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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육상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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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후기 스크랩 2014.9.12일 금요일 이야기가 있는곳, 남산 야간에 다시 걷다.
재휘애비 추천 0 조회 45 14.09.13 00: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야간에 보는 숭례문, 禮을 더 생각하게 한다.

 

안내판 어디에도 김유신장군 동상이 있다는 표시가 없는데, 팻말하나로 끝이다.

최소한 설명 안내문 하나는 있어야 할것 같다.

취직하면 이것부터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595년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멸망한 가야 왕손으로 증조 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이며, 할아버지는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무력이다.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가야의 왕손, 망국의 후예로 자라다

남산에 있는 김유신 장군상,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1,4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추앙 받고 있다.
<출처 : Integral at ko.wikipedia.com>

 

 

 

김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사랑하여 중매를 거치지 않고 부부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안 숙흘종이 딸을 가두어놓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신라 왕실의 일원이었던 만명과 가야계였던 김서현과의 혼인은 당시 사회적으로 용납받기 어려운 결합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벼락이 집 문을 쳐서 지키던 사람이 혼비백산한 틈에 만명은 빠져나가,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던 김서현을 따라갔다고 한다. 아마, 만명의 가족들이 결혼을 묵인하고 김서현에게 만노군 태수라는 벼슬을 내렸을 것이다. 만노군은 지금의 충청도 진천 지역으로, 이곳에서 김유신은 태어나고 자랐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화랑이 된 김유신은 2년 뒤, 외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의 석굴로 들어가 수련했다. 이때 난승이라는 노인을 만나 삼국통일에 쓸 비법을 전수받았다. 또 다음 해에는 홀로 보검을 들고 인박산에 들어가 기도하니, 사흘째 되는 날 허성(북쪽의 넷째 별자리)과 각성(동쪽의 첫째 별자리) 두 별이 환하게 빛나면서 칼에 내려앉았다. 김유신이 소년 시절부터 삼국통일의 뜻을 품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그 힘을 길러나갔다는 전설적인 일화들이다.

낭비성 전투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다

김유신이 처음으로 전공을 세워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629년(진평왕 51년)의 일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은 실패하는 듯 보였다. 부상자가 늘어가는 가운데 신라군은 고구려의 기세에 밀리고 있었다. 이때 오늘날의 연대장이라 할 수 있는 부장군 자격으로 출전한 김유신은 그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에게 허락을 구한 뒤 혼자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고구려군에서도 장수 한 명이 나와 김유신 앞을 막았다. 그러나 적장은 김유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별이 김유신의 칼에 내려앉았다는 전설이 전하듯 김유신은 칼을 잘 쓰는 장수였다. 김유신의 칼이 적장의 목을 베는 순간 신라군의 함성은 하늘을 흔들었다. 그 기세로 몰아붙인 신라군은 고구려군 5,000여 명의 목을 베고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의 명성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의 나이 서른셋에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며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열다섯에 화랑이되고 나서,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수받았다는 설화를 생각한다면, 빠른 등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철기문화가 발달했던 가야 왕족 출신의 3대, 김무력과 김서현, 김유신 모두 군사적인 능력이 우수했으나 가문은 점차 쇠락하고 있었다. 김무력은 신라 제1위 관등인 각간에 올랐지만, 김서현은 신라 제3위 관등인 소판에 그쳤고, 김유신도 30대 중반에 부장군에 불과했다. 가야계라는 신분적인 제한이 여전히 김유신의 발목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다

김유신은 이 문제를 적극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 보내 유력한 신라 왕실 가문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이다. 김춘추는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로, 왕권 계승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골 남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성골 여성이 왕위를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진골 신분인 김춘추와 힘을 합쳐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김유신은 판단했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집으로 불러 공차기를 하다가 일부터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여동생을 불러 옷고름을 달아주게 했다. 이를 계기로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가졌으나 김춘추는 결혼을 주저했다. 역시 가야계라는 게 문제였을 것이다. 김유신은 왕이 남산에 행차한 시간에 맞춰 여동생을 태워 죽인다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렇게 왕의 주의를 끌어 결국 김춘추와 여동생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후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김유신이 가진군사력의 결합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견인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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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 묘로 가는 흥무문,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김유신을 흥덕왕은 흥무대왕으로 봉하고, 후손을 왕족으로 대우하였다.
<출처 : Alain Seguin at ko.wikipedia.com>

