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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태국 군사쿠테타 (제1편)
2006 Thai coup d'état
"2006년 태국 쿠테타"는 2006년 9월 19일에 발생했다. 이 사건은 "왕립 태국군"(Royal Thai Army) 소속 군병력이 선거로 선출된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ทักษิณ ชินวัตร) 전 태국 총리의 위임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킨 무혈 쿠테타 사건이다. 이 쿠테타는 이전 15년 동안에 발생한 최초의 비헌법적 정권교체 사건이었고, 이후 탁신 전 총리와 그 지지세력, 그리고 그 반대파들 사이에서 일년에 걸친 정치적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이 쿠테타는 이미 예정되어 있던 국회의원 총선거를 채 한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발생했다.
태국 및 해외에서 이 쿠테타가 "태국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회의)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 เปรม ติณสูลานนท์) [예비역] 장군이 기획한 것이란 설이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다. 이 쿠테타는 결국 예정된 총선을 취소시키고, 헌법 폐기 후 계엄법 발동, 의회해산, 시위 및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 언론 검열 및 탄압, 내각 각료들의 구속 등을 초래했다.
(사진) 2006년 쿠테타 지도자였던 손티 분냐랏낀 장군은 태국 최초의 무슬림(이슬람교도) 출신 4성장군으로, 공식적으로만 2명의 아내를 거느린 억만장자이다. 2007년 "국가안보평의회"(CNS) 의장직을 사임하고 정치인으로 변신해, 부총리를 역임했다.
새로운 통치자는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손티 분냐랏낀(Sonthi Boonyaratglin, สนธิ บุญยรัตกลิน: 1946년생) 대장이었고, 쿠테타 지도부는 "입헌군주제 하의 민주개혁평의회"(Council for Democratic Reform under the Constitutional Monarchy: CDR)를 조직한 후, 9월 21일 "군사 쿠테타"(pronunciamiento)를 선언하여 권력장악 이유를 제시하고, 일년 내에 민간정부로 정권을 위임할 것이라 발표했다.(주1) 그러나 CDR은 민간정부로 권력이양을 하는 총선 이후에 CDR이 상설기구인 "국가안보평의회"(Council of National Security: CNS)로 전환될 것이라 발표했다. 하지만 CNS가 장차 태국 정치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주2)
CNS는 나중에 <과도 헌법>(Interim Charter)을 입안하고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สุรยุทธ์ จุลานนท์) [예비역] 장군을 과도정부의 총리로 지명했다. 2007년 1월 26일 태국의 76개 시도들 중 41개 시도에서 계엄법이 해제됐지만, 35개 도에서는 계속 유지되었다.(주3)
(사진) 2006년 9월 20일자 <방콕포스트>의 일면.
2008년 초까지도 군사정부 및 그 특별수사팀은, 자신들의 정적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부정부패 혐의를 입증할만한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탁신 전 총리 및 그 부인에 대한 기소는 단 한 건의 사건만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탁신 전 총리 부인이 국유지를 특혜로 불하받았다는 것이었는데, 군사정권은 당시 탁신 전 총리가 현직에 있었으므로 법률을 위반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 법률에 따르면, 정부 관료의 배우자들은 남편이 일하는 부처와 상업적 거래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태국의 여러 법률 전문가들은 이러한 혐의가 근거가 없다는 점을 밝혀냈다.
군부가 임명한 법원이 탁신 친나왓 총리의 "타이락타이 당"(TRT)에 대한 해산명령과 더불어, 주요 당직자들에 대해 5년간 정치활동 금지령을 내린 직후인 2007년 12월 23일 새로운 총선이 치뤄졌다.
(주1) 당시의 CDR 홈페이지.
(주2) The Bangkok Post, Military set to publish interim constitution, 2006-9-25.
