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창동(金昌洞)
● 금콕동(金谷洞)
● 창영동(昌榮洞)
● 쇠뿔고개
● 황굴고개
금창동은 1985년 11월 인천시 조례에 따라 금곡동과 창영동을 하나로 합하면서 이들 두 동네의 앞 글자 하나씩을 따서 새로 민든 이름이다.
금곡동
이중 급곡동은 구한말에 우리말로 ‘쇠골, 쇳골, 샛골’ 등으로 불렸던 동네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쇠(쇳)’를 ‘金(쇠 금)’으로 받고, ‘골’을 ‘谷(골 곡, 마을 곡)’으로 써서 ‘금곡리(金谷里)’라는 이름이 생겼다. 1936년에는 일본식으로 ‘금곡정(金谷町)’이라 바꿔었다가 광복 뒤인 1946년에 그대로 금곡동이 됐다.
금곡동이라는 이름을 만들게 한 ‘쇠골, 쇳골, 샛골’이라는 땅이름은 우리나라 곳곳에 널려 있고, 인천만 해도 대략 네 곳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쇠가 많이 나는 땅’, ‘풀〈새〉이 많은 땅’, ‘새로 생긴 동네’, ‘사이(새)에 끼어있는 땅(동네)’, ‘새〈鳥〉가 많은 곳’ 등의 여러 해석이 있다. (→‘샛골’에 대해서는 남동구 ‘남동+ 남촌동’ 편 참고)
이 중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가는 그 땅의 위치나 실제 상황, 역사 등을 두루 따져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이곳 금곡동은 흔히 “옛날 이곳에서 쇠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해석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헌이나 사진 등의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해석이다.
쇠가 많이 나온 곳이라면 광산(鑛[山)이나 제련소(製鍊所)와 같은 곳이 있었어야 하는데 이곳에는 그런 기록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인천에서 오래 산 사람들 가운데는 이곳에 광산 정도의 큰 규모는 아니었어도 분명히 쇠를 파내는 곳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관련된 자료가 나올 때까지는 이 해석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미뤄둘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이곳에 금잔디가 많았기 때문에 금곡리로 불렸다는 애기도 있지만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얘기다. 또 한편으로는 일제(曰帝) 강점기에 이곳에 유명한 성냥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성냥의 원료인 누런 유황(硫黃)을 금에 빗대어 금곡리라 부르게 됐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지금의 금곡동 33번지 일대 2000여 평 땅에는 1917년 「조선 인촌(燐寸·성냥) 주식 회사」가 들어서 연간 6만~7만여 상자의 성냥을 생산했다. 이는 당시 국내 전체 성냥 소비량의 3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공장의 남녀 직공만 해도 500여 명에 이르고, 지방의 학생들이 이 공장을 구경하기 위해 수학여행을 오곤 했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하는 가사의 유행가가 생길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유명했는지 짐작할만하다. 또 이 공장 때문에 그때 가정에서 부업으로 성냥갑을 만드는 사람이 2500여 명이나 됐다는 기록이 있다.
학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냥이나 유황 때문에 금곡리라 불리게 됐다는 얘기는 타당성이 전혀 없다. ‘금곡리’라는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의 일이고, 성냥공장이 들어선 것은 3년 뒤인 1917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해 볼 때 금곡동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한 ‘쇠골(쇳골)’ 또는 ‘샛골’은 ‘사이에 있는 땅’이라고 해석함이 가장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곳이 송림산(수도국산)과 쇠뿔고개(우각현) 사이에 있는 동네여서 사람들이 ‘사잇골〉샛골’, 즉 ‘사이에 끼어있는 마을’ 또는 ‘사이로 빠져나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불렀는데 차츰 그 발음이 바뀌어 ‘쇠골/쇳골’ 이 된 것으로 본다.
이와 똑같은 해석 이지만 송림산과 쇠뿔고개 사이가 아니라 쇠뿔고개와 예전에 박태선 씨의 전도관(옛 알롄별장 자리)이 서있던 언덕 사이를 지나는 길이 있는 동네여서 ‘샛골’이라 불렸다고 보기도 한다. 이들 고개와 언덕 사이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창영동(쇠뿔개)
창영동은 구한말부터 ‘우각리(牛角里D’라 불리던 지역이다.
우각리는 지금의 경인전철 도원역 주변, 인천세무서가 있는 언덕을 말한다. 이곳을 우리말로 ‘쇠뿔고개’라 불렀는데, 이를 그대로 한자로 바꾼 이름이 ‘우각현(牛角峴)’이다. 여기서 우각리가 나왔다.
