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화(梅花)를 기다리며 陸凱與范曄 육개여범엽 折梅逢驛使 절매봉역사 寄與隴頭人 기여롱두인 江南無所有 강남무소유 聊贈一枝春 료증일지춘 육개(陸凱)가 범엽(范曄)에게 보낸 시 매화를 꺽다가 우연히 역사를 만나서, 농두에 있는 사람에게 부쳐 보내노라. 강남에 있는 바가 없어서, 애오라지 한가지의 봄을 부쳐 주노라. 농두는 농서이니 북쪽지방이다. 애오라지는 마음에 부족하나마 그대로라는 뜻이다. 아름다운 꽃 한 가지를 보고 벗을 생각하는 멋스러운 우정. 육개는 멀고도 먼 강남에서 매화 한 다발을 친구에게 보냈다. 우정을 담아서. 그 꽃이 가는 도중 시든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범엽이 꽃을 받을 때쯤이면 이미 여름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우정은 마른 가지처럼 단단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구는 지금도 친구를 생각할 때면 널리 인용하는 명구이다. 매화 가지를 꺾다가 마침 인편을 만나서, 한 다발 묶어 그대에게 보내오. 강남에서는 가진 것이 없어, 가지에 봄을 실어 보내오. 매화는 다섯 장의 순결한 백색 꽃잎을 가진 아름다운 꽃이다. 그 모습이 애처롭고 은은한 향기를 지녔다. 그러나 꽃이 피면 오래도록 매달려 있지 못해 아쉬운 감이 있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매화 또한 덧없이 피었다가 지고 마는 것이 미인의 모습 같다고 하여 옛 시가에서는 미인에 곧잘 비유되곤 한다. 절개의 상징인 매화와 댓잎을 비녀에 새긴 것이 매화잠(梅花簪)이다. 머리에 꽂아 일부종사의 미덕을 언제나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축일에 부녀자가 머리에 매화를 장식(梅花粧)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봄소식을 뜻하는 매신(梅信)은 긴 겨울을 보내고 꽃이 피듯 시련기를 이겨낸 끝에 좋은 소식이 있음을 암시한다. 찬 서리를 이겨내는 강인한 성정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가는 선비의 의연한 자세와 닮았다 하여 군자의 꽃으로 추앙 받는다. 외세의 억압에도 굽히지 않고 불의에 물들지 않으며 오히려 맑은 향을 주위에 퍼뜨리는 모습에서 선비의 기질을 본다.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松)와 대나무(竹), 그리고 매화(梅)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시인묵객들의 작품 소재로 즐겨 다루어 졌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매화가 문학, 미술, 건축, 공예 등 여러 분야의 소재가 되었다. 과거 수천년 동안 매화를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이 제작되었고 지금도 많은 작품을 통해 매화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삼국유사(三國遺事)》아도기라조(阿道基羅條)에 처음 매화 기록이 보인다. 일연(一然)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온 아도(阿道)를 찬(讚)한 이 시를 통해서 당시에 이미 매화가 일부 귀족들 간에 심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리 위에 눈이 쌓여 있고, 얼음 도 풀리지 않았네. 서라벌의 봄빛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어여뻐라. 봄의 화신은 재주도 많아, 맨 먼저 모랑네 매화를 꽃피웠구나. 아도는 신라에 잠입해 들어와 선산의 모례(毛禮) 집에 기거하면서 포교 사업을 펼쳤다. 이 시에서 계림에 봄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신라국에 불교가 널리 퍼지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모례네집(毛郞宅)에 매화가 피었다는 것으로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해졌음을 뜻한다고 풀이된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중국의 문화도 함께 수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화도 일부 귀족들 간에 심어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일반인에게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의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궁중을 중심으로 정원 문화가 꽃핀 것이 사실이다. 안압지나 반월성지, 포석정지 같은 문화유산은 당시의 정원이 얼마나 호사스럽게 꾸며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불교를 국교로까지 승화시킨 고려조에서는 사찰이나 궁중 정원, 귀족들의 정원에 매원(梅園)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규보의 시에도 매화를 읊은 시가 여러 편 보인다. 비 개이니 풀빛은, 하늘빛이 배어 푸르고. 따스한 바람 타고, 매화 향기 재 너머 오네. 봄비가 내리더니 하늘이 더욱 청명하여 풀빛마저 푸르고 재 너머에 매원(梅園)이 있는지 매화 향기가 봄바람을 타고 풍겨 온다고 노래했다. 이 때부터는 매화를 꽃으로 감상하기 위해 재배하기보다 과일나무로 재배하기도 했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매실이 중요한 과일이었다. 지금도 늙은 매화는 대부분 사찰 경내에 남아 있다. 삼국시대부터 많은 지식인들이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당(唐)으로 유학을 갔다. 주로 승려 계급이 당과 천축(天竺)을 오고갔지만 그들이 돌아올 때마다 서역의 문물도 함께 수입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재배하고 있는 자두, 앵두, 능금, 석류, 살구, 복숭아 같은 과일도 그 당시 불교와 함께 수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매화는 가장 일찍 봄을 알리는 꽃이다. 전통적으로 동양 불교는 선불교(禪佛敎)에 속한다. 송대의 어느 비구니 스님이 끊임없는 정진과 고행의 수도생활로 마음을 단련했으나 도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은 바 있어 그 때의 환희를 적어 한편의 매화시로 남겼다.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매었으나 볼 수 없으니, 짚신 발로 산정에 올라 구름까지 찾아보았지. 돌아오니 언뜻 코끝을 스치는 매화 향기, 봄은 어느새 찾아와 가지에 앉아 있었네. 중국의 매화 기록으로는 《시경(詩經)》에서 처음 찾아 볼 수 있다. 