(주3) Bangkok Post, Thailand lifts martial law in 41 provinces, 2007-1-26. |
1. 사태의 전개
1.1. 초기의 계획과 소문들
이 쿠테타 계획은 2006년 2월경에 시작됐다.(주4)(주5)(주6) 군부 내의 동요에 관한 소문과 모의설은 쿠테타 발발 수개월 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됐다. 2006년 5월 손티 분냐랏낀(Sonthi Boonyaratglin) 장군은 군대는 권력을 탈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인 발표를 했다. 2006년 7월 20일 군지휘부는 탁신 지지성향으로 알려진 약 100명의 중급 장교들을 재배치했고, 이 일은 군부가 친탁신파와 반탁신파로 갈라졌다는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2006년 7월 사팡 깔라야나밋(Saprang Kalayanamitr, สพรั่ง กัลยาณมิตร) 제3군구 사령관은 한 인터뷰에서, 태국 정치는 수준 이하이고 태국의 국가지도력이 약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태국이 잘못된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주7)
(사진) 쿠테타 당시 3군구 사령관이었던 사팡 깔라야나밋 장군. 군사정권의 주요 인사 중 한명인 그는, 아누퐁 현 육군참모총장의 가장 주요한 경쟁자로 알려져 있는 현역 군인이면서, 동시에 태국 국영 이동통신 기업인 "TOT "와 "CAT Telecom"의 회장(=이사회의장)도 맡고 있다.
태국의 대중들은 새로운 소문 하나하나마다 촉각을 기울였다. 2006년 7월 15일 민주주의 운동가 타위웃 쭐라와짜나(Tavivoot Chulavachana, ทวีวุฒิ จุลวัจนะ)는 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웹사이트를 통해, 군소식통을 인용하며 한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그는 이 게시물에서 군부와 손티 분냐랏낀 장군이 국가 권력에서 탁신을 축출하고 일정 기간 정리작업 후, 민정으로 이양하는 모의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주8)
2006년 8월에는 방콕에서 전차들이 이동했다는 보도들이 나왔지만, 군측은 이러한 움직임이 정례적인 훈련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둘러댔다.(주9) 9월초에는 태국 경찰이 5명의 군 장교들을 구속했다. 이들은 모두 "국내안보작전사령부"(Internal Security Operations Command: ISOC) 소속이었고, 이 중 한 장교가 명백하게 총리 공관을 향하던 차량 안에 폭탄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단속된 후 체포가 이뤄진 것이었다.(주10) 하지만 쿠테타 후에 이 중 3명은 석방됐다.(주11)
쿠테타 이후인 2006년 12월 이전 "국가안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 의장을 역임한 쁘라송 순시리(Prasong Soonsiri, ประสงค์ สุ่นศิริ) [예비역] 공군중령이, 자신을 포함해 6명의 군부 고위인사들이 7월부터 쿠테타를 모의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중 한 명이 손티 장군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수라윳 쭐라논 장군과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은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주12)
(주4) The Nation, The persistent myth of the 'good' coup, 2006-10-2.
(주5) กรุงเทพธุรกิจ, พล.ท.สพรั่ง กัลยาณมิตร"วางแผนปฏิรูปการปกครองมาแล้ว 7-8 เดือน", 2006-9-24.
(주6) Thanapol Eawsakul, "The Coup for Democracy with the King as Head of State", Fa Dieo Kan special issue, 2007.
(주7) คมชัดลึก, [มทภ.3ชี้ชาติไร้ผู้นำ ตท.10ย้ำชัดไม่ยึดอำนาจ], 2006-7-19.
(주8) www2.se_ed.net/icarus631/document/taweewat_letter_3pdf
(주9) Financial Times, Timeline: From contested elections to military coup, 2006-09-19.
(주10) BBC News, Thai arrests over Thaksin 'plot', 2006-09-07.
(주11) The Nation, Car-bomb suspects get bail, 2006-9-30.
(주12) Asia Times, Grumbles, revelations of a Thai coup maker, 2006-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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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 9월 20일 새벽, 정부청사 주변에 배치된 전차들 옆으로 탁발을 나온 스님들이 지나가고 있다. |
1.2. 쿠테타 제1일 (9월 19일 화요일)
2006년 9월 19일 저녁, 태국 군과 경찰이 선거로 선출된 탁신 친나왓 총리의 정부를 전복시켰다. 당시 탁신 총리는 뉴욕의 유엔(UN) 총회에 참석중이었다.
