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가진 역사의 관념은 모든 세기에 걸쳐서 서양의 문물이 동양을 앞서 있었고 주도해 왔던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서양이 문명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18C 들어서 일어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있은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오히려 서구유럽이 동양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나오던 시기였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이 몰락한 후 서양에서 예수기원 이후(AD)약1,000여 년 간은 '서양 문명의 암흑기'로 불리울 만큼 문명의 발전이 없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미 AD 105년에 종이가 발명되었고, AD1000년경에는 나침반과 화약이 발명되었을 만큼 동양의 문명은 서양에 비해 앞서 있었다.
그리고 이슬람권에서는 인도와 고대 그리스의 과학을 종합하여 수준 높은 천문학, 의학, 수학을 발달시켰다. 대수법과 삼각법이 개발되고 정확한 태양력이 제작되었으며, 광학과 연금술의 실험 방법은 근대과학의 선구(先驅)가 되었으며 12C에는 이슬람의 과학이 유럽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10C경의 중국의 항해술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다. 격실(隔室)을 갖추고 4개의 갑판, 4~6개의 돛대, 12개의 돛을 갖춘 거대한 중국 선박은 선미에 방향타가 있고 지도와 나침반을 사용했으며 500명을 태울 수 있었다.
항해술은 이슬람권에서도 아주 뛰어났는데, 타고난 상업의 귀재들인 이슬람 상인들은 8C부터 인도양을 앞마당처럼 넘나들며 동양의 앞선 문물을 서양에 전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문명의 암흑기에 빠져 있던 서양은 동양에서 전해지는 앞선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10C이후 동양의 앞선 문물이 서양으로 전해진 두 가지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십자군전쟁과 칭기즈 칸의 세계 정복이다.
서양을 지배하고 있던 중세 봉건주의가 몰락하기 시작한 단초는 11C 후반부터 약 200년 동안 로마 교황의 주도하에 진행된 십자군 전쟁(11C말~13C말)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11C 후반 알라신을 믿는 셀주크 투르크족이 기독교의 성지(聖地)가 있는 소아시아를 점령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시작되었는데, 로마 교황청의 기독교 교리를 정신적 축으로 삼고 있던 유럽은 이 사건을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를 침략한 것으로 여겼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의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7차에 걸쳐 감행되었는데, 자신들의 성지를 회복하는 듯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예수 사후(死後) 1,000여 년 동안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강력한 정신적 공동체를 유지해 왔던 서부 유럽의 사회에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원정의 실패로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고, 전쟁에 참가한 봉건 영주들이 몰락하여 봉건체제가 크게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을 치르기 위해 동방으로 온 병사들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역의 대도시인 큰스탄티노플의 선진 문물, 휘황찬란한 건물, 진기한 물건, 깨끗한 도시와 활기찬 주민을 보자 입이 딱 벌어졌다. 평생 자기가 살고 있는 영지를 벗어나지 못했던 서유럽의 중세인들이 본 동양의 신천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십자군의 원정경로
그래서 십자군 중 일부는 전쟁이 끝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방과 가까운 이탈리아의 도시로 모여들어 이탈리아에서는 상업도시가 크게 번성하였는데, 도시의 성장은 중세 유럽이 몰락하는 하나의 조짐이었던 것이다.
십자군 원정 외에 동서 교류를 더욱 성행하게 한 계기는 몽고제국의 성립이었다. 칭기즈 칸에 의해 시작된 몽고제국은 유목민족 특유의 뛰어난 기동력과 조직력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물론 이슬람권 및 동유럽까지 휩쓸었다. 칭기즈 칸은 극동아시아에서 흑해유역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역사상 가장 원대했던 원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과 쿠빌라이 칸
이 시기에 칭기즈 칸이 세운 원나라를 방문했던 대여행가인 마르코 폴로(Polo, Marco)는 1271~1295년에 동방을 여행한 후 훗날『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방의 문물 및 무역의 번영에 관해서 자세히 적혀 있어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것들에 고무된 당시의 유럽인은 동방은 마치 황금이 쏟아지는 신비한 땅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동방으로 진출해서 한몫 잡고자 하는 열망이 들끓었다.
이러한 시대적 하에서 유럽에서는 지중해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림과 동시에 동서양 문물을 함께 접했던 이탈리아의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르네상스는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유럽의 역사에서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유럽의 중세는 인간성이 말살된 야만시대(野蠻時代)였음을 인식하고 본연의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사회 · 문화에 걸친 일련의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운동이 발생하게 된 원동력은 동방의 이슬람 세계 및 몽고제국에 의해 이루어진 동서양 교류였음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럽 문명의 암흑기는 유럽에서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이후부터 진행되었는데, 그 시발점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로마인들을 결속시켜 주고 있던 올림픽을 폐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에 첫 번째로 명시된 '나(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구절을 내세워 로마인들이 올림푸스의 신들을 섬긴다는 이유로 올림픽을 폐지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의 다신교 신앙을 포함한 문화유산은 서구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의 학문 중 일부는 중세유럽에서 유럽인의 의식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인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던 과학과 철학은 중세유럽에서 완전히 몰락하여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이슬람 세계에 의하여 계승 발달되었으며 보존되었다가 이후 동서무역을 통하여 유럽으로 다시 흘러 들어갔으니, 생각해 볼 때 서양의 르네상스는 자생적으로 발생된 것이 아니라 동양의 앞선 문물이 서양에 전해짐으로써 발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 · 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 문화가 로마로 들어오기 전 로마인들의 신앙이었고 문학이었으며 삶 그 자체였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재생과 부활을 뜻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다신교 신앙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볼 때 신(神)은 유일하고 전지전능하며 동시에 창조주이며 절대자인데 반해 그리스의 신은 다분히 인간적이다. 그리스의 신들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는다. 권능이 있고 침해받을 수 없는 자기 영역이 있는 것은 인간과 다르지만,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바람을 피우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음모와 배신, 권모술수 따위를 쓰는 것은 인간과 비슷하다.