소남(召南)편에 매실 따는 노래가 나온다. 결혼 적령기의 아가씨가 혼기를 놓칠까 아쉬워하는 노래이다. 이 시에서도 매화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비유되고 있다. 매실을 따고 나니, 일곱 개가 남았네. 나를 찾아올 님, 은 좋은 날에 오소서. 매화는 충절을 상징하며 선비의 기개와 의지를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많은 명현들이 매화로 호를 삼았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文)은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여 단종에 대한 충성심을 설중매(雪中梅)와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로 삼았다. 효종 때의 어영대장으로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李浣) 장군도 매죽헌(梅竹軒)이란 호를 썼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나 중종 때의 명필 매학 황기로(梅鶴 黃耆老), 우국열사 황현(黃玹)은 매천(梅泉)이란 호를 썼다.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청백리 염제신(廉悌臣)의 호는 매헌(梅軒)이며, 윤봉길(尹奉吉) 의사와 임란 때의 명장 이문범(李文範) 장군의 호도 매헌(梅軒)이다. 충절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던 위인들이었다. 여류 중에도 매화를 호로 삼은 분들이 많다. 조선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이 있는가 하면 춘향전의 은퇴기 월매(月梅)는 보름달처럼 친근한 이름이다. 육개(陸凱)와 범엽(范曄)의 친교는 매화가 있어 더욱 고매한 빛을 발한다. 전통적으로 매화는 달을 상징한다. 회화에서는 차가운 겨울의 보름달을 배경으로 꿋꿋하게 선 매화를 격조 높은 소재로 친다. 수많은 명작들이 둥근 보름달과 함께 설중매(雪中梅)를 그렸다. 매화가 여인과 밤을 상징하고 신하를 뜻한다면 소나무는 낮이고 남성적이며 군왕을 상징한다. 그래서 정전의 집무실 뒤에 그린 일월도(日月圖)에는 붉은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매화가 달과 같이 배치되는데 비해 소나무는 붉은 해와 같이 그리는 것이 보통이다. 대체로 소나무와 매화는 함께 배치하지 않는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함께 그리지만 매화를 솔과 같은 자리에 두지 않았는데 이것은 군왕과 신하를 동격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대나무는 곧잘 매화와 함께 그리므로 절개와 충절의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조선조 중기 이후로 오면서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를 즐겨 그렸는데 여기서 보이는 소재가 바로 송죽매(松竹梅)이다. 경복궁(慶福宮) 자경전(慈慶殿) 담장에는 도제(陶製)로 부조된 늙은 매화와 보름달을 표현한 월매도(月梅圖)가 있다. 붉은색으로 구워진 도제 줄기에 붉은 매화와 봉오리를 조각조각 붙여 모자이크 식으로 나타냈다. 바탕은 모래와 황토, 회를 섞어 발라서 밝고, 검붉은 가지와 황색 보름달이 어우러진 걸작을 빚어냈다. 매화는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도자기, 장신구, 가구, 의복, 건축물 등 생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선비들의 방에는 술병이나 찻잔, 먹, 벼루, 문진, 연적, 필세, 필통, 종이통, 담배함에도 매화를 그리거나 조각해 선비의 기질을 마음으로 깊이 새겼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매화 그림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능의 벽화이다. 매화와 함께 대나무, 소나무를 섞어 그린 이 벽화는 당시에 이미 매화를 가꾸는 일이 상당히 성행했다는 것을 말한다. 초기 고려조에서는 승려들이나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매화를 심고 가꾸는 원예 기술이 일반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꽃이 사철 피어 있다면 그 꽃이 귀한 줄을 모를 것이다. 마치 공기 속에 살고 있으면서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 같이. 우리가 꽃이 지는 것을 서러워하는 것은 다시 1년을 더 기다려야 그 꽃을 볼 수 있다는 지루함 때문이리라. 지는 꽃도 보는 마음에 따라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낙화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정원에 심는 꽃나무가 여럿 있다. 살구, 복사, 오얏, 벚나무는 화사한 꽃도 좋지만 떨어지는 꽃잎이 유난히 아름다운 나무다. 그 중에서도 매화의 낙화야말로 옛 문장가라면 한 두 편 정도의 시를 남겼을 정도로 중요한 작품 소재가 되었다. 봄날 지면을 가득 덮은 새하얀 꽃잎은 눈처럼 맑고 깨끗하다. 낙화의 순결을 범할 수 없었던 어느 스님은 공작 깃털로 꽃잎을 쓸어 좁은 길을 내었다고 하는데 하물며 속인이 어찌 꽃잎을 밟고 지날 수 있겠는가. 매실이 노랗게 익을 때쯤 내리는 비를 매우(梅雨)라 한다. 음력 6월은 강남에 장마가 시작되는 매우기(梅雨期)이다. 초여름을 매하(梅夏)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매우는 폭우로 내리기보다 부슬부슬 여러 날 계속된다. 이 때 내리는 비는 여름 과일인 매실과 살구를 살찌우는 생명의 물방울이다. 이슬비처럼 너무 적게 내려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지나친 소낙비로 내려도 안 된다.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생명의 빗줄기가 되어야 한다. 매우, 참으로 합당한 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명대 이후 매화 꽃꽂이와 분재가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도 중국의 영향으로 매화를 병에 꽂아 실내에서 감상하는 일이 유행했다. 이보다 앞서 고려 시대의 청자 병에도 꽃꽂이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귀족 사회나 사찰에서 매화를 병에 꽂는 일이 널리 퍼져 있었던 거 같다. 고려 상감청자매병(象嵌靑磁梅甁)은 풍만한 어깨에 비해 입이 유난히 좁다. 이 병은 단순히 매화 한 가지를 꽂기 위해 제작된 고도의 절제된 도예작품이다. 동양 예술은 절제된 단순미를 격조 높은 것으로 친다. 좁은 주둥이에 꽂은 가지는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있어 꽃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꽃꽂이를 위해 전용 꽃병을 만들었을 정도로 매화는 선비들에게 사랑 받은 꽃이다. 명대에는 매화의 품종만 해도 20여 가지를 기술하고 있고 기본 색상인 백매(白梅)와 홍매(紅梅)를 같은 병에 함께 꽂은 그림도 보인다. 송의 전설적인 인물 화정 임포(和靖 林逋)는 황주 서호(黃州 西湖)의 고산(孤山)에 살면서 매화를 즐겼다. 그는 자작시 〈산원소매(山園小梅)〉에서ꡒ성긴 매화나무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은 물위에 드러나고 그윽한 매화 향기는 몽롱한 달빛 속에 감도네ꡓ 라고 읊었다. 衆芳搖落獨暄姸 중방요락독훤연, 占盡風情向小園 점진풍정향소원. 疏影橫斜水淸淺 소영횡사수청천, 暗香浮動月黃昏 암향부동월황혼. 霜禽欲下先偸眼 상금욕하선투안, 粉蝶如知合斷魂 분접여지합단혼. 幸有微吟可相狎 행유미음가상압, 不須檀板共金尊 불수단판공금존.
