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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실하고 불변하신 대제사장
히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이 편지를 받을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찰해야 하는 이유와 복음에서 절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중대한 이유들을 알려 줍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입니다. 인간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일개 철학이 아니며, 세상살이의 필요에 대해 사람들이 내놓은 사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친히 주신 말씀입니다. 선지자나 시편 기자가 아닌 아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주신 말씀. 기독교회 초기부터 기사와 표적과 다양한 이적과 성령의 은사로 내내 입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 메시지를 듣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며,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보응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2:3). 하나님의 최종 제안까시 거절하면 멸망과 상실과 영원히 비참해지는 일 외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우리가 복음 메시지를 고찰해야 하는 것은 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이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이같이 큰 구원"을 다소 객관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큰 계획과 목적 -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과 함께 영광 가운데 거하며 세상을 다스린 백성을 친히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죄로 가득한 자들을 붙들어 자녀로 삼으시며, 영원하고 최종적인 영광으로 이끌어 자신과 함께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들의 성육신과 고난, 특히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 계획을 이루신 이유. 육신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 영원하신 아들이 죄로 말미암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아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주로 히브리서 2장의 가르침에 한정하려 그 모든 이유를 살피보았습니다. 2장은 히브리서 전체의 훌륭한 요약이자 사실상 기독교 신학의 개요로서, 하나님의 장대한 계획과 목적 및 이 방법으로 구원 계획을 이루신 이유를 밝혀 줍니다 아니라 복음의 아주 놀라운 특징도 알려 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펴볼 때는 항상 객관적인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복음은 결국 하나님에 관한 진리로서 진리는 객관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관적인 체험이나 삶의 큰 변화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중요한 체험을 제공하는 단체들은 많습니다. 여러 요인들이 삶의 변화를 가벼올 수 있고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더욱 유념하라는 말로 2장을 시작합니다. 무엇에 유념하라고 합니까? “들은 것” 것 즉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 유념하라고
합니다 (히2:1)
이처럼 크고 영광스러운 객관적 진리에서 출발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에는 주관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단순히 구원의 계획과 개요만 살펴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복, 복음이 즉시 주는 복 또한 고찰해야 합니다. 장차 주실 미래가 있고 그 영광을 위해 지금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영원한 영광의 놀라운 전망만 보여주시고 그 전까지는 우리 혼자 어떻게든 세상에서 생존하도록 버려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깨달은 순간부터 최종적 영광에 이르는 그날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지금 이곳에서부터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측면들 세상의 부를 다 합친 것보다 비할 수 없이 큰 복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이같이 큰 구원의 필수요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강조하고자 애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편지를 쓴 이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고 문제에 둘러싸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들에게 지금 이곳에서 주어진 복이 무엇인지, 장차 얻을 뿐 아니라 지금이 순간 얻을 수 있는 복이 무엇인지 일깨우고자 애씁니다.
이 복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전부 동일한 구원의 요소이자 일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을 씁니다(롬 8:23). 구원의 본체는 장차 올 영광 가운데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지금부터 주시는 맛보기와 첫 열매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 그 무한한 은혜와 자비로 지금 이곳에서 즉시 주시는 복을 살펴보면 엄청난 찬양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먼저 간단한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언급한 복들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 복들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경험 가능한 것입니다. 객관적이고 이론적으로 아는 바가 아무리 많아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독 신앙의 영광이 여기 있습니다. 신앙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것으로서, 이 두 가지를 분리하면 안 됩니다. 이 복들을 다 믿고 경험해야 합니다. 이 복들은 생명을 주는 생명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고 즐기며 누리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들을 모르는 탓에 불행하고 괴롭고 비참하게 사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승리의 삶. 풍성한 삶을 그려 줍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두운 세상 앞에서도 사도 바울처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인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롬 8:38-39).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복된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롬 8:15).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는 이 복들을 알고 있습니까? 경험하고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즉시 찾아오는 복이 무엇입니까? 일종의 이론적인 순서에 따라 설명해 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는 복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주님이 맡으신 큰 과업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신 이유이자 목적이었습니다 죄인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 이 일을 하고자 대제사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 일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누
구를 위해 하셨습니까? 대제사장은 백성의 대표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서 백성을 위해 화목을 이루어 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을 위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형언할 수 없는 죄인이요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자임을 깨달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율법의 정죄 아래 있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 힘도 소망도 없는 자임을 참으로 깨달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알며, 그런 자격이 없음을 참으로 깨달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5:1).
