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성사와 현도시대
의암성사는 포덕 46년(1905)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하였다. 따라서 동학은 은도(隱道)의 시대를 벗어나 현도(顯道)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의암성사는 거족적인 3·1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의암성사의 이름은 손병희(孫秉熙)이다. 의암성사는 포덕 2년(1861)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에서 태어났다. 부의 이름은 의조요, 모는 최씨인데, 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성사를 낳았다고 한다. 호방한 젊은 날을 보내던 의암성사는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새로운 세상인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커다란 종교적인 목적을 지닌 도라는 말을 듣고는 포덕 23년(1882)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의암성사는 호방했던 일상생활을 일시에 청산하고, 전도인(傳道人)으로부터 받은 주문 21자를 매일 3만 독(讀)씩 읽고 외우며 지극한 수련에 임하였다. 또한 이와 같이 주문을 읽는 틈틈이 매일 같이 짚신을 두 켤레씩을 삼았으며, 이 짚신을 한 달에 여섯 번 5일만에 열리는 청주 장(場)에 나가 팔았다. 이와 같은 생활을 3년간이나 시행해 왔다고 한다. 즉 주문을 통한 수련으로 일관된 생활을 해나갔던 것이다. 이후 의암성사는 해월신사를 모시고 공주 가섭사(伽葉寺), 익산 사자암(獅子庵), 그리고 풍천 용문사 등에 들어가 독공(篤工) 수련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의암성사의 지극한 종교적인 수행이 훗날 그 많은 업적을 이루게 하였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동학혁명 당시 의암성사는 북접 동학군의 통령(統領)으로 진두 지휘를 하며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해월신사를 모시고 관의 추적을 피해 원주(原州), 여주(驪州) 등지를 전전하게 된다. 37세가 되던 포덕 38(1897)년 12월 24일 해월신사로부터 도통(道統)을 전수받고 천도교의 3세 교조가 되었다. 종통을 이어받은 의암성사는 교단을 재수습하는 한편 세계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해외로 떠나던 중,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지사(志士)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또 교인 수습책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암성사는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교인 청년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일본에 유학을 시키는 등 꾸준하게 재기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포덕 45년(1904)에 노일전쟁(露日戰爭)이 발발할 기미가 보이자 국내 동지들에게 지시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교인들을 규합시키는 한편, 이 해 8월에 전국의 회원으로 하여금 일제히 머리를 깎고 검정물 든 옷을 입는(斷髮黑衣) 등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는 동시에 기우는 국운(國運)을 혁신하고자 개혁과 신문화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포덕 46년(1905)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하였다. 따라서 동학은 은도(隱道)의 시대를 벗어나 현도(顯道)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의암성사는 포덕 47년(1906) 1월 귀국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또 각 군에 교구를 설치하여 근대적 종교체계를 갖추는 한편, 진보회를 일진회(一進會)로 규합하여 친일 행각을 벌인 이용구 등 60여 명의 친일 간부 교인들을 출교 처분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포덕 51년(1910) 일제의 강점으로 우리 나라는 일제로부터 치욕적인 통치를 당하게 되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의암성사는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을 짓고 천도교의 전국 교역자 대표들을 이 곳에서 일곱 번에 걸쳐 소집하여 총 483명에게 이신환성(以身換性)을 위한 49일 특별수련을 시켰다. 이러한 수련은 곧 정신력의 단결과 조직의 강화를 기하기 위한 것으로서, 뒷날 일어나게 되는 3·1 독립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즉 의암성사는 이미 10년 가까운 기간을 3·1 독립운동을 위하여 그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포덕 60년(1919) 1월 5일을 기하여 전국의 교인들에게 일제히 49일 특별기도를 명하여 3·1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정신무장을 시킨 후 3월 1일 거족적인 3·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3·1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일제에 의하여 구금된 의암성사는 옥중에서 고문으로 전신마비의 병환을 얻게 되어 이후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그 병세가 악화되어 포덕 63년(1922)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서 향년 62세로 환원(還元)하였다. 수운대신사나 해월신사와 마찬가지로 의암성사 역시 억압받는 민중과 민족을 위하여 혼신의 정성과 힘을 다하다가 부당한 힘에 의하여 장엄하게 순도(殉道)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