'르네상스'란 이라한 고대 그리스 신화적인 정신세계를 다시 부활하자는 것이었으니 르네상스는 1,500여 년간 기독교의 유일신에게 신물이 나도록 지긋지긋하게 억눌렸던 유럽인들을 자극하고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그리스 문화의 현실 중심적, 현세 긍정적 사고 또한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리스 문화는 기독교의 철저한 내세 중심적 사고와 대비되는 것으로 기독교가 죽어서 신의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기 위해 현실생활을 희생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강요하고 있는 반면에 인간적인 욕망이나 현실을 긍정하고 육체의 아름다움이나 생활의 즐거움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은 칙칙한 중세적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은 지식인들에게는 어쩌면 생명수와 같은 것이었으니, 한마디로 르네상스는 신(神) 중심에서 인간(人間) 중심으로의 이행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르네상스운동은 사회 상층부인 지식인들의 운동에 불과했으며, 이들은 단지 동방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뿐, 가톨릭과 교황을 전면 부정하지도 않았고, 그 권위에 대항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사회 하층민에 대한 관심이 없었음은 당연하였다. 또한 사회 하층민들에게는 르네상스는 별 인기가 없었을 뿐 아니라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하층민들에게 절실했던 것은 농민을 수탈하고 갈취하던 봉건영주와 그들의 비호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로마교회에 의해 형성된 갈등구조를 깨버릴 수 있는 현실적인 개혁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르네상스는 그리스문화에 대한 일부 상류층의 각성으로 일어났을 뿐이었으며, 결국은 사치 · 향락 · 퇴폐적으로 흘러 쇠퇴하고 말았다.
15C까지의 서양의 문명은 극도의 침체기에 접어들어 사가(史家)들은 이 시기의 서양 역사를 '암흑기'라고 칭하는 반면, 동양문화의 중심국이었던 중국은 경제와 예술상의 발전이 높은 수준에 도달한 평화와 번영의 명조(明朝, 368~1644)에 와 있었다.
명(明)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은 칭기즈 칸의 원(元)제국을 몽골고원으로 축출한 후 지주 세력의 지지를 얻어 몽고의 잔재를 일소하고 중화문명의 정통을 재확립하였다.
안으로는 제도를 정비하여 황실의 체제를 굳건히 하고, 밖으로는 전국적인 토지대장과 조세대장을 작성하여 정비하는 한편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조공질서를 확립하였다.
명 태조 홍무제는 농부 출신으로 이렇다 활 학식은 없었지만 현명한 황제였다. 그는 평생 빈농의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 우쭐거리지 않고 치세 동안 백성의 생활 개선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영락제는 더욱 나라를 안정시키고 대외적으로 뻗어나가 이슬람 출신 환관(宦官) 정화(鄭和, 1371~1435)를 제독으로 대원정함대를 파견 동남아 일대를 순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대원정은 서양의 신대륙 침탈과는 달리 우호적이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명의 대외정책은 호전적이지 않고 정복하여 복속 시키려는 시도도 없었다.
정화의 남해 원정은 서유럽의 백인들처럼 전투적인 해적행위나 식민지 사업이 아니라 지리적 · 외교적인 목적을 가진 원정이었다. 그들은 기존 교역로를 따라 여러 나라를 돌면서 선물을 교환하고 조공을 받았으며 상서로운 것으로 알려진 기린 같은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원정은 중국인의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화교(華僑)들이 크게 활동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정화의 원정대가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포르투갈의 항해가(航海家)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렇듯 여러모로 보아서 명(明)은 주변 국가에 대해서 교양 있고 우월한 맏형 같은 분위기였다. 이러한 명제국은 16C 이후 환관 대 관료층의 정치적 당쟁이 뒤얽혀 정치가 불안정한 시기도 있었지만 이 역시 정치적 갈등은 조정에 국한된 것이었을 뿐 서양에서처럼 백성들에게 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경제는 크게 발전하여 명(明)·청(淸) 교체기인 17C 전반부까지 꾸준히 성장하였다. 전호(佃戶, 소작농)의 소작권도 안정되고 강남개발이 비약적으로 진전되어 농업생산이 증대되고, 그 결과 명(明) 중기(中期)부터는 목화 · 뽕나무 등의 상품작물의 재배가 성행하였으며 상품의 지역적 분업이 성행하였다. 수공업 또한 발달하여 면직 · 견직뿐 아니라 도자기, 제당(製糖), 제지(製紙) 등의 업종에서는 자본주의적 경영 형태도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대상인(大商人)도 출현하였으며, 공장제 수공업의 형태도 나타났다. 이런 것들은 서양에서는 18C산업혁명이 일어날 즈음에 가서야 영국에서 출현한 산업형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일조편법[一條鞭法, 과거 쌀, 보리 등 현물로 내던 세금을 은(銀)으로 대신한 제도]과 같은 화폐경제가 도입되기도 하였으니, 중국에서는 산업의 기계화만 되지 않았을 뿐 이때 이미 초기 상업자본주의적 양상이 나타났다.
오늘날 잘 알려진 『수호전』,『삼국지연의』,『서유기』,『홍루몽』,『금병매』등의 구어체 소설이 이 시대의 작품이며, 희곡(戱曲)이 크게 유행하여 연극관람은 도시 서민생활의 일부가 될 정도였다.
