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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과 두 가지 표준 (딤후 3:10-17)
이 말씀의 전체적 제목을 “두 가지 표준”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첫째 표준은 바울 사도의 경험과 모범이며(10-12절), 둘째 표준은 성경입니다(13-17절). 이 두 표준은 권위가 꼭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모범 하셨으므로 “자기를 본 받으라”고 하셨습니다(고전11:1). 따라서 사도들의 모범과 성경은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됩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의 모범이 성경에 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필요한 만큼만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요21:25).
1. 바울 사도의 모범과 경험을 본 받으라(10-12절).
1) 본문에서 바울 사도의 모범과 교훈을 일곱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①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성경에 수록된 바울 사도의 서신을 의미하고,
② 행실이니, 이는 바울의 실천 모범입니다. 고전4:6,16,11:1,빌3:17,살후3:9 등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본받아야 할 것을 명하셨고,
③ 의향이니, 이는 신앙과 사명에 대한 사상입니다. 그 사상이 성경에 근거하지만 뚜렷한 표준을 말씀하시지 않은 상태에서 각인의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신 바가 있습니다(롬2:15). 이 경우에 바울의 의향을 본받음은 더욱 성경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영감의 풍족함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바울 사도가 의향을 나타내신 말씀은 고전7:6-8,25-26에서 “혼인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신 일이 있고, 또 사명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서도 자신의 의향을 말씀하신 내용이 행20:22-24에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의향”은 신앙에 근거한 양심의 자유를 표현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④ 바울의 믿음이니, 이는 바울이 어떻게 믿었는가 ? 함이요,
⑤ 오래 참음이니, 이는 참는 일을 오래 끌며, 무한정 기다리는 것을 뜻하고, “인내”는 잘 참는다는 뜻입니다. 이때에 건설적 견지에서 참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건설적 발전을 저해하면서 참는 것은 바른 인내가 아닙니다.
⑥ 사랑의 모범입니다. 바울의 사랑의 폭은 넓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롬8:35,엡6:24), 골육 친척에 대한 사랑(롬9:3), 이방인에 대한 사랑(행20:18-24), 핍박자에 대한 관용(딤후1:15,4:14-15) 등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⑦ 핍박과 고난입니다. 핍박은 복음의 대적자로 말미암아 당하는 괴로움이고, 고난은 사명적 활동으로 당하는 어려움입니다. 바울의 안디옥에서 있었던 핍박은 전도자가 당한 유대인들의 핍박이었고(행13:14,45-50), 그 핍박으로 인하여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피하였는데, 그 곳에서도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핍박을 하였고(행14:1,2,5), 또 “루스드라”로 가서 발을 쓰지 못하는 자를 뛰어 걷게 하는 능력까지 나타내었으나 그 곳까지 따라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거의 죽게한 사실이 있었습니다(행14:6,19).
2) 이런 사실을 디모데는 바울과 동행하면서 보고 알았으며, 모든 위험에서 주님이 건져 주셨다고 하셨습니다(11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와 같은 핍박을 당하는 모범도 본받을 것을 말씀하셨고, 이 경우에 주께서 건져 주신 방법은 기적과 일반 은총이었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줄 알고 성 밖으로 내쳤으나 다시 일어난 것은 기적에 의한 은총이며(행14:19-20), 과격한 핍박을 면하려고 도망한 상태에서 보호받은 것은 일반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행14:4-6).
3)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12절).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고(시10:1-18)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마24:12). 불신자와 성도의 사상적, 가치관의 대결도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불신자들과의 교제를 멀리하는 상태에서 대결과 고난을 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와의 교제에서 다른 성도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완악한 성도의 대립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이 경우에 정의를 주장하는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여야 하고, 불법을 행한 성도는 자신의 불법한 행위들을 진실하게 자복하고 회개할 때에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될 것입니다.
2. 성경을 표준함에 대하여(13-17절).
13-17절에서는 성경의 필요성과 성경에 대한 관심과 응용함과 성경을 주신 방법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1) 성도는 성경을 배워서 확신한 일에 거하여야 합니다(14절). 성경은 신구약 66권이며, 거듭난 심령의 이성(지,정,의)을 상대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저절로 알아지는 기적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배워서 확신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에게 깨닫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사50:4).
