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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은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역사학은 20세기 사회과학의 발달과 정보화 혁명 속에서 끊임없이 그 존재이유가 평가절하 되었으며, 급기야 ‘역사학의 위기’란 말이 상투어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역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많은 후진들이 진입을 포기하였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각종 시험에서도 역사를 없애는 한편 학교교육에서는 국사를 선택과목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시수도 줄이는 등 역사 천시 풍조를 가속화하였다. 잘 아는 것처럼 중학교에서 국사는 책만 독립되어 있을 뿐 사회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세계사는 중학교 1, 2학년 사회 교과서의 앞뒤에 배치하여 때로는 지리교사가, 때로는 일반사회 교사가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런 편재는 적어도 내가 확인한 한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기형이다.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양식 있는 학자, 교사, 시민들의 목소리는 밥그릇싸움의 전사라고 매도당하거나 우원한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심지어 <<교육과정의 정치학>>이란 제목의 책이 나올 정도로 교육과정조차 힘에 따라서 나눠먹을 이익 대상물로 되어버리면서, 역사학은 힘없는 분야요, 패배자의 영역처럼 되어갔다.
그 업보는 광속의 시대에 걸맞게 빠르게 나타났다. 국내에서는 수많은 비인간적인 사건, 비역사적인 사건, 그리고 비민족적 사건들의 빈발,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동북공정 강행,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독도 영유 주장, 그리고 일본 우익의 부상과 망언·망발, 이것들이 그 실례가 아니겠는가? 이런데도 역사학이 우원한 학문이고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천대하고 무시할 것인가?
큰 맘 먹고 <<수신제가 - 강희 原典>>, <<치국 - 옹정 原典>>, <<평천하 - 건륭 原典>>(둥예쥔 지음, 송하진 옮김, 서울: 시아출판사, 2004.12) 세 권을 샀다. 책값 합계가 7만원이 넘지만 각각 687쪽, 655쪽, 829쪽이 되니 꼭 비싸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라 처세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도서 분류에서도 ‘중국사에서 배우는 지략’이란 항목에 넣었다. 그러나 내 전공시대인 청대 전반기의 역사적 사실을 활용하였다는 면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다. 또 역사의 효용성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강조되어온 것이 교훈으로서의 역사이며, 그 교훈은 구체적 사례에서 나오기 때문이므로 더욱 그랬다.
이 책은 “황제로서 천하를 경영하며 태평성세를 이룬 걸출한 인물들의 생애 그리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를 이루어냈던 지혜의 글들을 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단순한 지혜의 글과는 달리 우리가 살아가는 데 참고가 될 수많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개인이 아니라 둥예쥔(東野君)이란 집단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소장 역사학연구 그룹이다. 대표자 류샤(劉俠)를 비롯한 청장년 학자, 작가로 이루어진 이들은 당대 중국 지식 문화계의 실질적인 주역들이며, 주로 역사 인물을 소재로 한 전기, 평전 등 역사 교양서를 기획, 출간해 왔으며, 중국의 오랜 정신문명을 오늘의 시각에서 연구하여 살아있는 지혜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호설암의 관상지도>, <한비자의 경세기략>, <중국번>, <조조>, <이홍장>등이 있다. 그리고 번역자 허유영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및 통역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정부기관, 기업체, 방송국에서 중국어 관련 번역과 통역 활동을 했으며, 현재 통·번역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처세서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두꺼운 책이므로 각 권에서 하나의 사례씩만 소개하도록 하겠다.
