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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학』이 주목하는 이 계절의 시인/ 대담 임애월 편집주간
비(雨)의 시인, 宮南池 연꽃 사랑
정 진 석 시인
- 小雪도 지난 겨울입구 햇볕 따스한 날,
충남 부여에 사시는 정진석 시인님을 뵈러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겨울산은 이미 가벼울 대로 가벼워져 고요한 눈빛의 賢者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고속도로 나들목 근처까지 마중 나와 주신 선생님의 첫 모습도 겨울산과 많이 닮아 보였다 -
임애월 : 정진석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러 가지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진석 : 어서 오세요. 우리 한국문단의 전국구 마당발 임애월 시인님께서 그 먼 경상도 상주에서 충청도 이 외진 시골에 살고 있는 초라한 저를 찾아오셔서 반갑고 황송해요.
임애월 :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선생님의 근황 좀 들려주세요.
정진석 : 지난 2015년 8월 31일자로 40년 가까이 몸담았던 교단에서 정년퇴임하였어요. 몸과 맘의 건강유지 방안으로 낮에는 주로 울안에서 꽃밭과 금잔디를 돌보는 한편 읍내 변두리에서 밭작물을 가꾸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어요. 수확에 연연하지 않고 소일거리로 밭에서 노는 가짜 농사꾼이지요. 그리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서 수시로 문학적 모임을 비롯하여 각종 예술행사에 동참하고 또한 여기저기 문학축제 시낭송에 초대출연하고 있어요. 밤에는 재직 시절보다 한층 더 시와 평론 따위 글쓰기에 정진하고 있어요. 그래서 스스로 외로움을 극복하고 무료하게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우리 부여에 오셨으니, 우선 다양하고 다채로운 연꽃낙원으로 유명한 궁남지로 안내해 드리고 싶어요.
임애월 : 네, 선생님께서는 꽃과 나무를 좋아하신다는 건 이미 소문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웃음)
이렇게 멋진 곳으로 안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연꽃은 지금은 다 지고 없지만 궁남지는 참 아름답고 여유롭네요. 여기에 자주 오시나요?
정진석 : 운치뿐만 아니라 조경적으로 중요한 궁남지(宮南池)는 사적 제135호이예요.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왕 39년조에는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해요.
그러니까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소재 궁궐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궁남지(宮南池)’이라 불리는 이 연못은 신라 문무왕 14년(674년) 경주의 안압지(雁鴨池)보다 40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 내지는 인공정원이지요. 향가「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들인 백제 무왕이 신라 출신 왕비 선화공주를 위해 만들었다고 해요. 무왕은 이곳에서 왕비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하여 향연을 베풀고 왕비와 더불어 뱃놀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고지순한 아내사랑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어요. 이처럼 고운 이야기가 전해질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향기로운 연꽃이 있는 궁남지이기에 저는 여기를 자주 찾는 군민의 한 사람이지요. 2·3일이 멀다고 들리고 우리집에서 가까운 곳이기에 지나치는 길에 하나의 습관처럼 잠깐씩 들리곤 하지요. 그래서 살다가 잊혀져가는 사람, 멀어진 사람, 떠나간 사람, 만나고픈 사람, 보고픈 사람, 그리운 사람 등을 생각하기도 해요. 때로는 연지를 거닐거나 원두막에 앉아 윤연순 가수가 부른 가요「얼굴」을 혼자 낮은 소리로 부르기도 하지요. 지나가고 떠나간 것들이나 사람은 대부분 아쉽고 그립고 아름답고 향기롭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임애월 시인님, 제가 이 궁남지에 대해서 얼마나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착하느냐는 것은 향토신문 <부여뉴스> 논설위원으로서 궁남지 관련 집필한 칼럼을 비롯해서 여기저기 발표한 글만을 모아도 책 한 권 분량의 충분한 원고량이 될 뿐만 아니라 카페<扶餘宮南池 사랑인 모임(약칭 : 궁사모 /http://cafe.daum.net/buyeo-gungnamji)>를 운영할 정도라면 짐작되실 거예요.
임애월 : 네, 아주 오래된 인공호수네요. 이렇게 넓은 호수를 만들었으니 그 당시의 서민들에게는 고달픈 役事였겠어요.
그리고 『부여궁남지연꽃사화집』발간하신 것 등으로 미루어 궁남지에 대한 선생님의 뜨거운 애정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웃음)
이 연못에 대한 신비한 전설이 있다면서요? 살짝 들려주세요.
