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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역사 제4장 : 톤부리 왕국
Thonburi Kingdom
กรุงธนบุรี Kingdom of Thonbu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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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 |
톤부리 |
| 언어 |
태국어 |
| 종교 |
상좌부불교 |
| 정체 |
군주제 |
| 국왕 |
| - 1768-1782 |
딱신 대왕 |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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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국 |
1768년 |
| - 멸망 |
1782년 | | |

(사진) 톤부리 왕국을 개국한 딱신대왕 초상화.
로마국립박물관 소장 ☞ 확대사진 바로가기
톤부리(Thon Buri, ธนบุรี)는 버어마의 침공으로 인해 아유타야(Ayutthaya) 왕국이 멸망한 후, 딱신(Taksin 혹은 Taak-sin) 대왕이 한때 태국의 수도로 사용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후 짜끄리 왕조의 개조 라마 1세(Rama I)는 1782년 다시금 짜오파야 강(Chao Phraya River, 차오프라야 강) 건너편의 방콕(Bangkok)으로 도성을 옮겨간다. 이후 톤부리는 독립된 도 및 읍으로 남아있다가, 1972년 방콕 광역시로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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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암 국가의 재건설
1767년, 거의 400년 동안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세력을 떠쳤던 아유타야 왕국이 멸망했다. 왕궁과 도성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아유타야의 영토는 버어마가 차지하거나, 지역의 군웅들이 스스로 그 지방의 통치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이러한 지방 세력 중에는 사꽝부리(Sakwangburi), 삐마이(Pimai), 짠타부리(Chanthaburi), 나콘 시 탐마랏(Nakhorn Si Thammarat)의 영주들도 포함되었다. 당시 딱(Tak) 지방의 행정관이었던 짜오딱(Chao Tak)은 화교계(중국계) 귀족으로 군사적인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훗날 딱신 대왕이 될 그는 스스로 지방 군주를 자처한 후 짠타부리에 대해 전설적인 약탈 공격을 감행했다. 이후 짜오 딱은 짠타부리를 근거지로 삼아 군대와 자원을 증강했고, 함대를 보내 톤부리 항구를 점령하면서 짜오파야 강 입구까지 진격했다. 같은 해 그는 함락된지 7개월밖에 안된 아유타야 도성을 공격해서, 버어마인들로부터 아유타야를 수복했다.(주1)
이로써 시암인들이 독립을 하게 되자, 버어마의 신퓨신(Hsinbyushin, 신뷰신) 왕은 타워이(Tavoy: 현 Dawei)의 영주로 하여금 시암(태국)을 침공토록 명했다. 그리하여 깐짜나부리(Kanchanaburi)의 사이욕(Sai Yok, ไทรโยค) 지역을 통과해 들어온 버어마 군대는 오늘날의 사뭇송캄(Samut Songkhram) 지방의 방꿍(Bang Kung, บางกุ้ง)을 점령했는데, 이곳은 딱신의 화교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딱신은 서둘러 자신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 중에 분마(Boonma: 훗날의 라마 1세의 동생)로 하여금, 함대를 지휘하여 버어마 군으로부터 지역을 탈환하도록 파견했다. 분마가 이끈 시암의 군대는 버어마 병력을 포위했고, 그들을 격퇴시켰다.
당시 수백년간 시암 권력의 중심지로 사용됐던 아유타야 도성은 너무 황폐하게 파괴되어 더 이상 국가의 도읍으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딱신은 메남 강(Menam River=짜오파야 강) 서안에 위치한 "톤부리 시 마하사뭇"(Thonburi Sri Mahasamut)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 건설공사는 약 1년이 걸렸고, 이후 1768년 딱은 산뻿(Sanpet) 왕이라는 칭호로 스스로 옥좌에 등극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원래 이름과 지위를 합친 의미로 "딱신 왕"(King Taksin)이라 불렀다. 딱신은 스스로를 아유타야의 왕이라 칭함으로써, 자신이 과거의 영광을 계승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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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จรรยา ประชิตโรมรัน. (2548). สมเด็จพระเจ้าตากสินมหาราช. สำนักพิมพ์แห่งจุฬาลงกรณ์มหาวิทยาลัย. หน้า 55.
