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늦게까지 자려고 했는데, 아침에 지나가 와서 부시럭거리는 바람에 잠이 깼습니다. 그래도 의지적으로 더 누워있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미미누나의 전화가 와서 할 수 없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부시시한 얼굴로 밑에 내려가서 담배를 태우는데, 신발장에 있던 신발상자들이 나와서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마리에따가 청소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다가 아주머니께서 간밤에 나이키 신발을 도둑맞았다고 하셨습니다.
아! 이것때문에 지나가 아침부터 부시럭거렸구나!!! 신발도 신발이지만, 팀형과 지나의 얼굴이 궁금해졌습니다. 괜히 이것때문에 평정심을 잃고 울고 있지는 않을까, 괜히 지나가는 사람한테 시비걸다 두드려 맞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시장표 운동화는 훔쳐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것도 이 나라 돈으로는 비싼건데, 실은 팀형꺼랑 가격이 비슷한 건데 왜 가져가지 않은거지?(존심 상하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둘의 얼굴을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마음보다는 웃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 하지만 둘은 도둑맞은 사실에 분개하지 않고 아주 침착하게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빠, 이따가 그린힐스 가요" "그럴까?"
역시나 오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둘은 집에 없었고,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신발사러 그린힐스 갔다가 메가몰에 들렸다 온다고 했습니다. 가족같은 분위기에서(아줌마, 아저씨, 나) 맛있게 저녁을 먹고 혼자 쓸쓸히 담배를 피고, 오늘도 수많은 적군 병사를 베고 있던 순간에, 아주 환한 얼굴을 한 지나가 무엇인가 바리바리 싸들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더니 손목을 내밀며 시계자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아주 좋은 평가를 내리기 위해 한참 들여다 보고(한 10초 정도?)"빨간색, 예쁘다. 26일이구나(날짜가 찍히는 빨간 스와치 시계였습니다)"라는 제 입에서 나온 것 치곤 객관적이고도 대단한 평가를 해주었는데, 지나의 반응은 무언가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팀형에게 달려 갔습니다. '아이고, 조금 더 놀란 표정으로 많이 얘기할 걸!'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 그런 데에 별 관심 없기 때문에 그 정도 칭찬이면 아주 훌륭한 칭찬입니다.
하여튼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지나가 사온 다른 물건들을 관심있게 보고 좋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사실 괜찮았습니다. E-Spirit 후드식 가디건 한 벌, 다수의 DVD 타이틀, 나중에는 시계 케이스까지 칭찬해줬습니다. 참고로 팀형은 도둑맞은 범고래 신발과 똑같은 거 다시 구입했습니다.
지금 두 사람의 표정은 아침과 비교해서 많이 밝아져 있습니다. 도둑맞은 것보다 새로운 물건에 빠져 있는 듯 합니다. 가끔 제가 지나에게 '나이키' 말만 꺼내면 얼굴이 시무룩해지긴 하지만, 한 5초 지나면 또 딴 얘기하면서 다시 환한 웃음을 짓습니다. 상꺼풀 없어지면서...
아마도 두 사람은 오늘은 기쁜 마음으로 잠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꿈에(뭔가 아쉬우면 꿈에서 해결하는 제 특성상 - 지난 번에는 메가 가서 작은 가스통 두 개 사고 그날 밤 큰 거 한 통 사는 꿈도 꿨습니다) 새 신발을 신은 팀형과 새 시계를 찬 지나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