경주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무덤
<출처 : Alain Seguin at ko.wikipedia.com>

김유신은 642년 압량주 군주가 되었고, 644년에는 소판에 올랐다. 그해 가을 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7개 성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으나, 백제가 매리포성을 공격하자 가족들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정하여 백제군 2,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개선하자마자 또 다시 서부전선으로 달려가 백제군을 물리쳤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평생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명장이요 전략가였다.

 

선덕여왕의 비호 아래 김유신과 김춘추가 급성장하자 비담염종을 비롯한 구세력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면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난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덕여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마저 재위 8년 만에 죽자, 김춘추가 왕위를 이어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러 신하가 김알천을 왕으로 추천했으나 그가 사양하며 김춘추를 추천했다고 전하지만, 그 이면에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뒷받침한 김유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자신의 셋째 딸을 61세의 김유신에게 시집 보내 두 사람의 혈맹관계를 더욱 다졌다.

 

신라 내부에서 정권을 장악한 김유신과 김춘추는 660년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 정벌에 나섰다. 나당 군사동맹을 성사시킨 것은 김춘추였고, 김유신은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었다.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을 무너뜨린 김유신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해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합류했다. 황산벌 전투가 워낙 치열해 예정보다 하루 이틀 도착이 늦었다. 소정방은 이를 핑계로 신라의 장군 김문영을 목 베려 했다. 신라군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위엄을 세우려는 술수였다.

 

그러자 김유신이 도끼를 잡고 “먼저 당나라 군사들과 싸우고 나서백제를 쳐부수겠다.”며 성난 머리털을 꼿꼿이 세웠다. 소정방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사비성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김유신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대각간이 되었다.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에 ‘대’자를 더한 자리였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었다.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소.”라며 선왕과 다름없는 믿음을 보였고, 김유신 또한 죽을 때까지 문무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신라는 668년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74세의 나이로 병을 앓고 있었던 김유신을 배려한 왕은 전장에 참가하는 대신 국정을 살피게 했다. 그 해 9월 고구려가 멸망했다. 고구려 멸망 후 태대각간의 자리에 올랐던 김유신은 673년 7월 1일 79세의 나이로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통일의 영웅인가 음험한 정치가인가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41의 제 1장 김유신 열전 첫페이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1_002_001_0035)

이후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이라 봉하고, 그 후손을 왕손으로 예우했다. 또한 [삼국사기]는 10권의 열전 가운데 3권을 내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삼국유사]는 김유신이 당대에 ‘성신’으로 추앙받았다고 적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까지 김유신은 통일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에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던 한말, 신채호는 “김유신은 지용이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하기가 사나운 독수리 같았던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큰 공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자”라고 비난했다.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이유 때문에, 그 책임을 김유신에게 물었다. 당시 시대정신을 반영한 신채호에 의해 김유신은 통일의 영웅에서 음험한 정치가로 평가절하되었다.

 

백범광장에서 본 남산타워 야경

은행열매, 우리어머님이 보시면 새벽같이 달려와서 주워가실건데....아깝다

은행나무에 은행열매가 주렁주렁...떨어지면 다 짓발펴서 쓰레기로 변할건데....

약재로 유용한 건데...

남산에 바라본 서울 중앙통 야경, 시야가 좀 않좋아서, 야경이 썩 좋지는 않다.

 

계단 중간에 꿋꿋이 지키고 있는 나무 옆으로 서울 타워가 비교가 된다.

 

 

팔각정 주변은 젊은 연인들로 꽉 메꾸었다.

야간에는 쌍으로 다녀야 할것 같다.

