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분의 가을
김 미 애
잘 난 체 마라. 겸손해라. 세상 모두는 제 멋에 산다. 그런대도 우쭐대는 이 심사를 녹이고 또 녹여 잠재우고 싶다.
2년마다 한 번 여는 신엄리민 체육대회가 있는 날. 청년회 임원인 남편으로 하여 그 안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게 됐다. 회장 부인은 나와 동갑인데, 모임을 하나 만드는게 어떠냐며 그 일을 내게 추진해 보라한다.
그녀는 나보다 사회 활동도 깊게 할 뿐더러 큰아이가 중학생이라 훨 의젓해 보인다. 그런 친구가 체육 대회때 피켓 걸 부탁을 한다. 사양하는 내게 "30분 서고 오만원이야". 한다. 그래 용기 충전 !사기 충전! 도전해 보자.
한복을 입어야 한다기에 옷장에서 꺼냈다. 새각시때 장만한 꽃수가 수놓아진 다홍치마에 물빛저고리다.
아침 8시 30분 임원들 식사 준비로 신엄중 급실실에 여자들이 모였다. 홍시, 포도, 회, 장아찌, 김치, 떡, 나물, 국수, 음료등 풍성하다. 그곳에 모인 젊은 사람들을 보며, 허전한 농촌 현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우리 다음 세대인 이십대가 드문드문 보일락말락인 것이다.
개회식이 몇 시인지 진행팀에서 연락도 없다. 태평스레 벗이랑 언니들과 수다가 싱그럽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손질해 준다며 두 언니가 내 뒤에 섰다. '아! 아파'. 짱짱하게 땋는 솜씨가 느껴진다.
갑자기 파란 유니폼의 진행요원 남자가 급식실로 뛰어든다. 피켓걸이 누구냐며 찾는 중이었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뒤를 따랐다. 내빈들은 벌써 자리에 다 앉아 있고, 선수들 청룡, 사자, 백호, 독수리 네 팀이 초록잔디위에 나열해 있는 것이 보인다.
아! 그런데 한복 입은 여자가 없다. 그 것이 나 혼자 였던 것이다. 이런! 재작년 책자에는 분명 네다섯명이었다. 친구가 그 말을 쏙 뺐던 것이다. 이제 와서 말해 무얼 하나.
빈 교실에서 치마와 저고리로 갈아입었다. 머리속이 하얗게 장막이 드리운다. 내 대신 피켓을 들고 있던 진행요원이 얼른 중앙으로 안내한다. 구름은 살짝 가려져 햇살이 연하다. 맨 앞 중앙, 홀로 선 나는 시선을 어디둘지 몰랐다.
국회의원, 각 기관장, 회장 수없이 많은 분들의, 인사와 격려 축사가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한 인사가 내 뒤에 선 선수들을 그 자리에 앉게 한다. '아 이럴수가! 그럼 난 서야하나 앉아야 하나! 신엄리민 피켓을 들고, 옷도 운동복이 아니다. 이건 서야 되는 거지' 이 넓은 운동장에 홀로 서 있다. 이 일을 어째!!
피켓을 잡은 두 손이 떨려 힘을 주었다. 그런 중에 스포트라이트마냥 구름 속 햇님이 얼굴을 내민다.
바람이 불어온다. 치마가 나부낀다. 흔들리지 말자. 괜찮다. 시간은 곧 갈테지.
천막 안은 오십 여 명의 임원, 등 뒤로 오백 여 명의 선수와 리민이, 운동장에 덩그러니 선 나만 보는 건 아닐테지. 축포가 쏘아진다. 꽃가루가 날리고 청년회장의 개회선언이 선포된다. 이제 끝났구나.
두 다리가 뿌리째 그자리에 박힌냥 움직이지 않는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진행요원이 '이쪽으로 오세요'. 하며 손에 든 피켓을 들어준다. 옷을 갈아 입었다. 백지상태인 몸이 스르르 책상위로 누인다.
드디어 그 긴장된 사십 여 분을 견딘 것이다. 해 볼만 했는지, 안했음 어땠는지 모른다. 연습도 없이 한 내 모습이 어땠을까 부끄럽고 어색했다. 그나마 그 볕에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대회가 끝이 났다. 뒷풀이를 마친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엄 논스톱에 앉았다. 개회식 장면을 떠올리며, 그는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내가 어여뻐 보이던가요'.
가을밤에 소년같이 웃고 있다. 마치 그리 고운 자네가 내 여인 인 게 행복하다오 되뇌이는 것인냥...... .
그렇게 바람 찬 노천 테이블에 두 젊음이 익어가고 있었다.
2011.09.25.일요일
첫댓글 읽고 있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질 않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을 만드셨군요. 그리고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피켓걸을 하고 저녁엔 또 한스북카페에 오셨군요. 그 열정이 님을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
ㅋㅋ 말을 하지 그랬어요. 신경 접으시길.... 아마도 아무도 관심 같지 않았을걸요. 남편만 빼고.
행복한 그림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하고 싶어도 설 자리도 없거니와 시켜 주지도 않겠죠ㅋㅋㅋ 부럽습니다
ㅎㅎㅎ...재미있고 리얼하게 그려주셨네요...5만원 그냥 벌어지는 것이 아니죠...ㅎㅎ 그래도 "저기 피켓걸이 우리 마눌"이라고 얼마나 자랑했을까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