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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문학과 삶에 이르는 하이퍼링크
(김탁환, 『진해 벚꽃』, 민음in, 2006.)
박 현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린 시절 오빠의 서랍 안에 숨겨둔 일기장이나 꼬깃한 연애편지를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에서 『부여 현감 귀신체포기』에 이르는 열 편의 장편소설을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끊임없이 풀어놓은 소설가의 늦깎이 첫 단편집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의 호기심과 기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역사’소설이라는 익숙한 라벨을 과감하게 떼어버린 그의 소설은 과연 어떤 디자인과 색상, 또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을까? 기대 반, 궁금 반으로 펴들었던 책을 읽은 소감은 솔직히 실망이 컸다. 소설 속에서 마주한 그의 얼굴은 한 마디로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였기 때문이다. 그는 「감동의 도가니」에 등장하는 지금 막 “이야기꽃” 출판사를 차린 허술한 새내기 출판업자 ‘독고영’ 내지는 첫 소설집을 낸 소설가지망생 ‘최사무엘’의 어리숙한 얼굴과 닮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른 하늘에 점점이 흩어지는 고운 표지 속 풍경처럼 “진해 벚꽃” 그늘에 다시금 들어가 소설을 완상하게 만드는 여운은 소설가의 ‘기억’과 ‘고백’에 실려 있다. 기존의 장편에서 늘 건재했던 환상과 실재 사이에 놓인 팽팽한 다리를 과감하게 거둔 그의 이야기는 밋밋했지만, 그 안에는 수줍은 고백이 스며들어 있었다. 다리의 공백을 메워가기 위해 그의 손에 새롭게 들린 것은 역사와 시대를 가로지르는 원시안적 망원경이 아니라, 일상과 동시대를 관찰하는 근시안적 현미경이다. 그가 어정쩡하게 내민 현미경을 통해 마주하는 세계는 다소 어색하다. 그러나 작가와 독자라는 구도를 벗어나 일상인으로서 그가 내미는 렌즈와 기억의 회로를 좇아 링크하는 순간, 우리는 모세혈관처럼 미세하게 퍼져나가는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에 묻히게 된다. 소소한 기억의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세계 속에는 ‘그’의 기억만이 아닌, ‘나’의,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사가 넘실거렸다.
# link 1 : 아버지
「진해로부터 29년」은 자전소설에 가깝다. 독자 입장에선 일기장을 훔쳐보는 묘미가 쏠쏠하지만, ‘도대체 갑자기 왜?’라는 물음표가 피어오른다. 역사적 ‘서사’ 대신, 왜 이런 일상적 ‘서술’이 궁금해진 걸까? 아마도 그는 지나간 역사 속에 존재했던 시공간과 인물들을 새롭게 창조하고 재현해내면서 문득 자신의 역사와 현재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작중인물이자 서술자인 ‘나’의 고향인 진해와 그가 살아온 29년이란 시공간은 허구 속에 존재하는 한 개인의 역사를 구성해내는 동시에 현실에 실재하는 김탁환 개인의 역사를 구성해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아버지의 모습은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영웅’도 신기한 도술을 부려 귀신을 체포하는 재기 넘치는 ‘전우치’도 아닌,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평범한 남자다. 아버지는 어린 날의 우상도, 증오의 대상도 아니었기에 그의 삶에 있어 중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껴선 듯 보인다. 큰 키에 영화감상과 바둑이 취미인 남자, 지독한 음치에 군것질과 담배는 싫어하지만 술을 매우 좋아하는 남자, 공과대학을 나와 상업에 종사하는 가장, 헛웃음과 모로 낮잠 자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이 남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인물이다. 반면, 그의 어머니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둘이 자주 가던 “흑백 다방, 탁구장, 탑산, 도서관, 우체국”이라는 추억의 시공간을 중심으로 “언제나 영화처럼” 멋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신호위반을 한 뒤 경찰에게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만 원을 건넬 수 있는 영화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현실 속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의 의미, 나아가 가족의 의미는 “그러나 어머니는 엄앵란이 아니고 아버지도 신성일이 아니”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물로 그들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데 있다. 그래서 오히려 고등학교 시절, 갑작스레 들이닥친 아버지의 죽음과 이후의 부재는 그에게 외상이기보다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생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다. 더불어 ‘진해’라는 공간은 늘 따뜻하고 편안한 곳으로 기억되는 삶의 근원지이자 행복한 만큼 늘 부재를 환기하는 ‘따뜻한’ 상처가 되고 있다. 모로 누워 잠든 아버지의 모습이 수천 장의 사진 속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내 머릿속에서만 인화되었을 뿐”이라고 그가 강조하는 것처럼 기억되는 아버지는 평범하지만, 수천 편의 소설 속에 존재했던 아버지들과 견주었을 때, 독자들의 머릿속에 인화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평범하기에 특별하다.
