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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배반의 서사
- 김주영 소설론
이대영
Ⅰ. 문학과 ‘가난’
우리의 근대사에 ‘가난’은 마치 민중의 의상과 같은 것이어서 주변을 둘러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슬픈 용어였다. ‘한(恨)’ 또는 ‘체념’ 그리고 ‘반항’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이 용어는 이 땅에서 살다 숨진 조상들의 헐벗은 모습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은 ‘표준’으로부터 추락했다는 상실감과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타자’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더 이상 비상의 의지를 꿈꿀 수 없는 자들의 무력감을 동반한다. ‘가난’은 문명의 진화단계에서 수반되는 삶의 보편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특수한 요인에 의한 병리적 현상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가난은 휴머니즘 문학으로의 태동 가능성이 열려 있다. 아비의 부재 모티프를 활용한 빈궁문학은 어머니의 소름끼칠 듯한 강한 생명력과 장자의식, 그리고 장자를 중심으로 한 형제들의 가족애가 탄탄한 휴머니즘의 작품들을 산출해 낸다. 후자의 경우는 리얼리즘 문학으로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 경우, 가난의 특수 요인은 정치 또는 계급적 상황이 지배하는데, 정치적 상황이란 식민지화를, 계급적 상황이란 상부와 하부구조라는 사회적 계층구조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종속성을 의미한다.
‘가난’이란 용어가 우리의 문학영역에 깊숙이 들어앉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가 될 것이다. 굶주림을 체험한 가난한 작가들이 ‘빈궁’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접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방법론은 식민지적 정치상황, 마르크스 이론에 토대를 둔 계급투쟁론, 가난을 삶의 보편적 유형으로 수용하는 등 작가의식에 따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가난’의 문제는 간도 이주민을 소재로 다룬 소설들로 극점을 이루다가 전후문학으로 이어져 아비의 부재에 따르는 사회적 궁핍현상을 다룬 가족사소설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70, 80년대의 산업화, 근대화에 따르는 도시민의 빈곤현상을 제도적 모순에 기인한 것으로 인식하고, 이에 강한 비판의식을 담은 리얼리즘 소설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의 소설사를 일별할 때, ‘빈곤’의 문제는 곧 존재가 직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으며, 문학이 고민해야 할 중심 내용이기도 했다. 그 과제를 실천해 나갔던 문학의 한 도정에 김주영의 소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에, 김주영의 소설에 나타난 ‘빈곤’의 문제를 ‘배반의 서사’라는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Ⅱ. 가난과 배반의 서사
김주영의 문학은 유 ․ 소년기의 체험이 서사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아울러 ‘어머니’ 또는 ‘가난’은 김주영 소설의 중심 소재라고 할 만큼 주요 인물이 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김주영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한국 근대사에 위치한 전형적인 서민 가정의 들마루에 앉아 근대사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나는 고향과 어머니를 하나의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다. 어머니가 없는 고향이나 고향 아닌 어머니를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당신께서 돌아가시는 날엔 고향에 대한 내 인상에 어떤 혼란이 올 지 아직 예상할 수 없다. 지지리도 못살던 고향, 지지리도 짓밟히고 괄시받으며 볕들 날이 없이 항상 저녁연기 처럼 회색 빛깔로 스산하기만 하던 고장, 질곡과 고통이 할퀴고 지나가지 않는 날이 없고, 궁핍과 괄시 또한 떠날 날이 없었지만 그러나 의연하고 진중하던 그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 또한 의연하게 살아왔었기에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고향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새를 찾아서』( 나남출판, 1994, p.13)
<의연하고 진중하던 고향사람들>과 또 그렇게 살아온 <어머니>는 그대로 김주영의 뇌리에 각인되어 소설 속의 인물로 다시 등장한다.
어머니를 중심인물로 서사를 전개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먼저 장편소설『홍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작품의 제목인 ‘홍어’는 3백 미터의 수압을 견디며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는 생명의 상징체이다.