하나님은 성경을 가르치게 하셨고(마28:20), 배워서 확신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확신이란 익숙하게 아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풍성한 지식을 뜻합니다.
2)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14절) 하신 말씀은 성경을 정통적 계승자에게 배워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사상에 입각하여 바르게 가르치는 스승에게 배워야 합니다. 디모데가 바울 사도에게 배운 것처럼 신학의 정통적 조류가 있고, 신학자도 하나님 사상에 입각하여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교파나 신학교나 선배를 바로 만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3) 디모데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알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15절). 이는 유대인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을 배웠기 때문입니다(딤후1:5). 성경을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요, 디모데는 좋은 지도자 바울 사도를 만남으로(행16:1) 훌륭한 후계 사역자로 키움을 받았습니다.
4)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6절). “하나님의 감동하심”이란 “성령님의 감동하심”(벧후1:21,왕하2:9)이요, 이는 성령님께서 여러 가지 계시 방편을 통하여(히1:1)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영감으로 사람에게 전달된 말씀입니다.
5)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13,15-16절).
① 우선 속이는 자들의 유혹을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13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점점 악하여져서 성경 아닌 거짓으로 성도를 속인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잘못된 해석, 옳지 못한 사상, 잘못된 교회,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주장하는 일 등으로 속입니다. 속지 않을 성도들은 성경 지식의 풍성함과 예민함을 갖고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고전4:6). 지금도 말씀의 지식이 없는 성도들이 잘못된 교훈에 많이 속으면서 은혜 아닌 것을 은혜로,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착각함이 있을 것입니다.
② 성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지식을 나타내 주십니다(15절). 이 구원의 뜻은 영생이며,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아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시며(요14:6), 믿음과 구원의 주(히2:10,12:1)이시기 때문에 믿음과 구원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타내 주신 구원의 방법은 “십자가의 도”로서 이는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이 구원의 방법을 아는 자도 역시 지혜로운 것입니다.
③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16절). 이 말씀은 구원 다음에 바른 인간으로 교육하는 지침서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인간 교육의 지침서로는 성경 이상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인격을 변화시키니까요.
④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심”은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뜻하며(요17:17,딤전4:5,시119:9), 거룩의 뜻은 죄사함 받고 부패성을 제거하여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함을 뜻합니다(롬8:29).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심”은 성경으로 선한 일을 지도받고 말씀의 감동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받음을 뜻하는 것입니다(히4:12).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① 사도들의 신앙과 사명 생활을 본받고,
② 오직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구원의 지식을 가지며,
③ 잘못된 교훈에 유혹되지 않고,
④ 성경 말씀을 구원의 지침서로,
⑤ 인격 교육의 교안으로,
⑥ 또 그리스도를 닮는 표준으로,
⑦ 선한 일을 시행하는 능력의 말씀으로 활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8. 경건의 모양과 능력 (딤후 3:5)
경건의 모양과 능력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경건이란 “유세베이아”(εὐσέβεια)는 하나님을 경외함을 표현하는 명사(박윤선)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상대하여 갖는 모든 작용과, 예배 및 교회 생활 등을 포괄할 수 있습니다. 사람 앞에 취하는 태도는 예절일 뿐 경건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1. 경건의 모양이 무엇입니까 ?
경건의 모양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관계된 모든 의식입니다. 주일 지키는 일, 예배 드리는 일, 전도, 봉사하는 일 등 교회 생활에 합력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사들이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도 할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진실한 성도는 경건의 모양에서만 끝나지 않고 경건의 능력까지 나타낼 수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할 만큼 모양만 나타내는 자들은 외식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을 포함하는 모양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성도에게 참된 깨달음과 참회와 믿음의 발전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영광을 나타내도록, 힘있게 모양을 나타내는 경건한 의식도 있습니다.
