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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탐방기(2003.7.29-8.7)
1. 꿈은 꾸는 자의 것
몇 년 전부터인가 불현듯 실크로드를 걷고 싶었다. 당나라 수도였던 서안부터 로마까지 동서문물의 대동맥인 그 길을 따라 가고 싶었다. 그것은 전혀 실현될 듯 싶지 않은 하나의 꿈이었고 희망사항이었다. 사막과 낙타, 대상인과 바자르, 오아이스 그리고 그 위에 인간이 남긴 흔적들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내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 것은 아마도 둔황 막고굴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라 승려 혜초가 불교 성지 순례를 하면서 둔황 막고굴에 '왕오천축국전'이라는 흔적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혜초가 수업 시간에 나올 때쯤이면 학생들이게 둔황 막고굴을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아마 실크로드가 늘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면 그건 전적으로 둔황의 혜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소망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게 되었다. 꿈은 꾸는 자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 꿈이 지금 현실이 되어 꿈의 실크로드를 찾고있질 않는가? 베이징-서안-둔황-투루판-우루무치-카슈가르를 향해.
사막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실크로드는 왜 쇠락했으며 실크로드의 미래는 없을까? 중국 내 53개 소수 민족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실크로드에 한민족(韓民族)은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환경과 문화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실크로드 탐방에서 내가 찾고 싶은 모습들이었다.
광주를 떠나던 날 아침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흠뻑 맞아야 한다. 적어도 10일간은 비 구경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실크로드는 가장 척박한 사막으로 난 길이기 때문이다. 인천국제공항은 언제 보아도 위풍 당당하다. 처음 인천 국제공항을 보았을 때 엄청난 감동이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외국에 나갈 때면 우리의 인천 공항과 비교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우리 인천공항보다 적은데' 라며 나만의 으쓱거리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인천 공항의 감동은 김포공항의 왜소함에 대한 반대급부인지도 모른다. 김포공항만 보았던 시절 내 눈은 그 거대한 시설에 휘둥그레졌던 기억도 있다. 인간의 눈높이란 그런가 보다. 한번 올라가 버린 눈높이는 다시는 내려오지 않는 속성을 지닌 것 같다. 베이징을 향해 가는 비행기 속에서 본 하늘은 뭉게구름 속에 간간이 보이는 푸름이었다. 한국을 출발할 땐 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불과 몇 분의 비행은 하늘의 모습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베이징은 과거 금, 원, 명, 청 왕조까지 900여 년 간 도읍지였다. 명, 청나라 시절 조선의 사신들이 빈번하게 드나들었던 베이징까지의 노정은 아마도 2개월 이상 걸렸던 고행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고행의 길을 난 2시간도 채 걸리지 않고 달려와 버렸다. 베이징은 8년 전 내가 보았던 베이징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인의 '만만디'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기업의 50% 이상이 민간인에 의해 경영되면서 '만만디'의 중국은 '빨리빨리'의 중국으로 바뀌어 있었다. 더 이상 중국은 계획 경제의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이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쫓겨나야 한다. 거대한 용의 꿈틀림이라고나 할까. 중국의 미래가 나에겐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천안문을 찾아 나서는 전용도로는 자동차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급격한 자동차의 증가는 그 큰 나라 중국도 감당하질 못하고 있었다.
2. 문화는 조화(7월 29일)
무섭게 변해 가는 중국의 심장부 베이징에서부터 나의 실크로드 탐방은 시작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38도가 넘는 찜통 더위였다. 그러나 이번 일정에서 38도는 더위도 아니었다. 투루판에서 45도가 넘는 날씨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호텔에 여장을 풀기도 전에 먼저 찾은 곳은 천단(天壇)이었다. 천단은 명·청대 황제가 하늘·땅·해·달에게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한 제단이었다. 천단의 남쪽 끝의 담은 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북쪽 끝은 반원형의 형태였다. 이는 고대 중국의 우주관으로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으로부터 원구단·황궁우·단폐교(丹陛橋)·기년전 순으로 주요 건축물들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경에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 유산이 6개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천단을 비롯해서 자금성, 만리장성, 이화원, 베이징 원인 유적지 그리고 명13릉이 그것이다. 베이징의 문화 유산은 비교적 잘 관리 보존되고 있었다. 부러움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조화는 늘 아름답다. 1천년 이상 남도의 중심지였던 광주의 중심부에는 단 하나의 유적지도 남아있질 않지 않는가?
천단의 규모 역시 엄청났다. 언제나 중국의 유물·유적은, 문화는 크기부터 우리의 기를 죽인다. 그러나 문화란 그 지역에 사는 인간과 자연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중국의 유물·유적의 크기가 엄청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구, 영토의 크기와 생산력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에는 우리만이 갖는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떨어져 보였다. 즉 문화란 조화일 수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30평 아파트에는 30평에 맞는 사이즈의 텔레비전이 어울리고, 50평 아파트에는 50평에 맞는 텔레비전이 어울리듯이 말이다. 만약 30평에 사는 사람이 50평에 사는 사람의 텔레비전의 크기를 부러워하여 30평에 들여놓는다면... 그렇다. 문화란 인간과 자연과 환경의 조화다. 규모가 크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그 문화가 위대하다는 평가는 그릇된 평가일 수 있다. 아름다운 조화가 더 멋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청난 위용이 내리찍는 위압감은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 위압감을 자금성, 이화원, 병마용 갱, 막고굴, 교하고성, 천불동, 칸얼정 등의 유적지에서도 결코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1897년 조선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있다가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었다. 중국의 제후 왕에서 황제가 된 셈이다. 그래서 고종 황제는 황제나라 중국처럼 1897년 원구단을 건립하고 1899년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를 지었다. 그러나 원구단은 1913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돌북),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은 끝까지 황제의 나라로 남지 못했다. 중국의 천단에서 나는 고종의 나라 대한제국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중국에서 벗어나려던 몸부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겉만 황제였을 뿐 대한제국은 황제의 권위를 지켜줄 만한 힘이 없었다. 원구단 자리에 선 조선호텔의 모습이 대한 제국의 아픈 과거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베이징 한복판에 선 천단 앞에서 난 대한제국 시절의 황궁우의 모습을 아픔과 연민의 모습으로 내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3. 태화전에서 떠올린 부의(溥儀) (7월 30일)
다음날(30일) 아침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8시 20분쯤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다. 길이 880미터, 동서 너비 500미터, 세계 최대의 도심 광장이다. 광장 북쪽으로 천안문이 있고, 중심부에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었다. 중국근대사의 격변기에 베이징이 그 중심이었다면, 천안문 광장은 늘 그 중심 무대가 되었다. 1989년 6월 민주적인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많은 피가 뿌려진 민주화의 성지이기도 했다.
천안문 광장에는 인민대회당, 모주석 기념당, 혁명박물관 등이 빙 둘러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모주석 기념관 앞에 시신을 참배하기 위해 줄지어 선 기나긴 행렬이었다. 8년 전 이 곳에 왔을 때도 그 길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직도 그에 대한 믿음과 추억은 여전해 보였다.
