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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은 조선왕조 건국(1392년)에서 멸망(1910년)하기 까지의 27대 왕조에 있어,
왕과 왕비, 계비에 대한 40기 73위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과거),
현재에는 각 왕릉에 대해 해당 왕릉에서 직접 기신제를 지내고 있고(현재)
향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미래의 먼 세대에 까지 그 행위(왕릉의 보존과 기신제등 행사의 진행)가
지속가능할 것 같기에(미래)
그야말로 전세계 문화유적에 있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문화유산이다.
이런 이유로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는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하였다.
[ 2기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영역에 있는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그의 왕비 정안왕후의 능)은 통일이 되면 추가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예정임.]
또한, 그 문화유산에 대해 "신(神)들의 정원" 이라는 별명(명칭)과 함께....
여기에 조선을 건국하신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단릉)을 포함하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소재한 구릉(九陵)중
목릉-동원이강릉(선조), 원릉-쌍릉(영조), 경릉-삼연릉(헌종)을
중심으로 답사코자 한다.
숭릉(현종)은 현재 출입 제한 구역으로 묶여 출입 할 수 없다.
☞ 가는 방법 : 7호선 상봉역에서 용문행 지하철 탑승 -> 구리역 하차(상봉역에서 3째 정거장임) ->
6번 버스 탑승(지하철 내린 자리에서, 도로 건너지 말것) -> 동구릉 하차
▲ 현릉(顯陵)
안개낀 여름의 초입 어느날, 동구릉 역사박물관에 걸어 둘 능의 모습을, 어느 사진작가는
신(神)들의 정원을 더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 검암산(儉岩山)을 주산으로 하는 동구릉의 항공사진. 구리시 인창동 소재.
검암산(儉岩山)은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과 인창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 177m 내외의
소봉들이 동구릉 일대를 감싸안듯이 둘러서 있다.
▲ 인공위성에서 바라본 동구릉.
♥ 입지 선정
능묘는 조선 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의 "능역은 한양성 사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라는 입지 조건에 따라 선정되었다.
실제로 경국대전이 편찬되기 이전의 태조의 조상들의 능묘,
신의왕후의 능묘인 제릉, 정종의 능묘인 후릉과 여주의 세종과
효종의 능묘인 영·녕릉, 영월에서 객사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서울 사대문에서 100리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은 풍수지리적인 요소를 고려해 위치를 선정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장하기도 하였다.
▲ 동구릉의 약도
▲ 건원릉(健元陵). 제1대 태조 이성계 [(1335년~1408년), 재위(1392년 7월 ~ 1398년 9월) <6년 2개월>]의 능
좌(정자각), 중(비각), 우(수복방)의 모습
견원릉의 정자각에는 배위(판위)가 설치되어 있는데, 다른 정자각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물이다.
생존한 왕(제관)이 선대왕에게 절하는 자리이다.
배위에서는 왕릉을 보질 못하고 왕릉에 대해 90도로 좌향한 구조이다.
정자각에는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등 일부만 들어갈 수 있다.
건원릉 기신제(조선왕릉의 기신제는 약력으로 통일함. 건원릉 기신일은 6월 27일).
다른 제관은 사초지(잔디밭)에서 예를 올린다.
건원릉 기신제(6월 27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제관들.
하늘에서 본 건원릉.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의 능묘이다.
태조의 원비이자, 정종과 태종의 어머니인 신의왕후는 1391년 조선 건국 1년 전에
건강 악화로 사망하여, 개성에 묻혔으며,
5년 후인 1396년 사망한 둘째 부인이자 정비인 신덕왕후의 능묘는 서울 성북구에 존재한다.
태조는 경기도 구리에 묻혀 어느 왕비와도 같이 묻히지 못하였다.
본래 태조는 신덕왕후와 같이 묻히고 싶어하였으나 신덕왕후를 혐오하던 태종(이방원, 조선3대 왕)은
이러한 태조의 뜻을 거스르고 구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다.
