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놀이와 송파장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 그대로 조선 시대부터 지금의 석촌호수 남쪽에 송파장(松坡場)이 섰던 자리는 개발과 함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송파(松坡)라는 이름은 오늘날 송파구에 송파동이 있으므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조선시대에는 나루터이자 장터이며 군사주둔지〔軍鎭〕의 대명사로서의 명성과 풍물은 찾을 수가 없다.
송파의 원래 이름은 연파곤(淵派昆)으로서 이것이 소파곤, 또는 소파리(疏坡里)라 부르던 것이 변음되어 송파라고 칭하게 되었다. 송파라는 명칭이 생기게 된 또 한가지의 내력으로는 옛날 이곳에 살던 어부가 배에서 낮잠을 자다가 소나무가 있던 언덕 한쪽이 패어 떨어지자 그만 놀라 잠이 깨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송파로 가려면 뚝섬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거나 자양동에서 잠실섬까지 건너 온 뒤에 이 섬을 가로질러 걸은 뒤 다시 나룻배를 타야만 하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보면 우리나라의 15대 향시(鄕市)로 손꼽던 송파장은 현재 석촌호수 서호(西湖) 남쪽 언덕에 있었다. 송파장의 물건 시세는 배오개(梨峴)시장이나 칠패(七牌)시장보다 값이 헐하였다. 원래 송파장은 매월 5일, 10일, 15일…에 장이 서지만, 그 전날부터 전국의 장꾼들이 모여들고, 또 장날 다음날에도 물건을 실어 내느라고 며칠씩 붐볐기 때문에 날마다 장이 서는 셈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장날이면 한강을 통해 80여척의 배가 송파나루에 정박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던 말행상(馬行商)들이 몰리지요” “송파장은 소〔牛〕시장으로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럼요, 3남지방에서까지 소장사들이 이곳까지 소를 끌고 올라와 거래했고, 또한 서울의 푸줏간 주인들이 소를 사기 위해 이곳에 몰려들었지요” “그렇다면 서울 종로의 시전상인들이 송파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텐데…” “물론이죠. 영조 34년(1758)에 시전상인들이 그들이 파는 물건과 송파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이 같으므로 해마다 이익이 줄어 타격이 크자 항의가 대단했죠.
그래서 시장 감독기관인 평시서(平市暑)에서 시전상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송파장을 폐지할 것을 조정에 여러 번 건의했지요” “그랬던가요” “그렇지만 광주유수(廣州留守)가 송파장의 폐지를 적극 반대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논의를 계속하다가 결국 폐지하지 않기로 결정했지요” 사실상 송파장터의 상권(商權)을 쥐고 있던 것은 서울의 민간상인들이었다. 한편 도봉산 기슭에 있던 다락원〔樓院店〕은 서울의 중심부와 가까우면서도 북쪽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어물(魚物)과 포물(布物)이 지나는 길목이어서 일찍부터 이곳 상인들이 장시(場市)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시전상인들의 반대로 실패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이곳에 장시가 계속 서게 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이곳이 계속 민간상인의 근거지가 되었고 서울의 민간상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은 사실인 것 같다. 정조 5년(1781), 동북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어물을 다락원에 있는 중도아(中徒兒)들이 매점해 두었다가 서서히 칠패·이현 근처의 난전(亂廛)상인들에게 보내고, 이들이 수시로 값을 올려 팔므로서 서울안의 어물값이 오르고 이 때문에 어물시전이 실업상태에 빠진다 하였다.
서울안의 민간상인들이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피하기 위하여 누원에다 일종의 지점을 두고 상품을 매점(買占)하였던 것 같다. 광주의 송파와 삼전도 일대도 외방의 상품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었으므로 일찍부터 장시가 발달하였고 이 장시를 중심으로 서울의 민간상인들이 활약하였다. 송파장터에서의 민간상인의 매점상업이 서울의 시전상인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된 것은 대개 18세기 중엽부터인 것 같다.