온갖 꽃들이 시들어 떨어져도 홀로 아름답게 남아, 작은 정원의 정취를 독차지하고 있네. 성긴 매화나무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은 물위에 드러나고, 그윽한 매화 향기는 몽롱한 달빛 속에 감도네. 서리가 내릴 때 날아 온 새가 먼저 앉으려고 살그머니 훔쳐보다가, 흰나비가 혼이 빠져 앉아 있는 줄로 알겠구나. 다행히 나는 작은 소리로도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 단판위에 앉아서 금잔을 나누지 않겠는가.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이 시의 세 번째 구절과 네 번째 구절을 보고 절찬을 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일찍이 매화를 노래한 시는 많지만 이 구절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 또 위의 시에서 암향부동월황혼(暗香浮動月黃昏)이라는 구절은 매화와 달을 한 쌍으로 동시에 즐기는 운치가 가장 좋다는 의미에서 암향(暗香)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 임화정은 "매는 내 처요, 학은 내 아들(梅妻鶴子)"이라고 했다. 매화와 함께 평생을 혼자 살았던 그가 아니면 어찌 이처럼 아름다운 글귀가 나왔겠는가. 서호(西湖)의 그가 숨어살았던 유적은 오가는 시인 묵객들의 순례 코스가 되고 있다. 늙은 매화 등걸이 에워싸고 있는 그의 묘 바로 아래쪽에는 아들인 학의 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매화의 정수만을 간추려 낸 이 칠언대구는 역사상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명시라고 입을 모은다. 후세의 시인들은 이 시구에서 한 자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화정 이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노래와 그림을 통해 매화를 예찬했다. 지금도 소영(疎影)과 암향(暗香)이 매화의 대칭 시어로 자주 인용되곤 한다. 남송 초에는 이미 《화광매보(華光梅譜)》와 송백인(宋伯仁)의 《매화희신보(梅花喜神譜)》, 조맹겸의 《매보(梅譜)》가 편찬되었고, 원대에 이르러 오태소(吳太素)의 《송제매보(宋齊梅譜)》 같은 화보들이 속속 편찬되었다. 이러한 책들을 통해 매화 그림을 그리는 필법들이 자세히 소개되면서 매화도는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조선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나 사군자(四君子) 속에서 매화가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특히 사군자 속의 매화가 봄을 상징하는 식물로 알려지면서 일생을 사계절로 축소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봄은 매화, 여름의 난초, 가을의 국화, 겨울의 대나무가 그것이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면 봄은 소년기요, 여름은 청년기, 가을은 장년기이며, 겨울은 노년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인생에서 희망의 상징인 봄만 계속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팔폭병풍 그림에 어김없이 매화가 등장하는 것은 봄날처럼 희망에 가득한 나날이 계속되라는 축원의 뜻이 담겨 있다. 매화가 긴 겨울을 이겨내고 늙은 가지에서 새싹을 틔워 화사한 꽃을 피우는 것에서 회춘, 건강, 장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듯 사람도 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매화는 온대성 낙엽수이다. 따라서 겨울이 긴 우리나라에서 눈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눈을 뒤집어 쓴 매화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봄철 꽃이 피었을 때 눈이 쌓였고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았기 때문이다. 설중매(雪中梅)니 한매(寒梅)니 하지만 사실은 중국 강남 지방에서 자라는 매화를 말한다. 위도상 남쪽에 위치한 절강성, 강소성 같은 곳은 겨울에도 상록성 난대성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지역이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또한 춥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화분에 매화를 심어 겨울에는 방안에 들여놓고 가꾸는 실내 원예가 발달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은 매화를 좋아하여 많은 명품을 갖고 있었는데 홍원매실(紅園梅室)이라는 매화 온실을 따로 두었을 정도였다. 대원군(大院君)도 운현궁(雲峴宮)에 매실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중국에서는 명의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펴내면서 약용 식물학적, 식물 분류학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의 독특한 식물학적 지식을 결집한 것이 바로 본초학(本草學)이다. 조선에서도 농학적 원예학적 지식이 일반 농가까지 확대되면서 매화를 재배하는 기술도 많이 축적되었다. "분매(盆梅)는 줄기가 비스듬히 눕고 가지런하며(橫斜瘦疏), 늙은 가지가 거친 것(老枝醜樣)을 진귀하게 여긴다. 연한 가지가 웃자란 것이 있으면 운치와 격조가 떨어진다." 매년 매화가 피는 봄이면 선비들의 탐매(探梅) 여행이 이루어졌다. 