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한글 2000으로 작성하다 보니 사진을 함께 송부 할수 없어 죄송합니다. 사진은 다음 띄우겠습니다.
자바인을 찾아서 떠난 자바, 발리 9일 여정
2002년 8월 31일(토)
또 역마살이 도졌는지 떠나려 한다. 모든 걸 훌훌 털고 그냥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을 찾아 떠나려 한다.
여행은 낯선 곳으로의 떠남이지만, 그건 돌아오기 위한 만남이 아닐까?
태풍 루사가 온다는 기상예보가 있어 항공기는 정상이륙이 될지 걱정이 된다. 간밤에 숙직을 하고 챙겨 올 짐이 있었는데 처가 대신 챙겨 나왔다.
또 다른 이별, 그렇게 덕수궁 앞에서 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버스에 오르며 처에게 괜시리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말이면, 산 아니면 마라톤으로 거의 휴일을 집을 비우고, 늦은 여름휴가는 혼자 자바와 발리섬으로 간다.
버스 안에서 챙겨온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복대도 찾다. 복대, 이건 배낭여행자의 전매특허다. 그 안에 제일 중요한 여권, 돈, 항공권이 다 들어간다. 이것이 없으면 여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뱃속 깊숙히 찬다. 마치 살붙이 같이..... 다행이 아직 태풍이 한반도 이곳 까지 도달하지 않아 정상이륙 할 수 있단다.
일찍 출국수속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면 知人들에게 메일 보낸다. 미친놈이라 하겠지?
비행기는 태풍을 피해 태풍의 오른쪽인 속초, 오사까, 마닐라 상공을 우회하여 40분 정도 돌아간다는 기내 안내방송이 나온다. 고도가 높아지니 태풍이 오는지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그곳은 오직 푸른 하늘만 있을 뿐이다.
예상보다. 1시간 늦게 수카르도 핫타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 했을 때는 어둠 속이다. 2시간의 시차가 있다.
미리 생각해둔 감비르역으로 가는 리무진버스를 타고 1시간 가량 달려 역에 내려, 내일 갈 족자카르타행 열차시간을 확인한 후 배낭족 거리인 잘란작사거리로 가야한다.
가는 길은 걸어 서도 갈수 있는 가까운 거리인데 어두우니 길 찾기가 어려워 바자이를 타기로 했다.
이는 메타기도 없고 행선지를 말하고 미리 흥정을 해야 한다. 그래야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
그는 처음 “10?”, “익스펜시브“, ”하우머치“ , ”5!“ ‘ OK”, 결국 Rp5,000로 가기로 했다.
현지인과 흥정이 중요하다. 바자이는 바퀴가 세개로 크기는 모타사이클 만한 2기통 차인데 자카르타의 일반적인 교통수단이다. 소음이 무척 심하고 속도는 시속 30km 정도다.
그리고 배낭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첫날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 정할 때 까지 이다
작사촌은 배낭여행자 집합소다. 모든 여행정보를 얻을 수 있고 숙소, 먹거리가 해결되고 가격도 저렴하다. 밤 10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 아직도 이 거리는 아직도 초저녁이다. 오늘 일정을 마치고 속속 귀가해서 늦은 저녁식사와 빈탕맥주를 마시며 오가는 대화로 시끌벅적하다.
동서양 모두를 느낄 수 있는 배낭족 집합소로는 방콕의 카오산로드가 유명하다.
서울엔 이런 거리가 없는게 아쉽다. 세종문회관 뒷편과 이태원, 대학로에 있긴 한데 너무 미미하다.
게스트하우스 보르네오에서 자카르타의 첫 밤을 맞는다. 우선 나시 고랭으로 식사를 하고 빈탕맥주로 축하를 하자! 치어스!! 치어스!!
9월 1일(일)
새벽 5시에 일어 났다. 그냥 모나스 쪽으로 걸었다. 이곳은 아침이 무척 일찍 시작된다. 4시경부터 다들 분주히 어디론가 간다. 그 행열을 따라가니 모나스(인도네시아 독립기념탑)에 모인다. 달리는 이, 축구하는 이, 배드민턴치는 이, 산책 나온 이, 단체 체조하는 이,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그에 따른 먹거리와 볼거리 탈거리가 다 모인다. 마술하는 이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삥 둘러 있고, 시장도 선다. 옷도 팔고, 먹거리도 팔고, 사람사는 것은 어디든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왕 나온 김에 밤에 족자카르타(이곳 사람들은 약칭 족자라 함)로 가는 야간열차를 예약하고 시내를 둘러 볼 생각으로 역에 갔더니 기차표를 팔지 않는단다.
