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가 장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요즘세상 좋은 자리를 두고 서로 앉으려고 이전투구를 해댄다. 그러다 보면 자리가 모자라게 되고 심지어 자리가 없으면 새롭게 만들기도 하는 실정이다. 소위 자리가 금전을 창출한다는 것이 되고 말아 세상 허무함을 느낀다.
사르트르의 말을 세상 우수개소리로 바꾸어 옮겨 보자면, ‘그 자리가 무슨 자리인가?’ 보다는 ‘거기는 돈이 얼마나 생기는 곳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일까?
'염불보다 잿밥'이란 소리가 더욱 어울리는 말이다. 소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사회병리현상이다. 이럴땐 배를 움켜지고 소리내어 웃어야 제격일 것이다.
실존주의는 현실의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구조와 본질을 밝히고자 하였다. 실존주의의 입장은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명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에 관한 질문보다 '인간은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는가?'라는 실존에 관한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두 차례의 세계대잔을 겪은 유럽에서는 는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했다. 그 결과 인간의 이성 역사의 발전, 신의 권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났다. 전쟁의 체험,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고발 및 증언 앞에서 허망과 절망을 철학적, 문학적 고찰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절망감을 지성으로 극복하고 논리화하는 과정에서 실존주의 철학이 생겨났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주체적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한다. 실존주의는 합리론과 관념론에서와 같은 주지주의적이고, 이성적인 윤리 사상에 반대하는 철학사조이다.
오늘은 4. 19혁명 51주년일이다.
4. 19혁명은 당시의 불법 · 부정선거와 독재의 탄압에 항거하기 위하여 목숨바쳐 분연히 일어난 구국국민혁명이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날이 갈수록 발전되어 자유 · 평등 · 박애정신이 향상될 것이라 염원해 보지만, 세상사는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전히 특권의식과 탐욕이 평범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군림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누구의 주장처럼 또 다시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그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척도를 알 수 없을뿐더러, 사람마다 느끼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라고 지칭 되는 나라보다는 '자유스럽고, 풍요로운 나라'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르트르 말의 의미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다.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오랜만에 그 말이 실감이 나서 다시 옮겨보았다.
첫댓글 그당시는 아직 민주주의가 꽃피지 못했든것 같아요..이승만 양아들이 4.19에 참배하려다가 못했다고 하더군요.
먼저간 영령들에게 고개숙여 혼을 달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