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에서 해방이되여 사회가 어수선하던 1947년 10월 어느날 경기도 군포역 .... 그때의 군포역이라는것은 보잘것없는 작은역 이였지요. 그곳에서 저는 태어났습니다. 저의 집안은 원래 서울 종로3가 본토박이 였는데 일제시대때 에 아버님께서 철도청에 근무를 하신 관계로 군포에서 제가 태어난것이지요. 그곳에서 6.25 나기 전까지 살았으니까 한 2년 6개월 정도를 살았던것같군요. 아주 갖난 아이 일때 역 관사에서 태어나 아주 큰 기차 바퀴를 보면서 자랐구요. 홍역까지 치룬다음 6.25 사변이 터져 피난을 반월을 거쳐 조그만 배를 타고 어머니 고향인 충청도 당진으로 갔습니다. 그때 어른들은 누구나 할것없이 고생들을 많이 하셨지요. 심지어 밥 한끼를 위해서 장작으로 조개탄을 피우고 그 불에 밥 과 찌게를 끓여 식구들을 먹여 살렸으니 오죽 했겠습니까 ? 피난을 간 당진에서 1.4 후퇴가 지나고 식구들이 서울 로 이사를 가 게 되였는데 제 위로는 형님이 한분 계셨고 또 제 아래에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적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되어 우선 부모님들은 저를 나중에 데려가기로 하고 네 식구만 서울로 가기로 결정을 하신 모양 이였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저는 무슨 예감을 했는지 헤어지기 전날 어머니 옷고름을 제 팔에 꽁꽁 동여메고 나를 두고 가지 말라고 칭얼댔다고 어머니는 기억 하셨지요. ... 하여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구들은 한명도 없고 저 혼자만 방에 있는것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놀라고, 슬퍼서 울었는지 몇일 밤낮을 울었다고 그때 시골에계시던 고모님 식구들이 늘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그런지 어린시절 유독히 말이 없고 , 아니면 말을 잃어 버렸는지 저는 말없는 아이, 또는 우는 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7살까지 혼자 지내야 했습니다. 그때 서산에 해가 붉게 질때면 남산이라는 동네 동산을 보고 한참씩 울었던것을 지금도 기억한답니다. 7살때 아버님 이 데리러 오셔서 하루 왠 종일걸려 버스 와 기차를 갈아타고 천안으로 해서 지금 영등포에 집으로 왔습니다. 식구들 을 만난다음에 또 버리고 도망 갈까봐 집안 청소를 혼자서 " 그만해라 " 고 할때까지 열심히 했다고 그러시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어린시절을 그렇게 놀라고 두렵게 보내서 인지 말을 못하는 장애가 왔지요..ㅡ 말을 하긴하는데 심하게 더듬는 것이였어요. 거의 병적으로 말 첫마디가 안 나왔지요. 그것 때문에 병원에도 다니고 여러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성격이 소극적이 되였으며 앞에 나서지 못하고..수줍어하고 .. 말 수가 없는 어린아이로 자랄수밖에 없었습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 아니면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는 그런 아이로 , 고집은 세지만 수줍어서 남들앞에 나서는것을 극히 꺼리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을 그곳 영등포에서 보냈는데 그때는 전쟁 후라 아이들 놀이도 전쟁 놀이가 대부분이였죠. 수줍움을 타고 내성적이였지만 유일하게 잘 하는것은 칼 싸움 이나 활쏘기. 등 전쟁놀이였습니다. 그 당시 아버님은 농기계 만드는 공장에 근무하셨는데 그 회사가 잘되는 바람에 높은 자리에 오르셔서 그때 다른집 들에 비해 집안이 넉넉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지금 대방동으로 옮겼지요 ,그때 당시에는 굉장히 큰 집을 지어서 이사를 갔습니다. 빨간 기와 지붕과 빨간 벽돌로 지은집이라 (그때 대방동에서는 우리집 밖에 없었음) 빨간집 아들이라고 불렸을 정도 였으니까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들어가야 하는데 문제는 차 멀미를 심하게 해서 차를 거의 못탔지요. 