기차역에서 표를 팔지 않으면 어디서 팔까? 안내도 없고 모른다고만 하니 갑갑 할 수밖에....
9시가 넘어서 안내창구에 가서 확인하니 전철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그 거리로 가라고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고, 여기는 인도네시아니까 여기 법에 따라야지.
이슬람 대사원(Mesjid Lstiqlal)은 동남아시아 최대의 이슬람사원으로 모나스 광장옆에 밥그릇을 엎어 놓은 듯한 건물이다. 예배당 안의 면적이 1ha 라고하니 규모를 짐작 할만하다.
사진을 찍고 나오려 하는데 수위가 내부를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최상층, 내부등 건물 내부를 둘러 보는데 옥상에 가더니 지갑을 만진다. 얼마? 했더니 투엔틴이라고 한다. 뭐, 20만 루피? 어디든 공짜는 없다. 1만루피(일천사백원 정도)를 주고 나오는데, 들어 갈 때 아랫도리에 두르라고 준 치마(?)를 반납하니 돈통을 내민다. 2천루피를 넣으니 한 장 더 넣으란다. 그래 3천루피다. 함에 넣었다.
동남아를 여행하다보면 돈 때문에 속상해 할 때가 많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돈? 그것 때문에 신변의 위협까지 받을 수 있다.
다음엔 독립기념관(Monas)으로 갔다. 35kg 순금으로 에워싼 불꽃 기념비는 결코 꺼지지 않는 독립의 이상을 높이 선언하고 있다. 높이 137m로 상단 전망대 까지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갈 수 있다.
전망대에선 자카르타 시내를 한번에 조망 할 수 있고, 여행자의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므르데가광장의 대통령관저와 국립중앙박물관(Musium Nasional) 이곳에는 자바원인(原人)의 두개골 복제품이 전시되어 인류는 원숭이에서 직립원인을 거쳐 진화 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럼 인간의 원조는 원숭이(?)
저녁 8시 50분 특급열차로 족자로 간다. 열차비가 Rp185,000로 우리나라 새마을호 정도가 되는 1st Class급이다. 입석은 없으며 저녁식사와 담요, 베게를 지급해주고 간식도 준다.
오늘 밤은 열차에서 해결해야 된다. 옆엔 중년 신사인데 바바리 코트를 입고 있다. 난 반바진데?
여기서 수수께기1, 인도네시아인은 반바지를 입을까요? 긴바지를 입을 까요?
9월 2일(월)
새벽에 기차에서 차(茶)와 간식을 준다. 여명의 새벽을 달려가는 열대우림은 원시 그데로고 어둠 속에 삼각 고갈모자를 쓰고 벌써 논밭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곳 농부들은 5시경에 들에 나와 일을 시작하고 10시경 끝내고 그후는 낮잠을 자고, 그리곤 논다.
더운 한낮 시간엔 길거리에도 사람이 부쩍 준다. 상점도 문을 닫고 오수를 즐긴다.
시골 어디를 가던지 모타사이클이 있어 편리하게 사용은 하고 있으나 소음과 매연이 심각할 정도 이다. 어두운 여명의 새벽에 다들 분주히 어디론가 가고 있다. 낮엔 더우니 시원한 새벽에 일찍 일하고 낮엔 쉬는 자연의 섭리에 따른다고나 할까?
예정시간보다 늦은 아침시간에 족자에 도착하여 출구로 나오는데 이곳에는 베짜라하여 자전거 앞에 앉을 수 있는 좌석을 만들어 승객을 실어나르는 자전거 택시, 즉 인력거다.
그 베짜꾼들이 서로 자기 베짜에 타라고 야단이다. 다 싫다고 하고 물리치고 역전을 나와 인근에 있는 소스르 지구에 가서 숙소를 구했다. 확실히 시골이라 그런지 방값이 싸다. 하루에 Rp17,000(2,500원 정도).