과거의 삶이 걱정됩니까? 짐이 됩니까? 전에 지은 죄가 자꾸 떠오니까? 그 죄가 자꾸 생각나 괴롭고 비참합니까? 그 때문에 하나님을 대면하기가 두렵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이것은 신약성경이 던지는 간단하고 실제적이면서도 긴요한 질문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한 자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며, 본인도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합니다. 신약 서신서들은 이 확신을 주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의심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자신이 부름받고 택함받았음을 확실히 알게 하고자,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 우리가 아는 첫 축복이자 처음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사도들이 화목케 하는 일을 맡았다고 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라고 말합니다(고후 5:19-20). 이것이 복음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 사함 받은 것과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알고 누려야 합니다. 전처럼 비겁한 두려움이 아닌 경건한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0:19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여러분은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는 권면에 유념하며 따를 수 있습니까? (히 4:1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거록한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갈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그 앞에 나아가 필요한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전과 다른 기도생활이 시작됩니다.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하며 주저하던 마음이 사라집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화목을 누리며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고찰할 두 번째 단어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입니다 11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 - 주 예수 그리스도- 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입니다 저는 이것이 무엇보다 놀라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해졌다는 말이 항상 가리키는 첫 번째 의미는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거룩한산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위해 쓰도록 구별된 거룩한 기구와 그릇들도 나옵니다. 그것들은 절대로 다른 용도에 쓰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로 거룩해졌다는 성경말씀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보다 큰 위로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오직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님이 자기 것으로 구별하신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붙들어 구별하신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특별한 소유가 된 백성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뭐라고 기도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강성함이 무엇이며・・・・・・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하나님의 기업은 성도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일컫는데(벧전 2:9).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구별하셨고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특별한 대상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우주를 만들어 내신 하나님,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 특별히 아끼시는 대상입니다. 친히 안수하시며 특별한 관심을 쏟으시는 대상입니다. 자신이 이런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은 지금 다른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똑같이 여러분을 가혹하게 대하며 비웃을 수 있고 얼굴에 침 뱉을 수 있으며, 옥에 가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여러분을 구별하셨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이 이같이 여러분을 굽어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십니다. 그가 모르시거나 허락지 않으시는 일은 단 한 가지도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많이 겪으며, 때로 원망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 봅니다(롬8:28).
우리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신 자, 예비하신 영광을 위해 준비시키시고 정결케 하시며 완전케 하시는 자입니다. 10절은 하나님이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도록 준비시키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를 구별하고 우리는 그가 돌보시는 특별한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때로는 징계하시지만, 그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가고자 채찍질하시는 것입니다. 징계야말로 우리가 그의 자녀라는 증거이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고난당한수록 더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이 이끌어 가려는 영광을 위해 우리를 구별하시며, 그 영광에 합당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심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다른 표현들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ㄲ뜨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보다 앞서 나오는 말은 이것입니다.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히 2:10).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 2:14).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는 전부 그리스도인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들이 지닌 혈과 육을 자신도 지님으로써 그들을 동정하는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신처럼 만들기 위해 자신은 우리처럼 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해 육신이 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자신의 본성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지가 되었습니다(벧후 1:4). 우리는 그를 영접했고, 그는 우리 안에 찾아와 거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사실들을 침으로 안다면, 기독교회는 오늘날과 다른 모습이 될 것입니다. 사람도 미래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형제자매리 부르신다는 사실, 우리가 그의 본성을 가셨다는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지금 이곳에서 이미 그의 영광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늘 처소에 앉아 있다는 사실. 결국 그와 함께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는 사실을 붙잡는다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신앙을 비웃는 자들에게 우리가 한 말은 오직 한 가지. 그들은 무지하고 눈이 멀어 이런 사실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불과 몇 년만 지나도 무가치해질 세상 명예를 얻고자 서로 경쟁합니다. 가련하고 눈멀고 저주받은 영혼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될 수 있는데도 그 가능성을 외면하고 이런 것을 자랑하며 자부합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 회개하여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자신을 양도한 자는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형제라 불러 주십니다.
2장에 나오는 그다음 복은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하시며"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여러분은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은 엄청난 말로서, 신약성경은 이 말을 거듭 반복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사탄의 영토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참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더 이상 사탄의 종이나 노예나 포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탄의 영역에서 건져 내 영광스럽고 영원한 자신의 나라에 따로 옮기셨습니다 사탄의 권세를 무시하면 안 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계12:11)” 우리는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만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나온 확신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사탄을 정복하시며 패주시키신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공개적으로 사탄에게 치욕을 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자,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자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사탄의 속박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죄 없이 완전해진다는 말은 아니지 않느냐, 그리스도인도 분명히 죄에 빠지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이가 있는데, 그 지적이 맞습니다. 저는 지금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죄에 빠집니다. 그러나 아예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 탓에 죄에 빠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로 그 대책 또한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한 중대한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고,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사도 요한의 말 그대로입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큰 복을 누리면서도 때로 어리석게 사탄의 말을 듣고 넘어진 후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이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리해 주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십니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를 실망시켰다는 정죄감과 자괴감이 찾아올 때, 여러분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이 이것입니다. 여러분을 알고 이해해 주시는 대언자, 중보자가 계십니다. 여러분의 죄를 인정하고 문제를 맡길 때 풍성하고 온전하며 값없는 죄 사함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시험받을 때도 도와주십니다. 죄에 빠져 침체하고 낙심할 때도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언자가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죄 사함이 보장되었다고 해서 세상이나 마귀나 죄나 시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시 죄에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죄에 빠지지 않을 방법이 있습니까? 우리 구주는 시험받는 자를 능히 도우시는 분입니다. 혼자 버려두지 않고 늘 길을 지켜 주시는 분입니다. 그를 의지하면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를 능히 지켜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매순간 주가 필요하오니
가까이 계시옵소서.