2) 그러나 이단자, 타락자들의 행위로도 얼마든지 경건의 모양을 나타낼 수 있고, 그 모양에 현혹되거나 취하여 분별없이 따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어떤 이단 교파의 교주가 청중을 모아 놓고 찬송하며 설교하는 장면을 TV로 보셨을 것입니다. 이단자들도 경건의 모양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이단자는 아닐지라도 불건전한 방법으로 사람을 끄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하는 목사로부터 “욕설을 들어야 좋다” 하면서 그것을 은혜로 여긴다는 말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 목사는 설교하면서 욕설을 퍼부어도 교인들이 기쁨으로 받는 것입니다. 문제는 선악의 분별없이 맹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3) 1930년-50년대 황해도(북간도) 출신 황국주 목사는 특별 기도를 끝내고,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으므로 예수님 사진처럼 비슷하였는데, 자기가 기도하는 중 “자기의 목이 떨어지고 거기에 예수님의 머리가 붙는 장면”을 보았다 하여 자신을 재림 예수라 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예수님처럼 생긴 모양에 끌려서 따라다녔고, 그의 아버지도 아들에게 절을 하였으며, 구변도 좋아서 많은 청중을 임의로 울리고 임의로 웃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부흥회 할 때나 자기 교회에 있을 때 젊은 여자들을 대동하였고, 밤중에 한 방에 거하는 경우가 많아서 기회를 보던 청년들이 그 현장을 잡고 거짓 사역자임을 폭로하였다고 합니다. 그때에 황국주의 하는 말이 “한국 사람 참 어리석더라. 머리, 수염 기르고 예수 목이 붙었다 하니까 잘 따라 오더라” 하고 성직에서 밀려나 술장사를 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타락하여 큰 요정을 경영하는 것을 본 친구 목사가 찾아가서 “이렇게 타락한 자가 부흥회는 어떻게 인도하였느냐 ?” 하니까, “한 번 해보았을 뿐이라”고 하더랍니다. 부흥회도 연극처럼 “한 번 해볼 수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경건의 모양치고는 대단한 외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흔히 떠도는 말로 “영력 있는 목사”란 말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 증언의 활력과 감화력이 있고,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는 사역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과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영력 있는 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특별 기도했다”든지 “머리와 수염을 길렀다”든지 목소리가 크거나 음성을 변조하여 말로 제압하는 힘이 있으면 영력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으나 경건의 모양은 결코 진실한 영력과 상관되는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경건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
1) 성경을 진리로 믿는 힘입니다. 이 힘은 실천의 원동력이 됩니다. 공사장을 지나다 보면 기둥을 박고, 돌을 깨고, 말뚝을 뽑는 기계를 봅니다. 그것이 공기 압축의 힘을 이용한 것입니다. 공기 압축의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경을 믿는 믿음의 힘이면 그 이상의 강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는 것” 아닙니까 ?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1:37).
2) 진리를 깨닫는 힘입니다. 진리의 지식이 복음의 근거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도 진리의 지식으로 받고, 하나님의 뜻도 진리의 지식으로 압니다. 진리의 깨달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듣는 힘과 깨닫는 마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사50:4,행16:14).
3) 진리를 실천하는 힘입니다. 성도가 진리를 실천하면 성경대로 사는 결과가 나타나고 그래서 죄의 유혹을 피하여 세속을 멀리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닮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만 받고 실천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며(약2:17), 성경의 분별력이 없을 때 신비주의를 따르기 쉽고, 실천 능력 이 없는 경건의 모양은 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경건의 능력(실물)이 있고 그 다음에 경건의 모양(포장)이 있어야 하되 능력보다 모양이 더 커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드시 능력에 일치하는 합당한 모양만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9. 경건의 능력을 구하자 (딤후 3:1-5)
이 시간에는 “경건의 능력을 구하자”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경건”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모든 행동을 의미합니다. 오직 성령 충만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딤전4:7-8에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고전4:19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하셨으니 말보다 실천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의 간구하는 종목이 많습니다. 건강, 사업, 평안, 교회 부흥 등을 구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성장이나 경건의 능력을 구하는 성도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빌2:21에 보시면 “성도가 자기의 일만 구하고 예수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 하셨고, 약4:3에서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일”이 있으며, 유대인은 표적을,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십자가의 은혜는 구할 줄 모르고(고전1:22), 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12:39)고 하셨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곧 믿음의 능력이고, 믿음의 능력으로 깨달음과 실천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의 능력을 힘입기 위하여 무엇을 구하여야 합니까 ?