18:30 : 왕립 태국군 특수전사령부 소속 부대들이 주둔지인 롭부리(Lop Buri, ลพบุรี) 도에서 방콕으로 이동 시작. 이 시간에 쁘렘 띠나술라논 추밀원 의장은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라마 9세) 태국 국왕과 함께 접견행사에 참석했음. 보고에 따르면 이 행사는 시리낏(Sirikit) 왕후의 모친인 브어 끼띠야꼰(Bua Kitiyakara) 멈루웡의 제사와 관련이 있는 행사였음.
21:00 경 : 특수전부대들 방콕 도착.
21:30 경 : 군에서 소유한 "챈널 5"(Channel 5) TV가 정규 방송을 중지하고, 푸미폰 국왕이 작곡한 음악들을 방송하기 시작함. 이 시간 무렵부터 군부가 찻차이 완나사띳(Chitchai Wannasathit, ชิดชัย วรรณสถิตย์, 曹壁光) 안보담당 부총리, 탐마락 이사랑꾼 나 아유타야(Thammarak Isarangkura na Ayuthaya, ธรรมรักษ์ อิศรางกูร ณ อยุธยา) 국방부장관, 그리고 국내에 남아있던 탁신 총리의 아들을 구속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함. 이후 국영 라디오, 지상파 TV, 일부 위성방송들이 방송 중단.
21:40 : 경찰 특공대가 탁신 총리 자택에 도착. 군 소속 전차들이 방콕 주변으로 출현해 위치 확보.
22:20 : 탁신 총리는 뉴욕에서 국가비상사태 선포. 또한 손티 분냐랏낀 육군참모총장을 총리실 소속으로 전보발령함. 대신 함참의장(=군총사령관)인 르엉롯 마하사논(Ruangroj Mahasaranon, เรืองโรจน์ มหาศรานนท์) 장군이 이 사태를 지휘토록 함. 탁신 총리의 선언은 TV로 방송됐지만, 거의 시작과 동시에 방송이 중단됨.(주13)
23:00 : 1987년 미스 아시아 출신으로 군 소유 "챈널5"의 공보국장인 타위난 콩깐(Thawinan Khongkran)이 TV에 나와, 방콕 및 수도권을 군대와 경찰이 장악하고 있다고 발표.(주14)
[당시의 발표내용] "군사령관 및 경찰 총수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방콕 및 수도권 일대를 성공적으로 장악했습니다. 교전은 없었습니다. 저희는 국민 여러분들의 협조를 당부드리며, 불편하신 사항에 대해 인내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주15) |
군사정권은 최초 "입헌군주제 하의 민주개혁평의회"(Council for Democratic Reform under the Constitutional Monarchy: CDRM)라 자칭했으나, 이후 이 쿠테타에서 국왕의 역할에 대한 의혹을 일으킬 수도 있는 용어를 삭제하고, 단순히 "민주개혁평의회"(Council for Democratic Reform: CDR)란 명칭을 사용했다.(주16)
23:50 : CDR이 2번째 성명을 발표하여 쿠테타 이유를 밝히고, "정부 행정가가 되려고 하는 의도가 없음을 재확인"한다고 말함. CDR은 국왕을 국가수반으로 하고 행정권력을 "가능한한 빠른 시기에" 민간에 이양할 것이라고 밝힘.(주17)
00:39 :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내각과 상하원 의회, 헌법재판소를 해산시킨다고 발표. |
비록 외국의 주요 방송들이 방콕에서 취재와 보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BBC World", "CNN", "CNBC", "블룸버그"(Bloomberg Television) 같은 외국 뉴스 챈널들이 태국 내에서 수신이 중단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다.(주18) 이동통신망(전화 및 인터넷)은 계속 작동됐다.
