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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낮에 볕에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덥다.
그런 반면 마당의 포도 덩굴이 무성해져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지중해성 기후가 이렇기 때문에 포도도 잘 되는 걸까?
아직까지야 견딜 만은 하지만, 만약 여름이라면, 그리고 이 집에도 포도나무가 없다면 가끔씩 마당에 나가기도 겁날 정도로 더울 것 같다.
허긴 유화 재료를 사느라 시내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어느새 다 반팔차림이긴 했다.
드디어 캔버스를 사다가 흰색 밑칠을 해두었다.
집이 좁아 유화 그릴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아예 그리지 않을 게 아니라서 이제부터는 유화도 그려나가기로 했던 것이다.
어쩌면 난 여지껏 유화 그리기가 두려워 장소가 좁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해야 한다.
공간이 없다고 불평해봤자, 그래서 그림을 그리지 않아봤자, 나만 손해니까.
5. 26
# 동네 축제 #
5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늘이 이 동네 ‘깐 까라예우’의 ‘봄 축제’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동네 청년회와 아말리아가 알려준 것도 있고, 또 아침부터 차 몇 대가 확성기를 틀고 산동네를 오르내리며 떠들썩하게 축제를 알려서, 낮에는 역시 집에 처박혀 있었지만 밤이 돼서야,
‘나도 한 번 가 볼까?’ 하고 집을 나섰다.
축제는 이 동네의 조그만 성당 앞마당에서 벌어졌는데, 내가 나타나자(오직 나만이 동양인이다 보니 내 스스로도 멋쩍었고 하필이면 내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이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들 역시 나를 주시하는 바람에, 마치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 들어 바로 돌아오고 말았다. 더구나 지난번 송씨 아파트에 살 때 거기 ‘육마요르’ 구역에서의 ‘4월 축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여서(여긴 구역도 작고 산동네라) 썩 볼거리도 없어서이기도 했는데,
아랫집을 지나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문이 열리더니 호아낀이,
왜 그냥 오느냐고 물어,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워 그냥 어깨를 으쓱했더니,
“인야, 기다려!” 하더니 곧 내려와서는, 아예 나를 끌고 축제장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은 강제로 반은 호기심에 다시 가게 되었는데, 아까와는 달리 막 춤이 시작되면서는 분위기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물론 커다란 음향기에서 나오는 춤곡은 경쾌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본인이 흥이 나면 음악에 맞춰 무대 위 아래를 따지지 않고 나가 춤을 추는 모습도 흥을 돋기에 충분해 보였다.
게다가 그 아래의 ‘숯불구이장’에는 기름기 가득한 냄새에 고기들이 구워지고 그 옆 탁자들 위에는 포도주가 놓여있었는데, 그 주변에서는 또 한 무리의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어서 보기만으로도 흥겹기는 했다.
호아낀이 나에게 그 중 초리소 구이 꼬치를 하나 건네주었는데(돈을 주고 샀다.), 나는 그 초리소 냄새가 싫어서 질겁을 하듯 손사래를 쳤고, 그러자 그가 미안한 듯 대신 포도주(Vino) 한 컵을 주어 그건 받았지만, 내 관심은 흥겹게 춤을 추는 무대에 가 있었다.
스페인 전통 가락도 그랬지만 가끔씩 적절하게 배치한 듯한 현대적인 템포(룸바? 등)의 음악이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 것 같았고(분위기가 좋았다.), 특히 어린이들을 무대에 데리고 나간 부모들이 섞인 가족간의 춤추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 보니,
‘나도 춤을 잘 춘다면......’ 하는 춤을 추고 싶은 충동도 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춤을 못 추던 내가 어찌 감히 이들 틈에 끼어 춤을 추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축제에 빠지고 있었는데, 언제 나왔는지 아말리아가,
“인야! 너도 나가 춤을 한 번 춰보지 그래?” 했는데, 내가 펄쩍 뛰자, 큰 소리로 웃으면서 나를 끌더니 몇몇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도 시켜주었다.