<담도 낮고 대문조차 허술한 이 집을 지키며 어머니와 13년>을 살아 온 가정의 보전 수단은 어머니의 삯바느질이었다. 술집 ‘춘일옥’에 있는 여자와 동거하기 위해 가출한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견고한 인내심은 부엌의 문설주에 걸어 놓은 홍어에 의탁하고 있다. 아버지가 좋아했던 홍어는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는 옆집 남자와의 이성적 소통을 제어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옆집 남자에 대한 의타심과 홍어를 통한 자기제어, 외갓집 친척 누나로 명명되는 ‘삼례’와 나의 보이지 않는 이성적 교통과 이로 인해 형성되는 소설의 긴장감은 소설의 평면성을 극복하는 주 요인이기도 하다.
가출하여 6년 째 소식이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배신감은 30대 초반의 여자가 마을 앞을 지나는 막차를 놓쳐 집에 들면서 또 다른 사건을 전개시키는 모티프가 된다. 아이의 입에 물린 북어포에서 아버지의 배려를 읽은 어머니는 아기의 어머니가 떠난 빈 자리를 대신하여 모성애를 보여준다. 우는 아이에게 가슴을 열어 빈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생기는 나의 절망과 배반감은 가슴 속을 가득 메우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모성애적 결핍에 대한 아쉬움과 그에 대한 그리움이 혼재된 가슴 뻐근한 통증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아기에게 알을 제공해주는 닭을 죽인 장본인이 개가 아닌 옆집 남자라 이야기하고, 멀리 떠난 삼례의 주소를 담벼락 구멍에 숨겨 놓기까지 한다.
읍내에서 아버지가 긴 가출로부터 귀가하던 날, “세영이 사팔뜨기 눈은 아직 고치지 못했군”이라는 그의 말은 ‘나’가 ‘사팔뜨기’였음을 자각하게 하는, 그리고 나의 치부를 들어나게 하는 직언이다. 모든 사물과 사고를 사팔뜨기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허상에 의해 사고했던 지난날에 대한 자각과 반성은 바로 김주영 소설이 보여주는 의식성장 소설의 한 부분이다.
나의 의식의 깨임과 더불어 점점 작아지는 어머니의 위상은 바로 허상의 덧없음에 대한 인식의 공간 넓힘이기도 하다. 아울러 어머니가 그동안 차지하고 있던 책임감과 인내심으로 다져졌던 그 공간은 어머니의 자아 찾기를 위한 도약의 공간으로 환치 된다. 아버지를 기다리던 6년에 걸친 사랑, 또는 믿음에 대한 신념이 허상에 불과했음을 자각한 어머니의 떠남은 나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해를 가속화 시킨다. 즉 나의 행위를 어머니가 모두 알고 있었음을. 그리고 삼례를 멀리 떠나버린 것도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기 위함이었다는 것도.
어머니와 아버지, 삼례와 나, 아버지와 춘일옥의 여인 그리고 30대 초반의 여자, 어머니와 옆집 남자 사이의 이성적 소통과 긴장감은 이 소설을 엮어 나가는 서사적 힘이다. 아울러 홍어가 가지는 강한 생명력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상징체인 홍어를 문설주에 걸어 놓고 심리적 이탈의 방어기제로 사용했던 어머니의 강인함, 그리고 허상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반전과 그 반전을 보조하는 ‘사팔뜨기’의 신체 모티프는 이 소설이 나름대로의 문학성을 보여주는 요소라 할만하다. 또한 가난 속에서 절감하는 배반과 그 배반의 역전이 의식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소년의 모습에서 이 소설이 허상이 아닌 과거 우리들의 현실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기에 김주영 소설에서의 소년은 곧 ‘우리’로 환치될 수 있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역시『홍어』와 유사한 작품의 분위기를 보여 준다.