전통적인 탐매 여행은 호연지기로 유명한 당의 시인 맹호연(孟浩然)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장안 동쪽의 심산에 숨어살면서 산 속에 자생하는 매화나무에서 처음 꽃이 피는 나무를 발견하면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장안에서 파교를 건너 산으로 탐매를 떠났기 때문에 '파교심매(尋梅)'라는 고사가 생겼다. 중국에는 산과 들에 매화가 자생하므로 야생 매화를 찾았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이나 지방의 관아 또는 명현(名賢)의 고택에서 자라는 매화를 감상했다. 매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탐매(探梅), 심매(尋梅), 방매(訪梅)라 했고, 또 매화를 보고 즐기는 일은 관매(觀梅), 또는 완매(玩梅)라 했다. 옛 선비들은 지방 어느 산골에 희귀한 매화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 해도 그 매화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말을 타고 종자를 거느린 채 떠나거나, 어떤 때는 기생을 동반하기도 했다. 그들은 매화나무 아래서 시를 짓고 주향(酒香)과 매향(梅香)에 취했으며, 춤과 노래가 있는 풍류를 즐겼다. 단순히 한 그루의 꽃을 위해 떠난 것이 아니라 매화 속에 깃들인 그 선비 정신을 받들고 마음의 때를 씻기 위해 온 몸으로 매향을 들이켰던 것이다. 선비가 매화를 감상하는 장면이야말로 작품의 좋은 소재이다. 신잠(申潛)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는《탐매도권(探梅圖卷)》이나 심사정의 파곡심매도(파谷尋梅圖) 등은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는다. 심사정은 햐얗게 핀 매화나무 밑을 맹호연으로 보이는 고사(高士)가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는 매화를 지극히 좋아했다. 그가 얼마나 매화를 좋아했는지 호산 조희룡(壺山 趙熙龍)이 쓴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자세히 소개돼 있어 눈길을 끈다. "단원이 연풍 현감으로 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단원에게 매화나무를 팔러 왔다. 그 매화가 퍽 기이하여 무척 갖고 싶었으나 돈이 없었다. 그 때 마침 단원에게 예전(禮錢) 삼천량을 갖고 작품을 받으러 온 이가 있었다. 그 돈에서 이천량을 주고 매화를 사고, 팔백으로 술을 사 동지들을 불러 매화음(梅花飮)을 베풀고, 나머지 이백으로 쌀과 땔감을 사니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았다." 고 적고 있다. 단원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필력을 가진 천재였다. 그만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매화는 네 가지 고귀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함부로 번성하지 않아 희소가치가 있으며, 어린 나무라 할지라도 가지가 옆으로 퍼져 고태(古態)가 있다. 또 줄기는 너무 비대하지 않고 날렵하며, 한꺼번에 활짝 피지 않고 반쯤 개화한 것이 헤프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기생들의 이름에 매(梅)라는 글자가 많이 들어갔다는 점이다. 정절을 강조하여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매화를 사랑했던 분으로는 이퇴계와 추사의 제자 조희룡도 만만치 않은 분들이다. 퇴계는 일생토록 매화를 소재로 107수의 시를 지었으며, 임종할 때에는 단양의 기생 두향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청매화에 물을 주라는 유언까지 남겼다고 한다. 퇴계(退溪)는 매화를 절군(節君)이라고 불렀다. 절개있는 군자라는 뜻쯤일까 싶다. 퇴계는 매화시첩을 엮을 정도로 시의 소재로 매화를 많이 다뤘다. 시에서 매화를 지칭할 때는 매군(梅君) 또는 매형(梅兄)이라 하여 인격체로 예우할 정도였다. 지금도 도산서원의 뜰에는 매화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조희룡은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는 집을 지었으며, 자신이 그린 매화병풍을 방안에 두르고 매화차를 마시면서 매화그림이 새겨진 벼루와 먹을 사용했을 정도로 매화에 미친사람이었다 옛 선비들은 빛깔이 짙은 홍매보다 흰빛의 백매를 더욱 격조 높은 것으로 여겼다. 그 중에서도 꽃받침이 연한 녹색인 백매를 으뜸으로 쳤다. 흰색은 빛깔의 모태요 모든 색을 포용한다. 같은 백매라 해도 꽃받침까지 흰색일 때는 나무 전체가 희게 보일 것이다. 더구나 푸른 달빛에 비춰 보이는 백매의 환상적인 빛깔은 선비의 시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달빛에 비친 매화 그림자를 두고 어찌 옛 선비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퇴계 이황은 매화사(梅花詞)를 남겼다. 마주한 둘의 마음이 함께 맑으니, 내가 매화인지 매화가 나인지 모르겠네. 서로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으니, 밝은 달이 홀로 우리 곁을 떠도네. 매화 앞에 앉아 있으면 모든 욕망이 눈 녹듯 사라진다. 부귀와 명예에 대한 욕심도 버린지 오래다. 그야말로 선비의 꼿꼿한 자세로 은거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을까. 때는 봄이라 흰 매화가 피었다. 그 꽃을 바라보고 있는 퇴계가 매화인지 매화가 퇴계인지 모를 지경이라 했다. 바로 무아지경에서 오랜 시간을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때 마침 보름달이 떠올라 매화 가지에 걸렸다. 숨을 죽이고 있는 시인과 바람 한 점 없는 달밤의 매화가지. 둘 다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자긍심을 키워 왔다. 시류에 적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무언의 대화 자리를 비껴가기라도 하듯 달은 가지 사이를 지나 흘러간다. 한 폭의 그림인 동시에 꿈속의 한 장면이다. 꽃과 사람이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을 때는 달빛마저 피해 갈 수밖에 없다니. 삼국지의 영웅 조조(曺操)가 대군을 끌고 안휘성 함산현의 매산(梅山)을 지날 때였다. 허기와 갈증으로 지칠대로 지친 병졸들을 향해 외쳤다. "저 산이 바로 매산이다. 조금만 더 가면 매실을 실컷 따먹을 수 있다." 며 군졸들을 독려했다. 