그러자 그 때까지는 그저 호기심어리게 바라보던 그들이 아주 친근한 얼굴로 나를 대해주었지만, 말이 안 통하다 보니 그런 축제마저 즐길 수 없는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노 몇 잔이 들어가면서는, 마음도 좀 느슨해지면서(좀 안도가 되어) 축제의 맛을 다소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밤 1시가 넘어가기에 나는 아말리아에게 졸린다며 돌아오려는데,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여전히 그들과 얘기꽃을 피우던 아말리아도 그랬지만, 마을 젊은이들은 그제야 춤을 추려고 하나 둘 모이는 중이라고 해서 이상하기만 했다.
더구나 내가 아는 청년회 젊은이들은 무슨 일인지 축제에는 얼굴을 비치지 않아 약간 실망과 함께 내 관심도 식어가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초저녁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놀았다면, 자정이 넘어서는 젊은이들의 축제인가 보았다. 그런 것 역시 처음이었던 나는, 정말 몸이 피곤했고 졸려서도 더 이상 그 축제에 머물 수가 없어서 돌아왔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나도 이 마을 속의 한 일부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것마저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 다음 날 나는 그 ‘축제의 밤’을 떠올리며 드로잉을 했다. 그런데 이런 드로잉은 그리면서도 즐거웠고 그래서였는지 그림 역시 쉽게 풀려서 나와주었다. #
‘이 그림은 머릿속의 기억만으로 그린 건데 의외로 잘 나와주었지......’ 하면서 이 인야는 이 부분에 ‘마을 축제’라는 이미지를 첨부했고 캡션까지 붙였는데,
그림 상단엔 원색의 장식용 종이 술을 무작위로 배치했고 중간은 ‘무대 위’로 많은 사람들의 춤추는 모습에 하단부는 무대 아래서 호응하는 축제 모습을 아주 단순한 선으로만 묘사한 드로잉인데,
사실 이 인야는 이 그림이 맘에 들어,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10 여년 뒤에) 커다란 유화로 다시 옮겨 그릴 정도로 스스로도 재미있다고 여기는 그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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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TV로지만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보고 들었다.
오늘 밤 한 TV 방송에서 그의 콘서트를 생중계해 주었는데,
나 같은 사람도 아름답고 힘찬 그의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차라리 존경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도, 수도 없이 앵콜을 청하며 자리를 떠날 줄 모르는 청중을 보며,
‘저 사람은 저 맛에 살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이 끝난 뒤, 나는 갑자기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그리고 싶어 펜을 들었는데, 의외로 쉽게 그의 특징이 살아나 주어 만족이었다.
5 . 28
A4 크기의 종이를 세워 그린 이 그림은, 상단 우측엔 TV 모니터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파바로티를(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꼽고), 그 반대 측인 하단 왼쪽에 평면적인 한 사람(이 인야 자신의 모습)을 배치했는데, 무엇보다도 파바로티의 모습이 너무 닮아서,
‘이 그림을 파바로티에게 보낸다면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는, 이 인야에겐 드물게 나온(다른 사람을 그린, 더구나 TV를 보면서 그린) 그림이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Pavarotti)를 보며...’
캡션을 붙였다.
# 가우디(Gaudi)와의 만남 #
지난번 집구하는 과정에서 교민을 통해 알게 되었던 ‘세사르(Cesar)’씨는, 그 당시의 내가 불쌍해서도 그랬겠지만 ‘화가’인 것에도 관심이 있었던지 그동안에도 계속 연락이 이어졌었는데,
우리나라 서울 올림픽에도 가봤다는 그 분의 강력한 추천이자 호의로, 오늘 나는 그 분과 택시를 타고(차 주차 공간이 없어 택시를 타자고 해서) ‘구엘(Güell) 공원(Parque Güell)’에 갔다.
처음에 나는 세사르씨가 ‘다른 건 몰라도 꼭 봐야 된다’면서 하도 ‘공원’을 가보자기에 굳이 마다할 생각은 없으면서도, 그저 어떤 평화롭고 아름다운 녹지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공원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그저 평범한 공원으로 여겼을 뿐이다.