(주2) David K. Wyatt. Thailand: A Short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
2. 재통일과 팽창
딱신 왕이 등극하긴 했지만, 당시 시암에는 아직도 지방 영주들이 지역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딱신은 1768년 피사눌록(Phitsanulok, 피차눌록)에 대한 최초의 원정길에 올랐다. 당시 피사눌록 영주는 상-짜오파야 유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원정길에서 딱신 자신까지 부상을 입고 후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원정으로 인해 피사눌록의 세력은 확실히 약해지고 말았고, 결국 사꽝부리의 영주에게 복속당하고 말았다.

(지도) 딱신 치세의 시암 영토.
딱신 왕은 같은 해에 이산(Isan, 태국 북동부) 지방의 삐마이(Pimai) 통치자였던 텝삐삣(Theppipit) 왕자를 굴복시키기 위해, 휘하 장수인 텅 두엉(Thong Duang: 훗날의 라마 1세)과 분마(Boonma)장군을 보내 원정을 하도록 했다. 텝삐삣 왕자는 원래 아유타야 왕국의 버롬마꼿(Borommakot, บรมโกศ) 왕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결국 톤부리 왕국의 군대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텝삐삣 왕자는 위앙짠(Vientiene, 비엔타인)으로 도망쳤지만, 결국은 체포된 뒤 처형됐다.
1769년, 딱신 왕은 솜뎃 짜오파야 품계를 제수받을 파야 짜끄리(Phraya Chakri: 텅 두엉=훗날의 라마 1세)에게 군대를 내주어 남쪽에 위치한 나콘 시 탐마랏(Nakhorn Si Thammarat)의 영주를 정벌토록 보냈다. 나콘 시 탐마랏의 영주는 남부의 빳따니(Pattani)로 도망쳤다가 딱신 왕에게로 돌아와 항복했다. 딱신 왕은 그를 다시 나콘 시 탐마랏의 통치자로 봉하면서 자신의 지배권에 두었다.
한편 역시 1769년에 캄보디아의 우빠랏([역주] 친왕: 왕세자와 유사한 개념)이었던 엉논(Ang Non) 왕자가 시암의 지원을 받는 문제를 두고 나라이라자(Narairaja: 엉똔[Ang Ton]) 왕과 갈등을 일으키고, 톤부리 왕국으로 도망쳐왔다. 딱신 왕은 이 사건을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을 요구할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캄보디아의 나라이라자 왕은 딱신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 딱신 왕은 파야 아바이 론나릿(Phraya Abhay Ronnarit: 훗날의 라마 1세)과 그의 아우인 파야 아누칫 라차(Phraya Anuchit Racha: 이전의 분마 장군)에게 군사를 내주어 캄보디아 원정을 보냈고, 이들 장수들은 시엠립(Siemreap)과 밧덤벙(Battambang, 바탐방)을 장악했다. 그러나 딱신 왕이 나콘 시 탐마랏과의 전쟁을 위해 도성을 비운 사이, 정치적 불안이 발생했고 결국 캄보디아로 갔던 2명의 장수들은 급히 톤부리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 무렵 톤부리 왕국의 적수가 될만한 지역은 강성 승려인 짜오파 팡(Chao Phra Faang)이 통치하던 사꽝부리(Sakwangburi)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짜오파 팡이 다스리던 지역은 북쪽으로는 란나(Lanna) 왕국과 접경하고 있었고, 남으로는 1768년 피사눌록을 병합하면서 나콘사완(Nakhon Sawan, นครสวรรค์)에 이르고 있었다.
1770년 짜오파 팡은 바로 남쪽이었던 차이낫(Chainat, ชัยนาท)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딱신 왕은 이러한 움직임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사꽝부리에 대한 선제공격 결심을 굳혔다. 그리하여 딱신 왕의 함대는 짜오파야 강 상류로 진격한 후 매우 손쉽게 피사눌록을 점령했다. 딱신 왕은 이후 분마 장군으로 하여금 한 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하게 했고, 파야 피차이(Phraya Phichai, พระยาพิชัย)에게도 군대를 내주어 서쪽으로 진격케 한 후, 사꽝부리에서 합류하도록 했다. 결국 사꽝부리는 사흘만에 무너졌고, 짜오파 팡은 패하고 말았다.
이후 딱신 왕은 피사눌록에 머물면서 북부지방 인구에 관한 국세조사 및 세금징수 업무를 감독했다. 그는 분마 장군에게 "짜오파야 수라시"(Chao Phraya Surasi) 품계를 제수한 후, 피사눌록 및 북부지방의 모든 도시들을 관할하는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파야 아바이 론나릿(훗날의 라마 1세)에게는 "짜오파야 짜끄리"(Chao Phraya Chakri) 품계를 제수한 후, 재상으로 임명했다.