자금성이 얼마나 큰지 몇간이나 되는 궁궐인지, 어느 왕조의 궁궐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고자 한다. 몇 개의 거대한 문을 지나서야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의 중심 건물들이 나타났다. 궁궐의 주요 건물들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생략한다. 자금성에 대한 이야기는 풀어놓으면 끝도 없지만 실크로드의 주제와도 맞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끼는 감회는 없을 수 없다. 거대한 천안문을 통과하면 오문이 나오고 그 오문을 또 통과해야 태화문이 나온다. 태화문을 들어서는 순간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태화전과 맞부딪치게 된다. 태화전은 1420년 영락18년에 처음 건설되었지만 화재로 여러 번 불탄 후 1695년 강희 34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태화전은 새 황제의 즉위식이나 황후의 책립식, 출정식 및 중국 3대 명절인 원단, 동지, 황제의 생일날 성대한 축하 행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즉 태화전과 그 광장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다가오는 중압감. 그랬다. 황제 즉위식이나 동지에 조선에서도 사절단을 파견했을 것이다. 수개월을 걸려 걸어 온 조선의 사신이 천안문, 오문을 지나고 태화문을 지나 태화전의 위용을 보는 순간 어떤 감정이었을까? 죄어오는 중압감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겠구나. 그리고 그 중압감은 한평생 중국에 대한 사대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오늘날처럼 우리의 경제 수준이 더 높았다면 우리 문화가 최고는 아니어도 매우 소중한 우리 것이라는 자긍심도 가질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당시 조선의 사신이 받았던 문화적 충격은 내내 중국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태화전을 보는 순간 어딘지 낯설지 않았다. 그랬다. 여기가 바로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 1906 - 1967)가 1908년 3살의 나이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장소였다. 부의, 그의 파란 만장한 인생은 '마지막 황제'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어 '그런 인생도 있었구나'라며 나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부의의 황제 제위는 7살의 나이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끝을 맺고 만다. 그 후 1932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에 의해 끌려나와 만주국의 왕이 된 후, 1950년 공산정권하에 수감되었다가 1959년 특사로 풀려 나와 식물원 정원사로 일했다. 그리고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3살 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그 태화전에 정원사 신분인 부의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그 보위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늘의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오후에는 이화원을 찾았다. 이화원은 중국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으로 3,000간이 넘는 각종 건축물이 인수전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12세기 말 금나라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원, 명대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건축과 호수의 확장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중국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는 이화원 하나만 보면 알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그러나 그 이화원에서 난 서태후의 독기 어린 광기를 만날 수 있었다.
서태후(西太后, 1835-1908)는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며 동치제의 생모인 자희황태후다. 함풍제가 죽자 6살의 동치제를 대신하여 섭정하였고, 1875년 동치제가 죽자 3살된 누이동생의 아들을 옹립한 후 또 섭정하였다. 이가 광서제(光緖帝)다. 말이 섭정이었지 실은 중국 역사상 가장 폭악한 여황제였다. 광서제가 16세가 된 후 입헌파인 강유위(康有爲)와 손을 잡고 친정을 실시하려고 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10년 간 이화원의 옥란당(玉瀾堂)에 가두어 버렸다. 진비는 광서제의 애첩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이 잘려 나갔다. 29명의 시녀가 차(茶) 온도를 맞추지 못해 죽임을 당했다. 서태후가 불경을 연구했던 불향각은 부처가 안치된 만불각보다도 3센티가 더 높았다. 부처보다도 더 높은 지존의 위치에 있고자 했던 서태후. 그러나 그녀도 죽음만은 피해갈 수 없었다. 바다만큼 큰 곤명호에서 서태후가 그토록 붙잡고자 했던 권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한번 움켜진 권력은 그 끝이 없어 보였다. 이승만, 박정희처럼.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본성이 무섭고 두렵다.
4. 꿈의 도시, 서안(7월 31일)
드디어 서안(西安)이다. 꿈에 그리던 서안, 그 서안에 지금 내가 서 있다. 서안이 처음 수도로 자리잡게 된 것은 서주(기원전1134-770)가 호경이라는 도읍지를 서안에 정한 후부터였다. 그 이후 진(기원전 350-207), 서한(기원전 206-서기8), 전조(319-329), 후진(384-417), 서위(535-556), 북주(557-581), 수(581-618), 당(618-907)에 이르는 10개의 왕조가 이곳에서 터를 잡았다. 각 왕조가 서안을 수도로 정한 기간만 해도 1,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신라의 경주, 일본의 교토와 비교한다는 것은 서안에게 미안한 일이다. 당시 당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로마와 함께 인구 100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당시 서안은 최치원을 비롯한 신라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최고의 유학 도시이기도 했다. 내가 설레었던 것은 그것만은 아니었다. 백제 의자왕이 당에 끌려와 한 많은 삶을 마친 곳이 이곳이고, 혜초의 무덤(선유사에 있음)이 있는 곳이 이곳이며,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된 곳 또한 이곳이며, 삼장법사의 후계자였던 신라 승 원측의 판각 사진이 걸려 있는 곳이 이곳 자은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안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시이다. 그리고 이곳은 우리들의 이번 주제였던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실크로드의 출발 도시 서안. 그러나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진시황릉과 병마용 갱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세계 8대 기적의 하나로 알려진 진시황 병마용갱을 찾았다. 병마용 갱을 찾아가는 아침의 수은주는 35도를 훨씬 넘고 있었다
1,100년 동안 왕조의 수도였던 서안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이는 누가 뭐래도 진시황일 것이다. 진시황(기원전 259-기원전 210), 진시황은 다 아는 것처럼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인 진(秦)나라를 건설한 전제군주다. 13세의 나이에 즉위하여 한(韓)·위(魏)·초(楚)·연(燕)·조(趙)·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 인물이다. 군현제, 만리장성, 아방궁, 병마용 갱, 불로장생 등은 그가 남긴 흔적들이다. 이러한 흔적은 진시황을 황제로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 흔적이면서 동시에 진왕조가 단명하게 된 원인도 되었다. 늘 욕심이 많으면 그만큼 잃는 것이 역사의 법칙은 아닐까?
