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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제왕 미스터리
무측천이 다른 사람과 다소 다르다는 것은 여자로서 황제가 되었으므로 매사가 과거와 다르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그것을 마음껏 즐겼다는 점이다. 그녀는 옥좌 앞에 문무 대신들이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것을 즐겼지만 신체 건장한 미남자들 즉 남총들이 그녀의 치마 아래 엎드려 절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녀의 생각은 명쾌했다. 과거 남자 황제가 수많은 비빈을 거느렸으므로 자신이 많은 남총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측천은 만년의 남총으로 설회의, 장창종, 장역지 형제 등이 자신의 공식적인 남총이란 사실을 공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총들을 거느리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낄 것이 없었다는 것은 다음의 일화로도 알 수 있다. 당시 우보궐 주경측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했다.
폐하께서 총애하는 장역지와 장창종으로 충분한데 최근에 우감문위장사 후상 등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의 성기가 크다며 봉신 안에서 시봉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간언을 올리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므로 감히 폐하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측천은 주경측의 상소에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직언을 칭찬하고 채주 100단을 상으로 내리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총을 좋아하는 것마저 중단한 건 아니다. 당나라 사람들의 개방적인 생각의 일단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도 평하지만 무측천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이 과거에 태종과 고종의 비빈이었던 것에 대한 반발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녀는 남총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어려운 국정을 직접 챙겼고 틈틈이 저술과 시를 지었으며 글씨도 썼다. 그녀의 시문집은 무려 100여 권이나 되는데 문장술이 당대의 어느 작가와 비견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탁월하다고 중국인 셰위안량이 평가하기도 했다.
무측천이 황제로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로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나이로 즉위한 황제다. 그럼에도 황제가 될 초기에는 건강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정력적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무측천이 여자 황제인데다가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당연히 대두되는 문제는 누구를 후계자 로 세우느냐였다. 그녀는 집권 초기에 명분을 세워 조카들인 무씨들을 왕에 봉해 특권을 주었고, 넷째아들 예종 이단의 성을 무씨로 바꾸고 황사(皇嗣, 황제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삼아 동궁에 거하게 하면서 황태자에 준하는 의례를 갖추도록 했다.
무씨 종실의 정치적 지위를 높여가면서 이씨 성의 자식에게는 ‘제위 계승 후보자’라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제위 계승 문제는 골치 아픈 문제 거리가 되었다. 무씨와 이씨 간의 세력 다툼 때문이다. 무씨 세력은 무측천이 나름대로 중용했기 때문에 그녀가 황제가 된 후에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한편 당나라에서 주나라로 왕조가 바뀌면서 이씨가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세력은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고종과의 사이에서 난 이씨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면 자신이 세운 주나라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고 자신의 조카들인 무씨에게 제위를 물려주면 주나라라는 국호는 유지될 수 있지만 조카는 친자식만 못하다. 황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장차 자신의 친계인 아들과 손자들이 몰락하리란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껄끄러운 사건에 휘말리면 몸보신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신하들이 무측천의 눈치만 보고 있는데 하루는 적인걸에게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해달라고 의뢰했다. 꿈속에서 큰 앵무새의 두 날개가 꺾이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적인걸은 다음과 같은 해석으로 무씨 즉 조카를 후계자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앵무(鸚鵡)의 무자 중 무(武)자는 폐하의 성씨이고 두 날개는 두 자식입니다. 폐하가 두 자식을 세우면 두 날개가 떨쳐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측천은 자신의 아들 중에서 예종이 아니라 중종을 698년 황태자로 옹립했다. 그녀가 이단을 제치고 이현(이철)을 태자로 삼은 것은 이현이 형이므로 서열 관념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이씨 간에 제위 때문에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단도 어머니인 무측천의 뜻을 알고 이현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를 청했다. 무측천은 황사 이단을 상왕으로 낮추고 이현을 황태자로 삼았다. 가장 골머리를 썩일 후계자 문제를 일단 봉합한 것이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는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 사고가 일어났다. 장간지가 무측천이 요양하던 곳을 포위하고 이현에게 제위를 양여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무측천은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5년 정월 25일 중종이 복위했다. 또한 열흘 후에 국호를 당나라로 회복했고 모든 것을 고종 이전으로 돌렸다. 무측천은 상양궁으로 압송되어 300여 일을 더 살다가 705년 11월 26일에 사망했다.
무측천은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평가할 때 양극단으로 엇갈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는 ‘무자비(無字碑)’를 세워달라고 했다. 그러나 10~12세기에 그녀의 유지를 어기고 13개의 비문이 새겨졌는데 여진족의 문자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무측천처럼 명실공히 국가를 경영한 여자는 없다. 남다른 중국 역사를 만들었다는 뜻인데 중국 정부는 2007년 1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무측천의 능에 보물 500톤가량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무측천릉의 발굴을 검토 중인데 사전 조사 결과 능묘와 함께 하궁(下宮)이라는 지하궁전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곳에 당시 당나라 최고의 보물이 함께 묻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조사에 참여한 산시 성의 한 고고학자는 현재 매장품의 70퍼센트를 조사했는데 각종 진귀한 보물과 유물이 최소 500톤에 이른다고 말했다.