1771년 말, 딱신 왕은 캄보디아 정벌을 완료키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짜오파야 짜끄리 장군에게 엉논 왕자와 함께 육군의 지휘권을 맡도록 한 후, 딱신 왕 자신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진격했다. 이 작전을 통해 시암의 군대는 캄보디아의 여러 도시들을 장악햇고, 나라이라자 왕을 왕위에서 쫒아냈다. 그리하여 엉논 왕자가 리엄라짜(Reamraja) 왕으로 등극했고, 나라이라자 왕은 톤부리의 조공국으로 복속한다는 조건 하에 캄보디아의 우빠랏(친왕)이 되었다.
3. 버어마와의 전쟁
딱신 왕은 톤부리를 기반으로 해서 오래된 시암 왕국을 다시금 응축시켰다. 하지만 버어마는 계속해서 시암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1770년, 버어마인들은 치앙마이(Chiang Mai)에 위치한 근거지를 바탕으로, 현재의 수코타이 도에 위치한 사완칼록(Sawankhalok, สวรรคโลก)을 공격해왔지만, 시암인들은 이를 격퇴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딱신 왕으로 하여금, 버어마가 시암(태국)의 북부지방 영토를 침입하는 데 있어서, 란나의 영토가 중요한 자원의 공급기지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식케 해주었다. 즉 만일 란나가 시암의 통제권 하에 들어온다면, 버어마의 침략은 멈출 것이란 의미였다.
당시의 란나는 치앙마이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고, 버어마 장군인 파우 미웅우아운(Paw Myunguaun)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1770년 버어마가 사완칼록을 침공했을 당시 지휘관을 맡고 있었는데, 피사눌록을 통치하던 짜오파야 수라시(분마)의 군대로 인해 격퇴당했다. 시암(톤부리 왕국)은 이 해에 치앙마이에 대한 소규모의 선구적 침공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다지 성과있는 결과는 얻지 못했다.
1772년, 또다른 버어마 장수인 파우 툽라(Paw Thupla)는 라오스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서쪽을 향해 진격하여 삐차이(Pichai)와 우따라딧(Uttaradit)을 공격했다. 하지만 피사눌록의 시암 군대는 다시금 이들을 격퇴시켰다. 버어마의 군대는 1773년 다시금 침략해오는데, 이때 톤부리의 파야 피차이 장군은 그의 전설적인 부러진 검의 신화를 보여주며, 버어마 군을 격퇴했다.

(사진) 붉은 바탕으로 된 이 단순한 디자인의 깃발은 아유타야 왕국에서부터 시암의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1855년까지는 국기로 사용됐고, 1872년까지도 해군이 사용했다.
1774년, 딱신 왕은 짜오파야 짜끄리(훗날의 라마 1세)와 짜오파야 수라시(분마)로 하여금 치앙마이를 침공토록 했다. 그리하여 거의 300년 동안 버어마의 지배하에 있던 란나 왕국이 시암의 통치권 하에 되돌아왔다. 두 사람의 자오파야들은 란나 왕국 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반-버어마 저항군들의 도움을 받아 치앙마이를 함락시켰고, 딱신 왕은 그 반군들을 지방의 통치자들로 삼았다. 파야 차반(Phraya Chabaan)은 치앙마이의 영주로서 파야 위치안빠깐(Phraya Vichianprakarn)이란 칭호가 제수됐고, 파야 와이웡(Phraya Vaiwongsa)은 람푼(Lamphun)의 영주로 봉해졌다. 이 모든 영주들의 통치지역은 톤부리 왕국의 조공국 지위가 되었다. 결국 파우 미웅우아운 장군과 버어마 세력은 치앙샌(Chiang Saen, 치앙센)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딱신 왕이 북부지방에 대한 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버어마의 군대는 타딘댕(Tha Din Daeng, ท่าดินแดง)을 통해 톤부리 도성을 공격할 기회를 포착했다. 버어마 군은 방깨우(Bangkaew, บางแก้ว)에 주둔했지만, 딱신 왕이 지휘하는 시암의 군대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포위를 한지 한달 이상이 흐르자, 버어마 진영에서는 수천명이 사망했고,(주3) 또다른 수천명은 시암의 군대에 포로로 잡혔다.
