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방제문"
[문조부인 동래정씨 작: 삼년집상 대상시 전석 제문초 일장]
(文藻夫人東萊鄭氏 作:三年執喪 大祥時 奠夕 祭文抄 逸狀)
『돌아가신 어머님 대상시 저녁제사 영전에 드리는 제문』
유세차 갑인 팔월 경신삭 이십육일 을유는 현비 유인 경주김씨 종상지 일야라. 전석 갑신에 불초고 안동 권실이는 삼년의 세월이 흘러가도록 일찍이 일언고결을 못하였음을 모녀간 신뢰인정에
부제함을 어찌 감내 하리요. 참괴지심을 견디라 견딜 수 없어 우람척촉에 호천망극이라. 지애의 원정이 무한의 슬픔으로 감히 두어줄 글과 한잔 술로 연연하신 슬픔으로 소유 적막지하에 드리나니
슬프다 어마임요 권실이 왔소이다.
불러봐도 답이없고 물어봐도 말씀없네 자애하신 성품으로 반기실줄 모르시니 유명이 현수하고
생사가 달았슨들 평일 미망지정이 일분이나마 계시오면 이렇다시 무심하리
오호통제라.
소녀 아무리 소견이 부족하고 기억이 몽롱하나 어마생전 사랑하신 성품과 인후하신 심덕을 만분여일이 나마 일언치 않고 마오릿까, 우리동기 삼남일녀 부생모육 하올적에 남다르신 자애시로 우
로지택 나리시어 장중에 보옥같이 은사민사 길러내어 남녀혼가 불실시에 차레로 성혼하여 인간요체 하압시니 적비심력 오작하리요, 남에게 치사없이 목연임휼 균흡하니 가내친족 화목하고 대인
수접 하는법과 원근지정 인의까지 은원없이 여일하니 뉘아니 찬양하며 뉘아니 흠모하리 부덕을 겸전하고 복록이 구비타고 사람마다 칭송하며 세평이 자자하니 미거한 나이어린 생각에도 외인의
경앙하는 정세에 얼마나 기뻐 하였으리
오호라.
인간세사에 어떤사람 남자되어 부모설하 자라나서 성취를 하온후에 하나같은 양친지하 종신토록 기리면서 조선향화 받으시고 칭가유무 형세대로 감지공친 극진하여 생아구로 하신은공 만분여일
이나마 지성껏 갚는것이 인자직분 당연컨만 어여쁠사 이내몸은 어찌타 여자되여 부모혈육 같이타서 자식은 일반인데 남녀가 판이하여 자비하신 은덕으로 영화로 자양타가 겨우철을 안연후에 적
인종부 출가하여 생친부모 저버리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골육동기 멀리하고 남의동기 우애하니 여자유행 원부모는 나를두고 일음인가 가소롭고 애닲도다 승후문안 자로하야 원원왕래 할때마다 사
덕부행 봉제사와 대인수접 하는법을 어마교훈 극진하니 태산같이 의지하야 온향임천에 화기만복이나 바랬드니 호사다마 무삼일로 일조일석 몽매간에 영결종천이 왠일인고 천지도 무심하고 귀신
도 야속하다 순숙하신 우리어마 백세향수 못하시고 칠십칠세를 일기로 승피운향 하압시니 인층선가 이아닌가 황천길이 멀다해도 몇만리나 멀었관대 한번가면 못오신가 광대한 천지간에 우리어마
가신후로 소식조차 그리없네 자애하신 그성품이 어이그리 무심한고 그믐에 기운달은 망일에 돌아오고 추산에 이운풀은 명춘에 피건마는 단아하신 어마형용 다시한번 보고지고 생전에 적덕하신
여음으로 명부에서 서로만나 진세고락 만만층사 하온후에 옥색화초 꽃밭속에 극락세계 가시리니 명명하신 아바혼령 흔연영접 반겨만나 영원 무궁토록 금슬우지 하시리니 척강사로 자손복록 나리
시와 행복을 누려 주시기를 일심축원 바라오며 멀고먼 황천길에 창황망조 다못 아뢰오니 대강이만 고결하옵니다. 깊이 흠향우 하압소서
오호통제 상 향.