또한 명대(明代)에는 편찬 사업이 성행하여 전통문화를 총정리한 『영락대전(永樂大全)』(총 2만 2,877권에 이르는 백과사전), 도가(道家)의 역사와 체계를 정리한『도장(道藏)』(50권) 등이 편찬되었고, 성리학(性理學)을 보급하기 위한『성리대전(性理大典)』(70권),『사서대전(四書大典)』(36권),『오경대전(五經大典)』(36권)이 편찬되었는데 이를 '유교(儒敎)의 영락삼대전(永樂三大全)'이라고 한다.
그리고 철학적인 면에서는 성리학이 공허한 관념론에 빠져 인간의 본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억압하자 왕수인(王守仁)은 새로이 양명학(陽明學)을 주장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 학파는 기존의 가치관과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아가 모든 판단의 주체임을 선언하였다.
특히 양명학파의 이지(李贄, 1527~1602)는 "사람에게 남녀의 구별이 있다는 것은 옳지만, 식견에 남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식견이 길고 짧다는 것은 옳지만 남자의 식견은 길고 여자의 식견은 짧다는 것이 어찌 옳은가?"라고 주장하면서 근대적인 남녀평등사상도 제기하였다.
양명학의 이 같은 비판정신은 실용학문을 자극하여 농업기술서『농경전서(農政全書)』, 의학서『본초강목(本草綱目)』, 산업기술서『천공개물(天工開物)』같은 과학기술서들이 나왔으며, 전제군주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다수가 참여하는 정치질서를 모색한『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도 나왔다.
마르코 폴로(Polo, Marco)의 『세계 경이(驚異)의 서(書)』[통칭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등을 통해 동양의 찬란한 문명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고, 또한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 전해진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접한 서양인들에게는 동양은 신비의 나라였다. 특히 해로(海路)를 이용하여 무역하고 있던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서 서양에 소개된 인도는 황금의 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높은 산맥이 가로놓여 육로(陸路)로는 동양으로 갈 수 없었던 서양인들은 바닷길을 통해 동양으로 가기 위해 신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선두에 나선 나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경 길 에안네스(Gil Eannes)는 베르데 곶의 우회 항로를(1434년), 또 바톨로미 디아즈(Bartholome Diaz)는 희망봉을 발견했으며(1486년), 바스코다가마(Vasco da Gama)는 인도 항로를 발견(1498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는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여 서인도 제도, 즉 지금의 아메리카에 도달(1492년)하였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이곳을 인도인 줄 믿었으므로 원주민을 인도인이라는 뜻으로 인디오,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이는 지금의 아메리카 인디언이라는 이름의 시초가 되었으며 아메리고 베스푸치(Vespucci, Amerigo, 1454~1512)에 의해 신대륙임이 밝혀져 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그리고 1519년부터 1522년 사이에 서쪽으로 배를 몰아간 마젤란(Magellan, Ferdinand)은 세계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를 성공시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사실로 증명하였다.
하지만 유럽인에게 대항해는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식량은 소금에 절인 고기와 비스킷, 말린 콩 정도였으며 음료수는 포도주와 물이었다. 그나마 선적 분량이 한정되어 있어 영양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으로 사망하는 선원이 태반이었다.
당시의 배는 범선으로써 콜럼버스가 탄 배 ‘산타마리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수량 230톤에 평균 속력은 3∼5노트, 최고 속력 9.5노트 정도의 배였다.
마젤란의 경우 처음엔 5척의 배와 256명의 승무원으로 출발하였으나 귀국할 때는 배 한 척과 생존 승무원 18명뿐이었다.
그러면 지리상의 신대륙 발견이 유럽에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 물론 신대륙에서 옥수수, 감자, 담배, 코코아, 설탕, 목화, 차 등도 들여왔지만 이러한 농산물보다 유럽인이 더욱 열을 올린 것은 금, 은과 같은 귀금속의 약탈이었다. 단지 약탈을 위한 침략자가 되어 버린 유럽의 백인들은 동양에서 전해진 화약을 이용하여 총포와 대포를 만들어 이를 장착한 범선을 동원해 신대륙의 각종 물자를 침탈해 갔다.
이 과정에서 백인들의 원주민 학살과 노략질은 도를 넘었다. 원주민들은 발목을 사슬에 묶인 채 광산의 노예가 되거나 백인들이 퍼트린 매독ㆍ천연두 등의 전염병에 쓰러졌으며 거리는 폐허가 되었다
결국 서양인들은 동양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여 자구적으로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발전된 문명을 다른 민족의 것을 침탈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을 살찌게 했다. 그러나 이때 얻어진 풍요는 일부 지배층만을 살찌웠을 뿐, 하층민은 여전히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칼과 창, 화살 등 원시적인 수준의 무기밖에 모르던 유럽인은 중국에서 전해진 화약과 나침반을 개량하여 현실적으로 사용하면서부터 마침내 1000~1500년의 긴 잠에서 막 깨어나 부스스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전래된 나침반은 원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했고, 또한 중국에서 전래된 화약을 이용해 총과 대포를 만든 후 서구인들은 바다로 진출하여 대항해 시대의 막을 올렸다.
지금의 멕시코 지방에서는 6C 경에 장려한 궁전과 사원, 그리고 약간의 상형문자를 가진 마야문명이 번성했으며 아스텍문명은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 그리고 13C 이후 지금의 페루지방에서는 잉카제국을 성립하여 태양신을 숭배하는 지배자가 관료와 군대를 거느리고 이 지방을 다스렸다. 그들의 주산업은 옥수수농업이었고 철기는 아직 사용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런데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며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라틴아메리카는 15C부터 흰 피부를 가진 유럽인에게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태양을 숭배하는 잉카인들은 농업기술자가 많았다. 잉카인들의 본거지인 안데스 산맥에는 넓은 농토가 조성될 만한 곳이 없어 산비탈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먼저 관개시설을 건설하고 계단식으로 밭을 개간했다.