 

 

남산 팔각정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우남정을 지었다가 1960년 4.19혁명 때 철폐되었다가 1968년 11월 11일 다시 건립되었다. 이팔각정은 남산정상에 세워져 있어 서울시가가 눈아래 펼쳐진다.

 

 

 

 

어느 시대건 그 시대마다 세대간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만큼 세대간의 간극이 큰 예도 드물 것이다. 남산 정상의 서울타워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봉수대(烽燧臺) 앞에 서면 또 다른 느낌으로 그 간극의 서늘함을 경험하게 된다.

 

복원해놓은 봉수대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지만 봉수대는 빈틈 하나 없이 낙서로 채워져 있다. 가득한 낙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낙서 본능에서 비롯된 철부지들의 치기라고 넘기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집요하여, 이것도 개개인 내부의 절박함을 쏟아놓는 일종의 변화된 통신수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래도 그림같이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조차 민망한 것이 이곳의 현실이다.

목멱산(남산) 봉수대

목멱산(남산) 봉수대전국 각지에서 나라의 긴급한 일을 봉수로 알리면 주요 간선을 따라 목멱산에 있는 봉수대에 도착했다. 사진은 관련 자료를 통해 고증 복원해놓은 목멱산에 있던 5개의 봉수대 중 하나이다.

봉수대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높은 산봉우리에서 봉화나 연기를 이용해 먼 거리에서 일어나는 위급한 소식을 전달하던 시설물이다. 밤에는 횃불인 봉화, 낮에는 연기를 피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임금이 계신 한양으로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봉수제는 중국의 후한 광무제 때 이미 상당히 정비된 제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정확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부터라고 전해진다. 봉수는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제의 틀이 정비되면서 발전된 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봉수대는 전국에 620여 개소가 있었으며 이들은 목멱산(남산)에 있는 5개소의 경봉수(京烽燧)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목멱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남산에는 태조 3년(1394)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근 500여 년간 봉수대가 유지되었으며, 서울에 위치한 봉수대라 하여 일명 경봉수라고도 불렸다. 현재의 남산 봉수대는 남산 정상에 있던 목멱산 봉수대를 〈청구도〉(靑丘圖) 등 관련 자료를 통해 고증하여 복원해놓은 것이다.
1)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의 제1봉부터 서쪽 방향으로 제5봉에 이르는 다섯 개의 봉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도를 출발하여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양주의 아차산(지금의 광진구)에 닿은 신호를 받았고, 제2봉의 봉수대는 경상도 해안을 출발하여 경상도 내륙과 충청도 내륙을 거쳐 경기도 광주로 이어진 봉화를 받았다. 제3봉의 봉수대는 평안도에서 황해도를 지나 경기도 내륙을 거쳐 한성의 무악 동봉에 전해진 신호를 받았고, 제4봉의 봉수대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닷길을 따라 경기도의 육로로 들어와 한성의 무악 서봉에 연결된 봉화를 받았으며, 제5봉의 봉수대는 전라도 해안과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을 거쳐 양천(지금의 강서구)의 개화산으로 전달된 봉수를 받았다.

신호는 횃불이나 연기의 수를 조정하여 위급함의 정도를 나타냈는데, 한 번 드는 것을 일거(一炬)라 하여 평상시에는 일거, 해상이나 국경 부근에 적이 나타나면 이거, 변경이나 해안 가까이에 적이 나타나면 삼거, 적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병선과 접전을 하면 사거, 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을 침범한 적과 접전을 하면 오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또한 안개, 비, 바람 등으로 기후가 나빠 봉수가 불가능해지면 포성(砲聲)과 각성(角聲)으로 인근의 주민과 수비군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각 봉수대의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리기도 했다.

인왕산 성곽에서 바라본 남산

인왕산 성곽에서 바라본 남산남산은 풍수지리상 서울의 안산과 주작에 해당된다. 지금은 서울타워가 있는 정상 부분이 뭉툭하지만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무너지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높고 뾰족하였다고 한다.