1. 진리 듣는 힘을 구하셔야 합니다. 설교할 때 졸음이 오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하셨고,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겠느냐”(롬10:14,17) 하시면서 “하나님이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시고 귀를 열어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잠20:12,사50:4). 행16:14에 보시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청종케 하신 일이 있고, 고넬료의 가족들도 열심히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행10:33). 성도 중에 두 가지 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르다”형입니다. 이것은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또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 “마리아”형이 있으니, 이것은 성경 공부에 흥미를 갖는 성도들입니다(눅10:39-42). 사6:10에 보시면 하나님이 징계 받는 백성들의 귀와 눈을 막으셔서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징계의 기간이 끝나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듣는 귀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계2:7,13:9)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 듣는 힘을 구하는 것이 경건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2. 진리를 깨닫는 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듣기는 하였어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먹었으나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말씀을 “떡”이라고 하셨습니다(말씀의 떡; 마4:4,요6:48,예수님의 떡;요6:57,68). 이 떡은 믿음과 깨달음과 실천으로 먹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먹고 잘 깨닫기 위하여 바울 사도는 엡1:17에서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 하셨고, 또 “마음 눈을 밝혀 주셔서 신령한 소망과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해 주시기를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눅24:45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하셨고, 신29:4에서도 “깨닫는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으로 진리 깨닫는 총명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진리의 말씀을 간직하고 기억하는(마음 판에 새기는;신6:6) 힘을 구하셔야 합니다. 사람의 정신은 기억한 것도 자주 잊을 수 있습니다. 유익 없는 것들은 잊을수록 좋지만 진리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잊혀지지 않습니다(시1:3). 또 예수님은 요14:26에서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 하셨고, 출9:21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을 우박의 재앙에 버려 두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간직하는 것을 곧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으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말씀 간직하는 은혜를 주사 경건의 힘을 힘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진리 실천의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 힘이 부족하여 탄식한 일이 있었습니다(롬7:22-24). 계명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요14:23), 계명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고(계1: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만 칭찬 받은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도 인정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약2:22). 믿음과 진리의 지식은 실천의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방 여자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구원의 주”로 믿었을 때 이스라엘 정탐을 숨겨 보내는 모험적 순종을 하였던 것입니다(히11:31). 성도에게 진리 실천력이 없으면 경건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능력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시고 동시에 진리 실천의 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기도하신 예인 것입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기도하고 시행하는 선수를 볼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그렇게 기도하고 시행하면 큰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5. 세속을 멀리하는 힘이 곧 경건을 지키는 힘이므로 세속을 멀리하는 힘을 구허셔야 합니다. 경건한 성도는 세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세속에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요일1:15). 아브라함의 장막 생활이나 모세의 광야 생활은 세속에 얽매인 생활이 아니었고(히11:9,13,24-25),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나 바울도 그러하였습니다. 또 약1:27에서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정결한 경건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을 멀리하려는 성도는 높은 산에 오른 자처럼 또는 독수리가 높이 솟은 것처럼 신령한 은혜에 잠겨야 합니다(사40:9,31). 그렇게 될 때 세상은 자동적으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속을 따돌리지 못하면 하나님과 원수된다”(약4:4)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세속을 사랑하면서 어떻게 경건이 성취될 수 있겠습니까 ? 그런 의미에서 세속을 멀리할 수 있는 경건의 힘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6.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힘을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후에 마귀의 중대한 세 가지 유혹을 이기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4:1-11). 본문 3:1-4에서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교만, 훼방, 불효, 감사치 않음, 거룩하지 않음, 무정, 원통함을 풀지 않음, 참소, 절제 못함, 선하지 않음, 배반, 조급, 자고, 쾌락 사랑” 등 18 종의 유혹을 말씀하셨는데, 경건한 성도들은 이런 것들을 다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순종함과 같은 것으로, 유혹을 피하는 것은 소극적 순종이고, 진리에 충성하는 것은 적극적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한 것처럼 유혹을 이기는 힘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7. 헌신을 잘하는 힘을 구하셔야 합니다. 경건 생활의 최고의 실천은 헌신입니다. 자기의 현실적 유익을 위한 헌신은 “한 알의 밀”이 될 수 없을 것이요(요12:24), 복음의 명예를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충성하는 헌신(눅17:33,행20:24)이 곧 한 알의 밀이요 죽도록 충성함이 될 것입니다(계2:10). 이기주의적 헌신에서 대가없이 충성하는 헌신으로 바꾸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계명 실천, 헌신”의 삼 단계로 신앙이 발전하여야 하며, 헌신이 경건의 마지막 단계인 만큼 헌신으로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 일곱 가지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설교보충 10. 속지 말자 (딤후 3:13-15)
본문에 보시면 속이는 자가 있고 속는 자가 있는데, 성도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여” 속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만 참된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잘 배워 성경대로 사는 것만이 지혜로운 생활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속이는 전문가요, 속일 때마다 자기의 것으로 속인다”(요8:44)고 하셨습니다.
