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공부(12)
17. 황야의 시험을 받으시다.
누가 4:1-13 (마태4:1-11, 마가1:12-13)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예수 자신에 관한 준비는 끝났다. 죄없는 사람이 죄있는 자와 동일하게 우리들의 삶과 같은 입장에 서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씩씩한 행동을 가상히 여기시어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나의 마음에 흡족하다"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이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전도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따라서 전도를 개시하면 될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로 하여금 즉시 전도의 길보다는 먼저 황야로 발길을 인도하여 악마의 손에 넘겨 40일 40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당하게 하셨다. 즉 수세와 전도시작과 사이에 황야의 시험다리를 놓으신 것이다.
성령을 받아 득의 절정에 있는 예수를 일단 곤혹의 밑바닥으로 던져 넣으신 것이다. 시험인 이상 악마가 이기냐 예수가 이기느냐 이는 예수님께서 승리하실 확신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리라.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단호한 하나님의 조치일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대담한 일이며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 한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10)이다.
전도는 사랑이다. 모든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서서 함께 슬퍼하고 함께 괴로워하며 함께 기뻐하고 고민하고 믿는 일이다. 자기는 높은 자리에 있으며 "여러분"하고 말하며 손을 내미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 다시 함께 높은 곳으로 오르는 일이다 (빌 2:5, 엡 4:9-10). 전도는 입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손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또 발로 하는 일도 아니다. 전도는 사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사는 일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는 이웃과 함께 괴로워하며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유혹의 구체적인 부분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본 장에서는 대략적은 골자만 살펴본다.
가. 예수의 유혹은 세례의 직후에 왔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성령에 충만해 있을 때 온 것이다. 누가가 "예수는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올라오셨다. 성경에 40일 동안 황야를 이끌려 다니면서 악마의 시험을 당하셨다고" 한 그대로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높은 자각에 불타 득의와 기쁨의 절정에 있을 때 악마의 유혹의 손이 뻗쳤던 것이다. 일찍이 악마가 이브를 속여 유혹했던 같은 수단으로(창3:1) 예수를 유혹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예수에게 말하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듯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떻소. 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한 번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면!"이 얼마나 교묘한 유혹인가. 누가 이런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그만한 능력이 없으면 몰라도 이는 분명 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니 만큼 이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유혹은 항상 강할 때와 승리해 기쁨에 있을 때 우리들을 공략한다. 예수의 유혹이 어떤 때 일어났는지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 마태에 의하면 "성령에 이끌리어 황야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에게 인도되었음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를 유혹으로 끌어들이셨던 것이다. 마가에는 "이윽고 성령은 예수를 황야에 몰아내셨다"고 있어 그 뜻이 한층 확실하다. 아마 예수는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대로 곧 전도를 하시려고 했을 것이나 하나님은 이를 허락치 않으시고 황야로 내모셨던 것이리라. 그는 여러 번 "아버지 나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가 약함을 알고 "마음은 설레어도 몸이 약하다" 는 것을 알면서 악마를 두려워하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매어 달리면서 악마의 유혹에 맞선 곳에- 여기에 그의 대승의 이유가 숨어 있었다.
다. 예수는 40일 동안 -- 마태에 의하면 40일 40야 -- 악마의 시험을 받으셨다. 40일이라 함은 오랫동안 악마가 예수를 완전히 시험해 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라는 의미이다.
라. 마태와 누가는 세 가지 시험을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는 아무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누가에 의하면 제1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 제2는 악마에게 무릎을 꿇어 경배하면 모든 권위와 영화를 주겠다는 유혹. 제3은 하나님의 아들이면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밑으로 던져 보라는 유혹이다. 마태의 것은 전연 이 내용을 같이하되 다만 둘째와 셋째의 순서가 다르다. 양자의 다름에 대하여는 학자 간에 논란이 있는 곳이다. 마가가 "예수는 40일 동안 황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다" 고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 아마 마가는 그 내용에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리라. 마가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단에게 이긴 사실만이 중요했던 것이리라.
마.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 셋의 시험은 40일 40야 시험 당한 유혹의 전부인가 아니면 일부인가이다. 그리고 예수가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임하는 모든 시험을 받으셨던 것인가. 혹은 메시아로서 그, 즉 그의 하나님 나라 건설에 관해서 만인가의 두 가지 점이다.