대충 짐 정리 끝내고 시내에 있는 왕궁을 가는 길에 중앙시장을 들렸다. 온갖 바팈(Batik : 밀납을 이용한 염색 법) 제품이 넘치는 걸로 봐서 확실히 바팈의 고장에 온듯하다. 족자하면 바팈의 본고장이다.
넘치는 열대과일과 먹거리가 풍부한 재래식 시장은 늘상 활력이 넘친다.
인도네시아 왕궁은 항시 왕궁앞에 넓은 광장이 있어, 그곳을 통해 왕궁에 들어 갈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왕궁의 천장은 화려한 금장으로 도색하여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스테인드 글라스, 천장에 메달린 램프등에서 옛날 술탄 하멘그 부오노家의 권세를 엿볼수 있다.
이국에서 고국에 대한 향수는 저녁식사 때 마시는 Bintang맥주한병으로 달래며 또 하루를 보낸다.
밥 한끼나, 맥주 한병 값이나 거의 같다. 더운 지방 사람들은 술은 많이 마시지 않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전부 골초 같이 보인다. 담배는 무척 자주 많이 피운다. 더운데 왠 담배?
수수께기 2, 인도네시아인은 낮에도 가죽잠바를 입는다. 입지 않는다.
9월 3일(화)
보르부드르 사원
오늘은 새벽에 보로부두르(Borobudur)를 가기로 했다. 아침 5시에 출발하기 위해선 4시 반에 일어나 짐을 챙겨 새벽 공기를 가르며 교외길을 신나게 달렸다. 서양 여자2명, 덴마크인1, 나를 포함 동양인이 3명이다.
그리고 가이드1, 운전사 1명과 총 8명이 우리 식구다.
보로부두르사원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고, 인도양을 건너 전래된 불교는 남쪽끝 이 나라에서 모국인 인도를 능가할 정도의 문화를 꽃피웠다고 한다.
야자수가 펼쳐진 게도우 분지에 세계 최대 최고의 불교유적이 솟아 있다. 정교한 벽화가 새겨진 회랑도 불교미술 최고의 질과 양을 자랑하며, 보는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사가 절로 흘러 나오게 한다. 회랑을 한 개 올라갈 때마다 카아라의 큰 입속을 빠져나가는데 순례자의 과거의 재앙을 삼킨다. 제4 회랑에서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면 갑자기 시야가 열리며, 스투파가 서 있는 넓은 원단으로 나온다. 그 모양이 봉창 모양으로 되어있다.
특히, 2500면 이상의 부조로 등장인물이 1만명이나 되고, 지금도 풀리지 않은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다.
사원에 쓰여진 安山巖(전체 5만5천 평방미터)을 어디서 구했으며, 왜 이런 거대한 건축물이 지어 졌는지는 아직도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돌아 오는 길에 먼둣사원(Candi Mendut) 에 들려다. 삼존상의 부드럽고 우아한 선이 아름다우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이라고 감탄했을 정도로 쟈바 미술의 최고 걸작품이다. 모든상이 조면암(粗面巖)으로 만들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들른곳은 쁘남바난(Prambanan)으로 향했다. 쁘남바난은 족자에서 솔로(Solo)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쁘남빠난 사원군은 우선 중앙에 우뚝 솟은 주당(主堂) 시바신전(Candi Sivi)의 거대함에 압도당해 버린다. 그 모양은 하늘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가까이 서면 원근감을 잃어버려 47m라는 높이가 2배 정도 크게 느껴지는 동남아 최대규모의 힌디사원이다.
정면에는 머라삐 화산의 수려한 모습이 다가왔고 녹음이 짙은 평야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쁘난빠난 역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며 입장료도 외국인은 $7이다.
3시에 덴사파르(Denpasar)행 NightBus를 타야 했기에 서둘러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는 24인승 딜럭스버스로 내부에 화장실도 있고 좌석간격도 넓어 무척 편안하게 여행 할 수 있다.
물론 담요와 베개도 제공해준다. 운행중 저녁 식사시간엔 휴게실에 들려 붸페식 식사도 제공한다.
하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아 Rp140,000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HighWay가 없고 2차선으로. 속도가 느리다. 화물차, 모터사이클 등이 많아 속도를 낼수가 없다.