<<수신제가 - 강희 原典>>은 입관 후 반청 세력을 진압하고 중국을 안정시켜 청조를 반석에 올려놓은 강희제에 관한 내용이다. ‘제1부 반란 평정의 도 : 천하의 대권은 단 하나로 귀결된다’ ‘제2부 용병의 도 : 용병의 도는 기회 포착에 있다’ ‘제3부 정치의 도 : 천하의 이익을 백성에게 돌린다’ ‘제4부 관리 다스림의 도 : 관대함과 엄격함을 조화시키고 평안함이 우선이다’ ‘제5부 인재 등용의 도 : 배움과 행함이 모두 뀌어나야 등용한다’ ‘제6부 수신의 도 : 남에게 금지하고 자신은 행한다면, 어찌 남들을 감복시킬 수 있겠는가’의 6부로 나누고, 각 부는 다시 6장으로 나누어 총 36장으로 구성되었다. 예컨대 제5부 인재 등용의 도에서는 ‘인재를 잘 골라내 적재적소에 임명한다’ ‘덕과 재능을 함께 고려한다’ ‘사람을 얻기 위해 그 마음을 먼저 얻는다’ ‘관리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한다’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용해서 대권을 장악한다’ ‘공평하고 단정하게 공사를 구분한다’의 6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각 장에는 몇 개의 소항목으로 나누어 구체적인 역사 사례를 들고 있다. 예컨대 위의 ‘인재를 잘 골라내 적재적소에 임명한다’는 장에서는 ‘인재 등용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정확하게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라’는 두 소절을 두고 있다.
각 소절에는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자신의 주장을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위의 ‘정확하게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라’에서는 회하(淮河 :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는 경계선이 되는 지역) 治水에 대한 강희제의 조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강희 15년 10월 공부상서와 호부시랑을 보내 치수 공정을 순시하도록 하고(→ 기초조사) 이어서 여러 가지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15년 12월 회화와 양자강 유역에 버드나무를 심어 치수 공정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버드나무는 당시 제방공사에 쓰이는 중요한 재료임 → 재료 확보) 16년 2월 이부와의 논의를 거쳐 치수 공정을 위한 관리를 선발했다(→전문가 확보). 16년 3월 기존 하도총독을 해임하고 새로운 총독을 임명하였으며(→ 책임자 임명) 아울러 두 명의 감독자도 임명하였다(→ 감독자 임명). 이에 새 총독은 두 달간 현지를 실사하고 병사나 공사장 인부 등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치수에 대한 의견을 물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제안이라고 생각되면 받아들였다. 또 역대 치수 사업의 장단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치수공사에 필요한 비용과 인부 등을 정리하여 보고하였다. 강희 16년 7월 19일 재정지출이 심하고 부역을 너무 많이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실행하는 것은 힘들다는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강희제는 치수 공정을 하도록 하였다(→ 결단). 그 후 16년 10월 총독의 수정 보고서를 높이 평가하고 17년 1월 의정왕대신들의 논의를 거쳐서 실행을 윤허하도록 하였다(→실행). 저자는 강희제의 과감한 결단으로 청 초기의 치수 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점차 실효를 거두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흥미 있는 사실은 조사에서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이고 합리적으로 단계를 밝고 있다는 것과, 인재 확보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물론 2쪽 분량의 내용에서 충분하게 설명하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강희 15-17년이란 시기는 강희 치세의 최대의 위기인 삼번의 난이 전개되던 시기였으므로 왜 이런 급박한 시기에 적극적으로 회하 치수를 단행하였는가? 치수의 성과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발탁된 인재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알고 싶은 것이 많이 있지만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강희제가 깊은 관심을 가진 사항에 대해서 얼마나 합리적이고 분석적으로 접근했는지는 알 수 있으며, 그것이 곧 독자들에게도 교훈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반란 진압기에도 민생을 염두에 둔 강희제의 인식과 태도도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치국 - 옹정 原典>>은 13년의 재위기간동안 각종 제도 개혁을 통해 청조를 반석에 올려놓은 