건원릉은 조선 왕조 최초의 왕릉인 만큼,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능에는 갈대가 심어져 있는데, 함흥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건원릉,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로 심어져 있다.
조선을 건국한 왕의 능이라 믿기지 않을, 거칠게 자란 억새풀의 모습.
처음 건원릉을 답사한 자라면, 이런 형상을 상상이라 했겠는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보이는것은 전과 같지 아니하다는
명언을 이 건원릉에서 다시 느끼게 된다.
제가 답사한 날은 건원릉 개방을 하지 아니하였고, 대신 인근의 목릉(선조)을 개방하여
답사자의 궁금증을 해소케 한다. 사진의 억새풀은 최근에는 깍는다.
< 위화도 회군 상상도>
위화도(威化島) 평안북도 신의주시 상단리와 하단리에 딸린 섬.
면적 11.2㎢, 길이 9km, 평균너비 1.4km, 하안선(河岸線) 길이 21km이다.
압록강의 하중도(河中島)로 압록강이 운반한 토사(土砂)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고려시대에는 대마도(大麻島)라 하여 국방상 요지였다.
이성계는 이자춘[추존 환조]와 의혜왕후 최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고려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1392년7월17일 개경[지금의 개성]
수강궁에서 왕위에 올라 새왕조를 열었다.
이듬해 2월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1394년10월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왕조의 기틀을 이루어 놓았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사대정책을 썼고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했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 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갔다.말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
태종8년 창덕궁에서 74세로 승하했으며 묘호를 태조라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축조해 놓았다.
그러나 태종(3대왕, 이방원)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했다.
태조 사후 고향 함경도 영흥에 묻히길 원했으나 정종이 너무 멀다하여
양주땅[지금의 동구릉]에 능을 만들고 그 대신
고향에서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가 봉분을 만들었다.
지금도 봉분에 억새풀이 무성히 자라있다.
보통 능호는 외자로 하지만 건원릉만 두자리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중 가장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기본으로
조성하였으며 이후 조선왕릉 제도의 표본이 되었다.
기본 능재는 현정릉을 따르고 있으나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등
세부적으로는 새로운 양식의 도입으로 새왕조가 시작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7월17일이 현 제헌절이다.4명의 부인과 8남5녀를 두었다.
<일화>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태종]이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신덕왕후 소생인 두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치에 뜻을
잃어버린 태조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년뒤 정종의 뒤를이어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된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이때 태종이 문안을 위하여 보낸 차사들이 함흥만 가면 돌아오지않아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겨났다.
[ 태조는 그의 아들 이방원(태종)을 증오하여, 이방원이 보낸 차사를 모두 죽여 보내지 않음. ]
한번 가기만하면 깜깜 무소식이라는 뜻으로 심부름꾼이 가서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더디올때 쓰이는 말이다.
▲ 건원릉(健元陵)의 정자각.
다른 어떤 정자각과 비교하여도 웅장하며, 비석이 3개로 건국왕에 대한 예를 갖추고 있다.
건원릉 비각내의 비문. 비문을 지은이와 새긴이까지 명시되어 있는데,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의 당위성과
공덕을 상술하였다. 이 비외에 두개의 비가 정자각내에 설치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건원릉의 비각은 크고 웅장하다.
건원릉비(健元陵碑), 신도비(神道碑)[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동남쪽의 큰 길가에 세운 석비(石碑)]의 일종으로,
건립시기는 1409년(태조 9)이다.
비신의 높이는 10.5척(=315cm), 너비 3.6척(=108cm)
, 자경 7푼(=2.1cm), 전액 자경 3.5촌(寸)(=10.6cm)
비문은 권근(權近), 비음(碑陰 : 비신의 뒷면)은 변계량(卞季良)이 짓고
성석린(成石璘)이 썼으며 전액은 정구(鄭矩)가 썼다.
비문에는 이성계가 개국을 하게 된 동기, 창업의 성취 및 공로,
그리고 그를 기리는 송(頌)과 개국공신·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의 명단 등을 적었다.