물론 ‘사그라다 파밀리아’도 스페인에 가기 전에 한 번인가 무슨 책에서 조그만 사진(그것도 갱지에 흑백으로 인쇄되어있던)으로 보았을 뿐, 무식하게도 그것이 바르셀로나에 있는 줄조차 몰랐던 난데, 하물며 ‘구엘 공원’이야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너무나 생소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곳은 가우디가 구엘(Güell) 백작의 의뢰로 14년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했는데,
세사르씨는 여기저기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간단하게 가우디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는가 하면, 그 자신이 어렸을 적에 이 세라믹 광장에서 축구도 했고, 어떤 때는 모자이크 양식인 제방의 세라믹 조각들을 떼어내는 반문화적 행동을 자행했었다는 고백도 했다. 그런데 세사르씨의 그런 고백이 나에겐 더 정감어린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는데,
그 곳은 올림픽을 맞아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 관계로 철망이 쳐있어 가까이 들어갈 수가 없어 아쉬웠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스페인도 그런 훌륭한 작품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놓아 훼손되어 있었는데 올림픽을 맞아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 원형에 가까운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엘 공원 가우디의 손길이 닿은 구석구석을 돌면서 나는 가우디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은 감동에 감탄을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엘 공원에 있는 가우디의 작품은 정문 입구의 담과 도마뱀 같은 ‘용’의 형상을 둘러싼 아기자기한 분수, 그리고 가장 넓은 부분의 ‘마게이(용설란과 식물)’를 심어놓은 돌로 만든 화분과 길옆에 축대 쌓듯 이어진 돌 화단 같은 것들로 이어지는데, 나에게는 화려한 색상의 모자이크보다도 자연스런 돌로 쌓은 제방과 다리가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여기 말고도 ‘사그라다 파밀리아’ ‘까사 밀라’ 등 주물공장(솥공장)을 운영했던 그의 선조들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듯한 그의 독특한 스타일의 건축물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나는 거기서 어떤 한 노인이 큰 욕심 안 부리고 돌을 가지고 조금씩조금씩 작업을 해 나가는 모습을 숨죽여가며 감상한 기분이다.
게다가 세사르씨에 따르면, 가우디는 80이 넘도록 독신으로 지낸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국외로 여행한 것은 단 한 번 ‘모로코’인지 ‘알제리’인지 그도 잘 모르는 북아프리카에 여행했던 것뿐이었고 스페인에서만 살았다고 하던데, 오로지 작품밖에 몰랐다던 그는 어느 날 도심에서 길을 건너다 전차에 치어 숨을 거두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다가 그의 가족도 없어 보호자가 나타나지도 않아 그 시체를 시립 영안실에 보관했다 한다.
그런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계속 작업 중이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며칠 째 건축가가 나타나지 않아 수소문한 결과 그는 이미 죽어 시립 영안실에 보호자도 없는 시체로 안치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는데......
내 짧은 스페인어 실력 때문에 그 정도의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적이자 아픈 사연으로 가슴에 담겨져 왔다.
물론 그러면서 나는 가우디를 한 위대한 예술가로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초창기 우연히 접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한 예술작품으로 보였다면, 이 ‘구엘 공원(Parque Güell)’에선 가우디라는 한 인간을 접하는 기분이어서, 나는 더 깊은 감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바르셀로나에 가기 전에는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전혀 몰랐는데(관심조차 없었는데), 현지에 가서 그의 건축 작품들을 접하면서 존경하게까지 되었던 것으로,
‘물론 사그라다 파밀리아 안에 있는 ‘가우디 박물관’에 그에 대한 기록이 전시되어 있어서, 그즈음에는 이미 ‘가우디’를 알 수 있고도 남았을 텐데......’ 했던 건,
사실 이 인야는 ‘구엘 공원’에 갔을 당시만 해도 가우디에 대해선 거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이전에도 몇 차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접해보았던 그였지만, 모두가 겉모습만을 바라본 외부에서였고, 그 뒤로도 한 참 지난 올림픽이 끝난 뒤 한국에서 친구가 왔을 때에야 관광객의 입장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안으로 들어가 탑에도 올라보고 박물관에도 들어갔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가우디의 얼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진한 감동을 뭔가 그림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강한 충동으로 스케치북을 꺼내 자유롭게 그려나갔다. 그를 존경하면서, 그를 만난기분으로......