따라서 우각리의 원래 이름은 쇠뿔고개이다. 쇠뿔고개는 발음이 조금 바뀌어 ‘소뿌리고개’ 라고도 했고, 이를 비슷하게 한자로 바꾼 ‘송근현(松根峴:소나무 뿌리 고개)’이라는 이름도 가꼼 쓰였다·,
쇠뿔고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이 언덕의 모양이 소〈牛〉의 뿔〈角〉처럼 휘어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 모양이 실제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대체 이 동네의 어디가 뿔처럼 생겼고, 어디쯤이 휘어져 있다고 보아야할지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는 쇠뿔고개를 ‘삼각산(三角山)’ 처럼 봉우리〈角〉가 세〈三〉 개인 고개, 곧 ‘세뿔고개’의 변형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서울 우이동(牛耳洞)과 비슷한 경우다.
‘우이’는 우리말로 ‘소의 귀’, 곧 ‘쇠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는 원래 ‘백운대(白雲臺)’와 ‘만경대(萬景臺)’, ‘인수봉(仁壽峰)’ 등 세 개의 봉우리가 있어 ‘세귀’로 불리다가 발음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한자로 바꿀 때 ‘세귀’가 아닌 ‘쇠귀’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우이(牛耳)’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곳 창영동도, 앞서 말한 대로, 쇠뿔고개(우각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송림산(수도국산)과 예전에 박태선 씨의 전도관이 있던 언덕이 비교적 높게 서 있다. 따라서 이들 5곳을 ‘세 개의 뿔’로 보아 ‘세뿔고개’라 부르던 것이 ‘쇠뿔고개’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쇠뿔이 ‘쇠불鐵火’, 곧 ‘쇠를 녹이는 곳’이라는 뜻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이 옛날 쇠의 생산지여서 쇠를 녹여 물건을 만들던 곳이었기에 ‘쇠불’ 또는 ‘쇠불골’로 불리다 쇠뿔고개가 됐다는 말이다.
이는 바로 옆 동네인 금곡동의 옛 이름이 ‘쇠골/쇳골‘이었던 것이 ‘‘옛날 쇠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해석과 똑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광산이나 제련소 같은 곳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줄 수 있는 근거가 아직은 없기 때문에 판단을 ˙미뤄둘 수밖에 없는 해석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쇠뿔고개’가 ‘세뿔고개’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는 해석이 그나마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이 쇠뿔고개가 ‘창영(昌榮)’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36년 일제가 인천부의 땅을 넓히는 작업을 벌일 때였다·
일제는 당시 이곳에 ‘창영정(昌榮町)’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새롭게 번창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뜻은 좋은지 몰라도 이곳의 원래 땅 이름이나 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창영정이 광복 뒤인 1946년에 그대로 창영동이 됐다.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해도 지역 유래와는 전혀 관계없이, 일제가 아무렇게나 지어 붙인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은 아쉬운 일이다.
황굴고개
쇠뿔고개는 원래 그 맞은편의 황굴고개와 연결돼 있었다.
1917년에 발간된 이 일대 지도에 보면 ‘우각리’ 남쪽에 ‘도산(桃山)’이라는 곳이 표시돼 있다. 지금의 광성 중·고등학교와 실내체육관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도산(桃山)인데, 이 산의 아랫자락이 황굴고개이다. 지금의 경인전철 도원역에서 동인천역으로 가는 큰 도로에 있는 고개다. 하나로 이어져 있던 이들 고개는 그 가운데로 '경인철도가 생기면서 둘로 나누어졌다.
황굴고개의 ‘황굴’은 ‘황골’ 의 발음이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해 “고려시대에 이곳에 한 왕족의 묘가 있었기 때문에 ‘황곡(皇谷)’으로 불리던 것이 황골로 바뀌었다”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이름을 보고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 전혀 고증(考證)되지는 않는 내용이다.
‘황골’은 이보다 ‘큰 골짜기’나 ‘큰 고을’이라는 뜻의 우리말 ‘한골’에서 발음이 바뀌어 생긴 말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크다’는 뜻의 접두사 ‘한’이 말머리에 들어가는 땅이름은 ‘한들, 한개, 한골, 한내, 한뫼…’ 등 무척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한’은 발음의 편의 때문에 흔히 ‘항’이나 ‘황’으로 바뀌곤 했다.
이런 예는 일반 단어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중세국어에서 ‘큰 새’를 뜻했던 ‘한새’나 ‘큰 소’를 뜻했던 ‘한소(〈한쇼)’가 오늘날 ‘황새’와 ‘황소’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점에서 이곳 황굴고개도 원래 ‘한골고개’였던 것의 발음이 바뀌어 생긴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도산은 높이가 고작 50m 정도로 산이라기보다는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곳에 건물이나 철로가 들어서 있지 않았던 시절, 쇠뿔고개와 이어지는 이곳 골짜기는 주변에서 보기에 꽤 넓고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골’이라 불렸고, 그 발음이 바뀌어 ‘황굴’이 되자 여기에 ‘고개’가 덧붙어 ‘황굴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