성석린이 72세 때 구양순(歐陽詢) 법으로 쓴 것인데,
품격이 크게 뛰어난 것은 아니며 소동파(蘇東坡)의 필법이 보여 이채를 띠고 있다.
≪용재총화 慵齋叢話≫에 의하면 성석린의 글씨는 다만 진밀(縝密 : 곱고 촘촘함)할
따름인데 70세에 쓴 건원릉비는 필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는 건원릉비의 글씨는 속(俗)되다고 평하고 있다.
이 비는 고려의 많은 뛰어난 비에 비하면 다소 퇴보한 감이 있는
것으로 기상이나 질박, 그리고 서법의 추구 등의 면에서 볼 때 비교가 안될 정도이다.
고려말 조맹부(趙孟頫)의 글씨가 받아들여져 널리 풍미하면서 그 서체가
우리식으로 고쳐지고 바뀌어 조선 중기에 이르러는 이른바 ‘동방의 누기(陋氣)’라
일컬어질 정도로 쇠퇴하였는데,
이 비는 그러한 서법의 흐름에 있어서 전환기적인 풍모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건원릉 비각내의 우측에 세워져 있는 비. 1899년(광무 3년, 좌측 신도비를 세운 후로부터 490년)에 세워졌다.
이수(螭首,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머리부분)부에 왕실을 상징하는 이화문(李花紋)이 새겨져 있다.
6.25의 상흔 - 건원릉 정자각 기단부에는 6.25때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건원릉 수라간(정자각의 좌측에 위치)을 복원하고 있다.
▲ 목릉(穆陵). 제14대 선조(좌) [1552년~1608년, 재위 1567년7월~1606년2월(40년7개월) ]와
원비 의인왕후의 능(우)
목릉(穆陵)은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목릉(穆陵)은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선조 33년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인조 8년 1630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穆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인조 10년 1632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고 처음에는 이를 따로이 혜릉(惠陵)이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세 능역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고 하여 이를 모두 합하여 목릉이라 했다.
조선왕릉 중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이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목릉이 유일하다.
2011년 12월, 문화재청에서는 목릉의 정자각을 보물 1743호로 지정하였다.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567년 1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1년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는 건원릉 서쪽 다섯번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에 물기가 있고
불길하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선조는 변덕이 심하고 냉혹하고 무능한 군주였으나 놀랍게도 그의 시대에
조선의 명신들이 수없이 배출되었다.
퇴계 이황,율곡 이이,정철,이산해,유성룡,이덕형,이항복,이원익등 문신들과
권율,이순신 같은 무신들 그리고 어의 허준까지 수많은 충신들이 배출되었다.
선조는 10명의 부인과 14남11녀의 자녀를 두었다
* 목릉. 원비 의인왕후(1555년~1600년)의 능
본관 반남 아버지 번성부원군 박용순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1555년[명종10] 4월에 출생하였다
1569년[선조2] 15세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다.
하지만 선조는 가례를 올리기 전에 소주방 나인이었던 김씨와 접촉하였다.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나인 김씨가
임해군,광해군을 낳아 소용의 품계를 받았다.
선조의 승은을 입은 후궁들 사이에는 자신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받기위해 각축전이 벌어졌다.
후덕한 성품인 의인왕후는 후궁들의 아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도 관대하여
살아있는 관음보살이라고 불리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인빈김씨와 피난을 떠나고
의인왕후 박씨는 홀로 피난길에 올랐다.
선조의 박대로 마음고생이 심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후
병을얻어 1600년[선조33]6월 소생없이 승하했다.
▲ 목릉(穆陵).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1584년~1632년)의 능
목릉(穆陵)은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인조 10년 1632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동편 언덕에 조영하고,
처음에는 이를 따로이 혜릉(惠陵)이라 이름 붙혔다. 그러나 세 능역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 하여
이를 모두 합하여 목릉(穆陵)이라 했다.
본관 연암 김재남의 딸이고 영창대군의 생모이다.
1602년[선조35] 18세에 51세인 선조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소북의 유영경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인 정인홍,이이첨등이 득세하였다.