그런 뒤 ‘가우디와의 만남’이란 제목을 붙였고, 그 드로잉을 바탕으로 유화로도 발전 확대하게 된다. #
‘그러고 보니 이 대목도 뭔가 의미가 있는데?’ 하고 이 인야가 잠시 일손을 멈춘 건, 그 즈음의 자신에게선 몇 점의 ‘세계적인 예술가’(파바로티, 가우디, 피카소 등등)들과의 조우를 주제로 삼았던 그림들이 그려졌다는 것이고, 그 점에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글쎄, 그러고 보면.. 내가 스페인에 갔던 게, 그렇게 알게 모르게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는 거고, 그로 인해 내 작품 세계 역시 풍부해지고 있었다는 뜻도 되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보는 계기가 된 것마저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뭐라 정확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단정지을 순 없지만, 분명 스페인에서 그렇게 살아가던 효과는 있었던 게 분명한 것 같았다.
어디 그 뿐이던가. 가우디를 소재로 그렸던 그림은, 그 몇 년 뒤 자신의 서울에서의 ‘귀국전’의 포스터로도 사용했기에(더구나 30년이 지난 지금 서울 작업실의 벽면에, 이 인야 바로 정면에, 그러니까 그의 다른 대표적인 전시의 포스터 사이에 나란히 붙어 있어서),
‘화가의 작품생활은 그렇게, 한 순간 한 순간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감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어......’ 하면서, 한참 바라보았다.
물론 그런 뒤 그 원본 드로잉과 나중에 재생산한 유화 이미지 두 개를 시리즈로 이 부분에 붙였고 캡션도 넣었다.
‘가우디(Gaudi)와의 만남’-I,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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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잘 간다.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오늘 외출했다가 돌아오다 이 동네 수영장 앞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버스에서 5분만 늦게 내렸어도 됐을 텐데, 그 5분 차이로 온 몸이 다 젖고 말았다.
그래도 집에 도착해 그 젖은 몸으로도 바로 계단을 올라 우편함에 가 보니, 한국에서 보내온 편지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상태로 바로 편지를 꺼내면 내리는 비에 젖을 것 같아, 다시 집으로 내려와 우산을 챙겨들고 다시 올라가서 꺼내왔다.
그렇잖아도 비에 젖으면서는 스스로도 처량했었는데, 편지 한 장이 나의 그 처량함을 말끔히 씻어준 것이다.
6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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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비가 내려서 그랬겠지만, 오늘은 깨끗한 날씨였다.
포도송이가 엊그제만 해도 쌀알만 하더니, 이젠 콩알만 하게 제법 모습을 갖추어간다. 그나마 이 집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것이 포도나문데, 나무 역시 날마다 자기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뭔가 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을 쉬지 않고 그려야 한다. 그래야 벽에 붙은 그림들의 늘어나는 모습을 창을 통해서 포도나무도 엿볼 수 있을 테니.
6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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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연기’ 문제로 여기 ‘경찰청’에 갔는데, 이래저래 트집만 잡는 것 같고(내 스페인어가 짧아서 더더욱 답답했다.),
학교 문제 때문에 학교에 갔다가 내일 오라는 말을 듣고 나오는데,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아, 관공서거나 은행에 가서 내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그들의 말도 내가 이해를 못하는 게 얼마나 서럽고 울화가 치밀고(한 편으론 불이익을 당하는 느낌이고) 약이 오르는지,
여기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정말 살맛도 안 날 정도다.
그런데 내 은행 잔고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여기 ‘한국 영사관’에 알아보니,
은행 잔고만으론 부족하고, 그 돈이 한국에서 송금했다는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지금 내 통장에 남아 있는 잔고는, 여기 스페인 내에서 누군가에게 빌려서 채워 넣을 가능성 때문에, 한국에서 돈을 부쳐 받았다는 기록이 포함돼야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우스웠다. 그리고 기가 막혔다.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내가 쓰는 건데, 왜 난리람?’ 하고 화가 치밀었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이들의 법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상황에 맞춰야만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수긍이 되기는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증명서를 만들 때까지의 어렵고도 까마득한 일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어서, 풀이 죽은 상태로 집에 돌아올 수밖에.
그런데 오늘은 편지 한 통 없었다.
6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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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가 석 달 연기되었다.
그러면 이제, 다음 비자를 연기할 때까지 한국에서 돈이 왔다는 증거를 만들면 된다.