꼬불꼬불한 도로사정도 한몫을 한다. 운전기사도 두명이 타서 교대교대 운전을 하기 때문에 18시간 운행을 해도 졸음으로 사고가 발생되진 않는다. 승무원은 차장2명을 포함해서 총4명이 탄다.
9월4일(수)
자바섬과 발리섬은 각각 떨어져 있지만 페리(Ferry)가 버스째로 싣고 해협을 건너 준다. 도하시간은 1시간정도가 소요 되었다. 발리섬에 도착 했을 때는 어두움이 서서히 걷히고 섬 풍경을 뚜렸이 볼수 있었다.
발리, 지상 최후의 낙원, 신들의 섬, 원시와 문명의 공존지 등으로 불리우며, 자바와는 또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파도가 넘실되는 해변 코코넛 나무 그늘에서, 가믈란 가락에 취해 신들의 섬을 걸어 보고 싶는 곳 그곳이 발리다. 16시간의 긴 버스여행 끝에 덴사파르에 도착해 곧바로 꾸따해변으로 향했다.
꾸따는 파도가 크게 일고 있어 서핑에는 최적의 장소지만 해수욕하기에는 적당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15km나 되는 긴 사장과 토플리스를 입은 백인여성들이 하얀 젖가슴을 들어내 놓고 선텐하고 있으며, 마사지 아주머니의 끈질긴 마시지 권유도 한몫을 한다. 꾸따는 배낭족이 머무를수 있는 Inn이 많아 저렴한 경비로 여행하는 배낭족에겐 안성맞춤이다. 나는 중심가에서 가까운 Senen Beach Inn에서 Rp30,000을 주고 숙소를 구했다.
이곳의 왠만한 숙소는 Rp로 하지 않고 US $로 한다. 그래서 가격도 비싸다.
온종일 긴 해변을 산책하면서 인도양의 해풍을 가슴으로 느끼며, 많은 생각의 꼬리를 이어갔다. 특히 석양의 꾸따는 일몰 자체가 무척이나 장관이 었다. 코코넛 나무사이로 바라보는 일몰, 그건 한폭의 그림이다.
발리맥주를 마시며 잠시 술에 취해, 가믈란에 취해 발리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9월 5일(목)
오늘은 발리의 좀더 깊숙한 산속 마을인 우붓(Ubud)에 가기로 하였다. 다행히 꾸따에서 웃붓으로 가는 셔틀 버스가 있어 이용하였는데 만만디인 인도네시아인의 성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9시에 출반 한다는 버스는 10시가 되어도 오질 않고 여행사 사무실에 찾아갔더니, 노프라븜이란다.
그래서 여행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여행을 할 수 있다. 기차를 버스를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그 긴 기다림의 인내가 없으면 여행을 할 수 없다.
오직 편리함 만을 추구한다면 집에 있는게 좋을 것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그런데 왜 돈 써가면서 왜 고생을 사서 할까?
미지의 세계에서 이방인과의 만남과 그 곳의 풍광, 정취등 그런 것이 항시 나를 낯선 곳으로 이끌어 간다.
발리는 워낙 바다(꾸따, 사누르, 누사두아)가 유명해 산은 묻혀 있지만 계단식 논과 2만여개의 전통 힌두 사원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발리가 하나의 예술이라면 발리인들은 그야말로 지상 최고의 예술인들이다. 목각으로 흑단과 티크로 조각된 신화속의 독수리 가루다를 비롯하여 여러 힌두신 들을 만날 수 있는데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 올 듯한 생동감은 보는이로 하여금 숨을 가쁘게 한다.
길거리의 크고 작은 가게에는 발리의 수공예품인 발리회화와 바틱, 목각제품 등이 전시되어 판매되고 있는데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노력이 대단한 것 같다. 천천히 걸어 다니며, 우붓의 풍광에 젖어 본다.
논두렁 길도 걸어 보고, 흰디사원 안에도 들어가보고,, 특히, 재래시장에 서는 온갖 잡동사니를 다 파는데 이곳의 특산품인 바팈제품과 목각, 은세공제품과 회화(그림)이 인기가 있었다.
이곳에서 선물을 준비하는 여행자들이 많은 탓에 주로 고객은 여행자가 주 고객인데, 가격과 제품의 질이 천자만별하여 여러곳을 둘러보고 사야 했었다.