산중턱까지 물을 끌어올리는 관개(灌漑) 시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다른 부족에서도 잉카의 농업기술자는 대환영을 받았다. 그만큼 그들의 농업수준이 높았던 것이다. 양수시설을 갖추고 계단식으로 밭을 정리하고 나면 거기다 옥수수, 흰 고구마, 토마토, 땅콩, 고추, 목화 등을 재배했다.
특히 남겨진 유적을 살펴보면 잉카인들은 고산지대를 이용하는 데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협곡에 걸쳐져 있는 아슬아슬한 다리와 날카로운 산위에 건설된 유적지인 마추피추, 안데스산맥을 지나가는 도로, 당시만 해도 유럽을 훨씬 앞지르는 농업생산성 등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그들은 왜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낯선 이방인들 앞에 힘없이 주저앉았을까?
라틴아메리카의 아스텍제국은 에스파냐의 코르테스가 이끄는 소수의 군대에 의해 괴멸되었으며, 잉카제국은 1533년 피사로가 이끄는 에스파냐 정복자들에 의해 붕괴되었다. 그런데 코르테스가 이끌고 온 병력은 500여 명에 불과했으며, 특히 피사로가 이끌고 온 병력은 180명 정도에 불과했다. 낯선 백인들은 물론 총포를 가지고 있었으며 계략에도 능해 스스로 내분이 일도록 하는 계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멕시코 고원을 정복한 아스텍제국이나 안데스산맥을 지배하던 잉카제국은 대제국이었으며 또한 그들은 호전적이었다. 그들이 일군 문명 또한 뛰어난 것이었다. 침략자들은 이 고원지대의 지형지세에 익숙하지 못했으며 병력 또한 소수에 불과해서 게릴라전술을 잘 구사한다면 얼마든지 황금에 눈먼 침략자들을 궤멸시킬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잉카나 아스텍 문명이 어이없이 무너진 데는 그 내면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때문이었다.
아스텍인들은 우주에 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관들은 천지가 창조되고 난 후 우주에는 네 번의 태양(주기, 혹은 시대)이 지나갔다고 믿었다.
첫 번째의 태양은 4008년간 계속되었고 그 태양(시대)은 대홍수로 망했다. 사람들은 거인들이었으며 옥수수를 먹고 살았다. 대홍수가 오자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고기로 변했다.
두 번째의 태양은 4010년간 지속되었고 이 때의 사람들은 야생열매를 먹고 살았는데 태양은 바람에 의해 부서지고 사람들은 원숭이가 되어 나무 위로 올라가서 바람을 피해 살았다. 세 번째의 태양은 4081년간 계속되었는데 불에 의해 망했고 사람들은 불을 피해 새로 변해 살았다.
네 번째 태양은 5026년간 계속되었으며 사람들은 피와 불의 비가 내린 끝에 굶주림으로 죽었다. 지금은 다섯 번째의 태양으로 이 주기는 거의 마지막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의 태양은 인간의 심장을 먹고 산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간의 심장을 제물로 바쳐 그를 달래지 않으면 태양신이 굶주려 땅에 떨어지고 다섯 번째 멸망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아스텍인들의 심장 공양 풍습은 여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케찰코아틀(Quetzalcuatl)’이란 신이 있었다. 그는 멕시코지역의 고대문명을 창조한 신이었으며 태양ㆍ바람ㆍ영혼ㆍ문명의 신(神)이었다. 신화에 의하면 케찰코아틀은 최고신(最高神)이 낳은 네 아들 가운데 하나이며 지하세계에 내려가서 뼈들을 가지고 와서 그 위에 자기의 피를 뿌려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인간에게 옥수수재배와 베 짜는 법, 돌을 가는 법, 깃털로 외투를 만드는 법, 시간을 계산하고 천체운행을 연구하는 법, 종교적 교의, 역법 등을 가르쳤다고 했다. 그는 깃털이 달린 뱀의 몸에 턱수염이 길게 자란 잘생긴 얼굴에 피부가 하얀 신비한 인물이었으며 서쪽하늘을 다스렸으며 그를 상징하는 색채는 백색(白色)이었다. 행성 중에서는 금성(金星)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신공양에 반대하였다가 다른 일파와의 투쟁에서 패하여 동쪽 바다 속으로 사라졌는데 그 때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언젠가 다시 와서 악(惡)을 물리치고 끔찍한 인신공양의 풍습도 끝내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즈텍인들은 얼굴이 하얗고 총을 쏘며 말을 타고 나타난 코르테스를 보고는 언젠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케찰코아틀’로 알고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굴이 하얀 낯선 손님에 대한 원주민의 환대와 개방은 곧바로 정복으로 이어졌고, 잔인한 식민통치로 이어졌다. 원주민의 거대한 고대문명은 문화와 종교, 언어와 함께 차례대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무차별한 인종 학살로 이어졌다. 통계에 의하면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북ㆍ중ㆍ남미를 통틀어 침략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원주민의 수는 약 1억 정도 된다고 한다. 그만큼 백인 침략자들은 잔학했다.
잉카문명도 이와 비슷했다. 지금의 페루에 해당하는 안데스 산맥의 고원 지대에 세워진 뛰어난 고대제국과 그 문명 역시 하루아침에 이슬과 같이 사라졌다.