물론 그 문제에 대해 그동안 연구해 두긴 했는데, 나 같이 한국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은(그렇지만 나는 이미 한국에서 돈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여기 교포 중에 한국에 들어갔다 오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일정 양의 돈을 가져가게끔) 그 사람이 한국에서 나에게 송금하는 방법이었다.
일단 그런 식으로나마 비자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다. 나는......
만약 내가 돈 얘기를 하게 되면, 한국의 어머니는 밤잠을 못 주무실 테니 그런 내색을(한국에 그런 내용을 알리는 일) 할 수조차 없으니까.
‘근데, 여긴 무슨 상황이지? 비자가 연기된 내막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으니 내가 알 수가 있나......’ 이렇게 상당히 자주, 이 일을 시작한 이래 이 인야는 자신의 지난 일기의 ‘비 구체적인 점’에 아쉬움을 토로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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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월드컵’이 개막돼서 우리나라 경기도 아닌 축구 보느라 정신이 없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시차 없는 현지 생방송을 볼 수 있어서 실감나고 생생해서 좋긴 한데, 축구 때문에 일도 못하고 있다.
물론, 오늘은 종일 어둡고 흐리는 등 날이 좋지도 않았지만.
아, 뭐래도 좋으니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내 경제력이 한계가 있으니), 내가 알아 본 곳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고, 나는 이렇게 집안에만 처박혀 지내니......
이러다간 정말 입에 곰팡이가 슬겠다.
6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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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축구’의 한국 1차전은(대 벨기에) 2 : 0으로 졌다.
나는 집안에 처박혀 흑백 TV로 그 경기를 보았는데, 먼 외국 땅에서 홀로 흥분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처량하기만 했다.
확실히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6 .12
‘아, 여기 나오는구나!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고......’ 하며 이 인야는 혼자 살기 두 달이 되어갈 무렵에 있었던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일(에세이) 하나를 복사했다.
# 아말리아 친정아버지 #
며칠 전 나는 외출에서 돌아와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제일 먼저 집의 뒷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그 날도 편지함이 텅 비어있음에, 아니 전화세나 그 밖의 세금 영수증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나는 실망한 나머지 잠깐 멍하게 서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때, 웬 비닐봉지 두 개가 문 틀 사이 바깥쪽에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그 봉지를 살펴보니, 밭에서 캔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아직 습기가 밴 흙이 묻어있는 양파와 감자였다.
‘근데, 이게 왜 여기에 걸려있다지?’ 하긴 했지만,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어서 그냥 내려왔다. 사실, 내가 사는 집 문틀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떼어내 바닥에 내려놓을 수도 있었지만, 누구의 어떤 것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잊어버렸다.
저녁 무렵에 전화가 왔는데 아랫집 아말리아(Amalia)였다.
원래 말이 빠른 그녀의 천천히 설명하는 말로는, 문에 걸려있는 양파와 감자는 그 위 밭을 가꾸는 자기아버지가 나 먹으라고 걸어놓았다는 것 같았다. 일단 그렇게 이해가 됐음에도 나는 전화상으로는 확신할 수가 없어서, 전화를 끊고 바로 아말리아 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아말리아의 자세한 설명으로는, 자기 아버지가 오늘 오전에 감자와 양파를 캤는데 나 먹으라고 문에 한 봉지씩을 걸어놓았다는 것이고, 조금 전에 그쪽을 지나가면서 확인해보니 아직도 그대로 문에 매달려있어서, 자기 딸에게 전화를 걸어 나에게 알려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그 분이 아말리아의 아버지였고, 그 동네 다른 집에서 또 다른 딸(아말리아의 동생)과 둘이 살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비록 이 동네로 이사온 지 두 달이 돼가고는 있었다 해도, 알고 지내는 이웃도 많지 않았기에, 어차피 동네 사람들(아말리아 친정아버지 포함)에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말도 못하는 외국인) 동양에서 온 조용한 이웃이었을 뿐이니까.
아무튼 상황은 그랬다. 그리고 고마웠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에게서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호의를 받아 그 감동은 뭐라 형용할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아말리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는 말을 하고, 나는 다시 집으로 올라와서 그 것들을 들여왔다. 그러면서,
‘나에게 직접 얘기해도 되었을 텐데... 그랬다면 더욱 고마웠을 텐데......’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그러면서 얼마 전, 아말리아의 아버지가 뒷문 쪽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내가 인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더니 그 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았을 뿐이었는데, 역시 말도 없이 그런 호의를 베풀어왔던 것이다.
