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두사건: 이제 지나간 일 덮어두자고?
최근 '5공 치하 계엄군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박씨는 가혹행위에 항의하다 청송보호감호소(현:청송교도소)로 이감됐으며 지난 84년 10월 또다시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교도관들에게 폭행과 가혹행위를 당해 숨졌다'며 김씨를 포함한 당시 관련자들의 실명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표했었다.
위보면 아시다시피 박영두씨는 무슨 파렴치범으로 교도소에 가서 말안들어서 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 망할놈의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바른말 하다가 다시 청송보호감호소라는 우리근대역사상 최악의 인권사각지역에서 처참하게 고문과 구타후 죽었습니다.
어떤분은 구타중 일어난 우연한 사고라고 생각하실줄 모르겠으나, 그런분은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청송감호소 박영두 의문사 2001년 7월 14일'을 다시보기로 보십시요.
아래의 글은 그당시 같이 청송 감호소에 있었던 대도 조세형씨의 진술이고 그밖의 많은 동료 재소자의 증언과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84년 10월12일 오후 6시30분. 조세형이 수감됐던 청송교도소 제7사동. 우락부락하게 생긴 4~5명의 교도관들이 ‘군기를 잡겠다’며 죄수 박영두를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마구 때리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수갑으로 손이 묶인 박은 무방비상태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른두살이었던 박은 군삼청교육대에서 넘겨진 죄수였다. 다음날 새벽 그는 자신의 감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당황한 교도소측은 구타광경을 목격한 재소자들을 ‘범치기’가 되게 해주겠다며 회유했다. ‘범치기’는 소위 ‘귀족재소자’로 규율에 관계없이 교도소내에서 특권을 누리는 죄수를 말한다. 교도소측은 조세형에게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앞으로 징역을 편하게 해주고 영치금도 대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런데 그는 “차라리 자살하게 칼을 주쇼”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교도소측은 “조세형이는 자살 우려자”라면서 손발을 묶고 그것을 다시 뒷쪽으로 연결, 온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사동3층의 특수방에 감금했다. 교정용어로 ‘혁수정’상태였다. 밥을 먹을 때도 용변을 볼 때도 그는 벌레같이 엎드린 자세로 지내야 했다.
그는 자신이 교도소에서 탈주극을 벌였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교도관들의 구타로 동료죄수가 숨지자 그에 대한 항의성 시위를 벌였을 뿐이라고 전한다. 그는 “동료죄수가 교도관들의 구타로 사망했는 데도 교도소측이 이를 은폐하려 했다”면서 “이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를 주도했으며 교도소측은 보복조치로 전례없이 15년 동안이나 나를 독방에 감금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은 최근 그의 재심소송 변론을 맡고 있는 엄상익(嚴相益) 변호사를 통해 제기됐다. 다음은 엄변호사가 전하는 항의시위 전말.
특수방에 수감된 6개월뒤 조세형의 손발을 묶은 혁수정은 풀렸다. 그러나 그는 사동 구석의 독방에 가둬졌다. 창문마저 함석으로 용접, 밀폐된 방이었다. 한낮에도 30촉 전등불만이 유일한 광원(光源)인 그 방에서 다시 6개월쯤 지났다. 어느날 덜컥 문이 열렸다. 나가 보니 다른 죄수들의 방도 열려 있었다. 교도소측이 마음대로 다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러나 조세형은 그때까지도 박영두의 죽음을 어떻게든 외부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영두의 사망 후 1년이 지난 85년 9월19일.조세형은 교도소측이 열어둔 문을 통해 8사동으로 들어갔다. 교도관들이 뒤늦게 알고 쫓아왔지만 그는 철창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그곳에는 2백명쯤의 죄수들이 수감돼 있었다. 그는 수감자들에게 박영두 사망과정의 진상을 얘기하고 ‘법무장관과 교정국장이 내려올 때까지 투쟁하자’고 했다. 죄수들은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21일까지 사흘동안 교도관들과 대치상태가 계속됐다. 교도소장과 보안과장이 협상에 나서 “적법절차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세형 등 재소자들이 잠긴 문을 열자 교도소의 경비교도대가 출동해 이들을 집단구타했다. 자발적으로 항의를 끝내고 농성을 풀었는 데도 교도소측이 분풀이식 무력진압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조세형은 “사건주동자로 검찰에 송치되고 재판에 회부되는 과정을 통해 박영두의 죽음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도소측은 이를 묵살했다. 박영두는 심장마비사로 처리됐고, 조세형은 ‘난동’이유로 엄정독거(독방감금) 조치됐다. 행형법(行刑法) 시행령에는 ‘특별한 경우 외 엄정독거는 2년 내로 제한하는 게 원칙’이라고 돼 있다. 교도소측은 조세형을 ‘특별한 경우’로 처리했다. 난동사건 이후 14년 동안 그는 독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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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지나간일을 왜 들추냐고?
씨팔새끼들아, 너희 같으면 너의 아들이나, 동생, 아버지가 억울하게 맞아 죽고 모든게 은폐, 조작되면 다 잊고 지낼 수 있니? 당사자가 시인하고 잘못을 뉘우쳐야 그 다음 용서가 있고 선처가 있는 것이다.