원래는 그때 당시에 용산 중학교나 서울 중학교를 가려고 했으나 그렇게 못하고 바로 동네에 있는 성남 중학교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더듬는 버릇은 여전했으므로 학교 수업을 받는것도 지장이 많았습니다. 오로지 제가 잘 할수있는것은 동네에서 배운 칼 싸움이였지요. 칼 싸움은 일단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작대기로 찌르거나 내려치면 되였으니까요. 그때는 그런 행동 만이 저를 대변해주는 유일한 길 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잘하는것은 아버님 등을 두드려 드리는 것이였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안마 행위인데 아버님이 저를 부르시면 "그만 두어라 "고 하실때까지 죽어라고 무릎꿇고 앉아 등 이며 허리며 온 몸을 두드리고 주므르고 하는것을 몇 시간이고 했지요. 심지어 어떨때는 학교도 지각해가며 안마를 해드렸지요. 위에 형도 있고 동생도 있었지만 유독 저 만을 부르신것은 "그만 해라 " 고 할때까지 무식하게 말을 잘 듣는 놈은 저 밖에 없었기 때문 이였지요. 하여튼 이 안마 행위는 제가 군대를 가서야 끝이납니다. 물론 군대 갔다온 후에도 결혼할때 까지 쭉 계속되였지만 , ...어떨때는 짜증도 나고 또 힘이들어 요령을 부려 보려했지만 그래도 역시 " 그만해라 " 할때까지 제 안마는 계속되였습니다. 지금도 그래서 그런지 안마를 해드려야 할분들이 계시면 해드리는데 아주 잘한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 저의 안마를 받아보고 싶으신분들은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만하세요 " 라고 말 할때까지 해드리겠습니다. 대방동에있는 성남 중학교는 김석원 장군이 설립한 학교로 주로 사관학교로 많은 학생들을 보내는 학교였는데 저는 그 학교로 가자 마자 검도부로 등록을 했습니다. (사진은 대방동 성남중학교 입니다) 왜냐 하면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안시킬것 같고 유일하게 제가 잘하는 나무 칼로 싸움만 하면 되였으니까요. 중학교 1 학년부터 검도부에 들어간 저는 실력을 인정받아 정 선수로 발탁이 되였지요. 그때 전국 체육대회라는 것이 생겨서 검도 도 중요 종목에 들어가는 바람에 학교에서 정책적으로 육성하는 운동 과목이였지요. 굉장히 강도 높게 훈련을 받았는데 합숙 훈련은 물론 어떨때는 하루종일 운동만 할때가 있었지요. 기합도 무척 세여서 죽도로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사람을 때리는지 아마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않되어서 사람들의 감정이 메말라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중학교 2학년 부터 전국대회를 나가 우승을 휩쓸었습니다. 검도는 단체전 형식이지만 한사람씩 대결을 해서 이긴 수대로 계산해 승부를 내므로 결국은 각자 개인의 능력으로 승부가 나는 그런 운동입니다. 그래서 시합 전에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그런 운동입니다. 운동을 고등학교 3학년까지 쭉하고 우승도 많이하여 공도 학교에 많이 세웠지만 저 한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후 검도를 그만 두었는데 철 들고 보니 그 운동 자체가 저 한테는 잘 맞지 않는다는것을 알았기 때문이였습니다. 저한테 어울리는것은 오로지, 한가지.. 제가 싫어하는 말을 할 필요가없고 (말 더듬은 계속 되였습니다.) 오직 기합 소리만 지르면 된다는것이였지요. "야~~~ 머리 통 야 ~~~ 허리통" 이렇게 미친듯이 때리고, 그리고 이기면 박수받고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무리 상대방을 때려도 내가 맞으면 아프다는거였습니다. 열대를 때리면 무엇합니까 ? 한대를 맞으면 내가 아픈데... 그리고 상대방을 속여야 내가 살아나는 이 운동의 방식이 저를 실망 시켰습니다. 어느날 그것을 깨달았는데 .. 바보같이 10년 넘게 이 짖을 했다는것에 저는 화가 났습니다. 차라리 이 세월을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안마를 좀더 체계있게 배울걸 하고 말입니다.