가난과 먼지는 하루 종일 숨을 죽이고 가라앉아 있다가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부터 발가벗은 몸뚱이로 우리들 앞에 다가왔다. 아우와 나는, 애옥살이에 지친 어머니의 행색에서 우리 식구가 가진 모진 가난을 확인하게 되었고, 어머니 또한 헐벗고 메마른 우리들의 모습에서 하루 종일 잊고 있었던 뼈저린 가난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어머니였지만 그때만은 잔소리가 많아지고 하찮은 일에도 금방 흥분하곤 하였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문이당, 2005, p.110)
‘헐벗고 메마른’이라는 단어로 집약되는 ‘굶주림’은 어머니와 나, 그리고 아우가 극복해 나가야 할 현실의 벽이다. 가난에 대처하는 방법은 각자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따라서 달리 반응한다. 방아품을 팔아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어머니의 의연함과 그 어머니를 따르는 장자로서의 나, 그리고 실익을 추구하는 아우의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은 지난했던 근대사 속에 자리한 우리 가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신비의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는 다락방의 비밀은 어머니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곳에는 하얀 멥쌀과 보리쌀로 채워진 지(紙)독 위에 어머니의 선명한 손자국이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차단하며 가족의 명줄을 보전해 주고 있다. 그 위엄에 가위 눌린 형제의 무모한 호기심은 가난을 잊게 하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그 내밀한 공간이 지니고 있는 내용을 형제가 알게 된 이후에, 어머니와 아이들은 다락방의 신비성과 위엄을 해체한다. 그러한 위엄의 해체는 가족 간에 지니고 있던 마음의 벽을 허물어 나가는 도정이기도 하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다소 시적인 제목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소설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김주영 식의 제목 붙이기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살아 갈 영역을 절대 해하지 않는 어부의 순박함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고기잡이는 술도가에서 모꾼으로 일하고 있는 장석도라는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장사 삼손을 연상하게 하는 우람한 그의 허우대와는 달리 그는 다소 지능이 모자라는 인물이기도 하다. 술 만드는 재료인 고두밥을 훔쳐가는 아이들을 쫓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그 행위의 성격상 아이들과 적대 관계이지만 그의 무던한 성격 탓에 오히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발소 주인의 간첩사건으로 경찰서에서 모진 수난을 당한 그가 자신을 업신여기던 주인을 수채에 처박고 이에 대한 책임을 새경과 맞바꾸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순박함과 용기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말없이 그 곳을 떠난 삼손의 빈 자리에서 소설 속의 인물들이나 독자인 우리들이 씁쓸함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의 순박한 인간애를 그리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장석도, 나와 순애 그리고 이발사와 여선생 사이의 이성적 교통 역시, 『홍어』에서 보여주었던 끈끈한 인간애를 그대로 재현해주는 듯 하다. 또한 『홍어』에서의 나가 경험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절망감과 배반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한 배반의 감정 저변에는 바로 어머니에 대한 강한 애정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애정은 가난으로 균열된 모성애의 결핍을 보상 받기 위한 애증 섞인 것이기도 하다. 나와 아우가 찾아간 어머니의 일터에서 월천댁 집 아이를 업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병약한 아우를 업어주기에 인색했던 어머니가 건강한 남의 집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은 형제에게 분노의 감정을 유발하게 한다. 그리하여 나와 아우가 유년시절에 경험한 피 끓는 감정들이 배반의 서사를 이어가게 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배반의 서사가 갈등으로 치닫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아우를 수 있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배반의 서사를 따뜻한 인간애로 감쌀 수 있는 큰 성곽이며 범접 못할 요새이기도 하다.
전 국토가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격전지였음을 상기하게 하는 이발소 간첩사건, 누구나가 한 번 이상 경험했을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도난사건, 미군을 따라 다니던 헐벗고 때 묻은 어린이의 형상은 모두가 지난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멸치』는 김주영의 초기 소설에서 보여준 원시성과 순수성이 어우러진 동화와 같은 소설이다. 작가는 「휴면기」에서 보여주었던 순박한 <뚝이>의 노루에 대한 사랑 같은 자연친화적인 분위기에서 다소 멀어지는 듯한 작품을 창작해왔다. 그러나『멸치』는 자연친화적인 김주영의 잠재의식이 그대로 서사전개의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물설정이나 사건의 주제화 방법은 역시 김주영 소설의 틀짜기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아버지와 삼촌, 어머니와 아버지의 새로운 여인, 나를 가운데에 둔 아버지와 외삼촌의 신경전 등과 같은 인물설정이 그것이다.
