가 ‘호접지몽’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잘 설명된다.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너무 현실적이라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내가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주관적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인터넷과 가상 공간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주관적인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건축 공간이라는 것도 어느 하나의 확정된 물리적 조건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대신 정보의 해석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 인식의 산물로 보는 것이 이 시대에 건출 공간을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일 것이다.
<왜 인터넷 ‘공간’이라고 부르는가??
유럽 여행 중 우연히 17세기 화가 안드레아 포초(Andrea Pozzo)의 젗장화를 보고 깨닫게 되었다. 포초의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에 발전한 투시도 기법에 의해서 그려졌는데, 천장 면에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열린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완벽한 그림이었다. 2차원 평면의 정보이지만 내 뇌는 그 안에서 3차원의 공간을 보았던 것이다.(255쪽)
N차원의 존재는 N-1차원의 이하의 존재만 완벽히 이해 가능하다. 몸을 가진 우리는 3차원의 존재이다. 3차원의 존재가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것은 2차원의 평면, 1차원의 선, 0차원의 점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3차원의 공간을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가 3차원 공간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단기 기억력에서 나온다. 우리는 기억력을 통해서 다른 시간대의 장면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머릿속의 의식은 여러 시간대에 존재할 수 있는 4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빛이 물체를 때리면 반사된 빛이 수정체를 통해서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고, 망막에 상이 맺히고, 그 상은 전기적 신호가 되어 뇌로 전달된다. 뇌는 그 정보를 연산해서 공간을 만든다. 현실은 뇌가 초당 200장 정도의 그림을 연상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자전거의 휠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느 순간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의 뇌가 연산하는 그림의 조합이 어느 순간 거꾸로 돌아가는 연속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서 우리의 뇌가 무한대의 이미지를 연산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시은 마치 우리가 만화영화를 볼 때 초당 16장의 그림을 연산해서 공간과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그림의 숫자가 영화는 초당 24장이고, 현실은 200장일 뿐이다. 같은 원리로 모티터상의 2차원 정보를 보면서 우리의 뇌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텍스트뿐인 화면의 연속 장면이 공간이 되는 것이다.(255~256쪽)
관음증(Voyeurism)과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2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