“아버지는 간첩도 아니고 삶의 패배자도 아니”고,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일 뿐이”지만, 그에게 삶이 묻어나는 도시, 추억이 분분한 공간인 진해를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아이에게 ‘도시’ 대신 ‘글’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하는 동인이 된다. 작가에게 아이가 유전자를 나눈 자식뿐일까. 독자는 그가 ‘글’을 보여주고 싶은 또 하나의 소중한 불멸하는 아이일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상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여전히 기원이기도 하다.
# link 2 : 아내
「아내와 나」에서의 ‘나’, 그리고 그와 100% 가깝게 겹쳐지는 김탁환은 아내와 연결된 분분한 기억의 꽃잎들을 자신과 독자들에게 열심히 흩뿌리고 있다. 그의 아내는 그와 닮아있는 듯하면서도 너무 다르다. 그에게 있어 고향 진해는 “내가 아무리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나타나도 편안히 나를 감싸주는 도시”이지만, 아내에게는 “따분하고 심심”한 곳이다. 또한, 그에게 서울과 신림동은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만감이 교차하는 곳”인 반면, 아내에게 그곳은 “오아시스 같이” “편안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야구 프로를 즐겨보는 그와 달리 동물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는 아내는 분명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여성이지만 동시에 가족이다. 하지만 아내는 밥 짓고 빨래하고 식사하고 함께 아이 낳아 기르는 부부의 테두리 안에서 읽히기보다는 소설과 삶에 관련한 보다 근원적인 문답과 토론을 나눌 수 파트너 내지는 벗, 그리고 나아가 독자의 분신에 가깝게 읽힌다.
그러면 이들을 가족 테두리 내에서의 ‘우리’이기보다 일상 안에서의 ‘우리’로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백일사진 속에 함께 나누어 신은 듯한 하얀 털양말”처럼 공유했던 과거의 기억에서나 혹은 일상에서 나누는 문답 퀴즈, 주고받은 편지 안의 대화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들 부부의 대화는 먹고사는 이야기만이 아닌, 보다 본질적인 질문과 닿아 있기에 벗과 같은 아내의 역할은 더욱 주목해볼 만하다. 예컨대 80년대를 소설화하고 싶어 하는 그에게 “객관적으로 대상화하기에 너무 가까이 있다”는 조언과 “제대로 그릴 수 없다면 솔직히 말리고 싶다”는 견해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아내는 그의 소설에 대한 독자이자 삶에 대한 독자이기에 그 역시 아내를 “속일 수 없음”을 절감하는 것이다. 때로 “당신이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 곳이라면 독도도 괜찮아요.”라고 그의 소설과 삶에 “담담하고 단단하게” 응수할 수 있는 아내의 모습은 신랄함과 칭찬을 겸비한 영원한 독자의 모습을 투영한다. 이러한 독자가 있기에 그는 다시금 소설쓰기를 다짐하는 것이다. 그가 “절망이나 죽음이 아닌 희망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욕망 역시 아내라는 일상의 중심에서 그 원동력을 얻고 있다. 그가 “끌어안음을 배운 곳”이 ‘진해’이듯 소설 속 아내와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은 ‘진해’와 닮아있다.
극단적인 삶은 이제 꿈이 되었다. 남은 거라곤 극단적인 사유뿐인데, 삶은 중용을 거치면서 사유만 극단으로 갈 수 있을까? 또 이렇게 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활과 예술이라는 이중의 잣대는 나를 분열시킨다. 사는 나와 쓰는 나를 일치시키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이 둘을 철저하게 나누고 싶기도 하다. 드러내고 싶은 만큼 사라지려는 욕망. (「아내와 나」, 288면.)
분명 “어머니와 아내와 딸, 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어지러운 나”가 위치해 있는 곳은 현실이자 엄연한 일상이다. 하지만 이들이 방해물이 될 수 없는 까닭은 극단적 사유를 자꾸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서 “사는 나”와 “쓰는 나”는 끊임없이 분열되지만, 그것은 삶과 창작에의 이중의 욕망을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기능한다.