만리장성과 병마용 갱, 진시황릉을 축조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진시황을 원망하며 죽어갔을까? 그러나 그 후손들의 후손들은 그 할아버지의 원한과 저주가 서린 만리장성과 병마용 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진시황마저도 위대한 군주로 칭송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선조들의 고통이 오늘 우리들에게 커다란 자긍심이 될 땐, 우린 과거를 잊고 용서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병마용 갱이 있는 박물관은 서안 동쪽으로 약 40키로 떨어진 곳, 진시황릉 무덤으로부터는 약 1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벌써 숨이 가파져온다. 더 빨리 보고싶은 열망이 더위에 내 발걸음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들어선 1호 갱, 아! 거기에는 우리키보다도 더 큰 6천여 병사들이 살아 숨쉬는 모습으로 3줄로 늘어서 있었다. 장엄한 광경이었다. 전율이었다. 아니! 이럴수가! 그래서 세계 8대 불가사의였구나.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댔다. 한순간의 모습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놀라움이었다. 경이었다. 이런 놀람과 경이는 2, 3호 갱에서도 계속되었다. 만약 항우에 의해 불타고 부서지지 않았더라면.....아쉽게도 그건 소망일 뿐이었다. 부서지고 불탄 흔적들의 복원만으로도 그 감동은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1974년이래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4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4호 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였다. 1호 갱의 약 1/3은 후일을 기약하면서 미 발굴의 상태로 있었다. 본래 이 갱 위에는 길이 210m, 넓이 9칸의 회랑식 건축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6,000여 개의 도용들의 크기는 1.75-1.86m, 병마용(兵馬俑)은 높이 1.5m, 길이 2m의 실물 정도의 크기였다. 갑옷을 입고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이 모두 달랐다. 2호 갱 역시 부분적으로 발굴되어 다량의 목제 전차와 이를 끄는 병마용 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있었다. 3호 갱은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개, 마용 4개가 출토되었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잠시 병마용 갱을 발견했던 농부와 역사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양지발 농부와 다른 두 명의 농부가 팠던 우물은 1호 갱 가장 끝자락이었다. 5미터쯤 파도 물이 나오지 않자, 두 농부는 중단하고 되돌아가 버렸다. 양지발 농부만이 혼자 몇 미터를 더 파고 들어가자, 병마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세계 8대 경이였던 병마용 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건 우연일 수밖에 없다. 만약 도중에 우물파기를 멈췄다면, 만약 우물의 위치를 1미터만 더 밖으로 잡았다면, 그랬다면 병마용 갱은 영원히 땅속에 묻힌 채 후대 또 누군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땅속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최초의 발견자 양지발은 지금 할아버지가 되었다. 날마다 박물관에 출근하면서 책을 구입한 탐방객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었다. 카터와 악수를 나눈 사진도 걸려 있다. 정말 우연한 행운이 양지발 할아버지에게 떨어진 셈이다. 아니, 그 우연한 행운은 그 농부의 운명을 역사적인 인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감동을 뒤로하고 바로 옆에 위치한 진시황 무덤을 찾았다. 여산 앞에 또 하나의 산이 있었다. 여산 앞의 또 하나의 산, 그 산이 진시황의 무덤이었다.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76m. 25층의 아파트 높이. 수백개의 계단을 한참 오르고서야 정상에 설 수 있었다. 거대한 평야가 눈앞에 펼쳐진다. 뒤는 여산의 중앙이었다. 한눈에도 명당 자리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사서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하여 통일 이후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한다. 최근 레이저 투시로 다량의 유물이 저장되었음을 확인했지만 아직 중국의 과학적 수준으로는 발굴하기가 어렵단다. 진시황의 무덤 속에서 어떤 유물이 또 다시 세상에 나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지 기대된다. 진시황 그는 이미 2,000년 전 이 땅을 떠났지만, 그러나 그는 아직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서안하면 절대 빼 놓을 없는 인물이 있다. 당 현종의 애첩 양귀비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클레오파트라 아니면 양귀비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그 양귀비가 목욕한 곳으로 알려진 화청지(華淸池)가 진시황릉 부근인 여산 산록에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양귀비의 조각상, 선입견 때문인지 아름답다는 생각이 먼저 내 머리를 채운다. 선입감은 이처럼 우리들의 정상적인 사고를 잠재우는 마약일 때가 많다.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욕탕과 현종의 욕탕, 시중들의 욕탕이 아직 그 모습대로 있었다. 화청지의 주인공은 양귀비와 현종만은 아니었다. 늘 시대가 바뀌면 그 주인공도 바뀌는 법이다.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장소였던 그 곳은 서안사건(西安事件)의 주무대이기도 했다. 서안사건이란 1936년 12월 12일 공산군 토벌을 위하여 섬서성(陝西省) 서안에 주둔 중인 장학량(張學良) 휘하의 만주군을 격려하기 위해 온 장개석(蔣介石)을 감금하고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요구한 사건을 말한다. 화청궁에는 장개석의 집무실과 당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총알 자국이 남아 있었다.
화청지 그 자체는 나에겐 별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 정도의 경치를 지닌 온청탕은 한국에도 많다. 그러나 화청지가 세계적으로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곳에 당 현종, 양귀비, 서주 유왕과 애첩 포사, 장개석, 장학량, 주을래 등 인간들의 흔적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공간을 살아 숨쉬었던 인간들의 흔적, 그 흔적에 중국 최고의 시인 두목, 백거이의 예술이 가미되어 있었다. 그랬다. 역사란 좋든 싫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간의 훈김이 더해졌을 때 역사가 되고,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되는 것이다.
자은사 대안탑(大雁塔)을 찾았다. 자은사는 삼장법사 현장(602-664)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 사리, 불상 등을 봉안한 절로 유명하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인도 불탑 양식을 모방한 대안탑이었다. 652년에 세워진 전탑으로 당시는 10층이었으나 지금은 7층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7층의 높이는 무려 64미터나 되었다. 대웅보전 뒤 불당에 현장의 수제자인 신라 승 원측의 판각 사진이 남아 있었다. 원측을 만난 것이다.
서안에서의 2박이 끝나고 둔황으로 가기 전 짬을 내어 아방궁을 찾았다. 진시황의 궁전이었던 아방궁, 병마용 갱이나 만리장성을 볼 때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항우가 불을 질렀을 때 3개월이나 탔다고 전해지는 아방궁, 물론 과장된 기록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장 뒤에는 그 거대함의 규모가 눈에 보인다. 1/10로 축소된 아방궁이 재현되어 있었다. 1/10로 축소된 그 모습만으로도 우릴 압도한다. 근래에 재현된 아방궁, 아방궁은 그 자체 브랜드만으로도 우리와 같은 손님을 끌고 있었다. 브랜드가 주는 가치, 그래서 오랜 문화와 문명을 꽃 피웠던 이집트, 로마, 중국 등은 그 문화 브랜드만으로 먹고살지 않는가. 부러움이었다. 지금 아방궁은 간데 없고 상술만 남아 있었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젠 둔황으로 가야한다. 둔황으로 가기 위해 함안으로 이동중이다. 함안에 비행기장이 있기 때문이다. 함안으로 가는 길가에 고분들이 즐비했다. 멀리 측천무후와 당 고종의 합장묘인 건릉이 보였다. 가장 규모가 크다는 당 태종의 무덤인 소릉도 보인다. 모두를 둘러보지 못하고 서안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아마 그 무덤들 사이에 초라한 모습의 백제 의자왕의 무덤도 있을 것이다. 서안에 와서 난 비운의 왕 의자왕을 몇 번인가 떠올려 보았다. 불과 몇 시간만에 올 수 있었던 서안까지의 그 길을 의자왕은 몇 달이 걸려 왔겠지. 그리고 패망의 멍에를 안고 좌절하고, 분노하다가 이국 땅에서 한을 머금은 채 죽었겠지. 아아 의자왕이시여, 이젠 고이 잠드시라. 역사 도시, 실크로드의 출발도시 서안을 떠나면서 난 진시황과 양귀비와 당 현종과 삼장법사와 원측과 혜초와 의자왕과 긴 이별을 하고 있었다.
5. 아! 명사산 그 아름다움이여(8월 1일)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본 서안 주변은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둑판 모양의 농지였다. 여산 앞의 작은 산, 진시황릉 정상에서 본 평야도 끝이 없었다. 그래, 이런 거대한 평원을 가진 중국이었기 때문에 주(周) 나라 때 정전법(井田法)을 실시 할 수 있었구나. 체험에서 우러나는 깨달음, 현장 체험은 늘 나에게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스승이다. 정전법은 맹자(孟子)가 가장 먼저 주장한 설로, 1리 4방(1리는 400 m)의 토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주위의 8구획은 8호(戶)의 집에서 각기 사전(私田)으로서 경작하고, 중심의 1구획은 공전(公田)으로서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정부에 바치는 조세 제도를 말한다.
서안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난주(蘭州)에서 다시 갈아타야 한다. 몸이 벌써 지쳤는지 나도 모르게 곤한 잠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자났을까, 갑자기 비행기 안이 시끄럽다. 사막이었다. 사막, 말로만 듣던 사막이 사방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비가 내려 순간 물이 흘렀을 구덩이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 사막. 난 태어나서 처음 사막을 보고 있었다. 최소한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본 사막은 아름다웠다.
둔황(敦煌)은 타림분지 동쪽 변두리를 북류하는 당허강 하류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따라서 둔황은 고대 동서교역·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BC 1세기 초에 한무제(漢武帝)는 둔황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옥문관(玉門關)·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때 발달했던 둔황은 8세기 말 토번(吐蕃)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11세기 초 서하(西夏)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부터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그 둔황이 다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00년 17호 석굴에서 5만 여 점의 고문헌(古文獻)·회화류(繪畵類)가 발견되었고, 그것이 1907-1908년에 영국의 스타인 및 프랑스인 폴 펠리오 등에 의하여 약탈되어 세계에 알려지게 되면서부터였다.