1776년, 버어마의 마하 티하투라(Maha Thiha Thura) 장군이 이끄는 대규모 원정군이 시암을 침공해왔다. 마하 티하투라 장군은 자신의 병력을 쪼개 여러 방향으로 침입하기보다는, 3만명의 병력을 한꺼번에 몰고 곧장 피사눌록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피사눌록의 인구는 1만명 정도였다.
치앙샌에 있던 버어마 세력인 파우 미웅우아운 장군과 파우 툽라 장군도 다시금 치앙마이를 함락시키기 위해 공격했다. 하지만 피사눌록 방어를 위해 출정했던 2명의 시암의 짜오파야들은 급히 치앙마이로 돌아와 이들의 공격도 막아냈다.
버어마의 마하 티하투라 장군이 자신의 병력을 곧장 피사눌록으로 진격시키면서, 그 기세가 너무도 강력하여 이 도시는 거의 함락 직전까지 갔다. 마하 티하투라는 보급선을 차단시킨 후 딱신 왕의 군대를 공격했다. 2명의 짜오파야들은 피사눌록 방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버어마 군대는 승리를 거두며 이 도시로 들어갔지만, 버어마의 신퓨신 왕이 그해 사망하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그들은 퇴각해야만 했다. 신퓨신 왕이 사망한 후, 버어마는 자국의 내부 권력투쟁에 몰입해야만 했다.
1776년 새로운 버어마 왕 싱구민(Singu Min 혹은 Singusa)은 다시금 마하 티하투라 장군으로 하여금 란나를 침공토록 했다. 버어마의 병력은 대군이었고, 결국 치앙마이의 영주 파야 위치안빠깐은 그 도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짜오파야 수라시 장군과 람빵(Lampang, 람팡)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 까윌라(Kawila)는 버어마 군대로부터 치앙마이를 탈환했지만, 도시를 유지할만한 인구가 부족한 까닭에 이 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버어마에서는 싱구민 왕이 왕자들 및 마하 티하투라 장군을 숙청하는 권력투쟁을 행하면서, 더 이상 버어마는 시암을 침략하지 않았다.
4. 팽창과 경제적 문제들
1776년 현재의 나콘나욕(Nakhon Nayok, นครนายก) 지방인 낭롱(Nangrong)의 관찰사가 그 지역의 가장 선도적 도시인 나콘 라차시마(Nakhon Ratchasima, นครราชสีมา)의 영주와 더불어,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다. 낭롱의 영주는 참빠삭(Champasak: 현 라오스 지역) 국왕인 사야꾸마네(Sayakumane)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 일이 딱신 왕이 짜오파야 짜끄리(훗날의 라마 1세) 장군으로 하여금 참빠삭 원정을 보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사야꾸마네 왕은 도망쳤지만 체포되어 톤부리에서 2년간 구금상태에 있다가, 톤부리 왕국에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하에 1780년 다시금 참빠삭의 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참빠삭 원정에서 전공을 세운 짜오빠야 짜끄리는 시암 귀족의 최고품계인 "솜뎃 짜오파야 마하 까삿슥"(Somdet Chao Phraya Maha Kasatseuk)이란 군호를 하사받았다. 딱신 왕은 이 화교계 신하에게 왕족에 버금가는 명예를 안겨주기 위해 이 "솜뎃 짜오파야"라는 품계를 새롭게 제정한 것이다.
1778년 라오스의 화교 파워(Phra Wo)가 비엔티안(위앙짠)의 분산(Bunsan) 왕과 갈등을 하다가 시암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라오스의 분산 왕은 그를 살해해버렸다. 1779년, 딱신 왕은 2명의 유명한 형제 장수, 즉 파야 짜끄리(라마 1세)와 그 동생인 파야 수라시(분마)를 필두로 비엔티안 복속을 위해 군대를 출병시켰다. 당시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의 수리야웡(Suriyavong) 왕은 자진해서 톤부리 왕국에 복속한 상태였고, 이 원정길에도 동참했다.
결국 분산 왕은 숲속으로 도망쳤지만, 후에 시암에 항복해왔다. 비엔티안의 왕족들은 볼모가 되어 톤부리로 붙잡혀왔다. 이때 톤부리의 군대는 비엔티안을 상징하던 2개의 귀중한 불상을 갖고 귀국했다. 그것은 바로 "에메랄드 불상"(Emerald Buddha)과 "파방"(Phra Bang)이다. 또한 이 정벌로 라오스 지역의 3개 왕국 모두가 시암의 조공국이 되었고, 이후 백년간을 시암의 영향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
버어마의 침입과 여러 해에 걸친 전쟁들은 농민들이 영농에 종사하는 일을 방해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이 멸망했을 때, 다수의 백성들이 버어마로 붙잡혀갔고, 인적 자원의 부족은 문제의 원천이 됐다.