그가 까뮈를 추억하는 장 그르니에의 말을 빌어 ‘추억’은 “위대함에 대한 갈망. 고귀함에 대한 향수”라고 했듯이 아내와 연결된 “소중한 기억들”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의 욕망인 동시에 지나간 삶에 대한 향수다. 이처럼 아내와 나는 공유하는 추억과 시공간, 그리고 일상을 통해 서로 호흡한다. 작가와 독자도 그렇지 않을까? 공유하는 작품들, 공유하는 유행들, 공유하는 시공간을 통해 서로 호흡하는 관계.
# link 3 : 벗
「진눈깨비」에서 친구 ‘숙’에 대한 환의 기억은 몇 가지 삽화로 이야기되고 있다. 첫 번째 기억의 삽화는 초등학생인 환이 폐결핵으로 인해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방안에 갇혀 지내던 때로 숙은 어느 날 불쑥 찾아와 그를 운동장으로 이끈다. 늙은 의사의 ‘숭숭 이파리’ 선고 때문에 바깥출입도 삼가고 한없이 나약해져가던 환에게 숙의 등장은 가히 획기적이었다. 환은 금지된 달리기를 하면서 한없는 자유를 맛보았고, 그 후 그의 병은 말끔히 치유된다. 두 번째 삽화는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대면한 환 앞에 문상 온 숙의 모습으로 그녀는 그에게 시 Tm기를 멈추지 말라고 충고한다. 두 삽화 속에 등장하는 숙은 벗의 상처를 티 안 내고 어루만질 줄 아는 세련된 치유법을 지닌 타고난 의사 같다. 육체적 상처든 정신적 상처든 벗의 약손은 탁월하다.
마지막 삽화는 그로부터 10년을 훌쩍 넘긴 어느 날 논산으로 불쑥 찾아온 숙이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여 미국 솔트레이크시티로 떠났던 그녀는 그의 첫 소설집을 읽었다는 전화와 함께 난데없이 그를 방문한다. 오랜만에 재회한 숙은 과거 두 번의 만남과는 반대로 자신의 환부를 차례로 드러내 환에게 보여준다. 공주 정신병원에서 마주한 숙의 큰언니, 미국에 가자마자 남편 폴을 교통사고로 잃고 온갖 수난을 거쳐 아들 마이클을 키워온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분명 그녀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이지만, 환 앞에 선 숙은 십여 년 전 운동장을 달릴 때처럼 주저함 없이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이제 벗에게 그녀가 위로받을 차례이지만 대신 “정말 멋지게 쓸 수 있겠다 생각 들면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약속을 건다. 이처럼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훤히 내보일 줄 아는 숙의 모습은 작가가 원하는 독자의 모습에 닿아있는 듯하다. 환이 시를 쓰도록 북돋고, 그의 첫 소설집을 비롯한 모든 소설집을 통독하는 숙의 열정은 시인과 소설가에 못지않은 독자의 역할을 환기한다.
기억의 첫머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로에게 가장 감명 깊었던 순간들, 행복했던 장면들을 이야기했다. 아쉬움 없는 멋진 나날이었다. 특히 스무 살 이후는 그들 인생의 절정기였다. 몸 바칠 조국이 있었고 지켜야 할 신념이 있었으며 책임질 일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알아주는 벗이 있었다. 그 밤에 그들의 말과 웃음, 몸짓과 노래는 이런 시구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열정」, 70~71면.)
환에게 가볍게 상처를 뛰어넘는 법을 선사한 숙, 힘겨운 시대에 삶과 죽음을 함께 나눈 공승하와 강혁의 모습은 그가 글을 쓰게 만드는 또 하나의 ‘열정’을 생성해낸다. 지나간 시대든 동시대든 도래할 시대든, 아버지든 어머니든 아내든 친구든 그에게 미치는 벗의 힘은 그가 무엇보다 소설가임을 인식하고 읽어가는 독자의 힘에 다름 아니다.
