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서울 사는 상식
서울 병원에서 어머님이 퇴원 하실 때 일이라 한다.
어머님이 병원 택시 승강장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계시고 그 앞에 스님이 승복 차림으로 서 계셨다.
맨 앞에 승복을 입은 스님이 서계신 것을 보고, 서울 사는 사람인 듯한 사람이 스님에게 오자마자 급하다고 사정이야기를 한 듯, 스님은 공손히 합장하고 자리를 양보하신다.
줄이 길게 늘어선 걸 본 그 다음 사람도, 또 스님에게 뭐라 이야기하고 자리를 양보 받는다.
그걸 보신 어머님 “어허 나도 환자인데 자리 좀 양보해주세요 스님” 허시자, 스님은 또 아무 말 없이 또 공손히 두 손을 합장하시고 자리를 양보하신다.
이윽고 택시가 오자 어머님은 본인이 타시지 않고, 뒤에 서 계신 스님에게 타시라 권하자, 스님은 또 공손히 합장하시고 택시를 타고 가셨다 한다.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니, 어느 분이 그게 서울 사는 상식 이란다.
서울 이라는 곳 아무리 좋은 사람도, 그곳에만 가서 몇 년 만 살면 인간성이 상실 되는 곳 인가?
수양을 하라고 윤리시간에 가르치는 도덕경은 시험 본다면 달달 외어서 하나도 안 틀릴 사람들......
실천윤리를 가르치는 학교는 없는 게 우리현실이라, 그저 수양 한 듯한 표정만 지어도, 그 사람을 만만히 보고 이용해 먹어야, 거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시골에 사는 상식
말나온 김에 우리 모친님 무용담을 하나 더 소개하고 싶다.
친구 분들과 선운사에 놀러 가셨는데, 우연히 어느 가게에 일행이 들르셨단다.
그곳에 어느 여린 비구니께서 계셨는데, 어느 학교 남자 선생들인지 영어로 여스님에게 추파를 던지며, 장난 하는 것을 보시고 점잖게 그냥 오실 일이지, 정의감인지 모성애인지 여성으로서 동지의식인지, 불심(佛心)인지가 발동을 하셔서, 눈에 불을 쓰시고 대갈일성 하신 말씀 왈, 감히 남자선생님들께 “어이 영어를 쓸데 가서 써 영어 쓸데가 없어서 스님한테 영어를 써 - 어 “ 라고 여자 몸무게88kg의 거구에서 품어져 나오는, 메조소프라노로 불호령을 내시니, 제아무리 지체 높으신 남자 선생님들도, 뒤에 서계신 할머니들 숫자도 있고 하니 꽁지를 내리고 퇴장을 하고,
그 얼굴이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비구니께서는, 할머니들 곁으로 얼른 오시더란다.
그걸 보신(지금은 고인이 되신) 당시 정읍 배영고 이사장님께서 “형님 참 야단치실 분이 야단 치셨네요” 라고 하셨다 한다.
거기서 무용담(武勇談)이 끝나고 여자분 이니까 무용(舞踊)담을 써야 나도 기분이 좋을 터인데, 무용담(武勇談)이 거기서 그치질 않는다.
선운사 구경을 마치시고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할머니들께서 줄을 서 계시고 있는데, 버스가 막 도착하자 어느 술 취한 남자가, 어디서 번개처럼 달려 와서, 버스 승강구 문 양옆을 양손으로 꽉 잡더니, 그 뒤를 따라 오는 여자 일행들을, 뒤에 아까부터 가랑비 맞고 줄 서있는 할머니들을 무시하고 태우는걸 보시고, 연세도 지긋한 할머니이시니까 술김에 저러는가보다 하고 이해를 좀 하셨으면 좋으련만.
자기 앞에 서계신 키 작은 친구 분이, 그 남자 목뒤 옷깃을 잡으려고 손을 올려도 잘 안 잡히자, 그 친구 분을 비키라고 옆으로 밀어내시고, 그 남자 목뒤 옷을 한손으로 잡아서, 단 한번에 뒤로 벌러덩 다운을 시켰으면 그걸로 만족 하셨어야지, 발로 한번 더 밟아서 마무리를 하시고, 자기 일행들과 차에 오르셔서 그 일행들과 정읍에 도착 할 때 까지 파이팅을 하셨다는 점잖치 못한 전력을 자랑하셨다.
그런 화려한 전력을 자랑 하시던 모친께서 84세로 연세가 드시자 별세하셨다.
어머님이 저승에서 이글을 보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평생을 정부미만 드신 어머님
어머님은 순창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잣집 손녀딸로 태어났다.
외할머님이 임신했을 때, 점술가가 “이집에서 큰 갓을 쓴 사람이 살 것이요“.라고 예언했다.
그리하여 외할아버지 부부는 꼭 아들일 줄 알았는데, 그 집이 군수 관사가 되어 지금까지 군수 관사라 한다.
은씨 가문에 시집 오시기전, 외할머니는 큰딸 사주를 여기저기 넣고 사위를 얻고자 궁합을 보는데, 큰딸 사주가 외국인과 결혼을 하거나, 흑인 외국인과 결혼할 경우, 국가 운명을 좌지우지 할 사주라는 얘기를 두 사람 이상의 점술가에게 듣고 그 소리가 기분은 좋으면서도, 왠지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오히려 순창군에서 손꼽히는 미모의 딸 팔자가 센가 보구나, 하고 걱정이 앞섰다.
부자 집 딸로 태어나고, 부자 집 며느리로 살아온 외할머니는, 부자들의 치부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시집올 때부터 첩(妾)이 있었고, 돌아가실 때까지 첩(妾)을 두고, 사신 외할머니는 부귀를 가진 남자는 거의 다 축첩(蓄妾)을 한다고 믿었다.
