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은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미학이론’의 두 번째 장인 ‘상황’은 ‘현대성의 역사철학’이라는 지적처럼 현대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아도르노의 현대성 이론은 ‘급진적인’ 현대성 내지 현대성의 ‘급진화’로 표현될 수 있다. 아도르노에서 현대성은 보들레르에서 시작된 전통선상에서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현재로서 간주된다. 경험 가능성의 한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간화된 현대성은, 규범적인 요청으로서 현대성의 포착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불확정적이고 부정적인, 결여적인 개념으로서 현대 예술에 대한 도전으로서 간주된다. 아도르노에서 현재성으로서의 현대성을 포착하는 노력은 동시에 새로운 것이라는 범주에 의해 매개되어서 사고된다.
후기 아도르노는 모더니즘의 노화라는 판단과 짝을 이루면서 현대성의 급진화를 사고한다. 이 급진적 현대성은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거치면서 뒤늦게 새롭게 주목되면서 ‘모더니즘 이후의 현대성’을 해명하는 단초를 담고 있다. 아도르노는 포스트모더니스트와는 달리 모더니즘의 노화에 대한 해결책을 현대성의 종언을 주장하지 않고, 현대성의 급진화를 추구한다. 이 이론은 비판이론의 지평 속에서 벤야민의 ‘현대성의 고고학’(과거의 구출)이나 ‘기획으로서의 현대성’이라는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현대화론과 구분되는 독자성을 지닌다.
아도르노에서 종종 동의어로 사용되다시피 하지만 새로운 것과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협의의 현대성은 보들레르적인 의미에서 ‘현대적 삶’ 혹은 현대적 경험과 밀착되어서 사고된다. 현재 시간에 대한 현재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성은 ‘탈전통적인 사회’에서 더 이상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단절이나 부정을 통해서 정당화되지 못한다. 더 이상 상관적이지 않은 현대성, 이른바 ‘절대적 현대성’은 순간적인 지금을 포착하고 지속으로 구출되어야만 진정성을 획득한다. 다른 한편 이 절대적인 현대성의 이념은 합리화되고 테크놀로지화된 경험들의 매개들을 모두 거침으로써 객관화될 수 있다. 이른바 ‘재료적 현대성 개념’의 중심에는 ‘경험 방식’으로서의 현대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급진적’ 현대성은 새로운 것의 구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기억과 동경 사이에서 경험되는 현재의 불확정적 시간성, 순간성은 새로운 것에 의해 객관화되고 지속성을 얻게 된다. 새로운 것은 벤야민에서 유래한 ‘항상 똑같은 것’으로서의 새로운 것에 대한 비판적인 대결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것은 벤야민과는 달리 ‘항상 똑같은 것’에 대한 부정으로서 규정된다. 새로운 것은 센세이션과 이노베이션의 메커니즘과 비판적 대결을 거치면서 자기 입증되어야 하는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범주로서 설정된다. 새로운 것은 센세이션을 동반할 수 있지만, 센세이션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은 이름 없는 것이며, ‘판단 없는 판단’이다. 그런 점에서 ‘불가항력’이다.
아도르노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이론적인 파악은 ‘비동일자’ 범주를 이론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었던 후기 사상, 특히 ‘미학이론’이 이룩한 성과이다. 이점은 “미학이론”과 “미니마 모랄리아”를 대비할 때 잘 드러난다. 아도르노에서 동일성 사유의 비판과 비동일자의 옹호는 새로운 것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아도르노에서 새로운 것은 추상적이고 불확정적인 범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주관적인 범주라거나 미래에 투사되는 범주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현재적인 범주이다. 새로운 것의 불확정성과 불가항력에서 경험되는 전율은 미메시스적인 행동방식을 불러일으키지만, 여기에서 이 미메시스적인 행동방식은 퇴행 없이 합리성과 화합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의 경험 속에서 주체에게는 자기보존의 동일성 주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주체적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이 불확정성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개인에게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열어주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운동하게 한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과거지사로, 옛것으로 밀어내는 위력을 발휘하고, 옛것과 새것의 관계를 재구조화하고 재편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