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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시 2004년 가을호에 게재한 이송희 시인의 시집 (환상)의 서평 원고입니다.
시여, 따뜻하고 자상한 날개를 달고 날아라.
- 이송희 시인의 시집 『환상』
김경수 (시인)
문학의 기원에 대한 학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인의 심리적 충동을 표현하기 위해 탄생되었다는 심리학적 기원설을 중심으로 본다면 ‘모방 충동설’, ‘유희 충돌설’, ‘유인 본능설’. ‘표현 본능설’ 등으로 나눌 수가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원설 가운데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 충동설’이다. 그는 『시학』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방 본능을 지녔으며 그것을 통하여 학습하고, 만족시켰을 때 희열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술 작품은 이 모방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칸트는 ‘유희 충동설’을 주장했는데 즉 ‘예술은 유희’라고 설명한다.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인 무목적의 합목적성을 주장한다. 또 다윈은 ‘유인 본능설’을 주장하였는데 예술 행위는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심리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허드슨은 ‘자기 표현 본능설’을 주장하였는데 인간에게는 누구나 타인과 자신에 대한 흥미, 현실과 상상의 세계에 대한 흥미, 그런 것을 형식화하는 흥미를 지니고 있고 이 흥미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문자로 표현한 것이 문학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이러한 이론들은 예술의 기원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해도 문인들의 창작 동기의 심리를 해명하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본다.
문학이 죽은 현대 사회에서 특히 시가 죽은 이 현대 사회에서 돈 버는 일이 아예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유명해질 수도 없는 시를 쓰는 행위는 위의 이론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적합한 것일까? 돈이 안 되어도 자연을 재현하고 싶은 모방 충동의 본능에 의해서일까? 아니면 너무나도 일상적인 생활이 반복되는 도시 생활의 타성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유토피아적 놀이의 세계에 빠져들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현대 사회에서 자꾸 소외되어져 가는 내 자신에 대해 타인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의미에서 시로 표현하는 것일까?
나는 이송희 시인의 2번째 시집 『환상』을 읽고나서 다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시인은 어떤 동기로 시 창작을 할까? 아마 앞에 언급한 동기들 중에 하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이송희 시인의 시 세계의 단면들을 통해 이 시인은 표현 본능의 충동에 이끌려 시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내 나름대로의 분석을 해본다. 이러한 나의 추측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송희 시인의 시집 (환상)은 6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독’이라는 부제를 단 장의 시편들은 현실 세계 속의 여러 소재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사색 한 후 시인이 발견해 낸 형이상학적 진리를 이미지화 하여 보여주고 있고 ‘유년의 환상’이라는 장의 시편들은 과거에 대한 추억을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따뜻하게 보여주고 있고 귀향이라는 부제의 장에서는 고향에 관련된 제재들에서 느낀 감정들을 담담한 심정으로 이미지화하고 있고, ‘풍경’이라는 장에서는 풍경화를 그리듯 자신이 직접 접한 인상적 풍경들을 시각화 시키고 있고 ‘미로’의 장에서는 여행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고 마지막장인 ‘후회’의 장에서는 현대적 감각을 지닌 이미지스트의 진지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 속에서는 무엇인가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송희 시인의 절박한 심정이 드러나고 있다. 이송희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시로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이송희 시인의 휴머니스트적인 낭만적 본성이라고 본다. 그런 본성에 의해 씌여진 이송희 시인의 시세계 속의 시적 화자는 지극히 감성적인 휴머니스트이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리고 정이 많은 낭만주의자이다. 삭막한 아스팔트의 성 안에 갇혀 매일 매일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의 형극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고독한 현대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민한 감성의 더듬이로 자신의 아름다웠던 과거를 추억하고 그 추억의 따뜻한 온기를 그리워하고 가슴에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사는 센티멘털리스트이기도 하다.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와 사상을 한 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집의 전체적인 특징은 쉬운 언어를 통한 쉬운 표현법 그리고 일상적 소재를 대상으로 평범한 그러나 감동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그림을 그리듯 따뜻한 시각화에 심혈을 기울인 점, 그리고 삶에 대해 긍정적인 휴머니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시집에서 발견한 시인의 독특한 개성과 장점을 몇 가지 대표되는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해보고자 한다.