병사들은 신맛을 상상하는 동안 입안에 침이 고여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무사히 매산을 넘었음은 물론이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모란을 화중지왕(花中之王)으로 받들며 꽃 중의 꽃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너무 화려하다거나 지나친 호사는 선비의 기질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모란의 농염(濃艶) 보다는 매화의 냉염(冷艶)을, 모란의 이향(異香)보다는 매화의 암향(暗香)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주고받은 매화 시를 살펴본다. 먼저 독서당 동호(東湖)의 망호당(望湖堂) 아래에 핀 매화 한 그루를 보고 쓴 것이다. 망호당은 한강 주변 독서당의 부속 건물이다. 퇴계는 1541년에 사가독서를 하며 이곳에 머물렀는데 그 후로도 자주 이곳을 찾았다. 1545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퇴계는 물러날 뜻을 굳히고 1546년 2월에 귀향을 결심한다. 그가 남쪽으로 떠나는 날에 막 꽃이 피어나는 매화를 만나 술을 가지고 찾아가서 이 시를 쓴 것이다. 望湖堂尋梅 망호당심매 望湖堂裏一株梅, 망호당리일주매, 幾度尋春走馬來. 기도심춘주마래. 千里南行難負汝, 천리남행난부여, 敲門更作玉山頹. 고문경작옥산퇴. 망호당에서 매화를 심방하다 망호당 아래의 한그루 매화, 널 보고자 몇 번이나 말 달려 왔나. 천 리길 남쪽으로 떠날 제 널 버리기 어려워, 또 찾아와 흠뻑 취해 곁에 누웠네. 여기에서 옥산퇴(玉山頹)는 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용지(容止)〉에 “혜강(嵇康)의 자태가 마치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선 것처럼 빼어나 그가 술에 취해서 넘어지면 옥으로 된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하였다. 여기서는 퇴계가 매화를 이별하매 석별의 정을 못 이겨 술에 취했음을 말한 것이다. 再用前韻答景說, 재용전운답경열, 聞道湖邊已放梅. 문도호변이방매. 銀鞍豪客不曾來, 은안호객부증래, 獨憐憔悴南行客. 독련초췌남행객. 一醉同君抵日頹, 일취동군저일퇴. 재차 앞의 운을 써서 경열에게 답하다 듣자하니 저 호숫가에, 매화 이미 피었으나, 흰 안장 호방한 객이, 아직 오지 않았다오. 가엾어라 초라한 이 몸, 남으로 가는 길이니, 임과 함께 한번 취해, 저무는 것도 모르련다. 다음은 퇴계가 1566년(명종21) 중춘에 소명의 사면을 빌며 예천 동헌에 머물면서 뜨락의 매화에게 묻는 시이다.〔丙寅仲春 乞辭召命 留醴泉東軒 問庭梅〕그는 명종의 소명을 받아 서울로 올라가다가 병으로 사직을 하고 예천에 머물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매화 시 두 수를 지었다. 得鄭子中書 益歎進退之難 吟聞庭梅 득정자중서 익탄진퇴지난 음문정매 風流從古說孤山, 풍류종고설고산, 底事移來郡圃間. 저사이래군포간. 料得亦爲名所誤, 료득역위명소오, 莫欺吾老困名關. 막기오로곤명관. 정자중의 서한을 받아보고 진퇴가 어려움을 더욱 한탄하며 시를 읊어 매화에게 묻다. 매화의 고절함은 고산을 일컫거늘, 무슨 일로 이 관가에 일찍이 옮겨왔나. 마침내는 스스로가 명리에 그릇 얽혀, 내가 늙었다 해서, 속이지를 말아다오. 제목의 정자중은 퇴계의 문인인 정유일을 말하며, 시에서 고산(孤山)은 송나라 때 은자인 임포(林逋 967~1028)를 가리킨다. 그는 자가 군복(君復)으로 서호(西湖)의 고산에 은거하여 20년 동안 성시(城市)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서화와 시에 능하였고 특히 매화시가 유명하다. 장가를 들지 않아 자식이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짝을 삼으니, 당시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사후에 화정선생(和靖先生)이란 시호를 받았다. 代梅花答 대매화답 我從官圃憶湖山, 아종관포억호산, 君夢雲溪客枕間. 군몽운계객침간. 一笑相逢天所借, 일소상봉천소차, 不須仙鶴共柴關. 불수선학공시관. 매화를 대신하여 대답하다. 나는 관가에 있으면서 고산 생각 간절하고, 그대는 구름 시내에 나그네 꿈 짓는구나. 서로 만나 한번 웃으니 하늘이 점지함이라, 신선 학과 사립문에 아니 와도 좋을 것일세. 다음은 예천에 있을 때 매화를 보았는데 그 후 수십 일 만에 안동 도산에 이르니 산 매화가 처음 피었다. 이 매화를 퇴계가 보고 기뻐서 지은 시이다. 丙寅季春 辭召命 還山問梅 병인계춘 사소명 환산문매 爲問山中兩玉仙, 위문산중양옥선, 留春何待百花天. 유춘하대백화천. 相逢不似襄陽館, 상봉부사양양관, 一笑凌寒向我前. 일소릉한향아전. 1566년 병인년 계춘에 소명을 사양하고 산에 돌아와 매화에게 묻다. 묻노라 이 산중에, 두 그루 백옥 신선, 어이 봄 빛 기다리어, 온갖 꽃 필 때 이르렀나. 이제 서로 만났으나, 양양 객사 같지 않아 추위를 비웃으며 , 나의 앞에 다가오네. 시에서 양양은 예천(禮泉)의 옛 이름으로 양양관은 그곳의 객사를 말한다. 代梅花答 대매화답 我是逋翁換骨仙, 아시포옹환골선, 君同歸鶴上遼天. 군동귀학상료천. 相逢一笑天應許, 상봉일소천응허, 莫把襄陽較後前. 막파양양교후전. 매화를 대신하여 대답하다 나는 바로 포옹이라 환골한 신선인데, 그대는 요동에 돌아온 학이라 하늘에서 내려왔네. 서로 만나 한 번 웃음 하늘이 이미 허락하니, 양양관의 매화와 전후를 비교하지 마시게. 여기에서 포옹(逋翁)은 송나라 때 은자인 임포(林逋 967~1028)를 말하는 데 임포의 시 “산 동산의 작은 매화(山園小梅)”는 너무나 유명하다. 제 2구의 요동에 돌아온 학은 정영위(丁令威)를 말한다. 정영위는 본래 요동(遼東) 사람으로 영호산(靈虎山)에서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는데, 그가 뒤에 학으로 변하여 성문 앞의 큰 기둥인 화표(華表)에 앉아 있었다. 이때 어떤 소년이 활로 쏘려고 하자 학이 날아서 공중을 배회하며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영위로다. 집을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야 돌아오니, 성곽은 옛적과 같은데 백성은 그때 사람이 아니로구나. 어찌하여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 즐비한고.’하고는 날아가 버렸다. 다음은 1569년 3월초에 선조 임금의 윤허를 받고 서울을 떠나는 퇴계가 1568년 7월부터 1569년(선조2) 3월까지 8개월간 한성 우사에 있으면서 늘 책상에서 마주보던 매화와 떠남을 서운해 하며 지은 시이다. 漢城寓舍 盆梅贈答 한성우사 분매증답 頓有梅仙伴我凉, 돈유매선반아량, 客牕瀟灑夢魂香. 객창소쇄몽혼향. 東行恨未携君去, 동행한미휴군거, 京洛塵中好艶藏. 경락진중호염장. 한성 우사에서 분매와 증답하다 다행히 이 매선이 나와 함께 서늘하여, 객창이 소쇄하여 꿈마저 향기로워라. 동으로 돌아갈 제, 그대와 함께 못하니, 서울 티끌 이 속에서, 고이 보전하시게. 盆梅答 분매답 聞說陶仙我輩凉, 문설도선아배량, 待公歸去發天香. 대공귀거발천향. 願公相對相思處, 원공상대상사처, 玉雪淸眞共善藏. 옥설청진공선장. 매화가 대답하다 듣건대 도선께서, 우리를 푸대접한다 하니,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을 피우리라.