얼마나 바가지를 많이 씌우는지 부르는 가격에 5〜60%는 깍아야 하는데 그렇게 깍아 사고도 저렴하게 산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저녁에는 힌디사원안에서 케착댄스가 있다고 하여 갔는데 일명 원숭이 춤이라고 하는 이춤은 흑백의 격자무늬 천만을 허리에 두른 남자 수십명이 횃불을 애워싸고 원을 만들어 “챠챠” 나 “쵸쵸”등의 원숭이 소리를 내면서 가믈란과 같은 복잡한 리듬을 합창하는 것이다.
케착의 원형은 전염병의 유행이나 천재(千災)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신의 계시를 듣는 의식으로 행하여 졌던 것이라고 한다.발리의 대표적인 음악은 가믈란으로 “두드리다”란 뜻으로 섬세하면서도 상당히 빠른 음절이 모여 발리 가믈란 음악을 이룬다.
발리섬의 마지막밤은 빈탕(Bintang)맥주를 마시면서 가믈란을 들으면서 보냈다.
9월6일(금)
이제 발리섬을 떠나 자카르타 방향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서서히 귀국을 준비해야 한다. 이제 남은 여정의잠은 버스에서 기차에서 비행기에서 3일을 자야한다.
아침 일찍 우붓의 근교를 3시간 가량 산책을 했다. 인도네시아는 약 300여 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각 민족마다 고유한 전통이나 문화를 가지고 있다. 발리인은 인도네시아인이지만 인도네시아인이 모두 발리인은 아니다. 또한 자바인도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인이기는 하지만 인도네시아인은 모두 자바인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벼 농사를 하는 지역에는 가믈란 음악이 있지만 지방마다 음색이 다르다. 또한, 내가 즐겨 사먹었던 사떼 아얌(닭고기 구이)도 지방에 따라 맛이 전혀 다르다.
이곳에서 버스타기도 만만치 않다. 어디에서 표를 팔지도 않고 어느방향으로 가는지 운전기사에게 물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오늘은 덴파사르로 나가야 하는데 또 일전을 치루어야 할 것 같다.
일단 바뚜블란(Batubulan)으로 가야한다고 한다. 발리인과 함께 베모를 타고 바뚜블란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끄리냉으로 와서 다시 우붕(Ubung)으로 가는 베모를 갈아 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남은 시간동안 덴파사르를 둘러보고 3시에 출발하는 솔로(Solo)행 밤버스(NightBus)를 타야한다. 이제 발리(Bali)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자바(Java)섬으로 돌아가야 한다.
발리섬은 일본인들이 특히 많이 찾는다. 직항이 있어 공항에서 꾸따해변이나 우붓등으로 바로 와서 1주일 정도 즐기다가 곧장 귀국한다.나도 다시 신들의 고향인 발리섬을 떠나 페리를 타고 도선을 할 쯤엔 석양이다. 오늘은 밤새 버스 안에서 새우잠을 자야 할 것 같다.
9월 7일(토)
새벽녘에 솔로(Solo)에 도착하였다. 아직도 어두운 새벽인데 다들 분주히 어디론가 열심히 간다. 어디를 가는지 따라가 보니 새벽시장은 벌써 열려 있었다. 열대과일부터 우리네 시장과 같이 마늘, 배추, 오이, 닭도 팔고 쇠고기도, 메기도 팔고 무척 흥청거렸다. 나도 그들과 같이 시장을 나온 사람 같이 복잡한 시장통 골목을 돌아다녔다.
평소 삶에 지쳤을 때, 삶의 활력을 느낄려면 재래시장을 가보면 생동감이 넘친다. 모진 삶의 끈질긴 면모를 엿볼 수 있고 면면이 이어가는 생명줄을 느낄수 있다. 장터는 먹거리 부터 온갖 잡동사니가 다 있고 볼거리가 풍부하다. 무겁게 시장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총총히 집으로 향하고 때론 베자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시장에는 늘 서민들의 진솔한 삶이 배어 있어 흥미롭다.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낮 동안 솔로 시내를 구경하고 또 밤이면 자카르타행 기차를 타야 한다.