1612년[광해군] 이들의 사주를 받은 윤인에게 살해될 뻔 했으나
박승종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1613년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아버지 김재남은 사사되었다.
1618년 서궁에 유폐되고,대북파는 폐모 정청 사건을 일으켜 왕대비의 지위까지 위협했다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대왕대비가 되었다.소생으로 1남1녀를 두었다
▲ 목릉(穆陵)의 비각.
목릉(穆陵)은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인해,
비각은 3개의 능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목릉의 신도(神道)>정자각에서 인목왕후 능까지의 사초지(잔디밭)에 신도가 그림같이 길게 이어져 있다
▲ 원릉(元陵).
원릉(元陵)은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묘로 1776년 7월 27일에 조성되었으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동구릉 중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해인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52년에 걸쳐 재위를 하였으며,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안장하고 원릉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원릉을 조성한 지 29년이 지난 순조 5년 1805년에는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61세의 나이로 승하를 하여 원릉의 옆에 묻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홍살문과 정자각이 불타서 주춧돌만 남은 상태였으나
1995년 새로 복원하여 왕릉의 면모를 다시금 갖추게 되었다.
원릉 전경.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의 능으로 이봉이실(二封二室) 형태의 쌍릉이다.
영조의 발인반차(發靷班次) 모습 . 수천명의 행렬중 앞 부분 행렬.(맨 앞부분은 아님)
☞ 발인반차(發靷班次)란? 장례(葬禮)에서 발인(發靷)할 때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반열(班列)를 말한다..
영조의 발인반차(發靷班次) 모습 . 수천명의 행렬중 재궁(왕의 시신을 담은 관)의 상여.
영조는 조선 최장수 왕으로 보령이 83세에 재위 기간만도 52년에 이르며,
재위기간 탕평책, 균역법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아들 사도세자가 붕당정치의 희생자가 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원릉(元陵)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와 계비 정순(貞純)왕후 김씨의 쌍릉으로
동구릉 중앙에 위치해 있다.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1694년 9월 13일 태어났다. 휘(諱·이름)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이다.
1699년 연잉군(延君)으로 봉해지고 1704년에 진사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맞아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린 후 1712년에 궁궐을 나가 살게 됐다.
숙종은 연잉군의 집에 '양성(養性)'이란 당호를 하사했다.
▲ 영조의 어진
군왕으로서 만기(萬幾)를 관장하며 부지런했고 검소한 생활로 장수를 누렸다.
즉위 이전 궁궐 밖에서 살았던 경험도 있었기에 세상물정도 잘 알고 있었으며,
노론계의 핵심가문과는 개인적인 교류도 있었다.
즉위 이후 각 붕당간의 탕평 정국을 이루는 데 온 힘을 쏟았고
균역법을 시행해 백성의 세금부담을 경감시키고자 했다.
또한 청계천을 준설해 매년 겪었던 물난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구황 식량의 보급과 서자(庶子)의 관리 등용, 강화 외성(外城)의 축조,
'속오례의'와 '속대전' 등 문물제도 정비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재임 동안 이인좌의 난과 나주의 괘서 사건, 그리고 아들 사도 세자의 죽음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많은 변화를 이끈 영조는 1776년 승하했고 세손인 정조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 조강지처와 함께 하기를 원했으나…
영조는 왕자시절이던 11세에 13세이던 서종제의 딸을 첫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즉위 후 영조의 왕비가 된 이가 바로 정성왕후(貞聖王后·1692~1757)였다.
정성왕후가 1757년 66세로 서거하자 영조는 고양에 있는
서오릉에 정성왕후의 능지를 마련하고 봉분 두 자리를 만들어 오른쪽을 비워 뒀다.
홍릉(弘陵)이라 이름하여 자신의 서거 후에 비워둔
오른쪽 자리에 함께 묻혀 쌍릉으로 조성하길 원했던 것이다.
영조의 바람대로 처음에는 영조의 능지를 홍릉으로 정했으나
정조는 더 좋은 자리가 있는지 다시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했다.