군은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발동하여 전 병력에 대해 주둔지에 머물라고 명령하고, CDR의 허가를 득하지 않은 모든 군사적 이동을 금지한다고 하달했다.(주19) TV에서는 중무장한 군병력과 "M113 병력수송용 장갑차들"과 "M998 험비차량들"이 방콕 시내에 배치된 모습을 내보냈다. 많은 병사들과 군용 차량들이 국왕을 상징하는 색깔인 노란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쿠테타 지도자인 손티 분냐랏낀 장군은, 찻차이 완나사띳 안보담당 부총리와 탐마락 이사랑꾼 나 아유타야 국방부장관을 체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주20) 고위 공직자들은 CDR로 보고할 것을 명령받았고, 정부 사무실과 은행들은 9월 20일에 휴업을 하게 되었다.(주21)
쿠테타 발발 소식이 있은지 몇 시간 후, "BBC 뉴스"는 비록 푸미폰 국왕이 이 쿠테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바로 그날 늦게 쿠테타 지도부가 푸미폰 국왕을 만났다고 보도했다.
(주13) The Nation, Coup as it unfolds, 2006-9-20.
(주14) Mercury News, Thailand ruling military uses beauty queen, 2006-9-26.
(주15) AP, Thailand's Military Ousts Prime Minister, Associated Press, 2006-09-19.
(주16) The Nation, CDRM now calls itself as CDR, 2006-9-28.
(주17) BBC News, Text: Thai coup-leaders' statements, 2006-09-19.
(주18) BBC News, Thai PM 'overthrown in army coup', 2006-9-20.
(주19) Hariraksapitak, Pracha (2006-9-19). "Thai army declares nationwide martial law". Reuters.
(주20) The Independent, One night in Bangkok, 2006-9-19.
(주21) Associated Press, Thai military moves to overthrow prime minister, 2006-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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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06년 9월 탁신 정권을 전복시킨 쿠테타 지도부가 푸미폰 국왕(좌측)과 시리낏 왕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중앙 상단으로부터 르엉롯 마하사라논 국방총사령관, 사티라폰 께야논 해군사령관, 그리고 이 쿠테타의 최고 지도자인 손티 분냐랏낀 육군 참모총장(우측 끝).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인사는 추밀원 의장인 쁘렘 띤술라논 장군이다. 이 사진은 국왕이 쿠테타를 승인하면서 태국언론에서 홍보성으로 배포된 것이다. 하지만 태국의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이 사진은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
1.3. 쿠테타 제2일 (9월 20일 수요일)
01:30 : 탁신 총리는 유엔에서의 연설을 취소.(주22) 탁신 총리는 뉴욕의 호텔방에서 자신의 몰락과정을 지켜보았다. 집권 "타이락타이 당"(TRT) 소속 의원으로 탁신 총리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던 똠 끄소폰(Tom Kruesopon)은, 탁신 총리가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였고 망명도 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고 증언했다.(주23)
09:16 : 손티 분냐랏낀 장군은 TV 회의를 통해, 수개월의 정치적 혼란 이후 국가의 단합을 위해 군부는 정권을 잡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당시의 발표내용] "우리는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헌법과 상하원 의회, 내각 및 헌법재판소가 해산되었습니다. 우리는 총리대행(caretaker prime minister: 당시 탁신 총리는 치차이 완나서팃에게 과도총리직을 위임하고 있었다) 체제가 전례없는 사회적 불안과 광범위한 부정부패, 정실주의, 독립 기관들에 대한 간섭하여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 사태를 초래했다는 데 동의합니다. 만일 이 과도정부를 그대로 두면, 이 체제가 국가를 좀먹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지속적으로 국왕 폐하를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본 위원회는 가능한한 빠른 시일 내에 상황을 통제하여 평시상태로 회복시키고, 단합을 이루기 위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
이러한 발표가 있은 직후 태국의 TV들이 방송을 재개했고, 케이블 TV도 부분적으로 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요한 외국언론들(CNN, BBC, CNBC, NHK, Bloomberg)은 여전히 불통인 상태였다.