구경도 해야 하고 저녁에는 시간 죽이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곳 사람들은 밤엔 일찍 잔다. 그래서 어디 가서 적당히 시간을 보낼 마땅한 곳이 없다. 어쩌면 역에서 독서나 하던지.....
우선 스리웨다리공원으로 갔다. 천천히 걸으면서 솔로의 한낮 열기를 한몸에 받아 등에는 땀이 흥건히 배어 흐른다.
공원에는 구식 놀이기구인 회전목마, 어린이 대공원에 가면 있음직한 다람쥐통 등이 있고, 유원지 같은 분위를 풍겼다. 그날은 토요일로서 고적대 브라스밴드의 페스티발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있노라면 시간여행을 떠나 70년대초 초등학교 운동회날 고적대를 보는 듯 했다. 이직은 새련되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극성 맞은 학부님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쳤지만, 나는 왠지 촌스럽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다음엔 까수난난(Kraton Kasunanan) 왕궁은 걸어서 갔다. 솔로의 중심적인 위체에 남북으로 두개의 일룬알룬(광장)을 가진 전형적인 중부 자바의 왕궁형식으로 지어졌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넓은 광장에서 부터 모자를 벗고 신발도 벗고 맨발로 입장을 해야 한다. 광장 옆에는 박물관이 있고 가믈란 악기, 와양인형, 도검, 왕실 가구나 마차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점심식사는 나시고랭 스페살로 했는데 “나시”는 밥, “고랭”은 볶다. 뜻이니 우리식 볶음밥이다. 스페샬은 추가로 계란 프라이를 얻어 주는게 고작이고, 간단한 스프(국)을 주는데 그게 전부다.
그걸 먹어도 배가 차지 않아 미(국수, 라면)을 추가로 먹어야 겨우 배가 찬다. 그들은 식사량이 적은 탓일까? 반찬이란게 거의 없고 고작해야 셀러드 한접시로 식사준비도 무척 간단하다. 그래서 먹거리가 마땅치 않다.
어두움이 도시에 장막을 드리울 때, 난 또 긴 기다림을 준비해야 했다. 열차 출발시간은 밤 9시 정각, 하지만 적당히 갈곳이 없다. 부근에 나가니 마치 사떼 아얌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길레 그곳에 가서 사데 아얌을 굽는 것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숯불에다 가는 대나무 꼬챙이에 닭살코기를 꽤어 양념을 칠한 다음 그것을 숯불에 굽는다. 그러면서 불 조절은 야자잎으로 만든 부채로 부치면 숯불에 알맞게 익는다.
그러면 이것을 메콤한 소스에 찍어 먹으면 무척 맛이 있다. 지역에 따라 소스 맛이 다른데 특히 자바의 사떼 아얌 맛이 좋다. 나는 빈탕맥주 안주로 종종 즐겨 먹었다.
코코넛 나무 아래서 9시가 되길 기다린다. 여행은 기다림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3시간여의 기다림 끝에 자카르타행 열차를 탓다. 냉방이 너무 강해 쌀쌀함 마져 느껴진다. 담요를 덮고 잠을 청해본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온 빈탕맥주 한병을 마시고 나긋한 마음으로 마지막 인도네시아의 밤을 보낸다. 이틀째 야간이동이다.
9월 8일(일요일)
밤을 달려 새벽녘에 잠을 깨운다. 자카르타 도착하기 전에 따듯한 홍차와 모닝빵을 준다. 여명속으로 내가 잠시 떠났던 자카르타로 재입성 한 것이다. 여행자의 등대 역할을 하는 모나스의 높은 탑 밑으로는 지난주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잔득 모여 저마다 즐겁게 새벽시간을 보낸다.
잠시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아직 들려 보지 못한 안쫄드림랜드로 가기로 했다. 캄비아역에서 125번 시내 버스를 타면 그곳을 가는데 이곳의 버스는 난폭하기로 유명하다. 완전히 정차하기 전에 얼른 올라야하고 정차 할 때도 얼른 내려야 한다.