소령원(昭寧園)을 비롯한 여러 능원에 표시해 둔 곳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동구릉에
있었던 옛 영릉(寧陵)이 완전한 길지(吉地)인 것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영의정 김양택, 좌의정 정존겸, 판중추부사 이은, 상지관(相地官) 김기량 ·유동형·김상현 등이 그들로,
건원릉자리에 버금가는 것으로 의견을 올리며 적극 추천했다.
이에 정조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구릉 내 현재의 자리로 영조의 능지를 정하게 된 것이다.
정조는 조강지처와 한곳에 묻히기 위해 마련한 자리보다는 왕실의 번영을 더 큰 목표로 보았던 것이다.
원릉자리는 효종의 능침으로 한 번 썼던 자리였으나 풍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따라 영조의 능침이 되었다.
사초가 자주 무너져 내려 여러 차례 보수하기도 했으나 원릉을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 정순왕후, 영조의 곁에 묻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장례가 끝난 후 1759년 6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중전(中殿)의 자리를 비워두면 안 되기 때문에 15세의 어린 처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야 했다.
그가 바로 정순왕후(貞純王后·1745~1805)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보다 10살이 어린 왕비는 왕실 규범에 따라 모후(母后)가 됐고,
영조가 서거한 후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됐다.
정조가 1800년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는 4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실질적으로 조선사회를 이끌다가 순조가 15세에 친정(親政)하게 되면서 일선에서 물러났다.
1805년 1월 12일 정순왕후는 회갑을 맞던 해에 경복전(景福殿)에서 서거한다.
정순왕후의 능지는 왕실의 관례에 따라 여러 곳을 물색했는데 원릉은 물론
각 능 주변 봉표(封標)한 여러 곳을 모두 살펴보았다.
순조가 같은 등성이에 합릉한 명릉처럼 원릉도 같은 등성이에서 길지를 점지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보이자 신하들과 상지관들은 원릉의 능 위쪽 왼편이
조금도 결점이 없는 대길지(大吉地)라며 적극 추천했다.
순조는 정순왕후를 영조와 같은 자리에 모시게 돼 정리(情理·인정과 도리)에
있어 매우 다행스럽다고 안도했는데, 정순왕후의 능침이 다른 자리로 결정될 경우
영조는 두 부인이 모두 다른 곳에 안장돼 홀로 있게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쌍릉이 된 원릉은
순조에 의해 쌍릉으로 조성된 원릉은 숭릉(崇陵)의 제도에 따라
난간석을 서로 이어 붙여 조성했다.
난간석의 석주에는 쇠사슬 문양을 넣어 상징성을 더했다.
두 봉분 사이가 겨우 2자(약 60㎝)에 불과하기 때문에 영조 봉분의 왼쪽 난간
아래에 있는 전석(전石) 일곱 개를 철거한 뒤 새 전석과 합쳐서 설치하고
두 개의 봉분 앞에 각각 혼유석을 놓아 쌍릉조성을 하고 비석을 추가했다.
난간 중앙에는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을 세웠고, 공간은 꽃문양으로 장식했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다른 왕릉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편으로 평소 검소했던
영조의 유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정자각 좌측으로 세워진 비각에는 3개의 표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1776년 정조는 비각을 2칸으로 만들어 '조선국 영종대왕 원릉'이라 표기한 표석을 세우고 1칸을 비워두었다.
1805년 순조는 비워둔 자리에 '조선국 정순왕후 부좌'라 기록한 표석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쌍릉이 완성됐다.
그 후 고종은 1890년 1월 3일 종묘에 나아가 영종(英宗)의 묘호를 '영조(英祖)'로 추상하고
정성왕후와 정순왕후의 존호를 올린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직접 올리고,
이어 신주(神主)를 고쳐 쓰는 의식을 거행했다.
종묘의 신주는 공이 있는 임금을 조(祖)라 칭하고 덕이 있는 임금을 종(宗)이라 칭하는데,
영조는 공덕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조(祖)로 칭하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 결정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영종은 영조로 불리게 됐다.
