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동아시아사’ 교과서와 지역적 정체성
백영서(서남포럼 운영위원, 연세대 사학과 교수)
얼마 전 서양사학계 원로가 타계하셔서 문상 갔을 때 겪은 일이다. 그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동아시아사가 개설될 예정이란 소식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한 중견 서양사학자의 발언이 내게 충격을 주었다. 동아시아사 개설을 얻어낸 동양사학자들의 노력을 봐라, 도대체 서양사학자들은 뭐하는 거냐는 식으로 말했다. 술좌석의 언사이니 깊이 따지고 들 일은 아니나, 그 발언의 밑에 깔렸을지 모르는 심리가 영 마음에 걸린다.
지금 그 골격을 짜기 위해 회의가 진행중인 것으로 아는데, 이 기회에 그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도록 다양한 논의가 일어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서남포럼의 지원으로 경향신문 1월 13일자와 20일자에서 두 차례 걸쳐 심도 깊은 토론이 있었는데, 이에 덧붙여 내가 평소 생각해온 것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먼저 새 교과과정이 특정 영역의 학자나 교사의 영역 확장에 그쳐서는 결코 안된다. 예컨대 그것이 동양사 전공자들이 동양사 부분을 더 많이 교육시키는 데 만족한다거나, 또는 (한국사가 동아시아 속에 해소될까 염려한 나머지) 그것을 한국사의 확장으로 간주하고 기껏해야 한국사를 중심으로 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사 내지 교류사에 머문다면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는 것이다. 그래 가지고야 주무부처가 의도한바 역사분쟁을 넘어 ‘화해의 동아시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역사적 전망은 희미해질 뿐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적 교과서 제도가 도입된 이래, 역사교과서는 대체로 국사와 세계사의 이원체계를 유지하면서, 기본적으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한 민족적․ 국민적 아이덴티티를 형성․ 유지하는 데 기여해왔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는 일국을 넘어 동아시아에 일체감을 갖는 동아시아 아이덴티티 형성의 계기를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
바로 이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 이미 동아시아 이곳저곳에서 착수되었다. 자국사와 세계사의 2과체제를 문제 삼으며 새로운 동아시아 역사 구축의 필요성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교과서가 자국의 이웃 지역인 동아시아에 관한 기술이 양적으로 적고 내용의 차이가 크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하고, 자국과 관계가 깊은 이웃 여러 나라의 의 역사를 중시하고 더욱이 그것을 각국별이 아니라 지역 전체를 가능한 한 일체화해서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2005년 한중일 3국 지식인들이 제작한 동아시아 공동의 역사부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였다. 이것이 당국의 동아시아 교과 개설 결정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 같으므로, 이에 대한 논평 형식으로 새로운 교과서의 방향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이미 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호에 발표한 바 있는데, 그 핵심주장만 여기에 옮기면 아래와 같다.)
『미래를 여는 역사』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과 그에 대한 한국인과 중국인의 저항이 상세하게 다뤄져 있다. 그런데 이런 서술이 한국과 중국의 기존 역사교과서에서 상당히 강조되어 있어 이미 익숙한 것이므로 독자의 역사인식의 지평을 넓혀 동아시아적 정체성을 갖게 하는 데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은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서술하기 위해 장절 구성에서부터 삼국의 이야기가 각각 균등하게 다뤄진 특징이 눈에 뜨인다. 특히 동아시아 역사를 서술할 때 흔히 상대적으로 덜 중시하게 되는 한국 부분이 잘 드러난다. 한국을 비중있게 다룬 것은, 한국인이 다른 두 나라의 인민에 비해 피해자의 역사경험만 갖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동아시아의 역사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집필진의 동아시아적 관점은 삼국을 병렬한 것, 다시 말하면 각국별 역사를 병렬한 것이지 동아시아 지역 전체를 구조적으로 연관시켜 파악한다는 목표에는 미치지 못한다. 물론 각장절의 말미에 칼럼이란 난을 설치해 국경을 횡단하는 개인이나 사물을 소개하고 있어 그 한계를 보완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세 나라의 역사를 합친 ‘삼국지(三國志)’란 인상을 벗어나기 힘들다.
바로 위의 지적에서 드러났듯이 이 책이 내세우는 동아시아사적 관점이 어떤 것인지 좀더 명료해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공통의 역사교과서’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라는 기본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 목표가 상대국의 입장에서 역사적 사건을 복안적(複眼的)으로 이해한다든가 공감한다든가 하면서 자국을 상대화하고 분석하는 것을 통해 공통의 역사인식을 형성하도록 이끄는 것이라면, 삼국의 역사를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을 넘어서 상호 연관의 역사를 서술하고, 더 나아가 국가 중심의 역사서술을 어느 정도는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해 나는 동아시아 안과 밖의 ‘이중적 주변의 눈’, 즉 서구 중심의 세계사 전개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한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질서에서 억압당한 또 하나의 주변의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런 ‘눈’으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다시 볼 때, 연대와 갈등의 동아시아 역사의 전모가 또렷이 드러날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 질서의 역사에서 중국(제국)-일본(제국)-미국(제국과 그 하위파트너 일본)으로 중심이 변화함에 따라 그 각각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기억이 어떻게 변화하면서 중첩되기도 하는지가 복합적으로 서술될 것이다.
끝으로, 새로운 교과서가 한국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동아시아 지역 안에서 소통 가능한 내용을 갖출 때에만, 동아시아에서 처음 시도하는 우리의 작업이 보편성의 확보라는 값진 보답을 받을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