둔황에 도착했다는 감동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우리 일행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사산(鳴砂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명사산은 모래를 밟을 때 나는 소리가 울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얼마나 보고 싶은 산이었던가. 멀리서 본 실물은 너무 아름다웠다. 바람이 날라다 준 모래가 기묘한 형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 폭의 예술이었다. 신의 선물이었다. 사막도 아름다운 자원이었다. 둔황산장에 여장을 풀자마자 명사산을 찾았다. 산밑까지는 낙타를 타야한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사막의 리무진 낙타 위에 올라 명사산을 향하는 모습이 마치 대상인들의 행렬 같았다. 모래는 너무도 곱고 예뻤다. 산의 꼭대기까지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자 해가 졌다. 명사산 위에서 바라 본 일몰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누렇던 모래 빛이 금빛을 띄며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 명사산의 아름다움이여. 눈앞에 천년동안 마르지 않는 신비의 오아시스 월하천(月河泉)은 마침 하늘에 뜬 초승들과 기묘한 조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벌써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두칠성, 북극성, 아니 초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은하수도 보였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보기는 생전 처음인 것 같다. 명사산을 내려올 때는 썰매를 타야한다. 모래 썰매였다. 단 몇 초만에 내려왔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월하천을 어둠 속에서 둘러 본 후 올 때 탔던 낙타를 다시 탔다. 초승달과 많은 별, 낙타와 나는 하나가 되어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밤을 걷고있었다. 둔황산장에 돌아 온 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옥상에서 우리 일행은 다시 한번 아름다움에 취하고 있었다. 우리 그 날 신선주를 마시고 있었던 셈이다.
그 날 저녁 난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막에 사는 사람은 행복할까? 오아시스를 찾아 양떼를 몰고 가는 사막인은 행복할까? 사막에 드러누워 하늘의 총총한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 사막인은 행복할까? 아마 행복했을 것이다. 사막이 세계의 전부인줄 알았던, 그리고 세상의 어디도 사막이며, 세상의 어디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던 그 사막인은 오아시를 발견하고는 몇 곱절의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들이 사막의 다른 세계는 비옥한 옥토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되고, 사막의 바깥 세상은 오아시스가 필요 없는 모두가 물이 넘쳐나는 오아시스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그 순간부터 그들 사막인은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사막안의 그 세계를 고수해야 할지, 새로운 사막 밖의 새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지. 사막인이여. 그 자리를 고수하시라. 사막은, 적어도 아름다운 명사산과 같은 사막은 당신들이 승리자다. 이젠 사막 밖의 사람들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훔치기 위해 몰려들고 있질 않는가?
6. 혜초와의 슬픈 만남(8월 2일)
다음날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 다시 옥상에 모였다. 6시에 떠오른다던 해는 30분이 지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금단 가이드가 말해 준 일출 시간이 틀렸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1시간 동안 버스에 올라 양관(陽關)을 찾았다. 양관은 옥문관(玉門關)과 함께 서역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서역 세계를 경계했을 군사기지 양관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물어져 가는 봉화대만이 홀로 남아 양관의 역사를 말해줄 뿐이었다.
둔황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우린 신기루를 보았다. 대기 내에서 일어나는 빛의 이상굴절(異常屈折)현상인 그 신기루 말이다. 멀리 아스라이 거대한 바다가 있었다. 목마른 상인은 그 신기루를 쫓아 달려갔지만, 신기루는 여전히 저만큼 떨어진 곳에 또 있었다. 차를 타고 달리는 나에겐 아름다움이었지만 당시 사막을 걸었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은 아니었을까? 차가 또 다른 목적지 둔황고성에 다다랐다. 1987년 중일합작 사극 영화인 '둔황'의 실제 세트를 유적지화 한 것이다. 우리가 도착했던 그 시간에도 '실크로드의 영웅'이란 영화가 촬영되고 있었다.
오전 일정은 이것으로 끝이다. 점심 식사 후 우린 명사산 기슭의 둔황 막고굴을 보러간다. 둔황 막고굴, 앞에서도 밝혔지만 내가 실크로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둔황 막고굴 때문이었다. 묘한 흥분이 일었다. 막고굴에 도착했다. 와! 온통 벽은 여기 저기 뚤린 굴 뿐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굴만도 1.6킬로의 길이에 600여 개가 넘는단다. 그 중 469개소에 부처와 벽화가 있었다. 엄청난 규모였다. 그 엄청난 규모보다도 난 1,000년이나 걸린 인고의 시간이 더 위대해 보였다. 4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어 13세기에 이르기까지 1,000년 간의 긴 세월 속에 만들어진 둔황석굴은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에 의해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문화 속에서 서로의 행복한 교감을 하지 않았을까?.
둔황 석굴은 대동의 운강 석굴, 낙양의 용문 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불린다. 그러나 둔황 석굴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가장 유명한 것은 17번 굴에 5만여 점이 넘는 경전이나 회화 등의 유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유물의 대부분은 1907년 영국의 A.스타인과, 1908년 프랑스의 P.펠리오에 의해 약탈당하면서 유럽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둔황 17번 굴에 남겨졌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에 지금 있게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에 둔황 석굴이 알려지자 독일, 미국, 일본 등의 약탈이 추가로 행해지면서 둔황 석굴의 유물 대부분은 현 위치를 상실하게되었다. 그것은 중국의 불행이었다. 아니 약소 민족의 불행인지도 모른다. 다음날 들렀던 투르판의 베제크릭 천불동에서의 약탈은 그 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처, 보살상마저 모두 이들이 뜯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동서 문물의 교역로 실크로드, 그러나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는 문명약탈의 지름길일 뿐이었다.
한족(漢族) 둔황 석굴 연구자 중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다섯 분 가운데 한 분이 오늘 우리들의 가이드였던 이신 선생이었다. 이신 선생의 손에 열쇠 키가 쥐어져 있었다.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석굴은 8개의 석굴로 한정되어 있었다. 16, 17, 328, 428, 427, 259, 78, 130, 148, 332굴, 그러나 우린 2개의 석굴을 더 볼 수 있었다. 너무나 열심히 수강하고 질문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이신 선생이 감동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 왕자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332호 석굴도 열어주었다. 석굴 속에서 우리들의 눈은 이신 선생이 쏘아대는 플래시의 불빛을 열심히 쫓고있었다. 거대한 불상, 너무도 아름다운 보살, 천년 이후에도 변색하지 않고 역사의 무게를 지탱해 온 벽화들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작년 여름 고구려 수도 집안에서 난 오회묘 5호분 무덤에서 색동저고리 색깔의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다. 그 감동을 난 또 하고 있었다. 행복한 감동이었다.
왕오천축국전이 남아 있었던 17석굴에서 난 혜초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불행이었다. 우리마음을 알았는지 이신 선생은 우릴 박물관으로 안내해 주었다. 거기에 프랑스에 있는 왕오천축국전의 한 페이지가 사진으로 찍혀 걸려 있었다. 드디어 혜초를 만난 것이다. 슬픈 만남이었다. 슬픈 만남이었지만 혜초의 훈김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 난 둔황을 찾은 내 목표가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의외의 소득도 있었다. 둔황 석굴에는 한국과 관련된 흔적이 더 있었다. 우리에게 문을 열어준 332굴에는 고깔 쓴 두 명의 신라 왕자가 있었고, 172굴에는 장구치는 벽화가, 61굴에는 신라 승려의 이름이 새겨진 사리탑이 남아 있다고 했다. 우리를 안내한 이신 선생이 한국 관련 유물들을 연구하고 싶단다. 그럴 기회가 그분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1,000여 개의 굴을 어떻게 팠을까? 한국에 있었을 때 내가 품은 의구심이었다. 내가 본 유일한 석굴이 석굴암 하나 뿐이었던 나에게 그것은 당연한 의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둔황 석굴의 지질은 모래와 자갈이 섞인 사력층(沙礫層)이었다. 아하 그렇구나. 둔황 석굴은 우리처럼 결코 쉽게 뚫을 수 없는 화강암이 아니었다. 문화란 자연환경 위에 행해진 인간 삶의 총체적 활동일 수 있다. 인간 삶의 총체적 활동이란 그 인간이 살아온, 살아 갈 그 자연 환경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문화란 같은 유형이라 할지라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자신이 살아가는 자연 환경에 따라 늘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세계 어떤 문화도 세계 최고는 아닐지라도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자기 나름대로의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늘 깨달음은 즐겁다. 현장 체험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의 확인 작업. 내가 답사를 멈추지 못한다면 아마 이러한 지적 희열 때문일 것이다.