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앉아 생각할 때, 청진한 옥설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 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기사년 모춘 3일 계로(溪老). 나의 고향 예안(禮安)은 영남의 가장 북쪽에 있다. 육로로 새재(鳥嶺)를 경유하여 가면 남행(南行)이라 하고 수로로 죽령(竹嶺)을 경유해서 돌아가면 동행(東行)이라 하니, 모두 예안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매화시에 대해 고봉은 1569년 3월15일에 퇴계에게 쓴 편지에 8수의 차운(次韻) 시를 동봉한다. 퇴계 선생의 매화시에 우러러 차운하다(仰次退溪先生梅花詩) 先生幽契託寒梅, 선생유계탁한매, 京洛風塵偶獨來. 경락풍진우독래. 歸興浩然春不暮, 귀흥호연춘부모, 定憐疏影慰摧頹. 정련소영위최퇴. 선생의 그윽한 마음 한매에 의탁하고, 서울의 풍진 속에 우연히 홀로 왔네. 돌아갈 흥 호연하고 봄도 저물지 않으니, 성긴 그림자 쇠퇴함 달래 줌이 어여쁘네. 晴牕深著一枝梅, 청창심저일지매, 不許遊蜂取次來. 부허유봉취차래. 今日別懷空自苦, 금일별회공자고, 百觴澆下任欹頹. 백상요하임의퇴. 맑은 창가에 한 가지 매화 환히 피었는데, 나는 벌 찾아오는 것 허락지 않네. 오늘의 이별 부질없이 괴로워하노니, 백 잔 술 마셔 마구 취해 쓰러지네. 公欲尋梅返舊山, 공욕심매반구산, 我貪榮祿滯塵間. 아탐영록체진간. 燒香繫纜知何處, 소향계람지하처, 風雨冥冥獨掩關. 풍우명명독엄관. 공은 매화 찾아 고향 산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영화 녹봉 탐하여 풍진에 머무르네. 향 피우고 닻줄 매는 곳 어드메냐, 비바람 어둑한데 홀로 사립문 닫았노라. 3월 10일에 비바람이 매우 심했는데 멀리 간 배를 생각하며 홀로 깊은 방에 있으면서 이런 말을 썼다. 湖上荒廬倚碧山, 호상황려의벽산, 瘦梅脩竹映牕間. 수매수죽영창간. 祗今春信應如舊, 지금춘신응여구, 愧我功名未透關. 괴아공명미투관. 호수 위 황량한 집 푸른 산 의지하니, 여윈 매화 긴 대나무 창살에 비치네. 지금도 봄소식 옛날과 같으리니, 공명의 관문 뚫지 못한 내가 부끄럽네. 縹緲淸標鶴上仙, 표묘청표학상선, 故將芳意露春天. 고장방의로춘천. 誰憐鼎實垂烟雨, 수련정실수연우, 種出嘉萌在眼前. 종출가맹재안전. 아스라한 맑은 모습 학 위의 신선인데, 꽃다운 마음 짐짓 봄 하늘에 드러내었네. 누가 정실이 연기와 빗속에 드리움을 동정하랴, 심어서 나온 좋은 싹이 눈앞에 있네. 정실(鼎實)은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의 역할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퇴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嶺外寒梅是謫仙, 영외한매시적선, 孤芳羈跡各全天. 고방기적각전천 何當月下開幽抱, 하당월하개유포, 說到羲皇畫卦前. 설도희황화괘전. 고개 너머 차갑게 피어 있는 매화는 바로 적선이라, 고고한 향기와 나그네 자취가 각각 천성을 보전하였네. 어찌하면 달빛 아래서 우리 그윽한 회포를 열고, 복희씨가 괘를 긋기 전의 이야기를 해 볼까. 매화는 적선이라. 고고한 향기와 나그네 자취가 천성이네. 고봉이 퇴계의 성품을 이렇게 매화에 비유한 것이다. 적선은 죄를 짓고 인간세상으로 쫓겨 내려온 천상의 선인이다. 이 시에 나오는 복희씨는 주역의 8괘를 처음으로 만든 전설적인 인물로서 몸은 뱀이고 얼굴은 사람이며, 소의 목과 호랑이 꼬리가 달렸다고 <열자>라는 책에 전한다. 공자는 <주역>을 좋아하여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는데, 특히 복희씨가 괘를 긋기 전의 뜻에 심취했다고 한다. 暗傲霜寒帶月凉, 암오상한대월량, 小牕培養發微香. 소창배양발미향. 冰姿擬待明年賞, 빙자의대명년상, 報道園丁莫謾藏. 보도원정막만장. 남몰래 서리를 이겨내고 달빛 띠고 서늘한데, 작은 창가에 배양되어 은은한 향기 풍기누나. 얼음의 자세 명년을 기다려 감상하리니, 정원지기에게 부탁건대 부질없이 감추지 마오. 稜稜高節撥炎凉, 릉릉고절발염량, 風動烟香不廢香. 풍동연향불폐향. 春攬百花從爛熳, 춘람백화종란만, 水邊林下且深藏. 수변림하차심장. 늠름한 높은 절개 더위 물리치고 서늘한데, 바람 불고 안개 자욱해도 향기 사라지지 않네. 봄날에 온갖 꽃 난만하게 피어나면, 물가 숲 아래에 깊이 감추리라. 동천년노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품으며 매화는 일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흠의 ‘야언(野言)’에 나오는 유명한 글귀다. 매화는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꽃을 피워 고매한 절의를 드러냄으로써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우러러진다. 늙은 몸에서 꽃을 피운다 해서 회춘(回春)을 상징하기도 한다. 더불어 사랑을 상징하는 꽃 중에서 으뜸으로 매겨진다.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 화목 9등품론에서 매화를 1품으로 분류한 바 있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은ꡒ남해의 신선이 사뿐히 땅에 내려와, 달밤에 흰옷 입고 와서 문을 두드리네ꡓ라며, 매화를 신선이라 칭송했다. 한 송이 꽃을 보고 신선이라고 노래했으니 얼마나 매화를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2세기 일본의 요시다 겐코(吉田兼好)는 그의 수필집 《도연초(徒然草)》에서 겹매보다 단엽매가 더 운치가 있다고 했다. 매화는 백매(白梅)와 담홍매(淡紅梅)가 겹꽃보다 더 좋다. 외겹 꽃이 일찍 피는 것이나 홍매의 빛깔이 아름다운 것도 다 좋다. 늦게 피는 매화는 벚꽃과 같은 때 피기 때문에 인기가 없고, 벚꽃의 화사함에 압도되어 가지에 달라붙어 있는 모양이 애처러운 생각이 든다. 가인(歌人) 사다이에(定家)경은 "외겹꽃이 일찍 피었다가 어느새 저버리는 것이 매우 민감한 느낌을 주어서 재미있다"며 처마 밑에 두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었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아래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 최대수(最大樹)인 정당매(政堂梅)라는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곳은 유명한 단속사(斷俗寺)지 삼층석탑이 남아 있어서 탑동으로 불리는 조용한 마을이다. 단속사는 원래 이름이 금계서(錦溪寺)로 신라 효성왕(737~741년) 대의 공신 신충(信忠)이 763년에 세운 절이다. 그 후 경덕왕(742~764년) 대의 직장 이순(直長 李純)이 748년에 중창하였다. 그리고 신라 말 신행선사(神行禪師)가 본격적인 대가람으로 중흥시켰다. 정당매는 고려말 강회백(姜淮伯)이 심었다고 전한다. 