더구나 외국인에게 딸을 주기는 싫었다.
경상도 마산에서 나라가 알아주는 거부 집안에서도 “어떻게 하면 사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라는 아주 겸손한 듯 보이는, 간절한 청혼도 있었다. 허나 사투리가 센 그 지방 말투가 싫고 풍습이 낯설어서 싫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혼처 중에 제일 가난한, 그러나 축첩하지 않는(가난한 덕택에?) 우리 집안에 딸을 시집 보내셨다.
시집보내기 전 딸에게 “내가 나중에 집도 주고 논도 주마, 그러고 신랑이 공무원이라니 평생 밥은 굶지 않을 것이니, 그리 가라 여자는 평생 한남자의 지속적인 사랑만 받으면, 그게 제일 큰 행복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일 많고 식구 많은(아버님은 칠남매 중 장자시다) 가난한 농사 집에 온실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란, 일 못하는 열여덟 철부지 큰며느리가 예쁘게 보일리 없는 시어머니(당시 제주도 목사(지사)딸)께, 짭짤한 시집살이를 한 덕택에 음식솜씨가 뛰어나고 큰 잔치경험이 많아, 공무원 가족들 큰 행사는 전라북도가 좁다하고 초빙을 받아 다니셨고.
국졸이시라 학식은 없으시면서, 고졸도 많은 어떤 부인회 간부 등도 역임 하셨다.
덕택에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텅 빈집이 나를 맞이하는 일이 많았었다.
외할머니 소원대로 아버님은 평생 축첩은 하지 않으셨지만, 나중에 장모님이 주신 집과 논이 생기자, 그전 근검절약 하던 모범 공무원이 마작에 손을 대서, 오히려 딸 속을 썩히고, 불명예스럽게 퇴직하셨다.
오히려 논과 집 안 주신 것만도 못한 결과를 가져와, 세상에 공것이란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어느 날 나는 한가한 때 어머님께 물어봤다.
바람피우는 부군보다, 노름해서 속 썩히는 부군님이, 더 나으신가요.
“그것은 부처님도 돌아앉는 다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외할머님의 혼인 정책이 성공하신 것으로 보였다.
딸만 둘 낳고 아들을 못 낳은 것이 한(恨)인 외할머니 한을 풀어드리려는 듯, 외할머니 두 딸은 칠 남매씩을 낳았다.
어머님의 가장 큰 업적은, 우리 칠 남매를 낳으신 것이라 보인다.
아들 넷 특별히 잘 낳은 아들은 없지만, 모두 병역 필 할 정도로 건강하게 낳아 키우셨다.(원정 출산 할 돈이 없으셨는지? 당시 군 단위에 두 세명인 사무관 힘으로는, 아들들을 병역의무에서 빼기가 힘드셨는지?)
딸 셋 경국지색(傾國之色)감은 못 낳으셨지만, 한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은 예쁘게 낳으셨나보다.
우연인지 사위 셋도 모두병역 필했고, 그 중에는 장교출신도 있으니, 아버님은 대통령 출마하셔도 자녀 병역으로, 시비가 되지는 않으니까 충분한 자격이 있는데, 그것은 모르시고 별세하셨다.
어머님 팔순 잔치 때 아들손자 며느리 사위 진 손자까지 모두 세어보니 60명이 넘었다. 어느 조상 묘 은덕인지, 할머님들이 부처님을 잘 섬기셔서, 인줄은 모르나, 그 많은 가족이 밥 굶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너무 먹어 살 빼야 할 사람이 절반이 넘고, 현재 지방 공무원인 내가 제일 가난할 정도로 재산들도 있으니, 어머님은 행복한 인생을 사신 것 같다.
임종을 몇 달 앞두고 나는 어머님께 물어봤다
어머님 일생이 행복 하셨냐고, 매사가 긍정적인 성격이시라, 내 일생은 보편적으로 행복했다. 고 말씀하셨다.
어머님보다는 조금 더 잘사신, 이모님 눈에는 이모님 표현을 빌리자면 “징그랍게도 고생혔어” 라고도 보이는 일생을 “나는 행복했다”하고 만족하시며 별세 하셨다.
순창군 적성면장 따님으로 18세까지 사시다, 공무원인 아버님께 시집와서 40세때(아버님45세때)부터 과장 사모님 소리를 들으시다, 금산군, 임실군, 순창군, 부안군 4개군 산업과장 사모님으로 사시다 퇴임하셨다.
그 뒤 큰아들은 철도 공무원에 취직하고, 둘째는 미원회사, 셋째는 한전공무원, 넷째인 나는 행정 공무원이니, 아들 절반이상이 공무원이라, 여자일생이 어려서는 부모님, 결혼해서는 남편, 늙어서는 아들에게 의지한다고 보면, 어머님은 평생을 국록(國祿 정부미)을 드신 셈이다.
사람의 일생을 혹자는 무대에 나오는 배우로도 표현을 하는데, 어머님을 배우라고 본다면, 나는 어머님의 일생과 그분의 다채로운 퍼포먼스(performance)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어머님 말씀왈 “나는 학교 다닐 때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등은 오리 대그빡이고 (을 乙자 모양이 오리를 닮아서 그리 표현하신 듯)나머지 음악, 미술, 무용, 서예,요리 등 예능과목은 갑(甲) 이였었다.“라고 말씀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귀에 조금 전 들은 것처럼 선하다
첫댓글 아휴.... 가족사가 화려하시네요
정부미라고 하길레 옛날 노풍벼 흉년이 생각나서 그때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기름진 정부미그만요.....ㅎㅎ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옛말에 끄덕 끄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