1. 그런데 인간은 마귀에게(즉, 거짓 유혹자들) 속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잘못 깨달아서 스스로 속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단자에게 속고 사기꾼에게 속는 것은 마귀에게 속는 것이지만, 자신이 모르거나 착각하여 속는 것은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스스로의 속임입니다. “온갖 선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모른다든지(약1:16,17), 알고도 행하지 않든지(약1:23), 심는대로 거두는 원리를 모르고 행한다든지(갈6:8), 되지 못하고 된척 한다든지(갈6:3),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행위(고전15:33)” 등이 다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속으면 기분도 나쁠 뿐 아니라 전진을 많이 후퇴시킵니다. 생활의 발전을 후퇴시킴은 물론 정신적 타격도 크고 특히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잘못 알면 믿음을 뺏기는 불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속은 일이 없는지를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꼭 할 일을 하였는가 ?”, “옳게 하였는가 ?”, “부지런히 하였는가 ?”, “보람있게 되었는가 ?” 등을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보람없이 살았다면 또 자기 인생을 스스로 속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 거짓이 많은 세상에서 속지 않으려면 잘 배우고 항상 주의하여야 합니다. 본문에서 “성경을 배워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말씀은 신앙적인 면에서 거짓 교훈에 속지 말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신13:1-3). 예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만 참이고(요14:6), 그 이외의 것은 믿지도 말고 의지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무슨 일이나 확실치 않으면 확인하고 시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길을 잘 모를 때 “이 길이 그 길이겠지”하고 짐작한 상태에서 간다면 70%는 속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살이를 적게 속으려면 선배들의 경험을 귀담아 듣고 참고를 하여야 하는데, 청소년들 중에서 경험자의 지도를 외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3) 잘못된 길인줄 알면서도 욕심에 끌려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각되지 않으면 요행수로 덕을 보려는 심산이지만 이 세상에서 안 밝혀지는 부정은 거의 없으니까 욕심에 끌리거나(약1:13), 현실 정욕에 끌려서(요일2:15) 불법을 행하면 자신이 금방 올무에 걸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속고 있습니다(엡5:16). 시간이 곧 자기의 생명이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나 허비되는 시간이 자기의 재물과 행복을 허비하는 것인 줄 알아서 시간 소모하는 것을 택시 요금 올라가는 것만큼 마음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긴 시간은 긴 시간으로 필요한데 쓰고, 짧은 시간은 짧은 일에 쓰며 또 이중 행사로서 시간을 겸용하는 습관도 길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토막난 짧은 시간을 어떻게 선용하라는 것이냐 ?” 하시겠지만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영적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 이상 더 보람있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짐을 나르는 사람이 조금 무겁게 나르면 능률이 있고 가볍게 나르면 시간이 더 걸립니다. 무슨 일이나 힘써서 감당할 때 능률이 있고 시간이 절약되니까 인생을 쉽게만 살려 하시지 말고 노력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질병도 견뎌서 낫는 경우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가 인내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서 낫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례식을 하는 주일 새벽 기도회에 구토 증상으로 어지러운 몸을 가지고 불편하지만 기어코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 중에 토했습니다. 그 정도가 되도록 인내하며 기도에 힘썼는데 그후 병이 나아서 주일을 잘지킨 경험이 있습니다. 힘들게 짐을 지고 시간을 보낼 때 자기 인생을 속지 않고 사는 것임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3. 지나친 물욕으로 인생을 속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이면 환장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광주시를 확장할 때 공동묘지를 정리하는 장소에서 여자 해골의 머리칼만 집어 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돈에 환장한 것일 뿐 죄는 아닙니다. 해방 전에 청진의 어떤 사람은 만주에 가서 돈을 한 가방 벌어가지고 30년 만에 고향에 왔는데 먼저 친구를 만나 부모의 안부를 물으니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갑자기 들어 가면 부모가 놀라서 기절하실 것이니까 나그네의 신분으로 들어가서 하룻밤 자고 천천히 알리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돈 가방을 들고 나그네처럼 자기 집에 들어가 자는데 주인 영감이 가방을 열어 본 후 돈이 가득한 것을 알고, 돈에 눈이 뒤집혀서 도끼로 그 나그네를 살해하여 안 마당에 묻고 돈을 챙겼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아들의 친구가 와서 “어른의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느냐 ?”