아스텍의 ‘케찰코아틀(Quetzalcuatl)’에 해당하는 신(神)이 잉카에서는 비라코차(Viracocha)였다. 폭풍과 태양의 신이며 뜻은 ‘창조의 호수’라고 한다. 비라코차는 문명 전파의 신이며 잉카의 창조신이었다. 머리에 태양을 이고, 손에는 번개를 들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그는 대지ㆍ별ㆍ하늘ㆍ거인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최초의 창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홍수로 세계를 일소하고 거인족(巨人族)을 말살했다. 그리고 보다 좋은 인간을 새로 만들었다.
비라코차는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거나 문명의 기초를 가르치면서 사람들 사이를 거지 모습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다 그는 태평양 위를 걸어서 사라졌는데 그가 떠나면서 먼 훗날 다시 돌아 올 것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 전설을 믿고 있던 잉카인들은 침략자를 비라코차로 알고 환대하여 음식도 주고 황금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금에 눈이 먼 이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날 밤 인디언 남자들을 다 죽였다고 한다. 완전히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격이었다.
비라코차는 태양과 달과 잉카 제국을 만들었다고 하는 하얀 피부를 지닌 신으로 공교롭게도 그들의 계산 방식으로 1531년에 돌아온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체포된 잉카의 황제 아타왈파는 자신이 갇혀 있는 방 가득히 황금으로 채워줄 테니 살려달라고 간원했다. 이 소문이 나라 안에 퍼지자 금은을 든 잉카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황금 잔(盞), 신상(神像), 장신구, 가구 등이 계속해서 쌓였다. 순식간에 57m의 방은 황금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잔인한 피사로는 황금만 가로채고 즉시 왕을 뒷짐결박한 후 목을 베어 버렸다. 피사로 일행은 주민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왕궁과 마을을 다 태워 버리고 보물을 전부 약탈했다. 이렇게 해서 수백 년 동안의 영화(榮華)를 자랑했던 잉카제국은 단 하루만에 어이없이 멸망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단지 180여명의 백인들에 의해서. 그리하여 중남미는 길고도 어두운 식민지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자행된 스페인의 식민통치는 잔인했다. 중남미의 인디오(원주민)들은 스페인 침략자의 폭압 아래, 대규모 농장 혹은 광산에서 강제노역과 각종 세금에 시달려왔으며 백인들에 의해 전파된 각종 전염병(천연두, 매독 따위)과 스페인인들끼리의 전투에 강제로 동원되어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자신들의 처지가 이 지경에 이르자 심지어 인디오 중에는 자식들이 태어나면 자식들의 다리를 분질러 자식들만큼은 강제노역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부모들이 많았다.
인디오들이 진폐증에 시달리며 탄광에서 캐어낸 많은 금은(金銀)은 주로 스페인으로 실려 갔다. 동시에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 정복자들은 인디오를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간주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당연히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원주민들을 죽였고 원주민을 죽이면서 그들의 신앙심을 과시했다.
사람이 아닌 악마의 후예로 원주민을 치부했기 때문에 아무런 가책 없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하고 짓밟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인종개조(人種改造)’라는 명분아래 그들의 혼탁한 피를 백인의 피로 정화시킨다면서 무자비한 강간을 자행했다. 그것도 300~400년간의 긴 세월에 걸쳐서.
그리고 교회는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미화했다. 스페인의 침략행위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었다.
르네상스가 1,500여 년 간 깊이 드리워진 중세의 장막을 찢어내는 서곡이었다면 종교개혁은 현실적, 실질적 개혁을 수반하는 폭풍우였다. 그것은 곧 봉건적 착취구조에 대한 투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의 신선한 움직임에서 나오는 기운을 희망적인 역사로만 보면 안 된다. 유럽에서는 이때 종교개혁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 그동안 국지적이고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던 중세적인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이 활성화되고 공식적으로 전개되었는데,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제물이 된 사람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남편 없는 여자들과 진보적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었다. 거기다가 크고 작은 종교전쟁이 수없이 벌어져 이 시기의 유럽은 많은 사람들의 피로 얼룩졌다.
종교개혁은 교황 레오 10세가 성베드로성당을 짓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자 독일의 신학자인 마르틴 루터가 이의 부당함을 지적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시작된다.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이 종교적 항쟁은 서구를 두 개의 진영[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으로 갈라놓았다. 이 반로마교회운동을 종교개혁이라 한다. 이는 교회의 부패와 권위에 대한 인민폭동이면서 또한 유럽의 군주위에 군림하고 있으면서 지배하려고 드는 로마교황의 간섭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종이의 보급이다. 종이는 중국의 후한(AD 25~220)의 채륜(蔡倫)이 발명한 것이다. 751년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와 이 지역의 패권을 지키려는 당나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데 탈라스강변에서 충돌, 이슬람측이 승리했다. 이로써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잃게 되었으며 이때 사로잡힌 당나라의 포로 중에 제지법을 아는 자가 있었다. 이로써 제지법이 이슬람권에 퍼지게 되고 이슬람을 통하여 유럽으로 도입되었다.
15C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와 함께 종이의 생산은 그 동안 극소수에 의해서 독점되었던 지식이 대중들에게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에는 라틴어로 된 성경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활판인쇄가 시작되자 자기나라 말로 쓰인 성경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직접 성경을 보고 예수의 말씀을 접한다는 것은 일종의 개안(開眼)이었다.