작가는 소설『멸치』의 서문에서 멸치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고래를 만난 멸치 떼는 질주를 멈추고 폭죽처럼 흩어졌다가 전열을 가다듬고 의연히 수중 발레를 벌인다. 그리고 물결을 이룬다. 목숨이 담보되고 말았는데도 비굴하거나 추악하지 않고 포식자를 향하여 매혹적인 군무를 보여 주는 어류는 멸치뿐이다. 물결을 이룬 아름다운 춤사위에 매료된 고래는 더욱 충동적으로 멸치를 사냥한다. 그러므로 멸치는 제일 작지만 고래보다 크고 의젓하며, 강직하고 담대한 어족이다. 그리고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채로 일생을 살면서도 알을 밴 흔적만은 감추는 은둔자의 삶을 산다.
-『멸치』(문이당, 2006) 서문에서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생태, 투명성을 생리로 하면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드러내지 않는 멸치의 본성에서 작가는 큰 감동을 받은 듯하다. 그렇다면 작가가 소설 『멸치』에서, 누구를 ‘멸치’의 생리와 유사하게 설정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인물은 작가가 파악하고 있는 멸치와 환치의 등가성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이 소설의 작품성의 성패 여부를 결정짓는 주요 내용이 될 수 있다.
소설『멸치』를 읽는 독자라면 독서과정에서 ‘멸치’로 상징되는 인물이 바로 ‘외삼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주영의 소설에서 외삼춘은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를 돕는 조력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소설『홍어』와 『멸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소설『멸치』에서 아버지는 동년배들로부터 <독수리로 태어나서 닭처럼 살고 있다는 빈축을 곧잘 듣는> 존재이다. 그 이유는 사냥꾼이면서도 사냥을 나가 내가 단 한 번도 포획한 짐승을 집으로 운반해 오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지고 돌아 온 것은 기나긴 수면으로 이어갈 온갖 피로뿐이었다. 반면 외삼촌은 사냥의 고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범접 못할 위엄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그가 작살을 곤두세우고 미동도 하지 않고 지키고 있는 유수지와 움막 근처에는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다. 그는 완고한 군주로서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외삼촌을 아버지는 경원하고 반목한다. 외삼촌은 할아버지가 재취로 삼았던 외할머니가 데려온 어머니와는 피 다른 형제이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아버지가 외갓집으로 들어가자 외삼촌이 인근에 있는 유수지 근방으로 거처를 옮겨 움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그 반목이 표면화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들 사이에 반목과 경원의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사냥으로 비워진 가장의 공간을 외삼촌이 들어와 가사를 돌본다. 아버지는 그의 행위가 나와 어머니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기에 이를 묵인한다. 반목과 행위의 묵인, 그리고 나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 간의 정은 이 소설 또는 김주영의 소설을 이끌어 가는 서사의 ‘힘’이다.
아버지가 외삼촌에 대한 경원의 감정이 극에 달한 것은 어머니가 가출한 시점이다. 사냥에서 피로와 허탈감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의 근처에 있는 여자의 존재를 감지한 어머니는 가출을 단행한다. 이에, 아버지의 외삼촌에 대한 의심과 분노가 가속화 된 것이다. 아버지와 외삼촌 간의 반목을 완화시키는 존재가 바로 ‘나’이다. 어머니의 공간을 차지한 낯선 여자가 떠나자 아버지는 그 공간에 다시 어머니를 불러들이려 한다. 그 방법으로 아버지는 멧돼지 사냥에 성공하여 어머니로부터 자기능력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외삼촌과 동행을 갈망했던 아버지의 속내를 외삼촌에게 전달하는 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가족과 그 소속감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왔던 나는 거짓으로, 그리고 아버지는 허풍으로 그 불안감을 감추어 왔다는 사실이 외삼촌에게 들통나 버린 셈이었다. 그것으로 아버지는 기품을 잃었고, 나는 거짓말쟁이로 추락하고 있다는 것조차 그에게 탐지되고 만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서로 시기하고 경원하면서도, 중력에 갇혀 있는 달처럼 외삼촌 주변을 맴돌고 있는 아버지의 쇠락한 모습이 내 모습과 겹쳐 처연하게 떠올랐다.