박영두씨를 고문하고 구타한뒤 사망하는데 직접 참여한 사람들은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표 하였다.
아래 이름들을 오래도록 기억 합시다!
박수호 관구부장 (86년 사망): 너 죽었어도 책임져야 해! 그밖의 자세한 행위 공개 필요.
이잠술 관구주임 (현재 과테말라 이민): 일 저지르고 이민갔어
김명겸 교도관 (현재 XX교도소 배치부장): 너 아직두 거기 있니! 누굴 더 조질라고.
김의식 교도관 (현재 대구지법 XX지원 접수계장): 너같은 새끼 때문에 다른공무원이 욕먹는 거야.
위 4사람은 직접 폭행과 고문을 가한 사람들로서 추후 정보가 입수되면 공개 하기로 하겠습니다.
Eastasian2020@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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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980년 여름. 세 번의 전과가 빌미가 되어 박영두는 휴가 중인 비전도 해수욕장에서 무장 계엄군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강원도 화천의 27사단 연병장은 구타와 가혹행위가 판치는 지옥 그 자체였다. 81년 10월, 박영두는 분노가 극에 달해 있던 다른 감호생들과 함께 집단행동을 취하게 된다. 정식 재판을 받게 해달라. 가혹행위를 하지 말아달라. 이런 것들이 요구사항이었다. 물론 그들의 `봉기'는 무참히 진압되고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받은 박영두는 청송 제1보호감호소로 이송된다.
그는 청송에서도 보호감호법 철폐와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다른 피감호자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요시찰 인물로 특별사동에 격리되어 있던 84년 10월, 그는 몸이 아파 의무과에서 치료를 받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교도관들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의무과가 아닌 지하실이었다. 곤봉, 꽈배기(포승을 꼬아 몽둥이로 만든 것), 혁대, 고무호스 그리고 군화발이 두 시간 동안 난무했다. 3~4차례 의식을 잃었지만 교도관들은 물을 끼얹어가며 가혹행위를 계속했다. 꽁꽁 묶여 감방으로 옮겨진 후 구토를 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박영두를 교도관들은 방치했고, 몇 시간 후 그는 숨을 거두었다.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그리고 바지에 똥을 싼 채로….
지난 6월25일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오래 전부터 소문으로만 전해져온 이 사건의 진상을 5개월간에 걸친 조사 끝에 밝혀냈다.
사실 박영두 사건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옥중 동료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그들은 검사를 만나기 위해 박영두 사망 일주기에 맞춰 8명의 교도관을 인질로 잡아 난동을 벌였으며, 사회 병원에 실려가기 위해 칫솔대를 삼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결과를 발표한 후 위원회의 홈페이지는 교도관들의 불만과 비난으로 현기증이 나도록 어지럽다. 추악한 조직이기주의 그리고 수준 이하의 인권의식에서 비롯된 저열한 아우성들이다. 타살되었다는 `물증'을 대봐라. 나쁜 짓을 하고 교도소에 수감된 놈들에게 무슨 인권이냐. 우리의 근무조건이 얼마나 열악한지 아느냐. 왜 흉악범이 `민주투사'냐. 너희들 때문에 공권력이 무너지고 있다 등등.
교도관들은 특히 한 `잡범' 전과자의 죽음을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규정한 위원회의 결정에 원색적인 분노를 토로한다. 숨이 막히도록 살벌했던 그 공포의 시대에 한 사람의 `잡범'이 당시로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비인간적 정책에 저항함으로써, 결국 권력의 하수인일 수밖에 없었을 공무원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교도관들의 의식과 행동에는 변함이 없다는 이야기다.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에 도전하는 이른바 `흉악범'들의 처우개선 투쟁이 불순한 저의를 가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 사회가 억압적일 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기는 `민주투사'나 `흉악범'이나 매 한가지일 것이다. 어떤 이유로 감옥에 들어갔든, 그리고 각자가 가진 `저의'가 어떤 것이든 감옥에서의 반 인권적 억압구조에 대한 그들의 저항이 객관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모두 `민주화운동'일 수밖에 없다. 교도관들은 입버릇처럼 교도소가 좋아지고 있다고들 하지 않은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인간대우'를 받으려는 수많은 `죄수'들의 처절한 몸부림 덕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아마도 `태생적 한계' 때문에 가해자들을 고발하는 데도 실패했고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교도소 상층부 공무원들과 담당 검사의 실명을 공개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러나 위원회가 어렵게 해낸 최소한, 즉 직접 박영두를 죽인 자들의 실명공개를 우리는 그나마 소중한 성과라고 여긴다. 우리는 이 이름들을 오래도록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 이잠술, 박수호, 김의식, 김명겸. 지금도 뻔뻔스럽게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이들을 더 이상 웃지 못하게 하는 일.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다.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첫댓글 1988년 8월 당시 법무부장관 교정국장 법무부보안1과 손재봉 과장 그리고 안동지검의담당검사 감호소 박희흔 소장 문풍길 과장 등외 십수명을 고발하였으나 검찰의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위에 게제된 이름의 사람들이 언젠가는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그유가족앞에 용서를 비는 날이 올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