12:14 : 쿠테타 당국은 대중매체들의 협조를 당부했고,(주24) 이후 정보통신 및 이동통신 회사들에까지 협조를 요구하며, 과도군사위원회에 해로운 정보들의 전파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했다.(주25)
14:50 : "국민의 헌법"이라고도 불린 "1997년 헌법"이 태국 국회의 웹사이트에서 삭제됐다.(주26) |
라오스와 미얀마(버어마)에 접한 국경관문들은 이틀간 폐쇄되어 있었다.(주27) 뉴욕에서 수라끼얏 사티얀타이(Surakiart Sathirathai, สุรเกียรติ์ เสถียรไทย) 대변인 및 개인보좌관 빠둥 림차로엔랏(Padung Limcharoenrat)과 함께 런던으로 출발하기 직전, 탁신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총리로서 이곳(뉴욕)에 왔는데, 이제 해고자가 되어 떠난다. 아무도 나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스스로 일하고자 하지만, 그들은 내게 일거리를 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주28) |
탁신 총리는 영국 런던의 켄싱톤(Kensington)에 있는 자신 소유의 집으로 간 후, 영국에서 유학중인 자신의 딸 삔똥타(Pintongtha)를 만났다.(주29) 외교부 대변인은 탁신이 개인자격의 방문을 했다고 발표했다.(주30)
15:35 : 군사정권 지도자 손티 장군은 발표를 통해, 군부는 탁신 총리의 개인자산을 동결하지 않을 것이며, "테마섹 홀딩스"(Temasek Holdings)로부터 "친 코포레이션"(Shin Corporation) 주식을 다시 회수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탁신 일가는 2006년 초에 소유하고 있던 "친 코포레이션" 지분을 모두 싱가포르 국영투자회사인 "테마섹 홀딩스"에 처분한 바 있다.(주31)
20:17 : 손티 장군은 TV를 통해 성명서를 발표하여, 푸미폰 국왕이 자신을 과도통치위원회 수반으로 인준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1년 안에 민주주의를 복원하겠다고도 발표했다.(주31) |
밤늦은 시각, "민주개혁평의회"(CDR) 대변인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손티 분냐랏낀 장군을 CDR 의장으로 임명하는 국왕령을 내렸다고 발표했다.(주32) CDR은 제13차 성명서를 통해 이전의 발표들과 달리, "선거관리위원회"(Election Commission: EC)를 새롭게 구성할 것이라 밝히고, EC 산하 ACT가 지방선거를 조직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주33)
이후 CDR은 제7차 명령서를 발표하여, 산하조직을 4개 부서로 나눴다. 이들 4개 부서는 "민주개혁평의회 위원회"(CDR), "사무처"(secretariat), "자문기구"(advisory division), "특무기구"(special affairs division)였다.(주34)
(주22) FoxNews.com, Thai Military Launches Coup, Tgdfgdfgfhreygertretakes Power From Prime Minister Thaksin, 2006-09-19.
(주23) channelnewsasia.com, "Ousted Thai leader Thaksin gets ready to leave US", 2006-9-20.
(주24) The Nation, NARC summons media bosses to toughen controls.
(주25) The Bangkok Post, "Council wants clamps on information", 2006-9-21.
(주26) Created by Tee, แด่รัฐธรรมนูญฉบับประชาชน Growlichat.com, 2006-9-20.
(주27) channelnewsasia.com, "Thai coup leaders seal northern border", 2006-9-20.
(주28) The Nation, "Thaksin says coup unexpected", 2006-9-20.
(주29) The Nation, "Ousted Prime Minister Thaksin "arrives in London", 2006-9-20.
(주30) The Nation, "Thai PM in London for 'private' visit after coup", 2006-9-20.
(주31) The Bangkok Post, "Developments in the military coup d'etat today", 2006-9-20.
(주32) The Nation, "Royal command issued to appoint Sonthi as ARC president", 2006-9-21.
(주33) The Nation, "ARC issues statement to maintain EC status", 2006-9-21.