이신 선생과, 둔황 석굴과 작별해야 한다. 투르판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투르판까지는 기차를 타야 한다. 투르판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유원으로 가야한다. 유원까지 버스로 2시간 동안 창 밖은 온통 자갈과 모래로 뒤덮인 사막이었다. 가끔 초원 지대가 나타나곤 했다. 그럴 때쯤이면 양떼나 낙타 떼들이 방목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난 사막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사막은 모래로만 이루어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장에 와서 본 사막은 대부분 자갈 사막이었다. 모래 사막은 전체 사막의 13%밖에 되질 않았다. 그 자갈 사막을 중국 사람들은 고비라고 불렀다. 몽골 고원 밑에 전개되는 거대한 사막 이름이 고비사막이다. 모르긴 해도 고비 사막은 모래 사막이 아닌 자갈 사막일 것이다.
4인 1실의 침대간 기차다. 비교적 깨끗했다. 오후 6시 5분에 유원을 출발한 기차는 10시간을 달려야 투르판에 도착한다고 했다. 사막에 지는 석양을 또 한번 바라볼 수 있었다. 명사산 꼭대기에서 본 석양의 황홀한 모습이었다. 10시간을 달려도 기차는 사막을 벗어나질 못하였다. 아! 사막. 이번 탐방기간 내내 난 사막에 갇힌 포로였다. 지도에서 보면 투르판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변방부에 있었다. 아! 내가 보고 있는 사막은 지금껏 10시간 이상 달려온 사막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바닷가에 살았던 탈레스는 '우주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외쳤단다. 지금 이 순간 난 '우주의 중심은 사막이다' 라고 외쳐되고 싶다.
7. 최열의 도시, 투르판(8월 3일)
투르판은 15, 16세기, 이 분지에서 세력을 떨쳤던 투르판국과 그 도성(都城)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북서쪽은 우루무치, 남서쪽은 카슈가르, 남동쪽은 감숙성(甘肅省)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르판의 가장 큰 특징은 해수면보다 낮은 위치에 형성된 도시라는 점이다. 현재 인구 24만의 투르판은 위구르어로 '낮은 땅, 파인 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지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낮은 곳이며, 이스라엘 사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다. 실제 바다의 수면보다 낮은 해저 154미터가 되는 지역도 있었다. 위구루인들은 이런 투루판을 최열(最熱), 최저(最低), 최조(最早), 최감(最甘)의 도시라고 설명했다. 최대 온도가 50도에 이르니 최열이고, 해저보다 낮은 곳이 있으니 최저고, 습도가 낮아 매우 건조한 지역이니 최조며, 햇볕을 잘 받는 포도의 단맛이 뛰어난 곳이니 최감이란다. 적절한 표현인 듯 싶다. 실제 우리는 교하고성에서 47도의 최열을 경험했고, 최감이라는 포도를 원도 없이 먹어 보았다.
투루판에 도착한 것은 아침이었다. 10여 시간을 기차로 달린 셈이다. 오아시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의 종업원들의 생김새가 달라 보인다. 위구르인이었다. 지금 우린 신강위구르족 자치구에 와 있었던 것이다. 신강위구르족 자치구는 전 중국의 1/6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사막 지대였지만. 그러나 신강위구르족 자치구는 티벳이나 몽고와 같이 늘 중국 당국의 경계대상이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위구르족의 정신적 수도인 카슈가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아시스 호텔 로비에서 광주에서 온 학생들을 만났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동향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즐겁다 따뜻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초등학생들을 포함한 학생들이 아닌가. 그들은 오늘 저녁 사막에 텐트를 치고 사막 체험을 한다고 했다. 그들의 용감한 도전 정신이 부럽다. 그들은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사막을 누볐던 대상인들처럼 그 어려움을 해결해 낼 것이다.
아침 식사 후 투루판에서의 첫 방문지는 화염산(火焰山)이었다. 우리에겐 손오공 때문에 잘 알려진 화염산, 그 산을 위구르인들은 '키질라타크' 즉 '붉은 산'이라고 불렀다. 황량한 사막에 불길이 솟는 산이란 있을 수 없다. 산의 구릉 습곡이 부챗살처럼 퍼져 있어 산세 모습이 마치 불을 뿜는 형상이었다. 그러나 화염산 앞에 선 우린 그 느낌만으로도 무더웠다. 아니 실제 화염산의 온도는 40도를 넘고 있었다. '화염산'이라 쓰여진 팻말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위구르 처녀들이 춤을 추며 공예품을 팔고 있었다. 불타는 화염산 앞에서 난 위구르인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위구르 처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긴 추억을 남겼다.
백라극리 천불동으로 가는 도중에 이스타나 고분을 들러보았다. 이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니 공동 묘지로는 적격인 셈이다. 벽화와 미이라가 있는 두 곳의 무덤을 들어가 보았다. 벽화 수준은 떨어졌지만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담긴 연작 벽화였다. 땅이 건조하고 메말라 미이라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백라극리 천불동에 도착했다. 천불동, 1,000개의 부처가 그려진 부처님을 모시는 동굴이라는 뜻일 게다. 백라극리 천불동은 투루판 시 북동쪽 4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천불동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거대한 계곡과, 그 계곡을 흐르는 물, 그리고 그 물 주위의 푸른 나무들이었다. 그 계곡 곳곳에는 토굴의 흔적도 보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그 토굴에 살고 있었단다. 계곡 앞산이 화염산이었고 멀리 천산산맥의 설산이 보였다. 그 설산의 설수가 지금 천불동 앞 계곡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남북조 시대(6세기)부터 원나라(14세기) 때까지, 83개의 석굴이 축조되었다는데, 지금은 40여 개만이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40여 개 석굴의 불상과 보살은 다 떼어져 없어졌고, 벽화 대부분도 훼손되어 있었다. 벽화의 훼손은 15세기 이스람 민족의 침입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천불동은 둔황석굴의 유물이 약탈당했던 그 무렵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인들에 의해 완전히 약탈당하고 말았다. 이스람인의 침략과 파손은 문명의 충돌일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 제국주의자들의 약탈은 우릴 분노케 했다. 싹쓸이 약탈, 유물·유적도, 문화도 힘이 있을 때에야 만 그 자리에 보존될 수 있다는 힘의 논리의 확인은 우릴 슬프게 한다. 일제 치하 얼마나 많은 문화 유산이 약탈되어 한반도를 떠나 일본에 건너갔던가? 순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정문부 장군의 '북관대첩비'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내동댕이 처져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씁쓸한 기억이었다.