# link 4 : 문학, 혹은 글쓰기 그리고 삶
「외계 소녀 혈루 회복기」,「스트레이트플러시면 죽는다」,「감동의 도가니」는 소설가로서 발 담그고 있는 문단 현실과 그의 작가관 및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소설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살아가는 동안 결코 체험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경험이라면 더욱 흥미진진하기 마련인데, 「외계 소녀 혈루 회복기」는 2105년이라는 미래의 시공간에 1906년 이인직의 작품 「혈의 누」 속 인물인 구완서와 김옥련을 끌어들이고 있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교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는 이 짤막한 단편에서 독자들이 기대해 볼만한 것은 SF적 상상력이 아니라, 역시 글쓰기와 소설가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특히 그가 사용하고 있는 매설가(賣說家)란 용어는 소설가의 위상을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와 미래로 접속하는데, 이는 20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독사(讀師)로서의 이야기꾼이란 의미와 근대 자본주의에 힘입은 출판업과 함께 등장한 소설가의 의미를 교묘하게 결합하고 있다. 종이가 없어 사람의 말로 풀어졌던 이야기들이 아이러니하게도 22세기에는 종이가 필요 없어 전자화면과 로봇의 음성으로 풀어진다. 20세기 초 매설가 이인직과 22세기 매설가 구완서와의 대화를 만들어낸 21세기 매설가 김탁환은 본인 스스로와 동시대의 소설가들에게 캐묻고 싶었을지 모른다. 도대체 소설과 글쓰기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그는 다음의 소설을 통해 해명하고 있다.
미스터리 형식을 띠고 있는 소설 「스트레이트플러시면 죽는다」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은 김선생(김탁환)이 마지막으로 본 박치국의 얼굴 위로 드러나는 조을광의 얼굴이 불러오는 결말의 반전은 사실 미스터리 영상물의 공식화된 각본처럼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아닌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본질적 물음으로 작가는 소설의 진정성, 혹은 환상과 실재의 경계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소설 곳곳에서 독자의 모습은 다양하게 현현한다. 김 선생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최은서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독자들 역시 집요한 시선과 관심을 아끼지 않지만, 때로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조을광과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처럼 냉정한 평가와 판단의 칼을 뒤에 숨기고 있음을 소설가는 늘 상기하고 있음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독자를 끊임없이 인식하는 그에게 소설 혹은 글쓰기란 독자 “개개인의 영혼에 씨를 뿌리고 물과 거름을 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쩌면 소설가 김탁환이 하고 싶었던 말은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감동의 도가니』를 영화화하려는 영화감독 제갈의 집요한 설득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최사무엘의 대답에 들어있는 지도 모른다.
“앵두 저거 돈 된다꼬 몽땅 따삐믄 내년 농사 망침니더. 남기 둬야지예. 소설 한 편 쓰고 말 거 아이믄 천천히 천천히 독자들을 만나믄 됨니더.”(151면.)
스스로 매설가이기를 자처하지만, 돈 된다고 무조건 풀어놓는 이야기꾼이 아닌, 글쓰기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시공간을 초월한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과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영원히 만나고 싶은 욕망을 꿈꾸고 있는. 그래서 그는 소설가로서 ‘역사’의 도가니와 ‘기억’의 도가니를 가로지른 ‘글쓰기’의 도가니를 통해 독자와 호흡할 수 있는 영원한 ‘감동의 도가니’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에서 아내와 벗을 거쳐 문학과 글쓰기로 이어지는 네 개의 링크는 그의 소설 속 주된 재료이자 여전히 삶 자체다. 네 개의 링크는 별개인 듯 보이지만, 사실 긴밀하게 결합되어 한 줄기 개인의 역사를 형성해 내고 있다. 굳이 분류한다면, 「열정」과 「대한민국 교사의 죽음」을 제외한『진해 벚꽃』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은 자전소설 내지는 메타픽션(meta-fiction) 경향을 띠고 있다. “자서전을 쓰기엔 우리가 너무 젊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해 벚꽃』을 통해 낯 화끈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은 이유는 “나는 초발심에 서 있고, 이런 도돌이표가 인생의 중요한 단면임을 예감하는 요즘이”(「작가의 말」, 『진해 벚꽃』)라고 절감했기 때문이다. 목에 생긴 폴립 때문에 얼마간 침묵하면서 일상을 돌아보던 소설 속 그처럼 소설 밖의 그도 『진해 벚꽃』을 통해 자신의 삶과 글을 돌아보며 객관화해 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소설과 삶 모두에 걸쳐 도돌이표 지점에 서 있는 매설가가 되새겨야 할 점은 단순한 매설가가 아니라, ‘독자를 의식하고’ ‘독자와 함께 호흡하는’ 이야기꾼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쉽게 거두지 않는 매설가여야 할 것이란 점이다. 턴 턴 턴.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새롭게 데뷔한 매설가의 이후 단편소설의 행보가 궁금하다.
* 대전 출생, 문학박사 과정 수료, 문학평론가, April-h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