-『멸치』(pp.162~163)
나에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족이란 개념 속에 결속되어 있다. 작가는 무능한 사냥꾼이며 가장일망정 <허전한 잠자리 한쪽에 허우대가 걸출한 아버지가 가로누워 있다는 것이 그처럼 가슴 뿌듯할 수 없었다>고 실토한다. 또한, 낯선 여자를 경원하고 어머니를 그리며, 그 어머니를 제자리로 돌리려는 아버지의 멧돼지 사냥의 성공을 위해 외삼촌과의 동행을 간원하는 나의 행태는 모두 가족이란 인연의 끈으로 결속되어 있다. 아버지의 새로운 여자와의 부당한 교제, 어머니와 외삼촌이 은밀한 정분을 나누어왔다고 믿는 아버지의 오해, 허세에 탐닉하는 아버지의 생활 속에서 나는 인간적 배반과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의 결속을 유지하려는 거짓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멧돼지 포획의 성공은 아버지의 사냥술에 의한 것이 아닌 외삼촌의 작살솜씨에 의한 것이었다.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잠적했던 새로운 여인이 다시 나타나고, 아버지의 허세가 이어질 때 나는 외삼촌의 움막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미 외삼촌은 움막을 떠나갔고 그를 기다리던 사흘째 되던 날, 유수지로 잠수한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멸치 떼' 이다. 작가는 멸치의 군무와 그 생리를 묘사체로 극찬한다. 그러나 정직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서는 멸치 떼가 갈망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작가는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작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가 한 가족의 세대원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외삼촌의 순수한 마음을 멸치 떼의 아름다운 생리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김주영 소설에서 가족구성원 간에는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나 배반행위가 자리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외삼촌을 일부러 묵인하며, 나는 가족의 화합을 위해 아버지 또는 외삼촌을 속이기도 한다. 또한, 외삼촌은 어머니 또는 나를 속이기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김주영의 소설을 ‘배반의 서사’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배반이란 긍정을 지향하는 배반이다. 우리가 김주영의 문학을 부정적인 배반의 서사가 아니라 긍정을 지향하는 배반의 서사라 할 수 있는 것은 소설의 저변에 가슴 찡하게 다가오는 가족애가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애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배반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작가의 기본적 사고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배반은 때로 아이러니한 배반으로 서사화 되기도 한다. 즉, 「모범사육」과 같은 단편소설이 그러하다. 영세보육원생인 <나>가 부잣집에 계집애 같은 쌍둥이들을 남성답게 양육하기 위한 책략에 의해 입양되지만 결국 그들의 목표가 달성되자 보육원으로 돌아온다는 소설내용이다. 그들의 남성화가 오히려 나의 자족적인 현재의 위치를 위협하게 되고 역으로 그들을 여성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그를 더욱 여성화시키고 그들을 남성화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우직한 사고가 배반을 잉태하는 오류를 경험한다.
Ⅲ. 도정의 문학
탐색의 문학, 혹은 길의 문학이라 지칭될 수 있는 소설이 김주영의 문학에도 존재한다. 「달맞이꽃」,「새를 찾아서」,「쇠둘레를 찾아서」등의 소설이 이에 속한다.
「달맞이꽃」은 전술한 배반의 서사영역에 속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어머니가 품팔이를 하던 집의 외동딸이었던 선옥과 도부꾼을 찾아 나서는 범태와의 재회를 통해 인간이 지닌 순정과 배반감을 서사화 하고 있다. 즉 이 소설은 ‘배반’과 ‘해후’가 중심테마이다.
「달맞이꽃」은 <내 기대 앞에는 항상 철저한 배반이 두 손을 크게 벌리고 서 있었다>로 시작한다. 냉정한 배반과의 해후를 위해 범태는 도부꾼을 찾아 나선다. 그가 도부꾼을 찾아 나서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 이유를 밝혀 나가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명동에서 양장점을 차려 돈을 벌고 있는 경제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아내와는 다르게 무분별한 확신으로 도부꾼을 찾아 나서는 나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다. 김천의 한 여인숙에 숙박하게 된 나는 눈두덩에 상처가 있는 여인과 그의 이모와의 대화를 듣게 되고 심부름하는 여자로부터 그 내막을 듣는다.