투루판 교외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포로 건조장이다. 중국 돈 1원, 우리 돈 1500원어치면 씨 없는 푸른 포도를 혼자 먹기에 버겁다. 달고 맛있었던 투루판의 포도 맛, 오래 기억될 것이다. 최열의 도시 투루판, 점심 식사 후 2시간을 자고서야 오후 탐방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오후 4시, 그러나 투루판은 47도였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온도다. 두 개의 물통을 지닌 채 교하고성(交河古城)에 올랐다. 교하고성, 이번 실크로드 탐방 중 가장 인상깊은 유적지 중의 하나였다. 기원전 1세기경, 한나라 무제에 의해 세워져 고창고성과 함께 13세기 몽고에 점령당할 때까지 투루판의 중심지였다. 교하고성은 말 그대로 두 개의 작은 강 사이의 벼랑 위에 서 있었다. 마치 거대한 군함 같았다. 길이 1,760미터, 너비 300미터, 높이 30미터. 전망대에서 본 옛 성(城)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천혜의 요새지였다. 2,000년 전, 중국은 이곳에 성을 쌓고 오랑캐라 불렀던 서역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내고 있었다. 당나라 때에는 고구려의 후손이었던 고선지 장군이 총 사령관이 되어 호령하던 곳이기도 했다. 성내에는 진지, 관아, 민가, 우물, 절터, 주방, 식량 창고, 우물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교하고성은 하나의 왕국이었다. 교하고성 최대의 볼거리는 대불사의 흔적이었다. 남북 80미터, 동서 40미터가 넘는 대불사 대전에는 불상이 각각 4개씩 안치된 흔적도 보였다. 아! 교하고성. 47도의 땡볕을 무릅쓰고 고선지 장군의 흔적이 묻어있는 그곳 교하고성을 난 1시간동안 서성대고 있었다. 두 병의 생수는 이미 바닥나 있었고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교하고성에서의 감동은 칸얼정 박물관에서 보다 진한 감동으로 이어졌다. 만리장성, 경항대운하와 함께 중국 3대 고건축물로 불리는 칸얼정이란 천산산맥에서 끌고 온 지하수로를 말한다. 투루판이 실크로드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닌 칸얼정 때문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신강위구르 자치구에는 1,600여 갈래의 칸얼정 중 1,000여 갈래가 투루판에 흐르고, 그 총 길이도 5,000킬로를 넘었다. 한나라 때부터 청나라까지 아버지의 아들, 아들들은 계속해서 칸얼정을 파왔던 셈이다. 아! 칸얼정. 그것은 그들에겐 생명선이었다. 1층으로 된 박물관 내부는 칸얼정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관련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150미터 정도의 칸얼정을 따라 가 볼 수 있었다. 거대한 굴이었다. 그 굴속에 천산산맥의 설수(雪水)를 끌어오는 수로가 나 있었다. 생명수인 물길 말이다. 사막에서 사람이 살 수 있었다면 그건 칸언정을 만들어 낸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녁 식사 후 위구르족의 민속 공연을 보았다. 척박한 사막에서의 고된 삶을 그들은 노래와 춤으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위구르족의 빠른 춤과 율동이 매우 인상 깊었다. 공연 후 양고기 파티를 열었다. 내일의 멋진 탐방을 기약하면서 우리 팀원들은 모두 원샷을 외쳐댔다.
8. 서역 개발의 신도시, 우루무치(8월 4일)
아침 일찍(7시10분)버스를 타고 우루무치를 향했다. 우루무치란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이었다.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는 180킬로, 고속도로는 잘 닦여 있었다. 천산북로였다. 옛 상인들이 걸었던 그 길을 우린 100킬로의 속도로 걷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따라 천산산맥의 설수가 조그만 강을 이루며 고속도로와 함께 가고 있었다. '백색수로'라 불리는 강이었다. 그때도 '백색수로'는 지금처럼 흘렀을 것이다. 얼마쯤 달렸을까? 천산산맥의 설산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 천산. 아니 설산이여! 그 천산의 설산 있어 투루판도, 둔황도, 우루무치도, 모든 오아시스 도시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천산의 설산은 오아시스 도시의 생명이고 신앙이었다. 갑자기 펼쳐지는 거대한 초원. 그 초원 위에서 소, 양, 말떼들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출발 전 한겨레투어 담당자가 '투르판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길에 절대 졸아서는 안됩니다.'라고 왜 말했는지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대상인들의 무거운 발걸음은 이쯤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말에게 풀을 뜯기고, 낙타에게 물일 먹이고. 그리고 그들은 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달리는 고속도로의 왼쪽은 황량한 검은색의 사막산, 멀리는 천산의 설산, 그리고 오른쪽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지대. 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보면서 '아름다운 목장' 우루무치를 향해가고 있었다.
우루무치가 가까워지면서 더 이상 사막은 보이질 않았다. 푸른 초원 위의 목 짧은 해바라기 밭은 장관이었다. 프랑스의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이 생각나기도 했다. 옛 우루무치의 출발지였던 적화(迪化)라는 곳은 지금 그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우루무치는 말하자면 새로 건설된 신도시였다. 인구 200만,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 서역 개발의 중심지, 신강위구르족 자치구의 수도, 그러나 신강위구르족 자치구의 수도에는 위구르인이 아닌 한족이 대부분 살고 있었다. 우루무치는 한족의 서역개발을 위한 신도시였기 때문이다.
먼저 들른 곳은 카자흐족이 빠오를 짓고 살아가는 남산목장이었다. 목장까지 가는 길도 아름다웠다. 카자흐족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에 살며, 아시아 몽골인종에 속하는 민족으로 천산산맥(天山山脈)의 키르기스인과 매우 흡사하다. 터키인과 몽골인과의 혼혈 때문인지 우리와도 닮아 보였다. 양과, 소, 말을 기르는 유목민으로, 겨울에는 각 부족이 한 곳에 모여 살지만 여름에는 소집단으로 분산해서 완전한 유목생활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착하는 사람이 늘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남산목장이나 천산천지의 계곡에서 여행객을 상대로 영업하면서 살기도 했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그들의 삶에도 그런 변화가 찾아왔던 것이다. 남산목장은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세였다. 30여분 동안의 승마 체험은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점심 식사 후 천산천지를 찾았다. 천산천지는 우루무치에서 동북쪽으로 115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해발 1980미터, 길이 3400미터, 최고 깊이 105미터. 우루무치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이곳 천지는 산 위의 눈이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고여 이루어진 하늘의 연못이었다. 하늘의 연못 천지를 찾아가는 길도 매우 아름다웠다. 천지의 설수가 힘차게 차고 내려오면서 시원한 계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서객은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아직 중국은 피서의 개념이 없었다. 곳곳에 카자흐족의 빠오가 있어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또 무개차를 타고야 도착한 천지, 멀리 천산의 설산과 어울려 하나의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 천지. 나는 장엄한 천지 앞에서 대 자연의 조화로움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감동은 적었다. 백두산 천지 때문이었다. 2,700미터에 위치한 백두산 천지를 난 두 번이나 보았다. 그것은 경이었고, 감동이었고, 신비로움이었다. 백두산 천지의 주위에는 잔설이 남아있었고 휘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용이 춤추는 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거기에 비해 천산천지는 장엄함, 편안함, 푸르름 뿐이었다. 처음 천지를 본 팀원들은 연신 감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두산 천지를 보는 순간 다시 감동할 것이다. 그러나 백두산 천지를 먼저 보아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감동하질 못했다. 한번 높아져버린 눈 높이는 다시 낮춰지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유럽에 여행하는 자는 먼저 영국, 프랑스, 독일을 가고 이탈리아를 간단다. 이탈리아의 유적·유물을 보면 눈 높이가 너무 높아져 프랑스나 영국, 독일의 어지간한 유적지에는 감동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눈 높이란 조금씩 높여가야지 한번에 높여놓으면 인생의 삶이 고달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다. 천지의 물을 만들었던 천산의 설산은 구름에 가려 볼 수 없었다. 아쉬움이었다.