무측천의 능은 중국 내에서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된 황릉으로 유명하며(현존 진시황릉도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하나 그중 일부는 항우에 의해 도굴된 것으로 알려짐) 특히 고종이 유언에서 자신이 애호하던 서화를 함께 매장토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고고학자들은 ‘서성(書聖)’으로 불린 왕희지(王羲之)의 불후의 명작인 난정서(蘭亭序)도 함께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제왕 미스터리
무측천이 다른 사람과 다소 다르다는 것은 여자로서 황제가 되었으므로 매사가 과거와 다르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그것을 마음껏 즐겼다는 점이다. 그녀는 옥좌 앞에 문무 대신들이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것을 즐겼지만 신체 건장한 미남자들 즉 남총들이 그녀의 치마 아래 엎드려 절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녀의 생각은 명쾌했다. 과거 남자 황제가 수많은 비빈을 거느렸으므로 자신이 많은 남총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측천은 만년의 남총으로 설회의, 장창종, 장역지 형제 등이 자신의 공식적인 남총이란 사실을 공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총들을 거느리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낄 것이 없었다는 것은 다음의 일화로도 알 수 있다. 당시 우보궐 주경측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했다.
폐하께서 총애하는 장역지와 장창종으로 충분한데 최근에 우감문위장사 후상 등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의 성기가 크다며 봉신 안에서 시봉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간언을 올리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므로 감히 폐하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측천은 주경측의 상소에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직언을 칭찬하고 채주 100단을 상으로 내리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총을 좋아하는 것마저 중단한 건 아니다. 당나라 사람들의 개방적인 생각의 일단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도 평하지만 무측천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이 과거에 태종과 고종의 비빈이었던 것에 대한 반발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녀는 남총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어려운 국정을 직접 챙겼고 틈틈이 저술과 시를 지었으며 글씨도 썼다. 그녀의 시문집은 무려 100여 권이나 되는데 문장술이 당대의 어느 작가와 비견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탁월하다고 중국인 셰위안량이 평가하기도 했다.
무측천이 황제로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로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나이로 즉위한 황제다. 그럼에도 황제가 될 초기에는 건강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정력적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무측천이 여자 황제인데다가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당연히 대두되는 문제는 누구를 후계자 로 세우느냐였다. 그녀는 집권 초기에 명분을 세워 조카들인 무씨들을 왕에 봉해 특권을 주었고, 넷째아들 예종 이단의 성을 무씨로 바꾸고 황사(皇嗣, 황제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삼아 동궁에 거하게 하면서 황태자에 준하는 의례를 갖추도록 했다.
무씨 종실의 정치적 지위를 높여가면서 이씨 성의 자식에게는 ‘제위 계승 후보자’라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제위 계승 문제는 골치 아픈 문제 거리가 되었다. 무씨와 이씨 간의 세력 다툼 때문이다. 무씨 세력은 무측천이 나름대로 중용했기 때문에 그녀가 황제가 된 후에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한편 당나라에서 주나라로 왕조가 바뀌면서 이씨가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세력은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고종과의 사이에서 난 이씨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면 자신이 세운 주나라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고 자신의 조카들인 무씨에게 제위를 물려주면 주나라라는 국호는 유지될 수 있지만 조카는 친자식만 못하다. 황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장차 자신의 친계인 아들과 손자들이 몰락하리란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껄끄러운 사건에 휘말리면 몸보신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신하들이 무측천의 눈치만 보고 있는데 하루는 적인걸에게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해달라고 의뢰했다. 꿈속에서 큰 앵무새의 두 날개가 꺾이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적인걸은 다음과 같은 해석으로 무씨 즉 조카를 후계자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앵무(鸚鵡)의 무자 중 무(武)자는 폐하의 성씨이고 두 날개는 두 자식입니다. 폐하가 두 자식을 세우면 두 날개가 떨쳐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측천은 자신의 아들 중에서 예종이 아니라 중종을 698년 황태자로 옹립했다. 그녀가 이단을 제치고 이현(이철)을 태자로 삼은 것은 이현이 형이므로 서열 관념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이씨 간에 제위 때문에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단도 어머니인 무측천의 뜻을 알고 이현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를 청했다. 무측천은 황사 이단을 상왕으로 낮추고 이현을 황태자로 삼았다. 가장 골머리를 썩일 후계자 문제를 일단 봉합한 것이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는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 사고가 일어났다. 장간지가 무측천이 요양하던 곳을 포위하고 이현에게 제위를 양여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무측천은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5년 정월 25일 중종이 복위했다. 또한 열흘 후에 국호를 당나라로 회복했고 모든 것을 고종 이전으로 돌렸다. 무측천은 상양궁으로 압송되어 300여 일을 더 살다가 705년 11월 26일에 사망했다.
무측천은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평가할 때 양극단으로 엇갈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는 ‘무자비(無字碑)’를 세워달라고 했다. 그러나 10~12세기에 그녀의 유지를 어기고 13개의 비문이 새겨졌는데 여진족의 문자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무측천처럼 명실공히 국가를 경영한 여자는 없다. 남다른 중국 역사를 만들었다는 뜻인데 중국 정부는 2007년 1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무측천의 능에 보물 500톤가량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무측천릉의 발굴을 검토 중인데 사전 조사 결과 능묘와 함께 하궁(下宮)이라는 지하궁전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곳에 당시 당나라 최고의 보물이 함께 묻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조사에 참여한 산시 성의 한 고고학자는 현재 매장품의 70퍼센트를 조사했는데 각종 진귀한 보물과 유물이 최소 500톤에 이른다고 말했다.
무측천의 능은 중국 내에서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된 황릉으로 유명하며(현존 진시황릉도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하나 그중 일부는 항우에 의해 도굴된 것으로 알려짐) 특히 고종이 유언에서 자신이 애호하던 서화를 함께 매장토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고고학자들은 ‘서성(書聖)’으로 불린 왕희지(王羲之)의 불후의 명작인 난정서(蘭亭序)도 함께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