정진석 : 그래요. 이 연못은 전설에 의하면 무왕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못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요.
『삼국유사』 기이 제2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기술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연못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요. 비교적 긴 이야기를 아주 짧게 간추려 요지만 소개하면 이래요.
옛날 백제시대에 이곳 마래마을에 젊은 과부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고 해요. 젊은 과부는 얼굴이 아름답고 마음씨가 고와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사람이데요. 하루는 저녁에 이 연못가를 산책하고 있는데, 연못 안에 사는 어룡(魚龍) 혹은 교룡(蛟龍)이 나와 이 여인을 품었다고 해요. 그러던 어느 날 젊은 과부는 아들을 낳았데요.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면서 마(薯)를 캐어 팔았기 때문에 서동(薯童)이라고 불렀는데, 이 아이가 훗날 백제 30대왕인 무왕(武王)이 되었다고 해요.
시인님. 저기 연못 한가운데 정자가 하나 있지 않아요? 저 정자의 이름은 용(龍)이 여인을 품었다는 유래에서 ‘포룡정(抱龍亭)’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임애월 : 역시 신비롭고 전설 같은 이야기네요.(웃음)
저는 개인적으로 부여에 대해 묘한 향수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요...... 이곳에 사시는 선생님께서는 어떤 느낌이실까 궁금합니다.
정진석 : 약자나 망국(亡國)에 대한 동정과 연민, 아마 그것은 임애월 시인님의 마음이 워낙 선하시고 고우셔서 그럴 거예요. 흔히 사람들은 약자나 측은하고 불우한 처지에 놓인 대상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느끼는 성싶어요. 다 아시다시피, 백제는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나라이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왠지 이곳에는 망국(亡國)의 한(恨) 내지는 그림자가 깔려 있는 것도 같아요. 누가 굳이 말하진 않아도 군민들 사이에 은연중 돌고 있는 지역정서 및 분위기 속에는 왠지 애련의 우수 내지는 고즈넉한 음영이 느껴지기도 해요. 여기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퍽 점잖고 조용하며 삶의 의욕 및 패기, 곧 자발성과 적극성이 별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타율적이고 소극적인 경향이 감지되기도 해요. 어쩌면 백마강(금강의 줄기 일부분으로 부여지방에 한정해서 불리는 강)과 비닐하우스 여열(餘熱) 때문인지 툭하면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운전에 불편할 만큼 짙은 안개가 빈번하게 끼는 통에 역사적 비운의 잔영 내지는 그런 분위기를 한결 자아내곤 하는 것 같아요. 외지에서 이주해온 저로서는 종종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데, 젊은날에 살았던 대전집을 처분한 이후, 남의 서까래 밑을 독채로 떠돌다가 20년 만에 황혼기를 보낼 집을 이곳에 마련한 죄(?)로 현실적으로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냥 지그시 누르면서 지내고 있어요.
임애월 : 이곳에 터 잡고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정진석 : 공직수행차 대전, 논산, 청양, 태안, 공주, 대전, 논산, 예산 거쳐 2005년 3월 1일자로 부여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음으로써 굴러왔으니까, 금년에 만 12년째 되네요.
임애월 : 그러면 여기 부여로 오시게 된 특별한 사유가 있으셨나요? 이곳에 어떤 계기나 목적이 있으셨나요? 아니면 부여와 무슨 연고가 있다거나 혹시 선생님의 고향은 아니신가요?
정진석 : 부여는 저한테 어떤 연고가 있는 곳도 아니고 제 고향도 아니에요. 제가 태어난 곳은 전북 익산시인데, 6·25전쟁 시기라서 출생하자마자 거의 곧바로 전북 김제시 부량면 외갓집 동네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유년기를 보냈지요. 이후 6살 때부터 초·중·고와 대학 학창시절 및 신혼초까지 줄곧 38년간을 살았어요. 제 경우, 이처럼 고향이 세 군데나 있는 꼴이지요. 그래도 제일 오래 살았던 대전이 실질적인 고향인 셈이나 마찬가지예요.
제가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이곳 부여군을 찾아온 이유 및 목적은 몇 가지가 있었어요.