옹정제에 대한 것이다. ‘제1부 옹정의 심리전 :인내로 역경을 극복하여 최후의 승자가 되다’ ‘제2부 권력 강화의 비결 : 권력 강화를 위해서는 비난을 두려워 말라’ ‘제3부 부정부패의 근절책 : 목숨은 살려주되 재산은 몰수하라’ ‘제4부 용인술의 비법 : 적게 베풀고 많이 살피며,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라’ ‘제5부 권력 독점의 비결 :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으로 개혁에 매진하라’의 5부로 구성하고, 각 부는 4장으로 편성하여 모두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옹정제는 개혁의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제5부 제1장에 있는 ‘제도의 개혁으로 권력의 기반을 굳혀라’는 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옹정제가 취한 조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밀접제(학계에서는 이를 주접제도라고 한다. 역자는 密折이 密摺의 간자체임을 모르고 그대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와 군기처(軍機處)의 설립이다. 전자가 황제와 신하를 사적으로 직접 연결하는 장치라면 후자는 정책결정을 황제가 직접 관장하도록 만든 제도적 장치이다. 옹정제는 옹정 7년(1729) 서북 전쟁을 계기로 군사 비밀을 지키면서 정책을 신속하게 결정한다는 명분으로 군기처를 만들고 이를 황제 거처가 가까운 곳에 건립하고 직접 관장하였다. 원래 군기처는 군무를 효율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만든 기구이므로 전쟁이 끝나면 당연히 폐지해야 했으나 다른 기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정무를 처리하는 스타일의 옹정제에게는 적합한 기구였으므로 존속되었다. 이에 모든 상소가 직접 군기처로 올라가고 대학사가 군기대신을 맡아 정사에 참여함으로써 내각은 유명무실해지고 의정처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옹정제는 수년 후 죽었지만 이 군기처는 이후 가경 대에는 정식 행정기관이 되어 황제의 교지 작성, 군대와 국가의 대사 논의, 군대의 인사이동, 문무관리의 임면, 국가 재정과 주요 안건의 심의 등을 처리하여 명실상부한 최고 의사결정기관으로 자리 잡았고 황제 독재 체제의 핵심 제도가 되었다.
<<평천하 - 건륭 原典>>은 60년 이상 황제노릇을 한, 청대 최대 번영기 황제인 건륭제에 대한 것이다. ‘제1부 흑백입정(黑白立政) : 관대함과 엄격함, 이 둘의 조화가 곧 정치다’ ‘제2부 흑백치리(黑白治吏) : 강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되, 반드시 매번 새로워야 한다’ ‘제3부 흑백무민(黑白撫民) :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하여, 은혜와 위엄을 모두 느끼도록 해야 한다’ ‘제4부 黑白用兵(흑백용병) : 때로는 긴장을 풀어 주고 때로는 느슨함을 조여라’ ‘제5부 흑백어하(黑白馭下) : 한 울타리 안에서 경쟁시키면서, 나의 용도에 맞게 골라 쓴다’의 5부로 구성하고, 각 부는 3장으로 편성하여 모두 15장으로 되어 있다. 비록 장의 수는 적으나 소절이 많고 내용도 다소 자세하다. 많은 내용 가운데 안정기에 들어선 청조가 취한 조치로 제1부 제2장의 한 절인‘적을 기려 벗을 삼는다’는 부분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을 간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청조가 흥기하는 과정에서 제멋대로 명조의 장병들을 살육하고 명조를 위해 희생한 충신과 의사들에 대해 모독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청조의 장기적 이익을 지키려는 통치상의 필요에 따라 강희제와 옹정제의 정책을 이어받아 명조의 충신과 의사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이들을 표창함으로써 한족 관리와 선비들을 유화하는 데 진력하였다.”고 하였다. 즉 건륭제는 청조가 명조를 이어받은 정통 왕조로서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세워졌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그 후속조치로 명청교체기에 명조를 위해 순국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시호를 내림으로써 명조 계승의 정당성, 반청행위의 차단, 청조체제의 안정화 등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상이 된 대표적인 인물이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한 두송(杜松), 유정(劉鋌), 마림(馬林), 하세현(賀世賢) 등을 비롯하여, 청의 입관전 요동·요서 방어 장군인 웅정필(熊廷弼), 원숭환(袁崇煥),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한 사가법(史可法)과 황도주(黃道周), 단식하여 순국한 유종주(劉宗周) 등이다. 건륭제는 사가법, 유종주, 황도주를 평가하길 “사가법은 끝가지 나라를 지키며 홀로 외롭게 충성을 바치다 끝내 죽음으로 희생했다. 