봉수대는 오늘날의 발전된 정보통신 기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설이지만 오감(五感)이 따라잡을 수 있는 생동감과 속도감 같은 인간적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유용했던 옛 통신시설이다. 남산 봉수대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산 봉수대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돌베개)

 

 

역시 야간에도 중국인 관광객의 인해전술로 남산은 중국말로 덮었다.

돌담길이 아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남산 성곽이다.

국립극장!!!

매월 세번째 일요일 한국일보에서 주관하는 거북이마라톤,

가끔 단체로 참석해서 토끼처럼 뛰던 곳인데...

밤에 보니 새롭다.

 

유관순누나, 영원한 누나, 어둠속에서 대한독립을 아직도 외치고 있는듯 하다.

 

“만국이 평화를 주장하는 금일을 당하야 (…) 우리도 비록 규중에 생활하여 지식이 몽매하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 무리나 국민 됨은 일반이요 양심은 한가지라 (…)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워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기(獨立旗)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羞愧)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衷曲)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3?1운동 시기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에서-

계몽운동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민족의식을 함양

유관순 이미지 1

유관순(柳寬順) 선생은 1902년 12월 16일(양력 기준, 제적등본의 기록에는 음력인 11월 17일로 기재되어 있다.) 충남 천안군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중권(柳重權), 모친은 이소제(李少梯)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5남매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선생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였다.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선생의 부친은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유빈기(柳斌基), 조인원(趙仁元) 등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하고 있었다. 선생 또한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여 돈독한 신앙심을 키우는 한편, 부친의 훈도 아래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갔다. 특히 선생은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선생의 생각은 종교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에서 발로된 것이었고, 양자가 서로 응축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과 탄압도 이겨낼 신념이굳건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5년 봄 이화학당의 보통과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것은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 선생은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이 같은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 이어 봉기하여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학생들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의 발판 마련

선생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 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민족이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었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므로, 3?1운동의 초기 단계는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을 중심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 등 3대 원칙을 수립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 기독교 측에서도 신한청년당의 선우혁(鮮于爀)과 옛 신민회(新民會) 동지인 이승훈(李昇薰), 양전백(梁甸伯)이 모여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서울의 학생들 또한 보성전문의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의 김원벽(金元璧), 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 계획은 천도교 측의 연합 전선 형성 제안, 즉 교단과 종파를 아울러 민족 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하나로 응집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민족대표의 선정, 거사일, 독립선언서 배포의 역할 분담, 불교계의 동참 등 3?1운동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도출되게 된다.

이화학당 시절, 뒷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열사.

3.1운동의 시작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아가 민족대연합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18년 말 재일 조선유학생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2?8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계백(宋繼白)을 밀사로 파견하여 거사 소식을 알림으로써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3?1운동 계획을 본격화시켜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친 끝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만 1천여 매가 인쇄되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 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학생 시위 결사대 조직, 만세 시위에 참가

선생 또한 이 같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갔다. 이로써 선생은 마치 잔다르크처럼 구국의 화신으로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운동인 3?1운동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3월 5일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선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 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워 갔다. 선생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 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잠잠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趙仁元)과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하며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 나갔다.

 

그리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추진 총본부는 용두리 지렁이골(芝靈里)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 하였다. 이 밖에도 천안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의 각 면과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유관순 열사의 연설로 더욱 고취된 만세 운동의 열기

거사를 앞둔 3월 31일 선생은 지령리 매봉에서 내일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선생과 연락이 닿았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함으로써 서로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하였다. 드디어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오가 되자군중 앞에서,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은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고 열변을 토해냈다.

 

선생의 이러한 연설은 군중들의 애국심을 한층 고조시켜 장터는 이들이 내뿜는 독립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 올랐다. 이어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선생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던 조인원이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그런 다음 선생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시위 중 부친과 모친을 눈 앞에서 모두 잃어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의 부친인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숙부인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 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 감옥 수형자 기록표 사진.

유중무는 격분하여 주재소에서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 하였고, 또 제지하는 헌병 보조원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 십 년이나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윽박질렀다. 선생 또한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 보조원들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도로 빼앗아 휘두르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함께 죽이라”고 소리치며,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주재소를 습격할 태세를 보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옥중 순국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감옥에서 선생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나게 되었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고, 오빠까지 감옥에서 만나게 된 선생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게 된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서울복심법원 판결문.