이곳 사람들은 곡예를 좋아 하는 듯 전철도 출입문을 아예 제거 해 버렸다. 전부 문앞에서 기둥을 잡고 시원한 바람을 쐬는 걸 좋아한다. 위함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들은 그런 곡예를 즐긴다. 버스도 마찬가지다. 앞뒤에 남자 차장이 각각 있어 요금도 받고 차를 세우고 출발신호도 한다. 버스비는 Rp1,300로 시민의 발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의 버스에는 늘 복잡하기 때문에 소매치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배낭안내서 마다 버스를 이용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뭐(?) 무서워 된장 담지 않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 랜드는 꼬다지역을 지나 안쫄항 옆에 있는데 공원내에 골프장이 있고 요트장, 풀장등과 위락시설도 있었다.
우선 북쪽에 있는 바닷가로 갔는데 작은 해수욕장은 마치 우리내 풀장 같이 만들어 이용하고 있었다.
탐방객을 위한 유람선도 운항하는데 각자 개인이 운행하고 있다. 공원내 화장실도 유료로 이용료가 Rp1,000다. 공원입장료를 받고 화장실 사용료를 별도로 징수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전히 돗자리세도 있었고 취사를 하는 등 무질서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해안선을 도는 유람선이 있어 배를 탓는데 얼마냐고 하니 “쓰리싸우젼”이란 한다.
비싸지 않다고 생각하고 배에 오르니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간다. 바람이 불면 돛대를 사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노를 젓는다.
이곳은 공원면적보담 고급호텔과 방가로 등 소위 상류층을 위한 위락 및 숙박시설이 더 많다. 바다에 나가서 되돌아 보니 거의가 바다와 연접한 곳엔 고급콘도 등의 시설되어 있고 별도 수상시설을 사용하고 있었다. 더구나 중앙부엔 골프장이 자리 잡고 있어 일반시민이 이용하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배는 30분정도 바다를 돌곤 돌아가는데 우리 배는 자꾸 멀리 바다로 약30분을 나왔다가 이제 돌아 간단다. 때론 너무 힘겹게 노를 젖는다 싶어 미안할 정도다.
그런데 돌아 올 때 까지 요금을 받을 생각을 않는다. 다시 출발지로 돌아와 얼마냐고 했더니 “스리싸우젼”. 싸다 싶어 Rp3,000을 주니 다시 “스리싸우전”한다. 글로 서 달라고 했더니 Rp300,000을 쓴다.
뭐라고? 이게 어떻게 “스리싸우전”이냐고 했더니 그래도 “스리싸우전”한다.
더 이상 말씨름을 해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폴리스”하고 같이 폴리스를 찾아 가자고 일단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곳은 전부 한패고 나를 도와 줄 사람은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출구쪽으로 걸어 나오는데 같이 배에 탓던 인도네시아 아가씨들이 걸어가고 있길레 너도 Rp300,000줬냐고 물었는데 그놈이 뭐라고 중얼거리길레 “셋 마우스”라고 했는데도 또 뭐라고 중얼거린다. 그 말은 나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기도 그렇게 줬다고 한다. “나뿐년”이라고 쏘아 붙여주고 다시 공원안에 폴리스를 찾으로 나섯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컷는지 기가 질렸는지 이야기 좀 하잔다. 무시하고 계속 “고! 폴리스“ 하며 더운 날 땡볕을 걸어 가는데 Rp100,000한다. ”노! 베리 익스펜시브“ ”고! 폴리스“하며 가는데 그곳에는 특급호텔이 눈에 들어 왔다. 일단 프론트 데스크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현지인들보다 백배이상의 가격을 요구해 부당하다. 경찰을 불러 달라고 했더니 인도네시말로 자기들 끼리 뭐라고 쭝얼거리다.
그러더니 Rp50,000만 내라고 한다. “노! 노! 베리 익스펜시브“했더니 그럼 나보고 경찰에 신고하란다.
그때 다른 인도네시아인이 그 정도 돈으로 경찰이 오지도 않으니 Rp50,000을 주라고 한다. 계산해보니 7,000원이 조금 넘고, 그도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위해 두배의 거리를 운항한 것이다.
더구나 오늘은 귀국하는 날, 마지막으로 선물도 사야 되고 시간도 넉넉하지 않는데 이렇게 시간 죽이기를 할 수 없지 않는가? 할 수 없이 Rp50,000주고 “나뿐 놈” 하고 쏘아 붙여주고 호텔문을 나서 125번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 왔다.