종이와 인쇄술에 의해 성직자와 봉건영주들이 볼 수 있었던 성경이 대중에게 보급되어 누구나 예수의 말씀을 접하게 되자 로마 교회와 성직자의 독선과 타락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이용한 것은 팜플렛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인쇄한 이 작은 책자를 교황과 주교단 그리고 대중들에게 배포함으로써 가톨릭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자극적인 무기를 막기 위해서 봉건 군주들은 개신교도들의 인쇄소를 폐쇄시키고 팜플렛 배포금지법을 제정했다.
훗날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도 팜플렛을 많이 이용했는데 이렇듯 동양에서 건너간 종이와 인쇄는 유럽을 개안시켰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구제는 교회의 의식이나 선행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것이며, 신앙의 근거는 성경이라고 주장하면서 로마교회에 대한 반기를 들자 이 사상은 독일 전역에 파급되어 많은 연방의 봉건영주, 자치도시의 시민, 그리고 농민까지 루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종교개혁을 농노제 폐지와 교회세 폐지를 요구하면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이때부터 루터는 농민들을 악마의 화신으로 칭하면서 진압에 찬성하였다. 루터는 중세 이래로 지속된 신분 질서의 동요 및 이탈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화의 길은 아직도 요원했다. 이후 독일은 로마교황파와 루터파로 나뉘어 투쟁을 계속한 끝에 연방 군주나 자유 도시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에서 일단락을 맺으나 세기를 넘겨 30여 년에 걸친 종교전쟁(30년전쟁, 1618~1648 )으로 독일국토 전체가 황폐화되는 참담한 지경을 겪게 된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국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헨리 8세(Henry VIII, 재위 1509∼1547)는 형이 죽자 형수인 캐서린(Catherine)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럭저럭 18년간 무사히 살았으나 타고난 기질이 호탕한 그는 궁녀 앤 불린(Anne Boleyn,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에게 매혹되어 교황에게 이혼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캐서린은 루터파 탄압에 앞장서고 있는 독일의 황제와 같은 왕실 출신이었으므로 교황은 이를 허락할 수 없었다. 이로써 헨리8세는 이혼과 동시에 교황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표면적 이유는 왕의 이혼 문제가 발단이 되었으나 헨리 8세는 특별히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종교 그 자체 보다는 교회 소유로 되어 있는 막대한 토지를 국왕 소유로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교황과 결별을 선언한 헨리 8세는 뒤이어 수도원을 해산하고 교회 토지재산 몰수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뒤에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Mary)가 왕위에 오르자 메리여왕은 가톨릭을 부활시켜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처형하였다.
이렇듯 영국의 기독교는 신ㆍ구교로 나뉘어 대립해오다가 훗날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난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가톨릭의 의식과 개신교의 교리 내용을 절충한 영국국교회(성공회, Anglican church)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영국의 종교분쟁은 일단락 지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퓨리턴, 칼뱅파 개신교도)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가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6C가 되어 종교개혁의 영향이 미치게 되었으며,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개혁파 교회가 형성되어 갔다. 특히 프랑스의 신교는 칼뱅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칼뱅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후기 종교개혁의 지도자였다. 그는 프랑스 황실의 개신교 탄압을 피해서 스위스로 피신해 있었지만 신교 세력인 위그노파는 그의 이념을 전폭적으로 따랐다.
따라서 프랑스에서도 신ㆍ구교간의 갈등은 날로 심화되어갔는데, 이 갈등의 비극이 위그노전쟁으로 표출되었다.
위그노전쟁은 대학살로 시작되었다. 학살극이 시작된 날은 국왕 샤를 9세의 여동생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국왕의 처남 될 신랑이 위그노파였으므로 전국 각지의 개신교도들이 축하 하객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때 구교도들 사이에서는 위그노파에서 왕실에 위해를 가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놀란 국왕은 파리로 들어오는 모든 문을 닫아걸고 위그노 학살명령을 내렸다. 파리는 순식간에 도살장으로 변했다. 성난 가톨릭교도들은 여관이나 가정집을 무차별적으로 습격 위그노 귀족들을 총과 활로 쏘아 죽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배후에는 국왕의 모후 카드린느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1519∼1589)가 있었다. 그녀는 신ㆍ구파의 대립을 이용하여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간계를 꾸민 것인데 결과는 수 천 명을 죽이는 대 학살극이 연출된 것이다.
국왕의 여동생 결혼식 날 벌어진 이 사건은 앞으로의 종교전쟁에 뿌려질 짙은 피냄새를 예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후 프랑스의 신ㆍ구교 사이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 결국은 위그노전쟁으로 이어졌고 이 전쟁은 1598년 낭트칙령으로 개인의 신앙의 자유가 인정될 때까지 27년 동안이나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럽의 종교개혁은 피로 얼룩진 것이었다.
여기서 종교 개혁당시 뚜렷한 두 인물 루터와 칼뱅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할 과제가 있다.
마르틴 루터 그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소망대로 법률을 공부하려 했으나 들판에서 뇌우를 만나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박문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이것이 이렇듯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반박문이 팜플렛으로 인쇄되어 전국에 유포되자 생활이 비참했던 농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게 되었고, 농민 폭동의 기폭제가 되어 농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그때 이 개혁가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루터는 농민들을 탄압하는 봉건군주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히 그들을 죽일 수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렇게 하게 하라. 그들은 악마의 화신이다. 그대는 농민반도(農民反徒) 죽이기를 마치 미친개에게 하듯이 해야 한다. 만약 그대가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이 공격할 것이며 토지를 모두 빼앗아갈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황청으로부터 막중한 세금을 강요당하는 프로테스탄트(상공업으로 부를 어느 정도 축적한 계층)를 위한 개혁이었지 궁핍한 농민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농민들과 박자를 맞추어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농민들이 족쇄와 같은 봉건농노제도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봉건군주와 한 패가 되어 그들을 탄압했다.