첫째 세속적 출세(교육계 승진)를 접어두고 글쓰기에 한층 정진해보자. 둘째 충청남도에서 지방문단의 발전적인 면에서 다른 지역과 견줄 때 비교적 낙후된 성싶은 부여문단을 중흥 내지는 활성화시켜보자. 셋째 부여는 다수의 형제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나 친지 및 대부분 많은 문우들이 주로 살고 있는 대전광역시와 문중 선영이 있는 익산시와도 비교적 가까운 지역인 편이기에 수시로 왕래하기에 양호한 곳이다. 넷째 덤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연꽃이 피는 궁남지가 있다.
크게 이 같은 네 가지 사유 때문에 부여를 찾아 정착하게 되었어요. 한 마디로 지난날 신분상승에 눈멀어 교육전문직 진출에 매달리고 애썼던 욕망을 비우고 새로운 기분전환을 꾀할 겸 새삶의 터전 속에서 그동안 다소 소홀했던 문학에의 정진을 도모하고자 부여로 생활근거지를 옮겼던 것이지요.
임애월 : 이곳 궁남지에서 시낭송이나 시화전 등 행사를 자주 개최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호수 가운데 정자가 있고, 원두막 주변에 연꽃이 있고 갈대가 있고, 청둥오리들과 온갖 꽃들이 피는 곳이니, 문학예술 관련 행사와 아주 잘 어울리는 곳이네요...
정진석 : 그래요. 이곳 궁남지에서도 포룡정, 원두막, 부여서동연꽃축제 때 수상특별무대 등에서 여러 차례나 시낭송회를 열었지요. 이곳으로 이주해온 이듬해 2006년 5월 15일 부여시낭송회를 주도적으로 창립했어요. 그리고 2006년 9월 23일 제1회 부여시낭송회를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개최한 이래, 현재(2016년 11월)까지 100여 차례 주로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박물관, 아빠학교엄마교실박물관, 궁남지 등을 주무대로 삼아 관내 여기저기를 순회하면서 매월 한 번씩 시낭송운동을 펼쳐 왔지요.
임애월 : 스스로를 ‘부여의 일꾼’이라고 자칭하시는데 참 감사한 일입니다.
부여를 홍보하는 사화집도 여러 권 발간하셨지요?
정진석 : 뭔 말씀을요? 그건 아니고요. 단순히 시낭송회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대표라는 뜻에서 ‘부여시낭송회의 으뜸머슴’이라고 자칭한 것을 시인님께서 확대해석하신 것 같아요.
우리 부여시낭송회에서는 기관지《부여시(扶餘詩)》를 매년 발간하고 있어요. 올해 곧 10호가 인쇄중이에요. 그리고 자매기관지《부여문단(扶餘文壇)》을 발간하고 있어요. 후자의 경우에 지금까지 『扶餘宮南池 연꽃 詞華集』(2012), 『아름다운 扶餘 鄕土 사랑 향기로운 百濟文化 사랑』(2013), 『忠淸南道의 國寶, 그리고 고을마다 자랑거리』(2014), 『忠淸南道의 장날·장터, 그리고 고을마다 特産物』(2015) 등 6권을 발간했지요.
임애월 :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그리고 ‘으뜸머슴’이나 ‘부여의 대표일꾼’이나 제게는 같은 말씀으로 들립니다.(웃음)
「宮南池 원두막」이라는 다음의 시를 읽어보면, 연꽃이 피고 지고 씨앗을 맺고 떨어지는 과정을 인생四季와 빗대어 ‘생성과 정화’의 알고리즘을 끌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궁남지 원두막에 앉아있으면 가라앉는다
연잎 솟아나
잊혔던 첫사랑 설렘 피어번지고
연 줄기 올라
꺾인 의욕과 용기 부스스 일어나고
연꽃 피어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火 가셔지고
연꽃 사그러들고
미운 사람 서운함 빗질되고
연씨 생겨나
사랑스럽고 삼삼한 사람들 궁금해지고
연씨 영글어가
그리운 사람 연밥에 알알이 새겨지고
연 줄기 주저앉아
산수유꽃 필 무렵 떠난 그리움 옅어지고
연잎 시들어가
온갖 기다림마저 덧없어지고
宮南池 원두막에 앉아있으면 가라앉는다
정진석 : 쑥스럽군요. 보잘것없이 풍신난 졸시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해요.
임애월 : 연꽃에 대한 선생님만의 특별한 서정이 있을 것도 같다는 느낌입니다.