“그 여자가 이 집 주인 조카인데 말이죠. 눈두덩 흉터 때문에 팔자가 드세게 된 여자에요. 시집을 두 번이나 갔으니까요. 60리 밖에 있는 옥산 쇠전바닥에서 대포장사 하고 있는데 사내자식이 삐끗하면 팬다지 뭐예요. 글쎄, 그게 전부 상판대기 험하게 타고난 탓이지 뭐예요.”
-「달맞이꽃」(『새를 찾아서』, 나남, 1987. p.269.)
<나>가 옥산장에 있는 쇠전에 들러 눈두덩에 흉터를 가진 여인을 만난 것은 서사의 우연이자 생의 필연이다. 그녀는 나의 어머님이 반빗아치 노릇을 하고 있는 부농의 외동딸이었다. 그녀와 소꿉놀이를 할 때 그와 나는 항상 한 쌍으로 존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아버지가 새우젓 파는 도부꾼이기에 시집을 안 온다는 말에 분개한 나는 이징가미로 그녀의 눈두덩을 그어 버린다. 그리고 보름 뒤에 나의 가족은 60리 길이 넘는 먼 읍내로 이주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잊었던 여인과의 해후는 그를 괴롭혀 왔던 막연한 확신과 해후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겹고 긴 여행을 이제 마무리 지을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논리적인 근거가 없는 것임을 화자는 스스로 고백한다. 이러한 화자의 고백에 독자들은 작가가 <나>라는 인물을 통해 도부꾼을 찾아 나섰던 이유가 무엇이었느냐에 혼돈을 가져온다. 서사의 전개 상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부꾼이었던 아버지의 생활을 알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선옥이라는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또는 그 배반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였는지.
작가는 <나는 그 이후 선옥이란 여자를 잊어 버렸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삼십 년 전에 그가 이야기했던 “범태아부지는 새우젓 파는 장수인데 뭘”이라는 그녀의 말소리를 연상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를 괴롭혀왔던 막연한 확신과의 해후란 바로 ‘상처 입은 과거의 시간’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제 아내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은 곧 나가 과거의 상처를 현실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끈으로 이어나가야 하는데서 오는 자조 섞인 고백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상처 입은 과거의 시간은 불행을 모르는 미래지향적인 아내와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삶의 벽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나는 아내가 아닌 여인숙에서 심부름 하는 여인의 품을 찾아드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이기보다는 과거로 퇴행하는 듯한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하는 그의 행태에 기인한다. 그러기에 「달맞이꽃」은 인간애 또는 가족애에 근원을 두고 과거 지향적인 작품을 쓰는 김주영 소설세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새를 찾아서」또한 ‘막연한 조우’를 찾아 나선다는 점에서 「달맞이꽃」과 유사한 서사맥락을 이룬다. 「새를 찾아서」는 양양에 있는 ‘선림원사지’에 답사여행을 기획했으나 출발시간에 늦은 <나>가 택시를 타고 일행을 찾아 나서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과거와 연계시키면서 서술하고 있다. 답사일행을 찾아 오색의 여관촌과 낙산, 설악산 입구, 그리고 다시 오색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은 과거 누나와 새를 잡으러 나갔다 허탕치고 돌아온 여정과 유사하다.
홀로 찾아 든 나는 세 시간 이상 좌선을 하고 난 후에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이제 정말 일행과 만나는 일에 대해선 생각하지 말자. 이곳까지 당도할 동안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모두 나와 동행해 주지 않았던가. 정작 아등바등 공력을 들여서 뒤따라 잡고자 했던 사람들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지만 예정에도 없이 만났던 사람들은 이곳까지 정확하게 나를 데려다 주지 않았던가
-「새를 찾아서」(나남, 1987. p.298.)
성장배경에서 생리적으로 움튼 신의를 바탕으로 현실에 충실하려는 나의 사고는 현실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사고로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생각은 과거지향적인 사고에 매어 있던 「달맞이꽃」과는 다른 작가의 새로운 성장이라 할 만하다. 그러한 성장으로부터 상징적으로 출현한 것이 바로 ‘새’이다. 이 소설에서 ‘새’는 갖고자 하는 혹은 이루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을 상징한다. 유년시절에 그토록 잡기를 원했던 새를 그는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욕망이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만남과 그 인연의 가능성에 의의를 부여했을 때 그 ‘새’는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김주영의 여러 소설이 있지만「새를 찾아서」는 나름대로의 주제의식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 평가 할만 하다.
