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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클래식 명곡 감상회> 안내 ===
1. 일시 :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14:30 ~ / 19:30 ~
(몇몇 분들의 요청이 있어 오후 시간에도 추가 편성!)
2. 프로그램
1부 슈베르트 피아노5중주 송어 - 1969년 8월 30일 퀸 엘리자베스 홀 연주 / 55분 / 한글자막
피아노 :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린 : 이작 펄만
비올라 : 핑커스 쥬커만
첼로 : 자클린 뒤 프레
콘트라베이스 : 주빈 메타
(휴식)
2부 말러 교향곡 제2번 '부활' /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마리스 얀손스 지휘 / 90분
2009년 12월 3 ~ 6일 연주 및 녹화
3. 기타 : 휴식시간 포함 160분 정도 소요 예상.
<송어> <내지 해설, Christopher Nupen / 송주호 번역>
1969년 런던 템즈 강 남쪽 강변에 위치한 새로운 퀸 엘리자베스 홀에 아직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세계 최고의 예술가가 될 다섯 명의 젊은 음악가들이 슈베르트의 <송어> 오중주를 연주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의 이름은 다니엘 바렌보임, 이작 펄만, 핀커스 주커만, 자클린 뒤 프레, 그리고 주빈 메타였다. 이 연주회는 8월 30일에 열렸으며, 때가 되면 이 연주회가 전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 연주회에 대한 영화를 반드시 만들기로 결정했다. 영화는 그 어떤 매체보다도 이 연주자들과 그들의 예술적 개성을 기록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단순히 연주회를 영상으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공연 이전의 준비 과정을 기록하고, 공연뿐만 아니라 일을 할 때나 연주를 할 때 등 뛰어난 재능과 활기 넘치는 젊은 음악가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는 공연만큼이나 공연 뒤에서도 나타나는 어떠한 정신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든 것은 가볍고 조용한 16mm 영화 카메라가 새롭게 개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카메라로 새로운 종류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전에는 결코 두지 않았던 곳에 카메라를 둘 수 있었으며, 전에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1969년에 있었던 이 작업의 결과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이 대단한 것이었다. 전에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으며,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에서 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었던 방법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었다.
영화의 첫 부분은 각 연주자들을 차례로 소개하고, 연주회 전에 무대 뒤에서 준비하는 장면을 마지막 7분 동안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 마지막 부분은 음악사와 영화사에서 그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장면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연주 장면으로 이어진다. 테이크 편집이 없는 완전한 라이브 영상으로, 다섯 대의 이 새로운 조용한 카메라로 찍었다. 이것은 음악적으로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완성된 영화 '송어'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클래식 음악 영화 중에서 가장 많이 방송된 영화일 것이다. 1994년 5월 25일에 독일 ARTE 방송에서 여덟 번째 방송이 있었다. 이 방송은 이 방송사가 설립된 이후 25년 동안 방송했던 모든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지나간 시대의,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시대의 음악으로서, 가장 잘 기억되고 있는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교향곡 제2번 c단조 <부활>
출처 : <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17권 말러 / 음악세계> 34~44쪽
작곡 1888~1894년
초연 1895년 12월 13일 베를린에서 말러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시간 약 80분
편성 플루트4(모두 피콜로와 겸함), 오보에4(제3, 제4오보에는 잉글리시 호른과 겸함)
클라리넷3(제3클라리넷은 베이스 클라리넷과 겸함)
작은 클라리넷2(제2작은 클라리넷은 제4클라리넷과 겸함)
파곳4(제4파곳은 콘트라파곳과 겸함)
호른6, 트럼펫6, 트롬본4, 튜바, 팀파니2(각 3대씩), 큰북, 작은북(가능하면 복수),
심벌즈, 트라이앵글, 탐탐(대소2), 글로켄슈필, 종3, 채찍, 오르간, 하프2, 현5부
무대 뒤의 호른4(제7~10호른은 오케스트라에서도 사용), 트럼펫4, 팀파니, 큰북,
심벌즈, 트라이앵클
소프라노 독창, 알토 독창, 혼성 합창
(유니버셜 판에 의함)
개설
말러는 부다페스트 가극장의 지휘자로 있던 1888년부터 <교향곡 제2번>의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교향곡 <제1번>의 완성과 초연, 가극장의 업무 등으로 인해 이 스케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1889년은 말러에게 비극적인 해였다. 말러의 생애에서 이 해만큼 비극적인 일이 겹쳤던 적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먼저 2월 18일에 부친이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7월에는 수년 동안 고생하던 치질 수술을 하고 큰 고통을 맛보았다. 10월 11일에는 모친이 52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이렇게 하여 말러는 집안의 최고 연장자가 된 셈이었는데, 동생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 레오폴디네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11월에 있었던 <교향곡 제1번>의 초연은 말러에게 큰 실망을 맛보게 했다. 이런 불행의 연속은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교향곡 제2번>의 내용에 어떤 의미로든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무렵은 부다페스트에서의 업무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이 가극장에 새로운 지배인이 부임하자 말러와 지배인 사이에 말다툼이 잦아져, 결국 말러는 1891년 3월 14일에 지휘자 자리를 사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러는 이전부터 왕래가 있었던 함부르크 시립가극장의 지배인으로부터 가극장의 수석지휘자로 와주길 바란다는 전보를 받게 되고, 3월 29일에 그 가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말러는 이후 약 6년 동안 그곳에서 근무했다.