그리고 원릉에는 '조선국 영조대왕 원릉'이라 표기한 새로운 표석을 가운데 자리에 놓고
비각을 3칸으로 고쳐 세움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 원릉의 홍살문
▲ 경릉(景陵). 조선왕릉중 유일하게 3연릉의 형태를 갖추었다.
조선 제 24대 왕인 헌종과 정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다.
(좌)조선 제24대 왕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과
(중)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1828~1843),
(우)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1831~1903)의 무덤이다.
▲ 하늘에서 본 경릉(景陵)의 모습.
경릉(景陵)은 조선 제 24대 왕인 헌종과 정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된 왕릉 제도가 아니다.
우선 헌종 9년 1843년 16세로 승하한 효현왕후 김씨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하였고,
능호를 경릉으로 올렸다.
그로부터 6년 후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김씨의 우측(누워있는 시신 기준)에 모셨다.
1904년에는 73세로 승하한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씨를 효현왕후 김씨의 좌측에 안장하여,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 완성되었다.
사람들이 경릉을 보면 왕이 가운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일 오른쪽
(누워있는 시신 기준. 정자각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제일 왼쪽이 된다)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능침이며, 왼쪽이 계비 효정왕후 능이다.
이런 식으로 장사지낸 예는 경릉이 유일하다.
본래 왕릉 장법에서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경우엔 새로운 능호를 쓰게 되어 있다.
중종이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같이(이때의 경우 한 구역 안 두개의 능침을
따로 세워 동원 이강이라 한다.
봉분은 따로 떨어져 두개이지만 제사는 한 정자각에서 받는다)안장되었을 때
희릉의 능호를 같이 쓸 수 없다 해서 정릉으로 능호를 새로 올렸던 전례가 있고,
숙종은 인현왕후와 합장할 것을 것을 미리 지시했기 때문에 인현왕후의 능호인
명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이 경우는 봉분이 붙어있어서 쌍릉이라고 한다).
경릉은 합장릉도 아닌 왕비릉에 왕릉과 계비릉이 덧붙여진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정혈은 가운데의 효현왕후 릉이라고 함) 중종과 숙종은 같이 묻힐 것을
미리 전교했었고, 그럼에도 중종의 경우는 능호를 따로 올렸다.
왕이 따로 능호를 쓰지 못하고 왕비의 능호를 따라간 예는 경릉이 유일하다.
이는 왕을 안동김씨 왕비 옆에 부록처럼 묻어버린 것이니,
당시 정권을 주도하던 안동 김씨가 왕실을 얼마나 업수이 여겼는가 알 수 있다.
여기에 효정왕후 홍씨마저 옆에 장사지내게 되니 경릉은 실로 괴이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 왕이 가운데에 있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이유 :
대개 사람들은 왕이 가운데에 묻혀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당시의 사상으로는 무덤에선
우측(누워있는 시신 기준)이
상석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헌종은 효현왕후의 오른쪽에,
계비인 효정왕후는 정비인 효현왕후의 왼쪽에 묻힌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이와 반대로 좌측(앉아있는 사람 기준)이 상석이 된다.
▲ 경릉에서는 "정자각과 비각 및 능"을 한 폭에 담기란 어렵다.
고목을 지탱하는 철재 지침대가 세월의 흐름을 짐작케 한다.
♣ 조선시대 왕릉 조성법 ♣
조선왕릉(朝鮮王陵)은 1392년 고려 멸망 후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9년 동안의 조선 시대 역대 왕들의 무덤이다.
역대 왕조의 왕릉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며,
왕과 비들의 무덤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왕실의 장례와 제례를 엿볼 수 있으며,
국조오례의와 같은 상세한 기록까지 후대에 전해져 조선 시대의 왕실 문화와
장례 문화를 조명할 수 있는 문화재이다.
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역에 있는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그의 왕비 정안왕후의 능), 태조의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양친의 능,
그리고 대한민국의 영역에 있지만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는 여기서 제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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