우선 나는 평범한 표현 속에 깃들은 범상치 않은 너무나 따뜻한 인간애를 품은 서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없이 내리깐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영도다리 난간 어디쯤
어둠이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울고 있다.
선창 포장마차에서
찢어진 금속음의 유행가 가락 타고
바다 새 한 마리 파도 속으로 숨는다.
소녀의 이름은 난蘭이다.
나는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예쁘게 시를 암송하는 모습을 보고
나 혼자 그렇게 불렀으니까.
한 줄기 바람이 그 이름 쓸어 안고
밤바다 속으로 사라진 후 다시
보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남포동 보석 가게 앞 유리창에
스치는 얼굴이 난蘭 비슷이 있다. 얼굴에는
세월이 한참 머물고 간 느낌이다.
반백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접어둔 이름을 들추어내고 있었다.
- 「난蘭에게」 전문
해가 진 저녁 선창 포장마차에서 만났던 한 소녀, 스쳐 지나가고 잊어버리면 그뿐인 대상인 난蘭이라는 소녀, 시인은 그러한 소녀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따뜻한 시선을 주고 있다. 그녀는 아마도 슬픈 사연이 있는 소녀인 것 같다. 슬픈 감정을 시를 읊으며 달래는 그 소녀에 대한 애틋한 이미지가 이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의 망막에 오래 오래 남아있다. 많은 세월이 흘러 다시 우연히 조우했을 때는 난이라는 소녀는 벌써 백발이 성성해져 있어 시인은 세월의 무상함마저 느끼고 센티멘탈 자니(Johnny)가 되어간다.
두 번째로 이 시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소재를 즐겨 찾아내고 예리한 관찰력을 통해 그 소재들로부터 발견한 형이상학적 진리를 쉬운 언어로 이미지화 하는 기법을 즐긴다.
입 풀무질, 풍구의 끝
잿더미 속에서 붉게
붉게 피어나는
갓 부화한 생명의 심장 같은
훤히 보이는 펄떡임,
오래전 잊혀진
그 적막의 잿더미 속에
살아있었구나
영혼을 지필 사랑의 핵으로
그리하여, 우리에겐 머나먼 오늘 아니면
내일 또다시 불로써 타오를
- 「불씨」 전문
위의 시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보았던 불씨를 예리한 시각으로 관찰을 하여 풀무질할 때 빨간 빛을 발하는 불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조용한 사색을 통해 불씨를 갓 부화해 펄떡이는 생명의 심장으로, 영혼을 지필 사랑의 핵으로 은유하고 있다. 사색을 통해 불씨의 형이상학적인 본질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스트의 기질을 보여주며 삶에 대한 긍정적 사고가 잘 드러나고 있다.
세 번째로 동화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애잔한 서정을 조용히 이미지화 하고 있다.
하늘이 왼 종일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그 바닷가 모래톱에
소년은 사발만한 옹당이를 만들고
신발 벗어 하늘을 떠 넣고 있다.
하늘이 멱 감다 말고
잠깐 머물다 간다.
한 소녀가 와서 바닷물을 퍼 넣는다.
그때,
소년의 발구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는
하늘을 보며
소녀의 눈시울이 젖는다.
마주친 소년과 소녀는 눈물을 훔치며
모래톱을 달린다.
파도가 뒤따라가면서 발자국을 지우고
하늘도 멱 감다 말고 어둠 속으로 숨는다.
-「첫사랑」 전문
이 시는 순박한 한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을 소재로 동화와 같은 분위기로 이미지화하고 있다. 첫 연과 둘째 연에서는 모래톱에서 소년과 소녀가 천진난만하게 즐겁게 서로 물놀이를 하는 정경이 그려지고 셋째 연에서 갑작스러운 반전이 일어나 소년과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모래톱을 달려간다. 이러한 슬픈 분위기로의 반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어릴 적 첫사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시는 시적 화자를 통해 표현하는 허구의 세계이다. 그런데 혹시 이순을 넘은 시인에게 아직도 정말로 첫사랑의 상처가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분명한 이 시대 최후의 센티멘털리스트요, 로맨티스트일 것이다.