영조 30년(1754)의 한 기록에 "서울의 사상인과 송파의 사상인이 서로 결탁하여 삼남지방과 동북지방에서 오는 상인들을 유인하여 대규모의 장터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금난전권을 피하면서 시전상인의 본업을 빼앗는 일이라 하였다." 이 시기의 송파장터에 대해서 "비변사등록"은 "명목상으로는 한 달에 여섯 번 장이 선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울 시전이 파는 상품과 같은 것을 마을 안에 쌓아두고 매일 매매하였으므로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이 때문에 해마다 이득을 잃어 가는 실정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미 정기시장이 아니라 상설시장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파장터에서 서울의 사상인과 현지의 상인들이 서로 결탁하여 상설시장을 이루고 있다 하였지만 사실상 송파장터의 상권을 쥐고 있던 것은 서울의 민간상인들이었던 것 같다. 19세기 초엽에 한강변에 근거를 둔 대규모 사상인의 한 사람이었던 손도강(孫道康)은 양주와 광주 등지의 부자들에게서 자금을 조달하여 직접 원산에 가서 이른바 '전선 상매(全船商買)'를 해왔다. 순조 4년(1804)의 어느날에도 어물 30여 바리를 운반해 오다가 이를 취체하려는 서울의 어전상인들을 오히려 구타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본래 서울의 큰 부자라고 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30년(1754)에서 영조 34년 사이에 송파장이 조정(朝廷)에서 거론되었다.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 홍상한(洪象漢)은 “서울의 간세(奸細)한 무리들이 송파에 살고 있는 부랑자들과 작당하여 각종 물화를 모아 시장을 크게 열어 삼남과 동북지방의 장사치들을 유인해서 마음대로 사고 판다.” 고 하였고, “서울 근처의 시장은 사평(沙平), 광나루, 누원, 금암(黔巖) 등지에도 있지만 송파가 가장 심하다. 이곳에 사는 백성의 무리들이 서울 안팎의 젊은 패 및 난전상인들과 결탁하여 삼남지방, 북도(北道), 영동의 상인들을 유인해 모두 이곳에 모인다. 명색은 한달에 여섯 번 장을 연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각전(各廛) 물건들을 마을에도 쌓아두고 매일 장사를 한다.” 고 지적하였다.
그는 송파장이 서울 시전의 특권적 상업에 위협을 주니 시전을 보호하기 위해 송파장을 규제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에도 송파장에서 서울로 가는 어물을 독점해 값을 마음대로 조정한다고 몇차례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송파는 각 지방 상품을 집결시켜서 항상 시장을 여는 상업도시였고, 서울의 특권적 상업에 위협을 주는 서울근교의 상업도시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송파산대놀이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번성하던 송파장이 어찌해서 쇠퇴하여 자취를 감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 송파장의 경기가 후퇴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에 경인선, 경부선이 개통되고 한강에 교량이 놓여 교통이 원활해진 것이 그 원인 중의 하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가 전쟁도발로 모든 생활필수품을 배급제로 하는 통제경제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설상가상으로 일제가 한일합방 후에 숭인동 동묘(東廟) 부근에 대규모 우시장(牛市場)과 도축장을 세워 놓자 송파장의 상인들이 이곳으로 옮겨감으로써 송파장은 쓸쓸해져 갔다. 더구나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시장과 300여호의 가옥이 흙탕물에 떠내려가자 마을주민들은 남쪽의 가락동으로 이전하여 새로 마을을 이루는 등 송파시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을축년 대홍수 때 송파마을의 홍수를 목격한 사람의 말을 빌면 “7월 9일부터 12일까지 큰 비가 내려 한강 물이 언덕까지 찼다가 차차 빠질 무렵인 7월 15일 저녁부터 다시 비가 내려 19일 까지 365.2밀리미터의 집중호우가 내렸지요.
처음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므로 ‘개부심’한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호우로 변하여 억수같이 퍼붓는데 송파장까지 물에 잠기데요” “그러자 송파지서에서 경방단(警防團)을 동원하여 마을 주민들은 안전한 광성보통학교의 돈대로 대피시켰지요. 그래도 강물이 계속 불어나자 석촌보통학교와 오봉산으로 주민들을 다시 대피시켰는데 이 학교마저 침수되어 가락동 공동묘지 산으로 대피시켰지요. 당시 이곳에 배는 많았으므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모든 집들이 떠내려갔지요. 이때 삼전동의 60호도 함께 떠내려갔는데 장마가 끝나고 나서 보니까 송파마을과 장터는 강줄기와 모래사장으로 변해 있더군요” 라고 당시의 참상을 말해 준다.
가락동으로 수해를 피한 송파마을 주민들은 이 홍수의 상흔을 오랫동안 잊지 않기 위해서 그 이듬해에 ‘을축년 대홍수기념비’를 송파면사무소 앞에 세웠다. 이 홍수 기념비는 최근 이 지역의 개발사업으로 인하여 쓰러져 있던 것을 주민들이 옮겨다가 송파제2파출소 앞에 다시 세워 놓았는데 최근에 송파동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에는 6․25전쟁 때 격전으로 총탄 흔적까지 남아 있으므로 후손들에게 홍수에 대한 경각심과 전쟁의 참상을 일깨울 수 있는 산 교재가 되고 있다. 전일에 송파장이 번창할 때에는 ‘송파산대놀이’가 성행하였다. 즉 정월 대보름, 단오, 7월 백중, 추석 등의 명절 때만 되면 탈꾼패놀이를 벌였다. 송파장 넓은 터에는 둥글게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친 뒤 악사(樂士) 석에는 멍석을 깔고 광목 천막을 쳐 악사와 동네어른되는 이들의 자리를 마련해 놓았고, 20미터의 거리를 두고 한 칸 정도의 개복청이 마련되어 있었다. 개복청은 네모퉁이에 기둥을 박고 수수깡발을 치고 원두막처럼 지붕을 만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