(주34) The Nation, "ARC issues order to divide responsibilities", 2006-9-21. |
1.4. 쿠테타 제3일째 (9월 21일 목요일)
2006년 8월 24일 적발했던 탁신 총리에 대한 명백한 차량폭탄 공격 음모 관련 수사기록 및 관련 문서들이(주35) 저녁 21:30 경에 "범죄단속국"(Crime Suppression Division: CSD)에서 유출되어 사라졌다. 탁신 총리의 부인인 퍼짜만 다마퐁(Potjaman Damapong, พจมาน ดามาพงศ์)의 남동생으로 경찰 부청장이었던 프리야우판 다마퐁(Priewphan Damapong) 장군에게 충성하는 경찰 병력들 역시, 공격용 무기들을 장착한 차량을 타고 CSD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목격되었다.(주36)
오후가 되자 태국 쿠테타 지도자는 언론사 사주들을 육군본부로 불러, 군부의 정권 장악에 뒤이은 대중 여론을 전달하는 일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군부가 언론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시작한 직후에 일어난 것으로, 태국을 장악한 과도군사위원회에 반하는 정보들은 위험한 것이라 하여 차단했다. 군부 지도자는 일상적인 방송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되, 오전 11시부터 시작하여 매 2시간마다 군사위원회가 방송용 발표문을 발령할 것이라 말했다.(주37)
(사진: REUTERS/Darren Whiteside) 9월 21일 한 패션학교 여학생이 정부청사 주변에서 경비중인 쿠테타 참여 병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군부 지도자는 탁신 총리의 고위급 측근들인 네윈 칫첩(Newin Chidchob, เนวิน ชิดชอบ) 총리실 장관과 용윳 띠야파이랏(Yongyuth Tiyapairat, ยงยุทธ ติยะไพรัช) 천연자원환경부 장관에 대해 목요일 정오까지 육군본부에 위치한 군사위원회로 출두하라고 통보했다.(주39) 한편 솜낏 짜뚜시피탁(Somkid Jatusripitak, สมคิด จาตุศรีพิทักษ์, 曾汉光) 부총리가 프랑스 파리로부터 돌아와 "돈므앙 국제공항"에 도착했다.(주40)
원래 탁신 총리를 태우고 뉴욕으로 갔다가 런던을 기착한 후 방콕으로 돌아온 "타이항공"(Thai Airways)의 전세기는 민간공항이 아니라 "돈므앙 공군기지"에 착륙했다. 이 비행기에는 탁신 전 총리를 수행했던 약 20명의 기자단과 중하위직 공무원들이 탑승했다. 이 항공기가 착륙하자 중무장한 10명의 특수부대원들(commandos)이 비행기를 둘러싼 후, 검문검색을 실시했다. 탑승객들은 여권에 도장을 받은 후 모두 풀려났다.(주41)
실각한 탁신 전 총리는 조국에 대해 새로운 조기총선거를 요구했고, 방콕의 쿠테타 이후 "국가적 화합"을 촉구하며 자신이 정계에서 실각했음을 인정했다. 런던에서 발표된 성명서를 통해, 탁신 전 총리는 자신이 자기개발 및 자선사업에만 전념할 것이라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총선을 통해 새로운 내각이 조속히 출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태국인들의 미래를 위해 민주주의 원칙들이 지속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주42) |
(주35) The Nation, "Alleged plot raises troubling questions", 2006-8-25.
(주36) The Bangkok Post, "Police, bomb plot file vanish", 2006-9-21.
(주37) ChannelNewAsia.com, "Thai coup leader summons media bosses to toughen controls", 2006-9-21.
(주38) ChannelNewAsia.com, "Fewer tanks in Bangkok as Thai army reduces presence", 2006-9-21.
(주39) ChannelNewAsia.com, "Two Thaksin aides summoned by coup leaders", 2006-9-21.
(주40) The Nation, "Somkid arrives at Don Muang".
(주41) ChannelNewsAsia.com, "Thai commandos search for Thaksin as his plane returns", 2006-9-21.