문조부인 동래정씨 (文藻夫人 東萊鄭氏 ) 유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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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記]◈오모 문조부인 동래정씨추모문<吾母文藻夫人東萊鄭氏追慕文>◈
▣ 자모 추모 기억담(慈母 追慕 記憶談) ▣
나의 어머님은 하음 종부(河陰 宗婦)의 소임으로 우리 집에 시집 오서셔 평생을 접빈객 봉제사에 혼신을 다바쳐 희생하신 나의 어머님 ! 어머님 친정은 명문세가 대문호 동래정씨 집성촌 우망 별실 (憂忘 別谷)이다, 동래정씨(東萊鄭氏) 장릉참봉(莊陵參奉) 정우현(鄭佑鉉) 문벌가 넷쩨 따님으로 문한가에서 자라나시어 현모양처 엄모자애 하셨고 사돈지 제문 내방가사 등 문장 문필이 출중하셨다.』
▣ 다정다감 하셨던 어머님 회억담 ▣
저의 어머님 !
다정하시면서도 때로는 준엄하셨던 저의 어머님이 시다.
저의 어릴적에 어머님을 볼적시면 부엌에서 조석지절로 사랑체에 래방손님 접빈에 호분하신 중에도 불구하시고 잠시간 여유를 가질 틈도 없이 항시 바쁘신 가운데도 이웃간 남여간의 혼사에 따른 혼서지 상장문과 사돈지 혼함 물목 예단 납폐 등 시집 장가 치혼준비를 총망라하셨다, 내일 신행을 떠난다며 여유 시간도 없이 부지불식 중에 사돈지를 써달라는 주문이 급박함에도 추호의 귀찮은 기색 없이 부엌에서 미소로서 대면하며 정혼가 상대 내막 정황을 대략 물어 보시고 사세 정황 유무를 들으신후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친신 다음 곧 바로 안방으로 들어오서셔 물 뭍은 손이 마를 사이도 없이 수건에 닦으시고, 받은 종이를 곱게 마르시어 벼루를 열고 먹을 곱게 갈아 정성껏 지필묵을 챙겨 잡으시고 방바닥에 엎드려 초서체로 일필휘지 능숙하게 쓰시던 그 때의 어머님 그 모습이 어제 본듯 지금도 눈에 선 하나이다.
훌륭 하셨던 우리 어머님 !
어느 날 하루도 한가하신 날이 없이 성품이 대단하셨던 시부님의 엄령하에 수시로 사랑방 호출에 발이 땅에 붙을 사이도 없이 동동걸음으로 할아버지께 지극지심으로 시중들어 효를 다하신 우리 어머님이셨다. 잠시도 쉴틈이 없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안에 뉘 없느냐" 호출이 떨어지는 할아버지의 호명 앞에 잠시도 여가를 가질 결열이 없이 이어지는 접빈객 봉제사에 호분 하셨던 저의 어머님이 셨다. 어머님의 효성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치 효부로 칭찬이 자자하셨다.
전기와 같이 저의 어머님 친정은 동래정씨 대문호의 집성촌 우망 별실 장릉참봉 쌍봉댁 따님으로 그 어머니 역시 인근 반촌인 왕태골 대문호로 소문 난 곳 개성고씨 집성촌이 친정이 신데, 저의 외할머니 역시도 양서(한문,언문)에 예문이 출중하셨다고 한다.