그리고 유종주, 황도주 등은 조정에 직언하여 간사한 무리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시국이 어려울 때 목숨을 바쳤으니, 일세의 완인(完人 : 신분이나 명예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 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시호를 내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웅정필과 원숭환의 후손들에게 관직을 내려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건륭제가 시호를 내린 명나라 신하는 3천여 명에 이르고, 그들의 후대와 친족들은 수십만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건륭제도 문자옥(文字獄 : 지식인들의 말이나 글의 표현이 통치자의 이익이나 의도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탄압하였던 것으로 명초와 청대에 빈번하였음)을 통해 한인을 탄압하였으나 남명(南明) 및 그 충신들을 사서에 수록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청조에 투항하여 충성한 자들에 대해서는 건륭 41년(1776) <<이신전(貳臣傳)>>을 편찬하여 이들을 이신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홍승주(洪承疇), 조대수(祖大壽), 풍전(馮銓) 등이 이들이었는데, 후에 이들을 다시 평가하여 갑, 을 두 편으로 나누고 모두 126명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건륭제는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기용하여 인심을 안정시켰을 따름이다”고 하여 이들을 폄하하였다. 또 건륭 54년(1789)에는 청조에 투항했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킨 자들에 대해서는 <<역신전(逆臣傳)>>을 만들어 수록함으로써 평가를 분명히 하였다.
주목할 사실은 전쟁·혁명의 시대가 지나고 안정화 시기가 오게 되면, 혁명의 논리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파괴가 아니라 건설의 논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건륭시대는 중국역사상 대표적인 성세일 뿐만 아니라 최대의 강역을 확보한 시기로 대표적인 안정화시기이다.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사상이 유교이이며 유교의 핵심 개념이 효와 충이므로 명의 충신들을 추숭하는 것도 당연하다. 심지어 이것은 지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중공 건국 과정에서는 계급투쟁을 강조하며 투쟁 역량을 제고하는 데 집중하였던 시대였다면, 개혁개방이후는 건설의 시대로, 계급투쟁이 아니라 생산력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노동자의 적(敵) 유산자를 양산하고 유산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조치가 속속 나오는 것도 그 예이다.
나는 지난 2월 복건성 일부 지역을 답사하는 중에 혁명박물관은 비가 새고 전시물도 바꾸지 않고 낡은 상태 그대로였음에 비하여 공자를 기리는 문묘는 재건되고 새로운 박물관으로서 중시되는 대조적인 현상을 보았다. 사회주의 사상은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안정된 중국 건설에 매진해야 되는 현재에는 상당 부분이 폐기되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념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제까지 봉건적이라고 매도했던 공자와 유교를 ‘전통의 보존’이란 명분 아래 전면에 내세우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현재의 중국공산당의 입장이라면, 현 사회주의체제(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에 가장 근접한 체제와 이념을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바로 왕조체제와 유교인 것이다. 유교의 부활은 그 일면이며, 그런 면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왕조체제의 무거운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과 관련하여 청대 역사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강희제>>, 조너선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서울: 이산, 2001.
<<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역, 서울: 이산, 2001.
<<반역의 책 : 옹정제의 사상통제>>, 조너선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서울: 이산, 2004.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 - 1768년 중국을 뒤흔든 공포와 광기>>, 필립 쿤 지음, 이영옥 옮김, 서울, 책과함께, 2004.
<<청사>>, 임계순, 서울 : 신서원, 2000.
<<대청제국>>, 마스이 츠네오 지음, 이진복 옮김, 서울: 학민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