네 번째로 시인은 데카당한 표현 기법을 통해 시의 현대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헌 책방 골목에서 만난 한 권의 책
국적 없는 글을 읽다 머리에 쥐가 난다.
까막눈이니까
덮어두고 그리고 잊었다.
어느날, 문득 그 책갈피 속에서
꽃 한 송이를 만나다.
이름을 불렀을 때, 황홀한 자태로 피어난다.
푸른 잎 사이로 덜난 줄기에 붙은 가시마다
검붉은 피가 맺혀 있다.
꽃술 속에는 나비의 나래를 단
벌 한 마리 꿀을 빨고 있다.
피를 먹고 있다.
순간 벌침 맞고 혼절한 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망각의 세월
어느 날, 무심코 열어 본 그 책갈피 속에
꽃과 벌이 남긴 가루, 흔적이
낯익은 글자로 남아
-「古書」 전문
이 시에서는 헌 책방 골목에서 외국 원서를 한 권 사서 집에 소장하다가 우연히 그 책을 펼쳤을 때 얻었던 에스프리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 책을 보며 시인은 심미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상상을 한다. 즉 고서의 한 책갈피로부터 꽃을 상상하는데 푸른 잎을 가진 그 꽃의 줄기에 붙은 가시에서 검붉은 피를 본다. 꽃 술 속에서도 붉은 피를 본다. 오래된 낡은 책갈피에서 이 시인은 왜 하필 아름다움을 상상하지 않고 퇴폐적인 상상을 했을까? 아주 데카당한 표현인데 이 시인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시적 상상이다. 시인은 데카당을 통해 현대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과 그로인한 퇴폐성으로의 유혹에 대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몇 가지 분류와 단순한 설명만으로 어찌 한 시인의 시 세계가 다 설명될 수 있겠는가? 남의 시세계를 평하는 것은 아마 봉사가 코끼리를 만지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나의 부족한 글을 마치며 시인에게 몇 마디의 고언을 하고 싶다. 시인은 시를 쓰지 않으면 몸이 아파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무당과 같은 존재라고, 시인은 시가 걸어온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고, 시인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시를 쓰는 존재가 아니고 남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글을 쓰는 이율배반적인 존재라는 것을.
이송희 시인은 현대시의 한 특성이었던 난해성을 배척하고 그 대신에 쉽고 감동적인 시를 쓰고 있다. 난해성과 애매모호성은 현대에 들어서서 시가 대중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된 제일 큰 요소였다. 이러한 점을 지양해나가는 이송희 시인의 시작 태도는 이 시대 시인으로서의 하나의 미덕이다. 하지만 현대시라는 개념에는 항상 동시대의 전통을 파괴하고 혁신해 나가야 된다는,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시세계도 끝없이 개혁해야 한다는 시정신이 웅크리고 있다. 이러한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본다. 모더니스트의 이론가인 쉬클로프스키는 ’문학작품이란 그것에 사용된 문체적 기법들의 총체’라고 하였다. 현대시는 기법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이 시인의 시는 다소 내용 중심적으로 평이하게 흘러가는 경향이 있어 다소 아쉬운 감이 있다. 그러나 시가 죽은 이 시대에 쉬운 언어 사용과 쉬운 주제로 독자들에게 따뜻한 휴머니즘의 감동을 주는 것이 이 시인의 장점임에 틀림이 없고 또한 시의 대중화에 일조를 하는 시운동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점을 잘 살려가며 좀 더 세련된 현대적 기법을 함께 시의 장치로 삼는다면 좋은 시인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끝-
약력: 김경수/ 1957년 대구시에서 출생, 1993년 (현대시)로 등단, 계간 (시와 사상) 편집인, 시집 (하얀 욕망이 눈부시다), (다른 시각에서 보다), 의학박사, 내과 전문의로 부산에서 김경수내과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