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선생은 여기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선생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3년을 받게 됨에 따라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 1919년 이화학당 학생으로 서울의 만세시위 참여
    충남 천안군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피체
    옥중에서 만세 항쟁
    1920년 고문으로 옥중 순국
  •                        역사적 인물 동상 관리부실을 지적하고 있다.

 

 

을미사변을 비롯한 당시 순국한 혼을 위로하기 위해 광무(光武) 4년 설치했던 제단 터

장충단비는 광무4년(1900)에 장충단을 세우면서 만들어진 비이다. 앞 면의 '장충단'은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글이며, 비 뒷면의 비문은 충정공 민영환이 임금의 칙명을 받아서 지은 것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죽었다. 이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장충단에 장춘단비를 세웠다. 장충단은 을미사변뿐 아니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근대사의 비극적인 사건 때마다 희생된 여러 신하들과 장병들을 함께 위로할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고종황제는 1900년(광무 4)에 이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장충단을 세웠는데 이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장충단은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다. 1920년대 후반에는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조성하고 이곳을 ‘장충단공원’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장충단 비를 다시 찾아 1969년에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장충단의 수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장충단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후에 우리나라를 점령한 일제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하여 1919년부터 장충단공원을 직접 관리하게 된 경성부는 장충단에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일본식 공원조성사업에 힘썼다.

일본은 일본의 역사적 의미가 담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를 짓는 간악한 일을 행하였으며, 왕실을 상징하는 궁궐의 정문(경희궁의 흥화문)을 떼다가 박문사의 사당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군국주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서쪽 산 밑에는 상해사변 당시 사망한 3명의 일본인 결사대를 '육탄삼용사'라는 이름으로 동상을 세워서 이 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우리의 국립묘지를 일본인 용사의 성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충단에서 제사를 지냈던 사람들이 일제 침략에 항쟁했던 충신들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대일감정을 악화시킨다는 구실로 제사를 금지했고, 장충단에 서 있던 '장충단비'도 남산 숲속에 방치하였다. 이에 따라 제사가 끊긴 장충단 사당의 문은 굳게 잠겼고, 사당안에는 오랜 태극기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일제 패망 후엔 일본이 세운 동상이 철거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이 곧 장충단 수난의 끝은 아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장충단의 사전과 부속건물들은 6-25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되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현재는 장충체육관등이 들어서고, 신라호텔, 타워호텔, 자유센터 등으로 더 이상 옛날의 뜻있는 장충단을 기억하기 어려워졌다
.

[네이버 지식백과] 장충단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 소재. 6모로 된 큰 다리 기둥에 길게 모진 도리[桁]를 얹고 그 사이에 판석(板石)을 깔아 만들었다.

청계천에 흐르는 수량을 측정하는 다리로 다리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란 표시를 해서 물의 깊이를 재었다. 영조 때는 다리 동쪽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원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하였다. 2003년 6월 청계천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청계천 위에 원래의 수표교를 본 따 만든 새로운 수표교가 생겨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표교 [水標橋] (두산백과)

 

 

수표교(水標橋)는 장충단(奬忠壇)공원 입구의 개천 위에 놓여 있는 다리이다. 원래는 청계2가 수표다리길 사거리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잠시 이전되었다가 1965년 이곳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표교

수표교청개천 복개공사 때인 1958년 철거되어 일시 홍제동으로 이전되었다가 1965년 이 자리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궁궐 같은 곳의 다리에 적용되는 난간이 민간의 다리인 수표교에 설치된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다.

수표교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도시기반시설을 위한 건설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워졌다. 조선 초 한양은 하수시설 미비로 장마 때마다 되풀이되는 홍수 피해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를 막기 위해 태종 11년(1411)부터 세종 16년(1434)에 걸쳐 한양의 중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개천(開川, 청계천)을 개설하여 백악·인왕·남산 등 주변의 물길을 한 군데로 모아 동대문 밖으로 흐르도록 했다. 이러한 개천의 건설로 인해 한양은 물의 범람으로 야기되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수표교는 이렇게 생겨난 청계천 위에 세워졌던 많은 다리 중 하나이다.