아름다운 천지를 내려오는 길이다. 계곡은 천지의 물소리로 시원스러웠다. 그 계곡 곳곳에 카자흐족의 빠오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빠오에서 뜻밖에 사범대학을 갓 졸업한 카자흐족 처녀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카자흐족 전통 빵과 우유를 내 놓았던 러스구메이라는 23세의 처녀였다. 그녀는 수십 킬로 떨어진 창길 사범대학을 올해 2월에 졸업했단다. 그러나 카하즈족들은 대학을 나와도 한족들의 차별 때문에 취직이 쉽지 않았다. 카자흐족 남자들이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 이유는 차별로 인한 취직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1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통해 카자흐족의 삶의 모습을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법적인 제한은 없었지만 그들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어하고 있었다. 절망감이 그들에겐 깊게 베에 있었다. 유일한 희망은 카자흐스탄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선족 동포가 대한민국에 그냥 들어올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매우 총명하고 똑똑했던 그리고 예뻤던 러스구메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길 바래본다. 떠나오는 우리 일행을 위해 그녀는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예정에 없던 카자흐족과의 만남 때문에 우린 카슈가르로 가는 시간에 쫓기게되었다. 다시 우루무치로 되돌아가 저녁을 해결하고 비행장으로 가야했다. 고려촌(高麗村), 대구가 고향이라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한국에서 한창 유행하는 노래가 우루무치 시내에 울러 퍼지고 있었다. 정겨운 한국말. 할머니는 조선족 2세였다. 반가웠다. 오랜만에 우리 입에 맞는 식사도 할 수 있었다. 우리보다도 그 할머니가 더 반가운 모양이다. 더 많이 먹으라고 이것 저것 같다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시간은 10분, 그 10분간의 만남이 그 할머니에겐 내내 서운한 모양이었다. 버스가 출발하고서도 한참동안이나 우릴 향해 손을 흔들고 계셨다. 저녁 11시 20분, 카슈가르로 가는 비행기가 우루무치를 이륙했다. '신강에 가 보아야 중국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고 카슈가르에 가 보아야 신강에 왔다는 말을 할 수 있단다'. 그 카슈가르에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9. 위구르인의 정신적 고향, 카슈가르(8월 5일)
공항에 도착한 순간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세찬 바람에 일행 모두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우리 팀 만이었다. 주위의 중국인들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들에겐 일상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카슈가르(喀什)는 중국식 발음으로 카스라고도 부른다. 카슈가르는 천산산맥을 남북으로 가르는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중 천산남로의 최서단에 위치한 실크로드의 심장부였다. 그러한 흔적은 오후에 갔던 그랜드바자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카슈가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다른 실크로드와는 전혀 달랐다. 위구르족이 92%. 그렇지. 이곳은 위구르족의 상징적인 도시였다. 대부분 이슬람교도들이 쓴 모자를 쓰고 있었고 얼굴을 가린 여자들도 많이 눈에 뜨였다. 늘 한족(漢族)을 증오하면서 독립을 꿈꾸는 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인의 눈에는 평화스런 모습일 뿐이었다. 먼저 수공업 시장을 찾았다. 모든 것을 직접 손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의 60년대 시장을 연상시켜 주었다. 변변한 공장을 가지지 못한 위구르족은 모든 제품을 손으로 만들어 쓰고 있었다. 10살 전후의 아이들의 손놀림이 대단했다. 학교에 있어야 할 그 나이에 그들은 생활의 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카슈가르는 지금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변화의 모습은 교육의 현장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카슈가르시 민족유치원. 카슈가르시에 있는 유일한 유치원으로 교사 84명, 원생 400여 명의 규모였다. 어린 유치원생들이 춤과 노래 공연으로 우릴 맞아주었다. 위구르족들의 노래와 춤 솜씨는 이미 투루판 민속 공연에서 확인 해 본바 있다. 어린아이들의 춤 또한 대단했다. 위구르족들은 태어나서 걸어다닐 무렵이면 춤을 추고, 말을 하게 되면 노래를 부른단다. 그 날 저녁 야외 저녁 식당에서도 춤추는 보통 위구르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리 민족도 춤과 노래를 매우 좋아하는 민족인데. 그런 점에서 그들과 우린 닮은꼴이었다. 아이들의 공연 이후 부원장과 1시간이 넘게 위구르족의 교육제도에 대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지금 위구르족의 부모들은 교육에 눈을 떠가고 있었다. 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컴퓨터 교육도 시키고 있었다. 대학 진학률도 생각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 교육의 결과는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위구르족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그것이다. 아직 다수는 위구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교육받은 일부는 이슬람교를 버리는 젊은이도 생겨나고 있었고, 타민족과 결혼하는 젊은이도 생겨나고 있었다. 위구르족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부류와 새로운 문명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부류 사이의 갈등은 상당기간 지속되지 않을까 싶었다. 세계 어느 곳도 이젠 문명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만이 갖는 고유한 정체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몸 속에 남아있는 우리만의 유전인자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만이 갖는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카슈가르는 지금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래본다.
우리의 인터뷰는 진지했다. 중국말을 못했던 원장 수리아는 우리의 모습에 감동한 모양이다. 자신의 집에 우릴 모두 초대하겠단다. 카슈가르에서 중상 정도의 생활을 한다는 원장집, 겉은 허술했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그 비싼 양탄으로 바닥과 벽이 온통 장식되어 있었다. 과일과 전통 빵을 차려 놓았다. 예정에도 없는 초대를 받고 우린 잠시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한참을 잔 후 오후 일정에 나섰다.
청진사(淸眞寺)를 찾아가는 길이다. 인민광장을 지나면서 모택동의 거대한 동상을 보았다. 위구르족의 정신적 수도인 카슈가르에도 어김없이 모택동 동상은 서 있었다. 언밸런스였다. 종교도, 언어도, 얼굴도 다른 이 지역도 중국 공산당이 다스리는 지역이니 위구르족 너희들, 다른 생각 갖는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위협처럼 보였다. 카슈가르가 위구르족의 정신적 수도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신강위구르족 자치구 최대의 이슬람 사원인 청진사 때문일 것이다. 1442년에 세워졌던 청진사는 위구르족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다. 그들이 몇 번이고 모택동의 동상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청진사를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종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청진사가 문화혁명을 지나면서 예전의 장대한 모습은 많이 사라져 버렸다. 12미터 높이의 정문과 18미터 높이의 첨탑과 내부 사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푸른색의 이슬람사원과는 달리 노란색 타일로 사원 전체가 뒤덮여 있었다. 우리가 찾았던 오후 4시 경, 청진사에는 몇 명만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2-3년 전일 것이다. 중국 건륭제를 주인공으로 한 '황제의 딸' 이라는 중국 사극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때 서역에서 시집 온 향기 나는 여인이 바로 향비였다. 건륭제는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향비는 죽을 때 자신의 고향에 묻히기를 바랬던 모양이다. 3년 넘게 운반되어 그녀는 그녀의 고향에 묻힐 수 있었다. 그 무덤이 향비묘였다. 무덤의 왼쪽 구석에는 그녀를 운반했다는 수레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당당함으로 향비와 함께 남아 있었다. 향비묘는 원래 1640년 이 지역 권력자였던 아바호자의 묘였다. 그리고 그 아바호자의 가족 5대 72인의 묘가 함께 묻혀 있다. 향비는 중앙의 아바호자 묘 오른 쪽 구석에 있었다. 아바호자의 묘가 향비묘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아바호자보다 향비가 더 유명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후 7시가 지났지만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다. 해가 질려면 아직도 3-4시간은 더 지나야 한다. 실크로드 탐방의 마지막 코스는 그랜드바자르였다. 매주 일요일 중국 최대의 바자르가 이곳 카슈가르에서 열린다고 했다. 과거 실크로드 요충지였던 이곳에는 5만이 넘는 상인들과 사람들로 북적거렸단다. 하지만 최근 크고 작은 상점들이 생겨나면서 과거의 소란스러움과 북적거림은 다소 줄어들었다. 우리가 찾아간 날짜는 일요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되고 있었다. 과거 이 시장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이 간다. 양탄자, 담요, 전통의상, 신발, 모자 등 다양한 이슬람 특유의 전통 수공예품 등이 여전히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한편에 한국산 스카프나 러시아 산 목도리, 파기스탄 산 양탄자도 눈에 뜨였다. 아직도 이곳 그랜드바자르는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 2,000년 전부터 실크로드의 심장부였던 카슈가르의 그랜드바자르는 지금도 명맥이 유지된 채 지속되고 있었다.