주 가까이 계시면
시험도 힘을 잃사옵니다
.-애니 호크스 (Anne S. Hawks)-
그가 여러분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 능히 붙들어 주시며 힘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에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능히 우리 연약함을 굽어보시며 허약함을 동정해 주십니다. 그도 세상에서 살아 보셨습니다. 인간으로 세상에서 살아 보셨기에 모든 사정을 아십니다. 죄를 짓거나 한순간이라도 죄에 끌리신 작은 없지만 그 극악한 힘은 느껴 보셨기에 능히 우리를 동정하시고 잡아 주실 수 있으며, 따라서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항상 동일하시며 불변하십니다. 우리는 가변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기분이 바뀌는 가변적인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제사장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중대한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히13:8).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끝까지 구원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 말을 밑바닥 인생까지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설명하는데. 이 진리는 그보다 무한히 더 큰 것입니다. 영원토록 동일하시기에 구원의 과정을 시작하시고 그만두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마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홈 없이 온전해지고 영화로워지는 순간까지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를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영원한 안전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복이자 확신을 주는 복입니다.
그의 선함으로 시작하신 일
그의 능한 팔로 이루시리.
그의 약속은 예와 아멘이니
취소된 적 없도다.
장래 일이나 현재 일이나
땅의 것이나 위의 것이나
그의 약속 폐할 수 없으며
그의 사랑에서 내 영혼 끊어 낼 수 없도다.
-오시스터스 탑레이-
우리 대제사장은 항상 살아서 온전히 끝까지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는 전부 채워졌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충만히 주어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미처 필요를 깨닫기도 전에 미리 예견되고 채워졌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그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아는 지식,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된 자들이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지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마신과 죄와 어둠의 영역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아는 지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패할 때 받는 도움과 회복, 평강, 힘, 지원, 도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우리 구원을 시작하신 뿐 아니라 마치신다는 확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 죽음은 어찌 되느냐고, 우리는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 것이 분명한데 그 문제는 어찌 되느냐고 묻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복음이 죽음에 대해 해주는 말이 있느냐고 묻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2:14-15)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은 확실히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죽음을 생각하기만 해도 겁이 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음의 문을 지나 영원한 운명 - 하나님과 그리스도 모를 경우 괴로움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게 될 영원한 운명 - 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무서워하지 않을 자는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섬뜩한 것입니다. 물리적인 죽음만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지 않고 죽을 때 뒤따르는 결과가 무섭습니다. 죽으면 끝이고 그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환영하는 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죽음의 권능이요 "쏘는 것" 입니다(고전 15:56). 이 말은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지은 자가 죽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쏘는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권능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같이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그래서 사람들이 죽음을 겁내는 것입니다. 율법이 형벌을 선고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며 죽음을 생각하기만 해도 겁을 먹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처리하심으로 죽음에서도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 죄책을 처리하시고 율법을 처리하심으로 죽음의 "쏘는 것"을 제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가 우리 죄를 지고 죽으셨기에, 적극적인 순종으로 율법을 만족시키셨기에 죽음의 "쏘는 것은 힘을 잃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무서워한 필요가 없습니다. 사탄이 권력을 행사하는 대상은 율법의 정죄를 받는 자들과 사탄의 나라에 속한 자들뿐입니다. 사탄이 그 나라를 지배하기에 거기 속한 자들의 죽음도 지배하고 두려움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해 하신 일을 깨닫는 순간 죽음의 "쏘는 것"은 제거되며, 바울처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고전 15:55).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키심으로 죽음의 "쏘는 것"을 제거하시고 죽음과 무덤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귀의 주된 일을 멸하시고, 율법의 정죄가 몰고 온 죽음의 두려움과 속박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의 공포가 사라질 뿐 아니라 오히려 죽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더 좋은 일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복들을 알고 있습니까? 실제로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 무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대신 필요한 일을 해주신 분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껏 살펴본 복들은 전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이 복들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 빛 안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 빛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미래의 삶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장차 온전하고 충만하게 누릴 놀라운 영광의 맛보기이자 첫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