하나: 마태에 따르면 40일 후에 비로소 시험을 당한 것처럼 보이고, 누가에 따르면 40일간 시험을 받은 후 마지막으로 이 세 가지 시험을 당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 마태도 누가도 같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마가가 간단명료하게 말하였듯이 40일간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셨던 것이리라. 즉 예수는 40일간 여러 가지로 시험을 받았지만 이를 요약하면 이 세 가지 속에 모두 원리로서 포용되는 것이리라.
둘 : 인간적인 일반적 유혹인가 또는 예수의 전도 준비에 관해서 만인가는 분명치 않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서 우리들과 똑 같은 유혹을 받으셨다(4:15). 따라서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서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유혹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셋의 유혹이 인간에게 임하는 모든 유혹을 전부 포함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또 수세 직후에 경험한 것으로서 이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각을 뒤집어엎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로서의 예수. 바야흐로 전 세계에 나타날 예수의 하나님 나라 건설의 방침, 정신에 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르다. 이점은 앞으로 유혹에 대하여 집중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바. 또한 이에 관하여 주의할 것은 악마는 온갖 유혹을 마치자 일단 예수에게서 손을 떼었다(13)라고, 이는 일단은 다음 기회까지를 의미한다. 즉 유혹은 이것으로 일단은 끝난 것이고 악마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누가에만 있는 "온갖 유혹을 마치자라는 표현은 아무리 예리하게 해석하더라도 지나침이 없다. 이로부터는 예수의 생애에 유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까지 강조하는 학자도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생애 마지막에 "다음기회에 온다". 누가 22장 3절에 있어서 사탄은 유다를 사로잡는다. 또 예수의 제자들을 유혹한다(22:31). 더 나아가 예수까지도 유혹하려 한다(22:39-46).
마가와 마태(요한)에는 이 뒤에도 수차례 그를 유혹한 사례들이 있다.
1) 왕이 되려는 유혹(요 6:15).
2)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악마는 베드로에게 들어가 예수를 습격한 사건(마 16:21,23).
3) 변모산에서 분명히 강렬한 유혹이 있었다. 똑같이 베드로를 통하여 악마가 예수를 공격했다 (마 17:1-8). "나"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십자가를 빼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유혹이다.
4) 겟세마네에서 (동 26:36).
5) 십자가에 있어서 최후 최대의 유혹(동 27:39). 그것이 얼마나 큰 유혹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22장 28절 등 그밖에 많은 유혹이 있었다.
예수의 생애는 실로 유혹의 연속이었다. 제1인자로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왜 이처럼 유혹을 받으셨던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한 것이었다. 자연의 이치에서도 잘 익은 과실에 벌레가 많고 건장한 청춘 남녀에게 모진 병이 생기듯이 악마 또한 강한 사람 하나님에 대하여 뜨거운 신앙을 갖은 신앙인에게 유혹한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간에게는 악마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는 악마에게나 하나님에게 모두 다 버림받은 사람이다. 악마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그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유혹은 즉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랑과 신뢰가 관계가 지속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예수가 왜 이처럼 지독하게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는가 하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아들로서 악마를 쳐부수고 죄에 얽매인 우리들을 석방하려 하시는 것이다(히 2:14-15). 악마가 그에게 맹렬하게 덤벼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정교한 비책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일격에 쓰러트리려 했던 것이다.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게 되면 베드로 요한쯤은 쉽게 넘어트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실로 악마의 유혹은 악마에게 있어서 사활이 걸린 대 문제였다. 단지 악마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또한 최대의 문제였다. 만약 제2의 아담이 제1의 아담처럼 악마에 진다면 그것은 실로 엄청난 대문제였다. 그것은 전 인류의 운명에 관한 대문제였다.
로마의 시저의 궁전에서는 세상의 온갖 환란을 즐기고 있을 때 또 하나님의 도시인 예루살렘에서는 위선적인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며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을 때에 유대의 황야의 한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사단과의 대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마침내 이 사단의 머리를 산산이 부수어 항복을 받아낸 것이었다. 이기고도 남은 대승을 거두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