강회백(1357~ 1402) 은 호를 통정(通亭)이라 했으며 본관은 진주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양왕 때는 세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대사헌에 올랐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정도전 등에 반대했다가 진양으로 귀양가기도 했다. 강회백은 처음 금계사에서 공부하다가 개성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친지들에게 자신이 애배(愛培)해 오던 매화나무의 관리를 부탁하고 떠났다. 후에 종2품 벼슬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한 뒤 낙향하여 매화나무에 정당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손수 심은 정당매에 읊은 《통정집通亭集》에 기록된 다음의 시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커다란 감동과 감회를 느끼게 한다. 斷俗寺手種梅 단속사수종매 偶然還訪石山來, 우연환방석산래, 滿院淸香一樹梅. 만원청향일수매. 物性也能至舊主, 물성야능지구주, 慇懃更向雪中開. 은근갱향설중개. 一氣循環往復來, 일기순환왕복래, 天心可見臘前梅. 천심가견납전매. 自將鼎調羹實, 자장정조갱실, 向山中落又開. 향산중락우개. 단속사에서 손수 심은 매화를 보며 우연히 옛 고향을 다시 찾아 돌아오니, 한 그루 매화 향기 사원에 가득하네. 무심한 나무지만 옛 주인을 알아보고, 은근히 나를 향해 눈 속에서 반기네.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가니, 천심을 매화에게서 볼 수 있네. 다만 솥을 가지고 매화 열매 조리할 것인데, 부질없이 산 속을 향해 지었다 또 피네. 강회백 당시의 정당매는 100년 쯤 지나자 시름시름 죽어갔는데 그의 증손 강용휴(姜用休)가 곁에 어린 나무를 심고 그 뿌리를 정당매에 접붙여 살려냈다고 한다. 현재 지름 30~40㎝의 큰 줄기 세 개가 같은 그루터기에서 솟아올라 있으나 위쪽은 모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루터기에서 어린 가지가 여럿 돌려나 있고, 매년 봄철이면 횐 꽃이 화사하게 핀다. 아래쪽 줄기의 둘레는 2m 정도나 된다. 증손(曾孫)되는 강윤범(姜允範)이 문종때 경상감사(慶尙監使)로 부임 했을 때 그의 증조부가 심어 놓은 정당매를 찾아와 지은 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觀梅追慕那時栽, 관매추모나시재, 獨守春光任自開. 독수춘광임자개. 風雨多年無恙否, 풍우다년무양부, 漢陽千里有人來. 한양천리유인래. 매화를 보고 심은 때를 헤아려 추모하니, 홀로 봄빛을 받아 스스로 피어났네. 오랜 세월 비바람 속에 평안이 있어, 한양 천리 먼 길을 너를 보러 왔노라. 또 후손 강대곤(姜大崑)의 시가 있다. 聞香千里古山來, 문향천리고산래, 萬疊頭流一樹梅. 만첩두류일수매. 如答雲乃追慕意, 여답운내추모의, 滿天風雪爛然開. 만천풍설난연개. 향기 찾아 천리 길 옛 고향에 찾아오니, 첩첩한 두류산엔 한 그루 매화가 있네, 구름도 추모의 뜻 표하듯이 흐르는데, 하늘 가득한 눈바람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었구려. 또 남명(南冥) 조식(趙植)선생은 단속사의 정당매를 보고 이렇게 읊었다. 낡은 절의 중 야위었고, 산도 전 같지 않네. 전왕(前王)이 이로부터 다시는 찾지 않으니, 신(化工)도 매화 가꾸는 일을 잊어버렸나. 어제도 꽃이더니, 오늘 또 다시 피었네. 또 60대의 조식선생이 20대의 사명대사에게 주었다는 시가 있다. 贈山人惟政 증산인유정 花落槽淵石, 화낙조연석, 春深古寺臺. 춘심고사대. 別時勤記取, 별시근기취, 靑子政堂梅. 청자정당매. 꽃은 조연의 돌에 떨어지고,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의 푸른 열매를. 조선초기의 학자로 알려진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탁영집濯纓集》권1의 〈정당매시문후政堂梅詩文後〉에 기록된 내용이 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은 조선초 성종조(成宗朝)의 대표적인 관인(官人)의 한 사람이었고, 대 문장가였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한때 실의에 빠져 낙향(落鄕)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지리산 단속사에 들렀다가 정당매를 보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옛날 실의에 빠져 영남(嶺南)에 내려가 지리산을 유람(遊覽)하려고 하였는데, 먼저 단속사에 이르게 되었다. 그 절에는 옛 누대(樓臺)가 있었고, 누대 앞에는 한 길쯤 되는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아래에 썩지 않고 남은 것이 반 자 가량 되는 옛 등걸이 있었다. 절의 중이 그것을 정당매라고 하였다. 그것이 그렇게 불리는 까닭을 물으니, 그 중은 이렇게 말 하였다. 강통정(姜通亭-통정은 강회백의 호임)이 어렸을 때에 손수 심은 것인데, 그 후 벼슬을 하여 정당문학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었습니다. 강통정이 죽은지 백 여 년이 되었는데, 매화도 또한 늙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昔年落魄嶺表, 將遊頭流先抵斷俗寺, 中有古樓, 樓前有梅兩株, 長丈餘, 下有古査, 其不滅者半尺, 寺僧目爲政堂梅, 詰其所以名, 側乃曰姜通亭少年時手植, 其後釋褐, 官至政堂文學, 因名焉, 政堂亡百有餘年, 梅亦未免老死. 라는 기록이다. 탁영의 이러한 기록은 단속사의 정당매를 보고 사실을 적은 글이며, 김일손이 정당매를 본 것은 강회백이 죽은지 백여년이 지난 뒤이며, 김일손이 단속사에 갔을 때에는 정당매는 이미 죽어 썩은 등걸만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김일손에게 감명(感銘)을 준 것은 단속사의 정당매 옆에 두 줄기 어린 매화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매화는 강회백의 증손인 용휴(用休)가,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용휴의 아버지)의 명을 받아 정당매 근처에 심은 것이다. 정당매의 죽음으로 인한 선조의 유적(遺跡)이 단절(斷切)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후손들이 심은 지가 10년이 지났을 때였다. 강회백에게 강희맹이라는 손자가 있듯이, 정당매도 손자 매화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김일손은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정당매화의 손자매화를 심었던 강용휴도 승지벼슬을 하여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용휴(用休)는 동료들에게 연회(宴會)를 베풀고 자신의 할아버지와 관계된 정당매를 시제(詩題)로 삼아 시축(詩軸)을 만들었고, 정당매를 두고 지은 시문을 모아서 서책을 만들었으며, 그 책 서문을 김일손에게 부탁하였다. 