낙타와 각 나라에서 온 대상인들이 북적되던 모습은 이젠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그 대상인들이 남겼던 과거의 북적거림은 카슈가르인들의 가슴속에 전설이 되어 영원히 남아 있지 않을까? 카슈가르의 그랜드바자르가 옛 영화를 되찾아 다시 부활하기를 바라면서 시장 문을 나섰다. 10시(한국시간 11시)가 되어서야 포도밭에서 저녁을 먹었다. 카슈가르는 그만큼 서역으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흥겨운 춤판이 식사시간인데도 벌어지고 있었다. 위구르족의 정신적 수도, 동서 교역 실크로드의 심장부였던 카슈가르를 떠난 것은 다음날 새벽 1시 40분이었다.
10. 사막에서 비를 만나다(8월 6일)
중국의 민항은 국제선일 경우 시간이 정확하다. 그러나 항공편수가 적기 때문에 큰 도시부터 점점 시간이 밀려지기 시작하여 변방 도시에 오면 원래 시간보다도 몇 시간 늦어진다. 어제 우루무치에서 카슈가르에 올 때도 비행기는 원래 시간표와는 달리 자정이 다 되어서야 이륙했었다. 그리고는 오늘 다시 우루무치로 되돌아오는 비행기는 새벽 1시 40분발이었다. 원래 시간표상에는 오후 비행기였다. 중국 사람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새벽 1시 40분에 비행기 타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새벽 3시20분에 우루무치 공항에 내렸다.
우루무치 공항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막에서 비를 만난 것이다. 연 강수량 200밀리인 우루무치에서 생명의 비, 축복의 비를 만난 것이다. 내가 다녔던 둔황, 투르판, 우루무치, 카슈가르에는 우산이 없었다. 우산이 없는 도시, 그 우루무치에서 난 비를 맞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사막 사람들은 모두 집 밖으로 나와 비를 맞는다. 축복의 비, 생명의 비였기 때문이다. 우루무치에서의 일정은 이제 없다. 아쉬움이 남았던 고려촌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북경발 비행기에 올랐다. 카슈가르, 우루무치와 영원히 이별하고 있었다.
오후 4시 무렵, 다시 북경에 도착했다. 다시 찾은 북경. 저녁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왕부정 거리에서 '한국'이라는 중국어로 쓰여진 책 한 권을 샀다. 먹자 거리에서 참새꼬치를 먹었다. 그러나 그건 참새가 아니라 병아리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난 중국 상인에게 속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실크로드 탐방에 대한 모든 팀원들의 소감이 있었다. 힘들었지만 모두 보람된 탐방이었단다. 지난 10일간 잊지 못할 10대 사건도 뽑아 보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번 탐방 중 최대의 사건은 팀원간의 팀웍과 우정과 사랑이었다.
11. 실크로드의 미래는 있는가?(8월7일)
아침 9시 북경을 출발했다. 한국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한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포근했다. 너무도 행복한 열흘이었지만 조금은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한국 행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실 자체가 포근했다면 '한국'이라는 그 말은 지쳐있는 우리에게 하나의 오아시스였던 셈이다.
지난 열흘 나는 많은 사막 도시를 보았다. 둔황-투르판-우루무치-카슈가르. 그 사막 도시를 잇는 선이 실크로드였다. 지난 열흘 나는 인간들이 남긴 많은 흔적들을 보았다. 천단, 자금성, 이화원, 진시황병마용 갱, 진시황릉, 화청지, 명사산, 월하천, 둔황석굴, 화염산, 천불동, 칸얼징, 향비묘, 청진사. 그랜드바자르 등. 지난 열흘 나는 너무도 많은 인간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부의, 서태후, 진시황, 양귀비 당 현종, 삼장법사, 장건, 구마라습, 마르코폴로, 혜초, 고선지, 의자왕, 최치원, 이신 선생, 광주의 아이들 등등.
사막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막에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막에서 비를 만나기도 했다. 천산의 설수는 그들의 생명수였고 신앙이었다. 설수가 흐르지 않는 곳에 그들은 거대한 지하수로를 만들고 있었다. 그 척박한 사막에 그들은 석굴을 파고, 성을 쌓고, 포도를 심고, 사원을 짓고, 시장을 열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문화를 실크와 함께 낙타에 싣고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서안에서 로마까지. 로마에서 서안까지. 그 길은 힘들었지만 행복한 길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었다. 이민족의 침략으로 문명은 파괴되고, 제국주의 침략으로 문명은 약탈당하기도 했다.
카슈가르의 대바자르에서 한국산 스카프, 러시아산 목도리, 파기스탄산 양탄자를 발견했다. 실크로드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거기에는 낙타도, 북적거리던 각 국의 대상인도 없었다. 지금 실크로드는 아마 전설이 되어 세계인들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왜 실크로드는 사라졌을까? 중국의 신제품 개발의 소홀, 새로운 운송 수단의 미개발, 유럽에서의 실크 기술 발명 등도 한 요인일 수 있다. 그러나 14-5세기 오스만투르크족의 등장으로 비단길이 막히고 바닷길이 개척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류 비용이 더 싸지고, 더 안전한 바닷길의 개척은 낙타로 대변되는 고 물류비용과 위험성 높은 비단길을 외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실크로드를 달렸던 대상인들은 낙타길 만이 아닌 물류비용이 보다 적게 들고 보다 안전한 새로운 길을 만들었어야 했다. 500여 년 간 잠자고 있는 실크로드에 미래가 있다면 그런 길이 아닐까? 고속도로 길, 철도 길, 비행기 길, 가스관 길, 송수관 길......시베리아 가스관이 한국까지 이어진다면, 시베리아 철도가 한국까지 연결된다면, 실크로드는 이젠 중국과 유럽의 길이 아닌 한국과 유럽의 새로운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크로드의 미래는 이젠 한국에서 개척해야 한다.
비행기는 어느덧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었다. 실크로드 탐방도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끝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것, 그것은 사막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의 확인이었다. 그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문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역사는 인간들의 역사였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둔황산장의 벽에 부조된 삼장법사, 법현, 구마라습, 장건, 마르코폴로, 고선지 등 실크로드의 영웅들이었다. 이들이 마지막 순간 생각났던 것은 새로운 실크로드의 영웅을 이 땅에서 기대하는 나의 바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003년 8월 17일 장서실에서
◆ 열 흘간 일어났던 10대 사건을 추억으로 남긴다.(무순)
1. 심야 5인방 행불 사건(처녀도 끼어 있었다)
2. 위평량 남산목장에서 사라지다.
3. 팀원간 놀라운 팀웍과 우정과 사랑
4. 김보미 카자흐즉 총각과의 애마 행각
5. 왜 태어났니, 사막에 울러퍼진 탄생가
6. 카슈가르 유치원 원장집에 초대받다
7. 단체 족 마사지 사건
8. 김보미, 김연주 허풍과의 삼각관계
9. 인천공항 3인은 어디에 있었나
10.심금단 가이드와의 만남과 일출불발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