(주42) ChannelNewsAsia.com, "Ousted Thai PM Thaksin urges new polls, calls for unity", 2006-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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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월 21일 방콕 시내에서 포착된 공수부대원들의 모습. |
1.5. 쿠테타의 시기에 관하여
<네이션>(The Nation) 지의 컬럼니스트 타농 칸통(Thanong Khanthong)은, 손티 분냐랏낀 장군이 탁신 친나왓 총리가 계획하고 있던 임박한 쿠테타를 방지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탁신 총리가 당시 진행중이던 옐로우셔츠(PAD: 국민민주주의연대) 시위대의 집회장에서 9월 20일에 폭력사태를 유발시킨 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국적인 계엄령을 실시하려고 모의했다는 것이다. 타농 칸통은 손티 장군이 정보라인으로부터 이러한 첩보를 전달받았다고 한다. 타농 칸통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손티 장군이 전달받은 보고받은 내용은, 네윈 칫첩 총리실 장관과 용윳 띠야파이랏 천연자원환경부 장관이 주도가 되어, "HK33 공격용 소총"으로 무장한 "산림감시부대"(Forestry Police, 타한판[ทหารพราน]: [역주] 태국 정규군 소속으로 국경지역 순찰을 주임무로 하는 공수부대)의 조력하에 대항 시위를 조직하고,(주43) 이후 유혈사태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주44) 따라서 금요일(4.21)에 "타한판 부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실시했고,(주45) 네윈 칫첩 총리실 장관과 용윳 띠야파이랏 천연자원환경부 장관도 구속했다는 것이다. 특히 용윳 장관은 "타한판 부대" 동원을 맡은 혐의가 적용되었다고 한다.(주43)(주46) 하지만 2006년 쿠테타 기획자 중 한 사람인 빠송 순시리는 탁신 전 총리가 그러한 쿠테타 계획을 가졌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주12)
타농 카통의 <네이션> 지 동료 컬럼니스트인 창 노이(Chang Noi)는, 타농 칸통의 주장이 "'사실'처럼 자리잡은 하나의 [허황된] 신화"라고 논박했다. 창 노이는 타농 칸통의 주장은 쿠테타가 발생한 날 밤에 어떠한 군사적 대항 움직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탁신측이 모의했다는] 임박한 폭력사태를 입증할만한 어떠한 직접적인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 창 노이는 타농 칸통의 주장이 "국민들을 놀라게 만들어 노예화시키는 것으로 쿠테타 지지 세력들의 가책을 덜어주려는 것이다. 이 신화는 이번 쿠테타를 반동적이고도 수구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말했다. 창 노이는 또한 제3군구 사령관 사팡 깔라야나밋 중장이 이번 쿠테타가 이미 7개월 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 언급도 지적했다. 따라서 이번 쿠테타가 탁신 총리측이 모의했다는 폭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발생했다는 주장은 모순된 것이라 논박했다.(주4) 창 노이는 또한, 동일한 이유에서 손티 분냐랏낀 장군이 말한 "수만명"의 친탁신 시위대와 반탁신 시위대가 방콕으로 동시에 몰려들 것이란 주장 역시 모순을 가진 것이라 말했다.
(사진) 쿠테타 직후 현역 시절의 손티 분냐랏낀 장군.
손티 분냐랏낀 장군은 이후 한 인터뷰에서, 이 쿠테타가 반탁신 시위대의 봉기예정일과 날짜를 맞추기 위해 9월 20일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포르투갈의 1910년 혁명을 예를 들었다. 당시 포르투갈의 반정부 시위대와 반군들이 동일한 날자에 봉기해 마누엘 2세(Manuel II) 국왕의 정부를 쓰러뜨리고, 포르투갈 최초의 공화국을 세운 바 있다. 하지만 태국 쿠테타는 탁신 전 총리가 아직 뉴욕에 머물고 있던 9월 19일에 발생했다. 손티 장군은 쿠테타 날짜가 앞당겨진 데 큰 이유가 있는 것을 아니라고 말했다. 손티 장군은 또한, 언젠가 탁신 전 총리가 군지휘관들과 오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당신은 쿠테타를 모의할거요?" 하고 물어보길래 "할겁니다" 하고 답했다는 일화도 밝혔다.(주47)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그가 공개적으로 군부는 쿠테타를 하지 않을 것이라 발표했던 그의 발언과 모순된 것이다.(주48)
<네이션> 지는 이 쿠테타가 태국 전통의 수점(numerology, 數占)에서 길조의 수로 알려진 "9"로 구성된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이 쿠테타가 불기(佛紀) 2549년 9월 19일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쿠테타 지도자 손티 장군이 쿠테타 직후 발표한 주요 연설 중 하나도 오전 9시 39분에 발표됐다고 한다.(주49) 하지만 <네이션> 지는 자사의 이전 보도에서 손티 장군의 기자회견이 9시 16분에 시작됐다고 보도한 바 있고,(주50) 불기 역시 1941년에 서양의 그레고리안력과 일치되도록 조정했다는 점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주43) The Bangkok Post, 2006-9-20.