세종 2년(1420) 수표교가 처음 세워질 무렵에는 그 주변으로 소나 말을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다 하여 마전교(馬廛橋)라 불렸다. 그후 세종 23년(1441) 비가 올 때 수량을 측정하기 위한 양수표(量水標)를 세우는데, 이것은 강수량의 정도를 미리 알아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방수 시설물로, 이때부터 다리 이름도 수표교로 기록되었다.

이후 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영조대에 이르면 개천은 자연재해와 사실상 방치 상태였던 유지 관리의 부족으로 제방과 거의 평평한 상태에 이른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한양은 장마철이면 홍수로 인한 피해를 또다시 겪어야 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영조 36년(1760) 대대적인 개천 준설사업을 시작한다. 이때의 작업은 57일간 20여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이 구역별로 나누어 감독하였다. 개천의 준설을 마친 후에는 수표교의 북안에 준설 상설기관인 준천사(濬川司)를 세워 관리하도록 했고, 수표교 아래에 높이 10척(약 3m)의 수표석을 새로 만들어 세웠으며 수표교 돌기둥에는 ‘庚辰地坪’(경진지평)이라 새겨 당시 준설의 표준과 평지 수위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설비나 기록을 기준으로 물이 드는 상황을 분석하여 방수 준비를 갖추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변화 앞에 인간의 능력이란 늘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그 뒤에도 홍수의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 예로 『한경지략』 「산천」조에 순조 33년(1833) 3월에 청계천의 준설공사를 크게 일으켰을 때 ‘경진지평’의 글씨가 드러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그 이전에 이미 이 글씨가 묻힐 만큼 개천 바닥이 높아지고 그에 따른 물난리를 겪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표교는 이렇게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세워지고 수많은 풍화를 견디며 처음 세워진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또한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청계천의 복개와 함께 오랫동안 머물렀던 자리를 떠나야 했다.

수표교의 옛 모습

수표교의 옛 모습청계천이 복개되기 한참 전인 일제강점기 때의 모습이다. 서울 제 모습 찾기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청계천 일대 복원사업이 마무리되어도 수표교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충단공원에 그대로 남는 아쉬움이 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수표교는 폭 7.5m 길이 27.5m 높이 4m이며 아홉 개씩 다섯 줄로 놓인 45개의 돌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다리 두 끝의 기둥인 교대(橋臺)는 하천의 양 기슭을 이용해 돌로 쌓았고, 특히 물의 저항을 가장 많이 받는 교각은 저항을 줄이기 위해 네모진 석재를 모로 세워 마름모형으로 놓았다. 교각 위로 4.5m 길이의 멍에돌을 놓은 다음 그 사이에 귀틀석을 올리고 좌우로 돌난간을 세웠으며, 바닥에는 디딤판을 네 줄씩 깔았다. 수표교의 구조에서 특이한 것은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난간을 설치하는 것은 궁궐 등 격식을 갖춘 다리에 적용되었으므로 민간의 다리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무척 예외적인 일이다. 서쪽 시렁 측면에는 ‘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 ‘丁亥改造’(정해개조) 등 개축한 해를 표시한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또한 영조가 준천공사 과정을 참관하는 모습을 담은 목판화 〈준천시사열무도〉(1760)가 남아 있다. 이 다리에 얽힌 세시풍속으로는 정월 대보름날의 답교놀이와 연날리기를 꼽을 수 있다.

수표교의 단순한 듯 치밀한 구조로 이루어진 견고한 외형은 선조들의 뛰어난 감각과 세월이 남겨준 정취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 다리는 오랜 세월 동안 서울 도심에서 이 땅의 사람들과 역사를 함께해온 현존하는 유일의 다리이다. 수표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며, 수표석(水標石)은 1985년 8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었다. 수표석은 현재 청량리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표교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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