고 물었을 때 깜짝 놀라서 “밖으로 나갔다”고 핑계한 후 아들의 시체임을 확인한 후에 그 부모가 양잿물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감케 하는 것입니다(딤전6:10). 물질지상주의가 자기 인생을 속인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많은 사람들이 지식 우상주의에 속고 있습니다(고전1:20-25). 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식의 목적을 돈 버는 수단에 두고 하나님의 영광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무시하기 쉽고, 사람은 지식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농산물을 먹고 삽니다. 지식의 긍정적 면도 있지만 살상 무기를 만드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미국이 인공위성으로 3억 천만 Km에 떨어진 화성을 맞추었고, 소련이 4억 3만 Km 떨어진 금성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을 축소하면 대구에서 만주 하르빈에 있는 파리의 눈을 총으로 맞추는 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적 가공 식품을 먹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자연 식품만 먹어야 합니다. 이런 형편에서 성도는 대학을 못 갔어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은 한이 없습니다. 스위스와 독일이 과학 연구 자료를 교환하였는데, 독일에서 종이 과학 재료를 보내니까 스위스에서 그 기술을 해득했는데 스위스에서 머리칼 과학 재료를 보낸 것을 독일에서 해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머리칼 속에 구멍이 뚤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없는 지식을 따라가는 것 보다는 차라리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것이 상책입니다. 생명도, 지식도, 행복과 구원도 다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살려고 애쓰다가 죽는 사람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살려고 애쓰다가 산 사람 있습니까 ? 없지요 ? 지식 만능주의에 속지 마십시다 !
5. 인물 우상주의에 속지 마셔야 하겠습니다(삼상16:7). “마이클 잭슨이 온다”고 야단하는 세상은 크게 잘못된 세상입니다. 대구의 어떤 여전도사님이 외아들을 가진 과부였는데, 외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전도사 직을 내어 놓고 장사를 하여 그 아들을 대학 졸업까지 시켰는데, 그 아들이 교통 사고로 죽자 “너는 나 때문에 죽었다”고 통곡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광주의 어떤 장로님은 “큰 아들만 잘 키우면 그 아들의 힘으로 다른 가족들도 잘 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큰 아들 교육에만 정성을 쏟았으나 그 아들이 행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역시 교통 사고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낭패를 보는 실례라 할 것입니다. 배운 아들이나 돈 있는 딸도 믿지 마시고, 연예인도 기쁨의 대상을 삼지 말며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중요시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속지 않을 것입니다.
6. 현세적 쾌락이 아무리 좋은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을 좋은 줄 알고 따라가다 는 또 속습니다(약4:4,요일2:15-17). 스포츠가 밥 먹여 줍니까 ? 천당을 보내 줍니까 ? 선수는 돈이나 벌지만 구경꾼들은 마치 신기루를 바라보고 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하여 “자기에게 절만 하면 천하 만국을 다 주겠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천하 만국의 향락을 다 준다 하여도 “하나님께만 경배할 뿐 다른 것들에게는 절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배격하심으로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것이 곧 세상 향락을 위하여 죄짓지 않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인생은 풀같고 영광은 꽃같다”고 하셨습니다(벧전1:24). 따라서 자기 인생을 영광 목적에만 투자한다면 낭패를 볼 것입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영화도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추구하지만 누리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까 ? “모파상의 진주 목걸이”란 소설은 그런 인생의 허무를 일깨워 주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세상 영화 일장춘몽”이란 말의 해석이 나온다고 합니다(욥20:5-11). 조신(調信)이란 사람이 세달사(世達寺)란 절에서 경영하는 농장의 관리인이 되어 명주 땅에 가서 사는데, 그 고을 군수 김근공의 딸이 어떻게 예뻤던지 그와 짝사랑을 하면서 그 여인을 자기의 아내가 되게 해 달라고 자주 불공을 드렸는데도 그의 딸이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원통하여 부처 앞에 나가 하소연을 하며 밤새워 울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자기 방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벌떡 일어나 문을 연즉 꿈에도 사모하던 그 여인이 “자기가 조신 도령을 한 번 보는 순간 크게 사모하였는데 부모가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서 시가로 가다가 조신을 잊지 못하여 도망쳐 왔으니 나를 아내로 맞이하여 살아 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 그날부터 부부가 되어 재미있게 살기는 하는데 워낙 가난한 형편이라 고생 끝에 다섯 자녀를 낳고 어렵게 사는 중 열다섯살된 큰 아이가 명주군 해현령 고개를 넘다가 영양실조로 기진하여 죽었습니다. 