김일손은 이에 〈정당매시문후(政堂梅詩文後)〉라는 글을 지어 정당매에 관한 전후 사실을 오늘 날 까지 상세하게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정당매에 관한 일과 손자의 효심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아, 사람은 갔지만 시는 남아 있고, 일은 지나갔지만 이름은 남아 있도다. 궁벽(窮僻)한 산골 깊고 깊은 골짜기의 사람의 발길 드문 절의 황폐한 정원에서 옛 등걸에 새로운 가지가 나서 그 성근 그림자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니, 자손된 사람으로서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미 새 매화를 심고 또 시가(詩歌)를 지어 그 뜻을 드러내 보인 것이니, 나는 승지공(承旨公-손자 용휴(用休)의 추원지심(追遠之心-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이에서 볼 수 있다. 噫! 人去詩留, 事往名存, 窮山絶壑, 野寺荒庭, 舊査新枝, 冷影相對, 爲子孫者, 當作何如懷也, 所以旣封植而又求歌詠以發其志也, 吾見承旨公追遠之心, 懇懇不己. 경남 산청지방에는 정당매 말고도 또 한 그루의 고매가 지금도 살아 있다. 지리산 천황봉(天皇峰) 아래 산청군(山淸郡) 시천면(矢川面) 사리(絲里)의 산천재(山川齋)는 호남의 거유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지은 정사(精舍)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학파의 수장(首長)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사후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추서된 인물이다. 그가 61세 되던 신유년(1561)에 지은 산천재 뜰에는 당시에 손수 심었다는 고매 한 그루가 지금도 맑은 향을 주위에 퍼뜨린다. 산천재 건립 당시에 심었다면 440여 년이나 되는 셈이다. 이 고매는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꽃이며 향기가 지극히 맑다. 밑에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뻗어 올랐고 군데군데 벌레가 쓸어 구멍이 나 있지만 건강한 편이다. 가지도 섬세하게 자라 해마다 많은 꽃이 다투어 피는데 개화기는 3월 말이다. 남명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운(韻)에 따라 지은 매화시 속에는 매화와 더불어 욕심 없이 사는 선비의 고매한 인품이 그대로 녹아있다. 달빛 아래 누워 시 읊조리니, 절로 흥이 이네. 뜰 앞에 선 저 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으면, 한 가지 꺾어 멀리 떠난 임에게 보내련만. 절세의 명기 황진이(黃眞伊)도 꺾지 못한 화담, 그리고 남명은 매화만큼이나 청아한 삶을 살다간 겨레의 스승이었다. 400년이 지난 오늘날 역사의 주인공은 사라졌지만 매화는 살아서 그 무대를 증언하고 있다. 매화의 열매인 매실은 귀한 약재로 쓰인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나 명의 이시진(李時珍)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에도 매실의 약효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덜 익은 매실의 딱딱한 씨를 빼고 불에 그을린 것을 오매(烏梅)라 하고, 소금에 절인 것을 백매(白梅)라 하는데 설사, 해열, 기침, 가래, 구토에 쓴다"고 했다. 의성 허준(醫聖 許浚)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오매는 염증을 치료하고 토하는 것을 멈추게 하며 갈증과 이질, 열을 내려 주고 곽란, 소갈증을 다스린다"고 했다. 매실이나 살구 복숭아 같은 과실의 미숙과는 강한 독성을 갖고 있다. 덜 익은 살구, 복숭아를 먹으면 설사가 나고 배앓이를 하는 것도 이 독성 때문이다. 매실의 독성은 시토스테롤(Sitosterol), 레아놀 산(Oreanolic acid) 등이 주성분이다. 그러나 독성도 완전히 익으면 당분으로 바뀌어 향기로운 과일이 된다. 매실은 술을 담가 마시거나 잼, 시럽, 주스 등으로 가공해 먹기도 한다. 미숙과를 간장이나 된장에 절이면 장아찌가 되고, 독에 저장하여 식초를 낸 것을 매장(梅漿)이라 하여 조미료로 썼다. 일본에서는 소금에 절일 때 차즈기 잎을 함께 넣는다. 이렇게 하면 차즈기의 붉은 색소가 물들어 우메보시(梅干)라는 매실 장아찌가 된다. 매실의 씨를 빼고 꿀에 졸이면 매실정과가 된다. 쫄깃거리면서 새콤하고도 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매실을 과일로 먹기보다 요리의 재료가 된 것은 이미 기원전부터이다. 《예기(禮記)》에는 음식에 곁들이는 여섯 가지 음료 중에 매실로 담근 식초인 의를 마신다고 했다. 또 복숭아나 매실 절인 것을 먹을 때는 소금에 찍어 먹는다고 했다. 이미 기원전부터 매실이 요리의 재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猷+噫 매화의 꽃봉오리를 모아 말렸다가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매화차(梅花茶)가 된다. 매향을 혀끝으로 맛보기 위해서이다. 또 매화를 베주머니에 싸서 술항아리에 넣었다가 꺼내고 마시는 술을 매화주(梅花酒)라 했다. 동남아를 비롯한 열대 아시아 사람들은 여행 중에 매실 말린 것을 갖고 다니며 씹는다. 더위를 막아 주고 물갈이에서 오는 배탈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늙은 매화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예스러워 더욱 멋이 있다. 고매(古梅)를 많이 가꾸고 있는 곳은 전남 순천의 선암사 경내이다. 3월말이면 200년 이상 된 늙은 매실나무 수십 그루가 봄의 향연을 펼친다. 그루터기에 푸른 이끼가 자라고 줄기에는 지의류가 붙어 태고의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열매를 거두기 위해 매실나무 과수 단지를 이룬 곳이 바로 경남 하동 지방이다. 지리산 자락에 펼쳐진 계단식 매실나무 밭은 봄이면 매화가 만발하여 구름처럼 산허리를 감싼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옛 그림이 있다. 옛 선비들이 흰 매화 꽃송이 81개를 매화나무 가지에 그려서 그 그림을 동짓날 벽에 붙여 놓는다. 그리고 매일 한 개씩 붉은 색깔로 칠을 해서 백매화를 홍매화로 만들어 나간다. 동지(冬至)부터 칠을 시작해서 마지막 꽃송이가 붉어지는 날이 바로 3월 12일경이다. 81개의 꽃송이가 붉게 핀 구구소한도를 떼어 내고 창문을 열면 거기 창밖에 붉은 홍매가 피어있게 된다. 다가오는 매화의 계절에 매화 한 가지를 취하여 매화 시(詩)와 더불어 존경하는 분이나, 사랑하는 친구에게 선물하심도 좋을 성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