「쇠둘레를 찾아서」는 철원의 고석정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를 찾아 나섰으나 민통선 안에 위치하여 답사하지 못하고 그 도정에서 누나와 있었던 애증담을 술회하고 있는 소설이다. 산골 채약군(採藥軍)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자 친정집에 오지 않는 누나를 찾아 나는 집을 나선다. 자형이 없는 집안의 온기 없는 분위기와 아버지의 허락 없이 삼십 리 산길을 몰래 달려 온 나에 대한 누님의 박대에 두려움을 참으며 밤길을 걸어온 곳이 바로 그가 찾고 있는 철원이다. 그러나 칠년 전에 누나를 찾아 걸어 간 구철원은 이미 민통선 안에 위치하여 출입할 수가 없다. 그가 찾은 곳은 신철원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자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과거의 존재에 매달려 사는 누나의 모습은 곧 신철원에서 민통선 안에 있는 구철원을 찾아 헤매는 나의 모습과 다를 리 없다. 자형을 찾던 누나의 집념이 곧 구철원을 찾는 나의 집념과 동일함을 인지했을 때, 나는 ‘정담(情談)’이라는 어휘의 매력에 이끌린다. 그러나 그 정담 또한 “야, 너부터 차례로 옷 벗어”라고 외치는 배사장의 일갈에서 한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작가가 찾는 ‘정담’은 어찌 보면 민통선 안에 깊이 잠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Ⅳ. 사람의 문학
김주영의 소설은 한 마디로 ‘사람의 문학’이다. 삶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인연의 끈을 강하게 부여잡으면서도 그 인연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긴장을 포착하여 서사화 한다. 작가는 인연이라는 단어의 저변에 자리하고 있는 가족구성원의 화합과 갈등과 시대상을 소설로 담아내는 역량을 보이기도 한다.
김주영 소설의 중심 소재는 ‘가족’이다. 그 가족은 ‘나’를 중심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그리고 외삼촌으로 구성된다. 또는 이러한 인물들을 이미지화 시킨 변형된 인물을 창조하기도 한다. 김주영의 소설에서 아버지는 늘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무능한 인물로 설정 된다. 「마군우화」의 병든 아버지, 포장마차에서 불량식품을 파는 「악령」의 황노인, 도둑인「도둑견습」의 의붓아버지, 채석장 절벽 위에 지은 12평짜리 집을 계약하는 「즐거운 우리 집」의 의붓아버지, 「외촌장기행」의 야바우꾼, 「달맞이꽃」에서의 도부꾼과 같은 단편소설의 인물들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멸치』에서 외도를 일삼는 무능한 사냥꾼인 아버지,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에서의 부재하는 아버지, 『홍어』에서 춘일옥의 여자와 동거하기 위해 가출한 아버지 등이 장편소설의 예이다.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닌 개인적 욕망에 의한 이탈이다. 그러기에 그의 욕망으로 비어진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가족의 희생이 요구된다. 그 희생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어머니’ 또는 ‘누나’로 대표되는 ‘여성’ 이며 그 곁에 나가 존재한다.
김주영의 소설 제목은 ‘멸치’, ‘홍어’, ‘새’, ‘고기’ 등과 같이 다분히 상징적이다. 그러나 「새를 찾아서」라는 제목을 제외하고는 그 상징성이 서사적 내용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마도 작품의 제목을 다소 시적으로 이끌어가려는 그의 감성적 기질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는 고장에는 늘 배반이 잉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족 간의 배반이란 크나 큰 상처를 불러온다. 그러나 현실의 배반과 과거의 배반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현실의 배반 속에는 존재 각자의 이익이 수반되는 것이지만 과거 가족공동체 속에서의 배반은 공동체를 결속시키기 위한 긍정의 배반이었으며 그 배반은 가족을 이끌어 가려는 존재 각자의 혼신의 힘이 어린 것이었다. 그러기에 작가 김주영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정담’과 ‘정분’이라는 용어를 소설의 말미에서 소중하게 꺼내놓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