함부르크에서 말러는 이곳을 근거지로 활약하고 있던 병약한 한스 폰 뷜로(1830~1894)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892년 12월부터는 뷜로가 하던 일도 적극적으로 담당하게 된다. 그 이전인 1891년 9월에 말러는 그때까지 써오던 <교향곡 제2번>의 제1악장을 피아노로 연주하여 뷜로에게 들려주었는데, 뷜로는 이 곡을 <트리스탄>의 음향을 하이든 교향곡에 집어넣은 것 같다면서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뷜로는 말러의 초기 가곡을 지휘하는 일도 거부하는 등, 말러의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말러는 바그너의 작품을 몇 차례나 지휘하였고, 바그너의 작품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말러는 1893년부터는 여름을 잘츠부르크에서 가까운 쉬타인바흐에서 지내며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그 최초의 여름에는 <교향시>를 <교향곡 제1번 거인>으로 부르도록 만든 작품 개정 외에, <교향곡 제2번>의 현재의 제2악장에서 제4악장까지의 관현악 총보 초고를 완성(7월말)하였다. 그중에서 독창이 있는 제4악장<태초의 빛>의 피아노 반주용 악보는 이미 1892년에 쓰여졌다고 한다.
뷜로는 1894년 2월 12일에 카이로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그 장례식은 3월 29일에 함부르크의 미하엘리스 교회에서 치러졌다. 물론 말러도 거기에 참석했다. 말러는 아주 나중에 쓴 편지에서, 이때 <교향곡 제2번>의 제5악장에 사용한 가사를 찾았다고 적었다. 말러는 이 장례식에서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기도 했다. “내가 맛본 기분, 죽음을 생각했던 기분이 내가 만들고 있던 작품의 정신에 딱 들어맞았다. 그때에 오르간 단상에서 클롭스톡의 「부활」합창이 울려퍼졌다. 나는 번개를 맞은 듯, 내 마음 속에 있던 모든 것이 정리되며 확실해졌다. 모든 창작예술가가 애타에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말러의 걱정은 이 마지막 악장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흉내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토벤의 것과 내용적으로 완전히 다른, 그러면서도 곡에 어울리는 가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말러에게 적절한 가사로 계시를 준 것이 클롭스톡의 「부활」이라는 찬가였다.
클롭스톡(1724~1803)은 함부르크에서 사망한 독일 시인으로, 독일문학에서 고전주의의 창립자로도 일컬어지고 있다. 클롭스톡의 시에 누가 음악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러가 장례식에서 감명을 받았던 것은 음악 자체가 아니라 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말러는 이 클롭스톡의 「부활」이라는 시를 제5악장에 사용하였는데, 클롭스톡의 시를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특히 제3절 이하를 많이 수정했다. 이렇게 하여 원래의 시에 있는 종교적이고 경건한 진리는 말러의 독특한, 죽음의 힘에 대한 구원의 상자처럼 바뀌어져,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생의 소멸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의 인생의 고뇌는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고, 인간은 부질없이 사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고뇌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상으로 바뀌었다.
말러는 쉬타인바흐에서 7월 25일에 이 제5악장을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단계는 아직 초고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함부르크로 돌아간 후, 12월 18일에 마지막 악장 관현악 총보의 사보가 완전히 완성되었다. 또 그 사이인 4월 29일에는 제1악장의 개정을 마쳤다.