그 어머니의 훈육으로 자라신 저의 어머님은 예문 범절이 출중하여 인근에서 소문이 자자하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길흉대사 관혼상제를 막론하여 반가의 예절과 문장 문필이 훌륭하셨던 어머님의 기억들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당시는 무슨 댓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반가의 예절을 지켜 행신지도에 순응하여 따르는 행위로 여겼던 것이다. 그 바쁘신 중에도 수시로 연하가걸에 이어지는 관혼상제에 따른 제반 예문에 밝으셨고 특히 혼사 때 사돈지 상장문(일명:사돈지) 및 특히 삼년상 (소대상) 상내에 제문을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애절한 음률로 글쓰시는 재간에 주위로 부터 많은 칭송을 받아 오신 어머님이 시다.
소자 나이 산수에 이르러서도 어제같이 어릴적 생각에 젖어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애절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머니께 받아 온 사랑이 유독하였기 때문이다.
◈ 어머님 저의 어머님 !
어머님이 남기신 유고와 유묵을 들쳐 보면서 지금까지도 불효한 죄스러움이 뼈속까지 파고드는 이 아픈 마음에 지나간 회한에 젖어 눈물을 글성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마는 아직까지도 때때로 어머님이 생각날 때 마다 당신이 남기신 필적을 재조명해 보면서, 어머님 손길의 흔적들에 정감을 느끼면서 낙동강 선유가 완담 화전가(浣潭 花煎歌)등 사돈지초고(査頓紙草藁)에 출가 여식의 부족하고 미비한 점을 해량하시고 부족한 혼수에 대한 죄책감 등을 구구절절 새로 맺은 사돈에게 소상히 발명하면서 시집살이 화평하기를 조심조심 이해를 바라면서 시집보내는 어미된 심정을 눈물겹게 엮어 쓰신 화해같은 사연들을 읽어보면은 감탄이 절로나오는 문장문필이 셨다.
남기신 유고중 우선하여 위 제문초고는 돌아가신 어머님 삼년 탈상을 기하여 출가여가 저녁 제사 기전을 드리는 내용의 제문으로 어머님의 필적을 재조명해 보고저 이에 한 편씩 현대문 표기법으로 변환하여 옮겨 보고저 하는 것이다.
저 지난 여름에 시골에 가게됨을 기회로 어머님의 못챙긴 유품들이 생각이 들어 조부님과 선고 계실때 옛살던 고향집은 헐려 빈집터로 남아 있으나 사람이 살지 않아 습기를 먹음은 지반에 무거운 기와 중력으로 기둥이 돌아가고 도괴 위험에 처하여 정부지원을 받아 철거하여 멸실조치 되었으나, 이로서 헐리게 될때 바깟 별체에 옮겨진 살림살이에 유품들이 남아 있겠지 하여 뒤져 보았으나 옛 보던 두루마리며 친정에서 어머님 자라실 때 청년 딸래들 간에 봄철 낙동강 선유회 및 완담사(浣潭祠) 화전놀이 시에 지으신 화전가와 사돈지 초고 및 내방가사 등이 많았음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근간에 이르러 어머님의 손때 묻은 그릇들에 옛 유고들을 찾아 보았드니 이미 비워놓고 방치된 빈집임을 알고서 외인 침입이 현저하여 어머님이 쓰시던 장농 손수 쓰시던 가구들이 흙 먼지 속에 다들 파손되어 있고 바라던 유고들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나마 남아 있는 조각들은 비가새어 흙 먼지 속에 파묻쳐 알아볼 수 조차 없이 산실되어 버렸음에 또 한 번 실망과 죄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돌아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 아래 어머님이 손수쓰신 유묵은 어머님 생전에 솔권하여 이사할 때 대구로 가져온 친필 유고로 몇 권이 남아 있어 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 어머님 묘소 전경 ◈ 憂浦處士 平山 申相沃之墓 , 配 文藻夫人 東萊鄭氏 附左 ◈
不肖 孤 哀子 石山 申恒烈 泣血 謹識
첫댓글 좋은 내방가사 한편이 심금을 울립니다. 공유해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