두 부부가 죽은 아이를 안고 실컷 울다가 장사를 지내고, 우곡현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사는데 얼마후 두 부부가 병이 들어서 어찌할 수 없자 열세살된 둘째 딸을 밥 얻어 오라고 내보냈더니 부잣집 개에게 물려서 온 몸이 피 투성이가 되어 돌아 온 것입니다. 이때에 부인이 하는 말이 “당신과 내가 좋아서 젊은 시절 재미있는 때도 있었으나 40년을 사는 동안 고생과 불행도 많았고 이제는 더 이상 이겨 나갈 수가 없으니 서로 헤어져서라도 이 고생을 줄여야 하지 않겠소 ? 아이가 넷 있으니까 둘씩 둘씩 맡고 서로 헤어집시다” 하여 그 말을 타당하게 여기고 헤어지려는 순간 서로 떨어진 아이들을 붙잡고 통곡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꿈이었습니다. 40년을 꿈 속에서 살아본 조신은 그제서야 인생 향락 일장춘풍임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7.마지막으로 돈과 명예와 권세도 참으로 믿을 것이 못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1) 자식이 부모의 유산을 믿고 방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 그래서 선진국 사람들은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거 서독에 간 교포가 서독인 친구 집에 가서 “이 집이 네 집이냐 ?” 하니까 “우리 아버지의 집인데 다른 사람보다 집세를 조금 싸게 주어서 아버지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란 것입니다. 아버지 재산을 자기 것인 줄로 믿으면 안된다는 뜻이지요.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연필 한 자루를 2전에 산 기억이 납니다. 50년이 지난 오늘은 400원 합니다. 20,000배가 올랐다는 뜻입니다. 1953.2.10에 100원이 1환으로 개혁되었고, 1962.6.10(5.16 직후)에 1,000환이 10원으로 개혁되어 도합 1/10,000으로 줄었습니다. 독일은 전란시에 1억 마르크가 1마르크 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돈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재산이 있으면 이 재산을 어떻게 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나 할 것이요, 이 재산으로 자기만을 부요하게 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하실 것입니다.
2) 명예와 권세도 그렇습니다.(전5:19). 대통령 되는 분마다 명예로운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5.16 혁명으로 뺏김), 박정희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12.12 사태 증언 기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한 사람도 명예롭고 칭찬스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자기 인생의 가치관을 물질, 명예, 권세, 세상 향락, 지식, 사람의 칭찬과 인기.....그런데 두면 다 속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속지 않을 진실한 대상은 하나님과 성경 뿐입니다. 자식이 잘 되어서 돈을 벌어 와도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 속지 않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특히 믿음 지식에 대하여 속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11.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3-17
본문의 중심 교훈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1.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입니까 ? “성경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말씀인데 그 말씀은 배워서 알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배우지 않고는 저절로 알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열심히 배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뜻은 “넉넉한 지식을 가지고 거기에 근거하여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길을 모를 때 넉넉한 지식이 없으면 물어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이 넉넉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입장이 못되고 자신의 활동도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많이 배워 확신하고, 확신한 것을 또 생활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넉넉히 알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속이는 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마귀는 천사처럼 가장도 하고(고후11:14), 기적도 행하며(계13:13,출7:11), 바른 말(진리)도 전할 때가 있고(막5:7,행19:15), 선을 행할 때도 있습니다(고후11:4,마2:8). 그러니까 쉽게 분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들은 성도 속이는 일을 본업으로 알고 감행하기 때문에 성경 지식이 없으면 속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지 않으려면 성경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성경 배우는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어릴 때부터 배우고 누구에게 배워야 할 것을 잘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좋습니다. 반드시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바로 전달하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할 것입니다.
5. 성경의 용도를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15-17절).