그러다 또, 그 얼마 전엔 뒷문 쪽으로 그 분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내가 인사를 하니까, 미소를 지으며 손만 번쩍 들어보이던 일도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렇게 그 분은 별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역시 편지함에 갔다가, 또 하나의 비닐봉지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우리나라 배추 같은 여기 상추 두 포기에, 못 생긴 토마토도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물론, 그것 역시 아말리아 아버지가 걸어놓고 갔을 터라,
‘이거, 고마워서 어떡한다지?’ 하면서 이번에는, 집으로 들어와 바로 아말리아에게 전화를 걸어, 띄엄띄엄 그 상황을 설명한 뒤,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아무튼 요즘, 그런 분이 이렇게 오며가며 나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상황에,
난 괜스레 든든한 후원자가 한 사람 생긴 기분이다. #
‘그런 식으로 아말리아(호아낀도 좋은 사람이었지만, 어차피 그 동네에는 아말리아 가족이 많이 살기 때문에) 가족들은 나에겐 어쩌면 ‘스페인의 가족’ 역할까지 하는 관계로 파고 들었다. 아무튼, “우리 아버지가 원래 그래!” 하듯 역시 아말리아를 통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분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썩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더러 내 스페인 말이 너무 서투르다 보니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기가 쑥스러워 그러셨다던 것인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뭉클하고 아련해지는 이 인야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하릴없이 자신이 앉아 있는 작업대 앞의 회전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혼자 미소 짓고 있었다.
*
큰일 났다. 포도나무에 문제가 생겼다.
잎은 떨어지고 열매는 시들고......
왜 그런지, 갑자기 시들시들 앓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무호스를 대고 물만 주었다.
그러고도 답답한 마음에 아랫집 호아낀한테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혹시 너무 늙어서인지도 모른다고는 하던데......
동네를 다니면서 봐도, 다른 집에서는 그런 일이 없는데 내 포도나무만 아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살리고 싶은데...... 어떻게든 살리고 싶은데......
문득,
‘이제 여름이 온 게 분명하구나!’ 하고 느낀 것은 곧, ‘봄이 다 갔구나’ 하는 뜻이었는데,
갑자기 한숨과 함께 나는,
‘그렇다면 이곳에서의 봄이 다 간 거네?’ 하는 아쉬움부터 앞섰다.
그런데 그것도 좀 이상했다.
내가 다른 계절이라면 또 몰라도 봄이 간 것에 대해 이런 식의 아쉬움을 표한 것 자체가......
한국에서는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6 . 13
‘그랬었지......’ 하면서 이 인야는 잠시 일손을 멈췄다.
‘사실 나는 한국에 있을 땐 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계절을 싫어하고 좋아한다기 보다는, 가을을 너무 좋아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상대적으로 네 계절 중 제일 무덤덤하게 보냈던 게 봄이었기 때문에, 봄에 대한 특별한 기대감이나 감상 같은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해 바르셀로나에서 우여곡절 끝에 봄을 다 보내면서의 느낌은 뭔가 달랐다.
난생 처음 외국이란 곳에 뚝 떨어졌던 당시, 뭔가 내가 그전에 알던 것과는 다르기도 했던 지중해의 그 찬란했던 햇볕과 봄기운을 좋아하며 보내긴 했는데, 그리고 그 당시에도 뭔가 특별하다는 걸 피부로 느끼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봄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 뿐, 지금 내가 표현하려 하는 ‘찬란했던 봄’으로 인식됐던 건 아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그런 행복하거나 설레기까지 했던 느낌의 봄은, 다시 나에게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뒤로 한 세월이 지난 뒤, 그러니까 내 50대 이후에 지난날을 돌아보다가, 내 전 생애를 통 털어 봐도 물론 ‘찬란했던 봄’의 감정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는데,
예순 다섯이 된 지금 돌이켜 봐도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다음 봄에도),
‘그토록 아름다웠던 봄이 나에게 다시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했기 때문에, 내 일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봄’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아무튼, 내가 봄을 그렇게 몸으로 느끼면서 즐긴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하면서, 이 인야는 여전히 그 봄을 그리워하는 표정에 잠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