여기에서 말러가 실제로는 언제쯤부터 제5악장을 구상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가사를 찾고 있었다면, 어느 정도의 음악적인 구상은 이미 전년도인 1893년 여름에 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대규모의 제5악장을 뷜로의 장례식 후에 가극장의 바쁜 업무를 하면서 7월까지 완성하기는 상당히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리고 죽음과 관련 있는 제1악장부터 시작해서 부활과 연결짓는 제5악장에서 교향곡을 마무리하는 것은 이미 생각하고 있던 설정이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말러의 편지나 자료 연구에 의하면, 뷜로의 장례식이 이 교향곡을 완성시키기 직전의 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좀 더 핵심을 찌르는 심리학적 견해를 보이는 사람(예를 들어 테오도르 라이크)도 있다. 그것은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뷜로의 죽음을 말러는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었고, 그 장례식에서의 실제적인 감정 체험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런 것을 교향곡에 담아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추측일 뿐이며,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자유이다. 단, 1889년의 비극은 이 곡과 상당히 깊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이 곡은 <교향곡 제1번>에 비해서 대규모의 관현악이 필요하며, 특히 금관과 타악기가 증가되었다. 그리고 성악(소프라노 독창, 알토 독창, 혼성합창)도 필요하다. 또한 구성적으로도 전통적인 4악장이 아니고 5개의 악장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말러풍의 거대한 경향의 최초 작품은 교향곡이 되었다. 그러나 <교향곡 제1번>에서도 인정된 말러적인 특징, 예를 들면 소박한 서정성, 선적대위법을 즐겨 사용한 것, 민요풍 선율의 사용, 자연에서의 동경의 자세 등은 이 <교향곡 제2번>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말러는 각 악장을 주제의 동기적인 관련으로 연결시켰다.
말러는 각 악장의 내용을 설명하는 표제적인 문장을 출판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는 이해의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다고 하여 그것을 철회해버렸다(그러나 뒤의 각 악장의 해설 부분에 그것을 부분적으로 인용해 놓았다).
또한 이 곡은 이어지는 <교향곡 제3번>, <교향곡 제4번>과 함께 <소년의 마술 뿔피리>의 3부작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세 곡이 모두 <소년의 마술 뿔피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세 곡 모두 영구적인 종교적 신념을 향한 작곡자의 노력을 보여주며, 의혹과 공포에 대한 애정과 관용의 승리 속에서 결국 그 신념을 찾아내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3부작의 제1작인 <교향곡 제2번>부터 이미 <소년의 마술 뿔피리>와 연결되어 있고, 이미 환상이나 공상 세계를 초월한 경지에 이르러 있는 말러의 성숙함을 엿보게 한다. 게다가 관현악과 합창 용법의 면에서, 이후의 거대한 <교향곡 제8번>을 예상하게 한다.
또한 이 교향곡은 c단조의 악장으로 시작하여 E♭장조의 악장으로 마친다. 고전파부터 중기 낭만파의 교향곡에서는 거의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성의 움직임인데, 물론 이것은 곡의 드라마로서의 일관된 흐름(죽음→부활)과 연결되어 있는 결과이다. 그리고 말러는 이후의 교향곡에서 이런 변칙적인 조성 배치를 보이는 일이 많아졌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교향곡 제3번 : d단조 → D장조
교향곡 제4번 : G장조 → E장조
교향곡 제5번 : c#단조 → D장조
교향곡 제7번 : b단조 → C장조
교향곡 제9번 : D장조 → D♭장조
<대지의 노래> : a단조 → C장조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러는 <교향곡 제6번>을 제외하고는 교향곡을 밝게 끌어내어 마치는 것을 선호하였고, 그런 것에서 드라마로서의 교향곡 진행의 본질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은 1888년부터 쓰여지기 시작하여 1894년 뷜로의 장례식까지 이미 처음 3개 악장이 완성되었다. 그 후 같은 해에 뒤의 2개 악장이 쓰여져, 전곡이 함부르크에서 완성되었다.
이 곡의 처음 3개 악장은 1895년 3월 4일, 베를린에서 말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에 의해 초연되었다. 전체 5악장의 초연은 1895년 12월 13일에 역시 베를린에서 말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에는 만족스러운 리사이틀을 만들기 위해서 말러가 자비로 오케스트라를 고용했다고 한다. 곡은 청중들과 연주단원들로부터 꽤 지지를 받았지만, 비평가들의 의견은 긍정파와 부정파로 나뉘었다.
또한 이 곡의 악보는 1897년에 라이프치니의 호프마이스터에서 출판되었는데, 말러는 1910년에 다시 이 곡의 보완 작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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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석하실 회원님들...오후 14:30 / 저녁 19:30, 구분하여 댓글 달아주시면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오후 14:30 참석합니다.
낼 낮엔 비소식이 있어서 저녁 시간에 참석합니다..요즈음은 부쩍 몸이 굼뜨지고 건만증까지 심해져서리...-_-
19:30 참석합니다^^
19:30, ㅈㅈㅈ님 참석 신청
오후 14:30분 참석하겠습니다.
19:30, ㅇㅃㅆ님 참석 신청
19:30, ㅅㅈㅎ님 외 1분 참석 신청
오후 14:30분 참석 신청합니다.
오랜만에 오시는 거 같습니다...반갑습니다!
ㅎㅎ 지리산도 넘었는데 오대산도 넘어야죠! ㅋ 2명이요!!
옙! ㅎㅎㅎ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11 0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