특히 저개발국가를 방문 할 때는 언제 이런 일을 당할지 모르다. 특히 바자이 등 요금 흥정을 하지 않고 탓다가는 십중팔구는 이런 경험을 하게된다.
또, 파리의 리도쇼 공연에도 바가지 쓴 사연들이 많다. 그땐 몇십만원도 넘는다. 맥주 몇병 마시고 무희들 춤구경 잠시하고 사.오십만원 준 사람이 허다하다.
늘 조심하고 유흥업소 출입은 현지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던지 아님 가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방심이 좋았던 여행기분을 망쳤다. 하지만 나쁜 기억은 빨리 잊어야 한다.
중심가 중앙정부에서 운영하는 백화점에 가서 그 유명한 바팈의 진품을 하나 사고 민예품을 둘러 보았다.
싼 인건비 탓에 그런 수공예품 제작도 가능할 것이다.
흑단으로 만든 예쁜 조각품도 많았지만 나에겐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아서 사지 않았다. 단지 옛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석유램프를 하나 샀다. 우리는 벌써 사용조차 하지 않는 석유곤로, 수동타자기 등을 아직도 잘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고도문명의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리함과 능률성만을 강조 하다 보니 얻는 것 보담 잃는 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특히 인간성 상실이란 심각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지난 20년전 시간여행을 하면서 잠시나마 어릴 적 시골에 살던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이제 공식 일정은 마쳤다. 내가 처음 도착했던 잘란 작사거리로 가서 마지막 식사를 하였다.
나시고랭 스페샬 엔드 빈탕 맥주 한병! 낮술을 마신 탓일까? 그간 여정이 영화의 필름처럼 돌아간다.
특별히 가이드 책도 변변치 않아 현지에서 정보수집하면서 여행하는라 힘이 들었다. 얼마나 걸었던지 첫날 새끼 발가락이 부어 다음날 절뚝거리며 걷다가 슬리퍼를 사서 신고 다닐 만큼 하루 걷는 거리가 만만치 않다. 해외여행 그건 화려한 것 만은 절대 아니다. 10여kg 되는 배낭을 메고 하루종일 걷고 밤 열차를 타고 밤 버스를 타고 늘 낯선 도시에서 새로 적음한다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미지의 도시에서, 미지의 장소에서 새로운 만남은 나로 하여금 항시 긴장하게 한다. 그리고 그 만남은 항시 새로운 것이다.
이제 캄비르역으로 걸어가서 수가르노 핫타 자카르타 공항으로 향해야 한다. 언제 다시 올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 자바섬과 발리섬 여행은 고생은 많았지만 긴 장거리 여행을 소화 한 것은 의미 있는일이다.
여전히 자카르타 시내는 바자이의 요란한 소음과 매연으로 도시전체가 매케한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그들의 살아가는 진솔한 아름다움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처럼 화려하고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단지 행복은 스스로 느껴 만족하고 즐거우면 행복한 것 아닐까?
그건 절대기준이 있는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느끼는 척도에 있는 것이다.
한끼의 식사만 있어도 행복을 느끼는 것 같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질려고 무리하지 말고 손에 쥔 행복을 가지고 또, 행복을 찾으려 헤메지나 말았으면 한다.
내가 도착했던 수가르노 핫따 자카르타 공항이다. 그간 8일의 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짧았지만 혼자서 미지의 세계 인도네시아 배낭여행은 그래서 힘들었지만 즐거운 여행이었다.
9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국수속을 마치고 일찍 출국하여 대합실로 향했다. 출국세가 Rp100,000다.
몇시간 전에 도착한 KAL628편이 분주히 이륙준비를 하고 있다. 내일 새벽 6시 20분 인천에 도착하여 바로 출근을 해야 한다. 아낌없이 알뜰히 시간을 쓰고자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9시 자카르타 야경을 뒤로 하고 이륙 하였다. 그리고 인천으로 향한다. 그간 먹고 싶었던 하이트 맥주 한캔을 주문해 단숨에 들이키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이제 본연의 나로 돌아기기 위해 그간 덥수룩히 자란 수염을 잘라야 하겠다. 그리고 반바지도 긴 바지로 갈아 입고 본연의 나로 돌아 간다.
일상의 나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자유인에서 직장인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간 나는 다시 자유인이 되어 떠날 것이다. 미지의 세계로 떠날 것이다.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