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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역사 와 유적 스크랩 광해군과 임해군 그리고 공비의 묘소 탐방기
이모(심재순) 추천 0 조회 35 12.11.28 09:4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2012년 11월 14일 (수)

 

 

 

사능 입구 옆엔 송능2리로 가는 신작로가 있습니다.

이 길로 들어가면 광해군묘와 성묘,안빈묘,임해군묘가 있지요.

100여 미터 채 못가 있는 우측 골목길엔 만두집도 있는데 배 고프면 들러가도 좋을꺼예요.

 

 

 

 

7,000원짜리 만두국이 먹을만 하거든요. 만두국 한그릇 먹고 되돌아 나와 걸었습니다.

 

 

 

 

 

광해군 묘가 있는 공원묘지 입구까진 약 30분 정도 걸어야 당도 할수 있습니다.

 

 

 

 

 

묘지 입구에서는 가파른 길을10분 정도 더 걸어야죠.

초록색 휀스안에 광해군 묘가 있습니다. 휀스문을 열고 들어가 본후 나와 문을 닫으면 됩니다.

 

 

 

 

 

 

 광해군을 모르는 분은 없잖아요? 선조의 서자로 조선의 15대 임금이였던 분이였죠.               

15년간 왕을 했고 19년간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여나  

임진왜란후 고생 끝에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 수호를 위해 적자인 영창대군과 친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인목왕후까지 폐모 했던 것이 빌미가 되여 왕에서 쫓겨난 비운의 임금이지요.            

 

 

 

 

 

광해군은 연산군과 같은 폭군은 아니였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 정인홍(대북) 일파만 등용해서

다른 정파들의 불만을 산게 반정의 원인이 된것이지요. 1623년 3월 14일 새벽 황해도 평산부사

이귀와 경기도 장단부사 이서가 몰고 온 군사 1,000여명의 기습에 광해의 정권은 무너졌습니다

 

 

 

 

 

참, 허무하게 당했습니다. 광해군의 군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는데도 말이죠. 광해군이 반정의 

 기미를 몰랐던건 아니였습니다. 재위 기간중 수시로 들어온 많은 반정 정보로 광해군은 웬만한    

 정보 보고엔 둔감해 있었어요. 사태가 심각해 져서야 비로소 대책을 세웠지만 이미 때는 늦은거죠

 

1623년 3월13일 어전회의를 열어 다음날 주모자들을 잡아 들이기로 했으나 그시간 반정군들은   

 이미 홍제원에 모이기 시작 했습니다.선수를 친 반정군이 창덕궁에 도달 했을때 반정군에 가담한

훈련대장 이흥립이 궁궐문을 열어주어 반란군들은 계획대로 쉽게 거사를 성공 했습니다.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피신 했으나 이내 잡혀 폐위된후 강화도로 유배 

됐습니다. 이때 함께 유배됐던 아들 페세자 질은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다 발각되여 죽고 이모습을 

 지켜본 며느리는 자살하고 열 받은 폐비 문성군부인유씨도 사망(10월8일) 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

 

 은 오래 살았습니다. 강화도에 유배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교동도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1637년 4월)에는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지고 온갖 수모속에 고단한 삶을 영위     

했지만 조선왕중 세번째로 장수했습니다.1575년 태여나 1641년 사망시 그의 세수는 67세였어요  

제일 오래 사신 조선의 임금은 영조( 83세)고요 다음은 태조(74세)임금 그다음이 광해군입니다.   

 

 

 

 

 

 폐위된 임금이라 해도 광해군의 묘는 참 초라 합니다. 조선의 왕릉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됐지만 거기에도 빠져 있습니다. 억울한 면이 있는 광해군은 전국적이지는 않았지만 대동법을    

        시행했고 동의보감을 편찬케 했으며 명과 청의 공존시대에 탁월한 외교정책으로 조선을 전란으로      

 

   부터 지켜냈습니다. 명의 요구에 어쩔수없이 파병은 했지만 역관 출신의 강홍립에게 항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조선 군사들의 희생을 막았습니다. 임진왜란시 전장을 누비고 다니며 전쟁이     

   백성들에게 주는 고통을 체험 했기에 할수 있었던 통치였죠. 임진왜란때 백성의 1/3이 죽었습니다

 

 

 

 

 

광해군은 눈을 감으며 자신을 어머니 발치에 묻어 달라고 했어요. 광해군의 친모인 공빈김씨는

광해군을 낳은지 2 년만에 산후병으로 25세에 요절했습니다. 광해군은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죽음 앞에서 어머니가 생각났었나 봅니다. 광해군은 재위시 빈이였던 어머니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묘도 성릉으로 격상 시켰으나 10년도 안돼 성능은 다시 묘가 됐습니다.   

 

 

 

 

광해군은 부인인 유자신의 딸 문성군부인유씨와 합장되여 있습니다. 본인의 바램대로

어미니의 묘 인근에 영면 했습니다. 건너 산에 어머니가 잠들어 있지만 보이지는 ?네요.

 

 

 

 

 

광해군 묘소에서 내려와 조금 더 위로 오르면 광해군의 생모 공빈김씨의 성묘가 있습니다.

 

 

 

 

 

입구에는 풍양조씨 시조묘 라는 이정표가 있죠.

 

 

 

 

 

 

 

 

 

 

 

묘소 입구에는 풍양조씨의 신도비와 이정표가 있습니다. 성묘의 안내는 없습니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살았던 조맹의 묘입니다.

 

 

 

 

 

 

묘소는 새로 단장됐고 옛 묘비와 신도비는 양 옆으로 물러나 있더군요.

 

 

 

 

조맹의 묘에서 본 성묘 모습입니다.

 

 

 

 

 

능으로 격상 됐을때의 석물들이 그대로 있어 묘의 모습은 왕릉과 같습니다.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석등과

 

 

 

 

 

혼유석등등... 왕능의 위엄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난간석과 평풍석까지 있는 성묘는

 

 

 

 

 

지금도 석호와 석양이 지켜 주고 있습니다.

 

 

 

 

 

 

 

 

 

 

 

성묘에서 보면 조맹의 묘 봉분이 보입니다.

 

 

 

 

왕릉 시절에는 조맹의 묘 봉분은 깍아 내려 평장을 했었다네요.

그나마 파내지 않은것은 조맹의 후손이 공빈김씨와 인척 관계 였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무인의 갑옷 무늬가 지금봐도 생생합니다.

 

 

 

 

 

 

마을로 다시 내려오는 길입니다.

 

 

 

 

 

 

 

 

 

 

추운 데도 마을엔 아직 가을이 떠나지 않았군요.

 

 

 

 

 

 

 

 

 

 

 

 

 

 

 

 

 

마을길로 나와 조금 또 가면 공빈김씨의 장남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의 묘도 있습니다.

 

 

 

 

 

성격이 광폭해 임금에도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임해군의 묘는 가는 길도 없습니다.

 

 

 

 

 

산속에 숨은듯이 있는 임해군의 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면 억울하고 한도 많겠지만

 

 

 

 

 

자업자득이란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근래에 세운 비입니다. 동생이 임금이 되여 형부터 죽였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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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1.29 22:44

    첫댓글 광해군이 나오는걸 보니..
    영화가 생각나네여...ㅎ
    잘 보구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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