(주44) The Nation, "Sonthi outsmarted Thaksin at the eleventh hour".
(주45) The Nation, "Rangers close to Thaksin disarmed".
(주46) The Bangkok Post, "Newin, Yongyuth greeted with jeers as they report to army HQ", 2006-9-22.
(주47) The Nation, "Sonthi told Thaksin he would stage a coup", 2006-9-27.
(주48)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Thaksin refuses to resign despite protests in Bangkok", 2006-3-6.
(주49) The Nation, "The auspicious number nine versus ET", 2006-10-27.
(주50) The Nation, "Coup as it unfolds". |
1.6. 쿠테타 자금
이 쿠테타에 장교들을 가담시키기 위해, 군사정권은 15억 바트(약 450억원)를 사용했다고 한다. 손티 장군은 "우리는 병력들의 음식과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분명 자금을 필요로 했다"고 말해, 쿠테타 자금이 비밀스런 자금원에서 흘러나왔다는 의혹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주51)(주52)
2. 쿠테타 발발의 원인
군사정권 및 독립성을 가진 업저버 양측은 이 쿠테타 원인으로 여러가지 요소들이 지적했다. 군사정권이 최초 주장했던 쿠테타 이유는, 탁신 정권이 "전례없는 사회적 불안"과 부정부패, 정실주의, 독립기구들에 대한 간섭, 국왕에 대한 비방을 야기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사정권은 나중에 탁신을 비롯한 고위 지도자들이 유권자 매수행위를 저질렀고, 폭력유발을 계획했으며, 군대를 약화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주53)(주54)(주55)
쿠테타 발발 2달 후에, 군사정권은 쿠테타 이유를 밝힌 백서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부정부패, 직권남용, 통합력 부족, 견제와 균형 체제에 대한 간섭, 인권침해, 국민단합 저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주56)
한편 독립성을 가진 업저버들은 이 쿠테타에 대해 군사정권과는 관점이 다른 견해들을 광범위하게 내놓았다. "쭐라롱꼰 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티띠난 뽕수티락(Thitinan Pongsudhirak, ฐิตินันท์ พงษ์สุทธิรักษ์) 씨는 이 쿠테타가 탁신 전 총리와 푸미폰 국왕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했다.(주57) 푸미폰 국왕에 대해 논란많은 전기를 발간해 태국 최대의 금서 작가가 된 폴 핸들리(Paul Handley) 씨는, "[이 쿠테타가 의도한 바는] 짜끄리 왕조의 왕위계승권이 와치라롱꼰(Vajiralongkorn) 왕세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탁신 전 총리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주58)이라 주장했다. 한편 "쭐라롱꼰 대학"의 정치학 교수 짜이 응파꼰(Giles Ungpakorn) 씨는 이 쿠테타가 탁신 지지층인 농촌 빈곤층과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도시 엘리트계층 사이의 계급투쟁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주59)
(주53) The Nation, "Thaksin feels heat after chilly London", 2006-11-17.
(주54) The Nation, "Sonthi outsmarted Thaksin at the eleventh hour", 2006-9-22.
(주55) The Nation, "We did it for the people: Sonthi", 2006-11-25.
(주56) The Nation, "What Thaksin had done wrong", 2006-11-22.
(주57) BBC NEWS Asia-Pacific, [news.bbc.co.uk/2/hi/Asia-pacific/5367936.stm Thai king remains centre stage], 2006-9-21.
(주58) Asia Sentinel, "What the Thai coup was really about", 2006-11-6.
(주59) John Roberts and Peter Symonds, "Wsws.org", 2006-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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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쿠테타의 정당성을 찾기가 어렵네요. 쿠테타 주도 세력의 모순된 말속에서 그들 스스로 쿠테타가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