하여튼 저는 고등학교3학년까지 검도를 하고 대학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고민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배운거라고는 사람 때리는 기술 (원래 "도" 라고 부르는 운동은 거의 똑같음) 밖에는 없었으니까요. 사실은 그때 어느 유명 대학에서 특기생으로 전원 받아주기로 했다가 무산되는 바람에 중학교 1 학년부터 고 3 때까지 정선수로 활동한 선수 전원이 갈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학교 성적표를 보니, 그래도 중학교 때는 전교에서 두 자리숫자에 성적이라 보기좋았는데 고등학교때성적을 보니 더욱 더 열심히 사람 때리는 기술을 연마한 까닭에 성적이 그만 세 자리 숫자로 바뀌어 있는 것이였어요. 이 성적으로는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었지요. 그때 만약에 안마 하는 전문 대학이 있었으면 그리로 당장 갔겠지만 그런곳이 없었구요. 그래서 한 과목 한 과목 따져보니 한심 하기가 그지 없었는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90점 을 넘는 점수가 음악 점수였습니다. 그때 성남 학교 브라스 밴드가 유명 했는데 김종석 선생님 이라고 실력이 괜찮으신 분이 계셨는데, 저를 보고 "어이~ 자네는 검도 그만하고 밴드부로 와!"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사람 팔자는 정해져 있다는데 그때 밴드부에 있던 친구들이 나중에 제가 한창 히트를 치고 있을때 저를 보고 많이들 놀랬지요. 그도 그럴것이 음악을 한 자기들과 다르게 검도를 한 제가 작곡을 하기 때문 이였지요. 하여튼 몇일을 고민 끝에 서라벌 예술대학 (그때는 초급대학 이였음)에 원서를 넣고 노래 연습을 혼자서 하였는데 , 현재명 씨가 부른 "성불사의 밤 " 이라는 노래를 연습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악적인 기초가 전혀 없다는 것이였지요. 청소년기를 사람패는 기술만 연마했으니..... 그렇다고 음악의기초가 금방 될일도 아니니 할수없이 노래만 열심히 불렀습니다. 그때는 나혼자 몰래 연습을 했으므로 " 그만 해라 ' 하는 사람이 없어서 산에 가서 무지하게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노래를 부르면 말 더듬는 버릇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지 않고 말하면 여전히 말을 더듬었습니다. 거의 반 벙어리 수준으로 말입니다. 드디어 시험 보러가는날 심사위원이 이름을 물어보는데 말이 안나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냥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 성불사 깊은 밤에 들리는 풍경소리 주승은 어딜가고 객이 혼자 듣는구나...... "그만 하세요." 라고 말할때까지 그냥 노래만 불렀습니다..... 좌우지간 합격을 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먹고살기가 힘들때여서 왠만하면 보통 대학은 다 들어갔지요. 그날도 집에 들어와 아버님에게 안마를 해드렸습니다. 물론 " 그만해라 " 할때까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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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쓰는 건 '그만하지'마십시요. 글은 전혀 더듬지 않으십니다.
허 허 허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지나온 길을 더듬으면서 쓰니 그런대로 재미가 있을라고 합니다. ㅡ그 려... 지금은 그만두라고 말할사람도 없습니다.
호랑이 담배피던 선생님 이야기는 읽다보면 영화같이 생생하기도하고 또 알지못했던 모습도 새롭구요 한가지에 열정을 쏟으시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십니다^^
그시절 힘겹게 사셨던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 III -- 기려집니다...
선생님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더듬어 보니 저와도 약간 비슷하군요. 전 아버님이 군인이라 전근이 많아 외가집에서 컸어요 어머님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 말도 없었고 구박 받고 학교도 다니기 싫을 정도로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글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연재가 계속 되어 후일 자서전으로 출판기념회 때 저도 갈 수 있겠지요
나이라고 할것도 없지만, 나이들면 추억을 반추하면서 산다고 하는데 이 글보면서 배고프고 어려웠던 어린시절이 새롭게 기억납니다.
어쩔수 없이 혼자 남겨진 어린시절이 정말 가슴 아프네요.오카리나가 아닌 선생님의 노래를 들으며 읽어 내려가니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것 같아요...그 후에는요????
너무 재미 있습니다...책을 쓰셔도 좋을듯 합니다...지금은 말을 안 드듬는것 같아요...
말을 더듬으셨다니 상상이 안되네요, 오래간만에 다니던 학교 교정을 사진으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재밌습니다."그만해라!"이단어 코메디언이 채가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