자유니 자율이니 개혁이니 하는 것들은 상류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일반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근대화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난했으며 대중의 시대는 아직 요원했다.
또 한사람 칼뱅은 어떤 사람인가? 칼뱅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후기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지도자였다. 프랑스의 프랑시스 1세의 개신교 탄압을 피해서 스위스로 피신하였는데 뛰어난 조직가였던 그는 피신을 간 상태에서도 『기독교 강요』를 출간하는 등 활발하게 신교운동을 전개하면서 제네바를 종교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런데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뱅 역시 매우 배타적인 사람이었다. 칼뱅은 제네바시를 종교적으로 통치하였는데 그는 제네바 시민에게 엄격한 금욕생활을 강요하였으며 자기의 설교나 훈계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겐 3일간 빵과 물을 금지했다. 종교법원을 조직하여 자기의 성경해석과 한 구절이라도 틀리는 사람은 숙청되었으며 그의 은인(恩人)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독교 강요』를 비난한 세르베투스는 그를 살려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칼뱅은 그를 화형에 처했다. 이러한 그의 독선은 퓨리턴이라고 하는 광적인 신도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칼뱅교리의 핵심은 『기독교 강요』에서 밝힌 ‘운명예정설’이다. 이는 신은 이미 구제될 사람과 구제받지 못할 사람을 미리 결정해 놓았으며 이것이 곧 신의 섭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기로 예정된 신자들은 안심하고 직업에 종사하도록 할 것이며 업무상 이윤은 축복이라고 했다. 신흥 상공업자들은 이윤 추구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이 신앙의 새로운 해석을 환영했으며 돈벌이에 분주했다. 그리하여 시민계급(신흥 부르조아)은 대중을 이용해 투쟁하여 귀족들을 무력화시키고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대중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종교개혁은 유럽인들을 옥죄는 또 다른 형태의 종교생활의 강압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은 로마교회의 모순에 대한 반성과 반항의 결과로 개신교가 등장하여 예수교의 새로운 유파를 형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은 결국 종교전쟁으로 화하여 신(新)ㆍ구파(舊派)로 갈린 유럽을 피로 물들였을 뿐 중세의 봉건적이고 반근대적인 불평등과 억압의 고리를 깨뜨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유럽에 종교의 자유를 가져온 것은 종교개혁 때가 아니라 이 종교개혁이 있은 지 100여 년이 지난 때였다. 즉 유럽에 종교의 자유를 가져온 것은 세기를 뛰어넘어 17C 중엽에야 이루어졌다.
유럽
16C 이후 시작된 신항로의 개척과 상업의 성공으로 18C에는 유럽이 한창 물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일부지역에서는 통상과 무역으로, 또 다른 일부지역에서는 약탈 및 정복으로, 그야말로 선진무기인 총포로 무장한 이들은 무패(無敗)의 신나는 행진을 하고 있었다.
서구세력의 식민지 진출로 및 식민지 세력권
영국에서는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려 대외적 팽창 사업으로 그야말로 성공시대를 구가하자 프랑스에서는 이에 질세라 영국을 바짝 추격하며 동남아시아, 인도, 북아메리카대륙 등 세계 곳곳에서 영국의 라이벌로 떠올랐다. 그런가하면 중부유럽에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등이 새롭게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이 경쟁에 뛰어들었고 유럽북부에서는 러시아가 뒤늦게 출발하였지만 급부상하여 유럽과 타 대륙에서 식민지 침탈의 대열에 합류하여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형국이 되었다.
한편 유럽보다 물질문명의 수준이 낮은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은 자기보다 훨씬 작은 영토의 유럽에 꼼짝 못하고 식민지상태로 전락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인도, 심지어 오세아니아와 태평양 제도까지 유럽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그들의 손길이 닿은 곳은 거의 식민지화되었다.
아프리카
18C의 아프리카에서는 노예사냥이 성행하고 있었다. 특히 서(西) 아프리카지역이 심했는데 유럽의 노예 사냥꾼은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생포하여 북아메리카 혹은 남아메리카의 담배농장, 커피 농장, 목화농장 등으로 팔아넘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상인들은 이 거래를 통해서 최고 500%의 이익을 남겼다.) 그런데 더욱 잔인한 것은 유럽인이 노예를 사냥할 때 현지의 아프리카 종족들을 이용해서 서로서로 살기 위해 타 종족을 잡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흑인 부족들은 자기네 부족이 잡혀가지 않기 위해서 타 부족을 잡아 노예상(奴隸商)에게 넘겨야 했던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잡혀온 흑인들은 짐짝처럼 쟁여져 몇 달이 걸리는 대항해를 거쳐 남ㆍ북아메리카의 대규모 농장으로 팔려갔는데 항해 도중에 1/6 정도가 죽어 없어졌으며, 현지 농장에서 길들이는 과정에 1/3 정도가 죽었으니 결국 노예로 노동에 종사한 흑인은 반수 정도에 불과했다. 고대 이후에 사라진 노예무역이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
향료의 주산지이자 동방무역의 요로(要路)였던 동남아시아는 16C 이후 서양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으니 결국 이 지역을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한 것은 향료였다. 육류를 주로 먹는 서구인들에게 향신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고기에 후추, 정향(丁香), 육두구 등의 향료를 쳐서 먹으면 맛이 아주 좋았다. 그러므로 향료는 서양인들에게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그런데 생산지는 고온다습(高溫多濕)한 지역으로 국한되어 있어서 산지(産地)인 동남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올 때쯤이면 값이 껑충 뛰어 오르기 일쑤였다. 고대 로마에서는 같은 양의 황금과 같은 가격에 향료가 거래된 적도 있다 하니 향신료의 값어치가 어떠했겠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타 지역에서 재배가 되지 않는 이 지역의 명물 향료는 이슬람과 인도 상인들이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렸었다. 