딱신 왕은 숲속에 숨어있는 백성들을 나오도록 장려했고, 농업 진흥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1773년 "징병 문신 제도"(Conscription Tattooing)를 선포하여 평민들의 몸에다 영구적인 문신을 새겨, 이들이 도망치거나 이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러한 제도는 라따나꼬신 왕국(Rattanakosin Kingdom, กรุงรัตนโกสินทร์) 시대에도 이어졌고, 쭐라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 국왕이 폐지시킬 때까지 지속됐다.
딱신 왕은 원래 중국계(화교)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실 및 자기 가문의 부동산과 재산을 팔아 백성들에게 지급할 보조금 재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는 경제적 쇠퇴를 일시적으로 구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참사에 빠졌던 시암의 경제는 부흥을 위한 시간을 아직도 더 필요로 하고 있었다.
딱신 왕은 시암을 다시금 외부세계와 연결시키기 위해(주로 중국), 몸소 통상사절단 파견을 관장하기도 했다. 그는 1781년 청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다시금 외교 및 통상관계를 재개했다.
5. 정치 경제적 난점들
톤부리 왕국은 그 사회를 재조직했다. 딱신 왕은 주로 전쟁 및 중국상인들과의 거래를 통해 자원을 집적시켰다. 톤부리 왕국 백성 중 다수는 태국민족인 "파이"(phrai), 즉 "평민들"과 화교, 라오족, 크메르 족, 몬족으로 구성됐다. 새로운 수도에서 활동하며 세력을 키운 일부 화교 상인들 중에는 공적인 품계를 제수받은 이들도 존재했다.

(사진) 딱신 왕의 군대를 지휘했던 총사령관으로, 딱신 왕을 제거하고 짜끄리 왕조를 개국한 파야 짜끄리 장군의 영정. 바로 라마 1세이다.
딱신 왕은 여러 성공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1779년 무렵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라따나꼬신 시대의 기록들과 당시 외교사절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딱신 왕은 광적인 종교인으로 변해 자신이 예류자(Sotāpanna, 預流者: [역주] 상좌부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4단계 중 제1단계) 단계를 획득했다면서 거의 신적인 단계를 주장하고, 고승 대덕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당시에는 외교사절들도 때때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왕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화교들이 주축이 된 그의 신하들은 2개의 분파로 갈라졌고, 그 중 한 파벌은 여전히 그에게 충성했지만, 다른 파벌은 그렇지 않았다. 경제상황도 난국이 초래됐다. 왕국에는 기근이 엄습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직권남용도 만연했다. 딱신 왕은 엄벌로써 기강을 세워보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관료들 및 대부분 중국인들이었던 상인들이 처형되기도 했고, 관료들 사이의 불평불만도 높아져갔다.
1782년, 톤부리 왕국은 이웃의 캄보디아 및 라오스에 대규모 원정군을 파병했다. 하지만 군대가 도성을 비우자 수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도성을 장악하고 딱신 왕을 하야토록 했다. 당시 딱신 왕이 승려가 될 수 있도록 허가가 됐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후 관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있던 캄보디아 원정군 사령관 파야 짜끄리 장군에게 왕위가 추대되었다. 파야 짜끄리 장군은 캄보디아로부터 행진해 돌아왔고, 이후 딱신 왕을 승려 자격에서 공식적으로 환속시켰다. 그리고 그 직후 딱신은 비밀리에 처형됐다.
6. 라따나꼬신 시대의 개막
딱신이 처형된 후, 총사령관 파야 짜끄리 장군은 톤부리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하고, 그 이름을 라마티버티(Ramathibodi) 혹은 라마 1세(Rama I)라 칭했다. 그는 짜오파야 강 건너편에 있는 방꼬(Bang-Koh: "섬의 장소"란 의미)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 1782년 세워진 새로운 도성은 "라따나꼬신"(Rattanakosin, กรุงรัตนโกสินทร์)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톤부리는 점차로 쇠퇴하다 방콕 광역시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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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딱신과 라마 1세...
딱 궁예와 왕건 이야기의 태국판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 나중에 <인물: 딱신> 항목하고 <대-버어마 전쟁> 항목을 만들 때
더 상세하게 공부하기로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