정진석 : 불교 『대장경』의 <불설 제개장보살 소문경> 중 ‘십종선법(十種善法)’에 따르면, 연꽃은 다음과 같은 10가지 특성, 즉 10대 미덕을 갖추고 있다고 해요. 참고로 그 핵심요지만 귀띔해 드리겠어요. 이제염오(離諸染汚), 불여악구(不與惡俱), 계향충만(戒香充滿), 본체청정(本體淸淨), 면상희이(面相喜怡), 유연불삽(柔軟不澁), 견자개길(見者皆吉), 개부구족(開敷具足), 성숙청정(成熟淸淨), 생이유상(生已有想)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요.
그래요. 아마 예로부터 사람들이 연꽃을 무척 사랑하고 가까이 하려고 하는 것은 연꽃이 우리들로 하여금 위와 같은 10가지 아름다운 마음씨를 기르고 갖출 수 있도록 넌지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감히 10가지 특성을 품고 있는 연꽃을 닮을 순 없지만, 저는 궁남지에 가면 왠지 연꽃과 같은 미덕을 고루 지닌 군자(君子), 진정 인간답게 살고 인간다운 풍모를 겸비한 큰어른, 정말 사람 냄새가 나는 분을 만나 뵐 것만 같아 거의 날마다 저녁 무렵엔 어여쁜 꽃과 함께 그윽한 향기에 취할 겸 산책을 나오곤 해요.
임애월 :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으며, 시를 쓰게 된 계기 내지는 동기를 들려주셨으면 해요.
정진석 : 제가 문학과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예요. 제 어렸을 적 꿈은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먼 훗날 장군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나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다소 지적으로 부족한 작은아버지께서 6·25동란 중 어리숙한 처신 탓으로 연좌제 대상에 속해 저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대전중학교 2학년 때인 1968년 12월 22일 밤에 알게 되었어요. 이 무렵 우리나라 국시(國是)는 반공(反共)이었지요. 이날로 그토록 갈망했던 꿈과 희망도 상실되었는데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쓰나 하고 공부에 대한 의욕을 송두리째 잃은 채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가족들 몰래 혼자 많이 울었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당시 다른 직종에 비해 전폭적으로 보수가 좋았던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하고자 '충남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였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이것마저 친구한테 들었던 귀동냥과는 달리 실정은 여의치 않았으며 또한 애초 하고자 했던 꿈도 아니었기에 슬픔과 번뇌와 고독에 갇혀 눈물로 나날을 보냈어요. 그 괴로움을 종이에 쓰기 시작했어요. 매일 학교에서 매시간 수업시간에도 선생님들 몰래 노트정리도 하지 않고 책 밑에 종이를 놓고 글을 썼어요. 물론 간혹 들켜서 혼나기도 했지요. 거의 발각되지 않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매번 위기를 모면하게끔 팔꿈치로 살짝 건드려준 급우 ‘이종국’이라는 짝꿍을 잘 만난 덕분이었지요. 이처럼 사춘기 시절에 꿈을 상실하여 그 좌절감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현실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글을 썼던 것이지요. 고등학교 3년 동안 내내 주로 시(詩) 형식으로 글을 썼으며 해마다 개인문집을 낼 정도였지요. 한 마디로 청소년기에 일종의 앞날에 대한 좌절감과 현실적 아픔을 스스로 토로하고자 시작되었던 이 글쓰기가 몸에 배어 후에 시인이 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셈이지요.
임애월 : 청소년기의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부분 딴짓(?)도 많이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글을 쓰셨다니 시인으로 타고나신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봅니다.(웃음)
1979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셨으니 시업 40년이 다 되어가네요....
당시의 문학적 배경이나 등단 이야기 좀 들려주셔요.