그러나 이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은 동남아시아의 신항로를 개척하여 동방에서 나는 후추, 생강, 정향 등을 이슬람 상인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얻기를 원했다. 결국 향료는 16C에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하여금 대항해를 하도록 내몰았던 것이다. (이 때 활약한 포르투갈인들은 동아시아에도 진출해 극동아시아의 끝 일본열도에 닿아 일본에 조총을 전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일찍부터 진출한 영국과 네덜란드 등은 동인도회사를 세워 향료, 커피 등의 상품에 대하여 상업적 경영을 독점했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이 지역을 잠식한 서구인들이 현지에 입힌 피해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현지인들로 일손이 모자라 인근 지역에서 생포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부리기도 했는데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도록 일을 해도 일꾼들에게 지급되는 것은 겨우 목숨을 연명할 정도의 소득뿐이었다. 반면에 동인도회사는 현지인들의 중노동으로 생산한 커피, 사탕수수 등으로 상업을 통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북미(北美)
영국의 아메리카 진출은 1607년 버어지니아의 개척 때부터 시작된다. 그 후 영국에서 ‘필그림 파더즈’라고 하는 일단의 칼뱅 개신교도들이 건너갔다. 그들은 영국의 전제정치가 싫어서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찾아 별 볼 일 없는 영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대서양을 건너 낯선 새 땅으로 건너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식민지를 개척하고자 했다.
아메리카에는 영국 외에도 영국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프랑스인들이 건너와서 식민지를 건설했으나 영국인이 건설한 식민지 수가 많았다.
지금은 뉴욕이라고 알려진 북미 최대의 도시는 사실은 처음에는 네덜란드 사람이 건설한 도시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의 도시였는데 영국이 식민지 전에서 승리하자 뉴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17C 중반에 들어와 아메리카에서의 대립은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으로 압축되었다. 유럽, 인도, 아메리카 등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툭하면 부딪쳤다.
프랑스는 캐나다와 미시시피 유역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아메리카 동부를 중심으로 개척된 영국의 식민지역을 북쪽과 서쪽에서 포위하는 형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메리카에서 벌인 최초의 싸움은 윌리엄왕 전쟁이라고 하며 1689~1697년에 일어났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의 윌리엄 3세와 프랑스의 루이 14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었는데,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도 본토와 협력하여 싸웠다. 전쟁은 9년간 계속되다가 1697년 조약을 맺고 일시 화해했다. 그러나 이 전쟁을 발단으로 하여 약 1세기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전쟁을 벌이게 된다.
18C에 들어와서 에스파니아 계승전을 계기로 영국은 캐나다의 프랑스 령 식민지를 공격하였고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 노바스코티아, 허드슨만 지역을 확보했다.
이외에도 유럽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지속되어 화약연기와 포탄소리속에서 해가 뜨고 지는 나날이 이어졌다.
1754∼1763년에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또 다시 격돌했다. 아메리카에서 영국은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1759년 9월 퀘백 및 몬트리올을 점령하여 승리했으며, 1763년에는 파리화약을 맺어 프랑스로부터 케이프 브린턴 섬, 미시시피 강 동쪽의 프랑스령을 넘겨받았다. 시간이 흐르고 전투가 거듭 될수록 영국은 우위를 점하였다. 이제 영국을 가로막는 라이벌은 사라진 듯했다.
동 아시아
한편 이즈음의 동아시아는 그 동향(動向)이 어떠했을까? 동아시아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동양 문화의 중심에 중국이 있었다.
중국은 당시 청조(淸朝)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만주족(滿洲族)인 청조는 한족(漢族)의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강압책과 회유책을 병행하였다. 한족(漢族)에게 만주족의 복식과 변발을 강요하기도 하고 반만(反滿) 사상을 자극할 수 있는 책은 금서로 정하면서 가혹한 사상탄압을 하는 등 강압책(强壓策)을 쓰기도 하였고, 명의 제도를 답습하며 한족 지주와 신사층(紳士層)의 기득권도 보장해주며 한인 관리를 요직에 기용하는 등의 회유책(回遊策)을 쓰기도 하면서 중국을 통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청조의 중국 지배는 효과가 있어 17C에 들어와 중국사회는 많이 안정되었고 18C에는 ‘강희ㆍ건륭의 성세’를 맞이하며 최전성기를 보내는 듯했다. 그러나 18C 중엽부터 서서히 중국이 병들어가고 있었으니 바로 인도에서 몰래 들여온 아편 때문이었다.
양귀비의 덜 익은 열매에 흠을 내면 거기서 흰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아편은 이것을 건조시켜 얻은 흑색이나 갈색의 가루를 말하는 것이다. 아편의 원산지는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반도이지만 당시에는 인도에서 영국인의 관리 하에 대량으로 생산되어 밀무역을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아편은 일종의 마약으로 중독성이 강하여 한번 피우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신(心身)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급성중독의 경우 사망할 수도 있었다. 이것이 외국과의 거래가 잦은 광동성과 복건성에서 퍼지기 시작하여 18C 말에는 중국의 농촌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번져서 전 중국이 아편 소굴로 변하게 되었다. 아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함께 중국인의 정신과 육체는 병들었고 마침내 중국 대륙과 그들이 이루어낸 중화(中華)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심도 사라졌다. 그만큼 마약은 무서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