1)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시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예수님과 관련된 믿음”이란 뜻입니다.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시는 이유는 성경 속에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구원의 도리가 다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좋은 교육의 자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교훈,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모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 교육의 가장 유익한 지침서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뜻은 거룩하게 되어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의 자녀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그리고 모든 선한 일도 잘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연구하는 사람은 악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국민들이 다 성경을 읽는다면 악한 자들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형무소에서 전과범들이 성경을 읽고 변화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성경이 선한 사람되게 하는 좋은 교육 서적이란 것을 깨닫게 하는 어린이 동화가 있습니다. 내용은 어떤 임금이 나라의 어려움이 많은 중에 세 왕자 중 한 아들에게 양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 아들들을 1년간 나가 있게 한 후 돌아올 때 가장 요긴한 것을 가지고 오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1년 후에 한 왕자는 아주 신통한 약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약물은 죽은 자의 입에 넣으면 죽은 자가 살아 나는 약입니다. 그때 외적의 침략이 있어서 전쟁에 나갔다가 많은 군인들이 죽었는데 그 약물만 입에 넣으면 또 살아나니까 또 싸워서 외적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평화가 왔습니다. 참 귀한 약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 나라에 기근이 와서 백성들이 굶주려 죽게 된 입장이었는데 마침 또 한 왕자가 이상한 구슬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구슬은 “무엇이나 있어라” 하고 굴리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굶주려 죽는 형편이니까 “먹을 것 나와라” 하니까 부르는대로 다 나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많으니까 마음대로 먹였습니다. 먹고, 놀고, 술 취하고, 싸우고, 음행하고, 마음껏 방탕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전쟁도 해결하고 죽음도 해결하고 먹을 것도 해결했는데 사람사는 세계가 더 어지러워진 것입니다. 그러자 마지막 왕자가 이상한 책을 한 권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책은 누구나 읽으면 착한 사람이 되는 책입니다. 그 책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그 방탕하는 백성들에게 그 책을 읽게 하였더니 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선한 사람들이 되어 마지막으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그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는 동화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는 말씀이란 사실을 확신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잘 배우고 잘 활용하는 성도님들이 되시라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배고픈 자가 먹을 것에 끌리듯, 영적 고갈을 당한 성도는 반드시 성경에 끌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2. 교육과 졸업의 의미 (딤후 3:14-1
여러분들의 뜻있는 졸업식을 맞이하여 “교육과 졸업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는 교육을 권장하신 말씀으로 교육의 방법과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교육의 방법은 성경을 배우되 어릴 때부터 배우고 바르게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야 하며, 확신을 갖도록 배우고 가르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2.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고 또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되는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3. 그렇다면 교육을 받는 분들과 교육을 시킨 사역자들이 이 졸업식을 맞이한 자리에서 반성해 볼 것들이 있습니다.
1) 성경을 잘 가르치고 잘 배웠는가 ?
2) 배움의 지식이 확실하게 마음판에 새겨져 있는가 ?
3) 우리의 배운 지식이 성경적이며 정통적인 지식으로 손색이 없는가 ?
4) 하나님의 사람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움이 없을만큼 좋은 인격으로 변화되었는가 ?
5) 선한 일로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인물들이 되어 있는가 ?를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졸업의 의미를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까 ?
1) 많이 배웠다기 보다도 “진리나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잠간 배운 것으로 필요한 지식을 다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은 지식을 가지고 항상 더 배우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배움의 과정을 밟은 것은 학문하는 방법을 배운 것입니다.
2) “고등 학문에 더 진학하라”는 뜻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은 중학을 가라는 뜻이요, 중학의 졸업은 고등학교를 가라는 뜻인 것처럼 어떤 과정을 졸업하였든지 “더 배우라”는 독촉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배움은 꼭 교육 기관에서만 터득할 것은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반드시 환경이 우리의 교육 기관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졸업이란 지식에 접근했었다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졸업이 학문 연구를 완성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일정한 과정만 밟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알 것은 더 많고, 배운 것은 미약하기 때문에 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교육에 임한 모든 성도들은,
① 성경이 말씀한 목적에 따라서 성경을 열심히 배워 하나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요,
② 예수님을 닮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됨에 모자람이 없어야 할 것이며,
③ 선한 일에 솔선하는 순결한 봉사자들이 되었을 때 비로서 교육과 졸업의 참된 의미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