정진석 : 제가 문단에 데뷔할 무렵에는 지금처럼 문예잡지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제 기억으로 종합문예월간지로는 《현대문학》, 《월간문학》, 《문학사상》, 《한국문학》 등이 있었고, 그리고 시전문 월간지로는 《시문학》, 《현대시학》, 《심상》, 이 밖에 《문학과지성》, 《세계의문학》을 비롯한 서너 개 정도의 계간지가 나오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해마다 전국 각 대학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문학청년들을 위시한 문인지망인들이 문단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라곤 신춘문예 당선 말고는 불과 소수의 문예잡지 추천코스였을 뿐이었지요.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등단의 관문이 오늘날에 비해서 퍽 좁았던 셈이지요. 저는 1974년 공주교육대학 2학년 재학중 교내 <석초문학동인회> 회장을 맡았을 때 문학초청강연 연사로 오신 한성기(韓性祺) 시인님을 만난 것이 크나큰 행운이었지요. 그 무렵 《현대문학》과 《현대시학》 두 잡지의 추천권자인 한성기 시인님과의 이런 인연으로 그후 계속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문학수업 과정을 거쳐 마침내 5년만인 1979년 1월 숭전대학교(개명된 현재의 대전 소재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1976년 2학년으로 편입학하여 교내 청림문학동인회 초대회장으로서 활발하게 문학제를 개최하는 한편 마치 시(詩)가 인생의 전부인 양 밤낮으로 열심히 쓰다가 졸업하는 기념선물인 꼴로 초회추천을 받고 같은 해 10월 완료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했지요. 그러니까 1979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예전문잡지《현대문학》에서 시「龍山里」, 「新아리랑」, 「그날 以後」, 「山直里 素描」, 「沙月里 비타령」, 「靑山別曲」 등 6편으로 추천 완료되어 시인으로 등단하였어요. 그래서 대전과 충청남도 문학청년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독차지하고 선후배 문인들로부터 부러움과 덕담을 많이 들었지요.
임애월 : 부러움을 살만도 하십니다.(웃음) 1986년 《월간문학》에 평론「인간회복의 반문명시」가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도 데뷔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문학평론가 겸 국문학자로서의 평론·논문 집필 작업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해 주세요.
정진석 : 꼼꼼하게 사전 조사를 하시고 초라한 저를 일일이 기억해 주셔서 황송해요.
임애월 : 네, 허락도 없이...... 미리 뒷조사를 조금 했답니다.(웃음)
정진석 : 저는 학계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것 이외에 여러 해 <월평> 및 다수의 <서평>을 집필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저는 대개 문학적 업적에 비해 문학사 또는 문단으로부터 소외된 감이 있는 문인들, 예컨대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한하운(韓何雲), 한성기(韓性祺), 조남익(趙南翼) 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했지요. 그래서 차후 언젠가 건강이 허락된다면 『이 땅에서 소박맞은 詩人들』(가제)이라는 저서를 발간하고 싶어요.
다른 한편 40년 전 대학교 재학 2학년 적인 1976년부터 20여 년간 『한국문학동인지사』(가제)를 집필하겠다는 의욕에서 우리나라 문학동인지에 대한 기본자료(동인지)를 수집, 정리, 분석하여 이를 논문으로 다수 발표하기도 했지요.
임애월 : 우리 문단 전편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집니다.
1981년에 출간된 첫시집 『沙月里 비타령』 <서문>에서 당시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인 조연현 선생님은 정진석 시인의 눈빛이 참 섬세해 보인다고 하셨어요.... ‘鶴춤에 고부라졌던 해가/소나무에 걸려/노을가루가 날린다’ -「龍山里·1」에서 노을가루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는 말씀이셨겠지요.
정진석 : 애초 저를 시인으로 문단에 소개시켜 주신 문학스승 한성기 시인님께 <서문>을 써달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선생님께서 겸허하시고 또한 이왕이면 문하생을 더 돋보이게 하시려는 배려심에서 우리 문단에서 선생님과 친분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조연현 선생님께 부탁하신 거예요. 한국문단의 거물급 원로어른으로서 새내기에 대한 격려성 덕담(德談)쯤으로 여기면 어떨까 싶어요.
임애월 : ‘사월리’를 첫시집 제목으로 쓰셨는데 실재하는 마을인지요? 특별한 인연이 있으신가요?
정진석 : 예. 사월리(沙月里)는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에 실제로 있는 마을이에요. 1975년 여름 만난 영화배우 겸 탤런트 톱스타 유지인(兪知仁) 버금갈 정도로 예쁘게 여겨졌던 첫사랑 미용사아가씨 CBO의 고향동네이지요. 이 첫사랑과 졸지에 헤어지게 된 통에 거의 상사병에 걸리다시피 그리움에 애간장을 태우며 그해 유난히 길었던 장마철 빗속에서 울면서 쓴 시가 바로 추천작품 6편 중 하나인 「沙月里 비타령」이지요. 또 이것을 첫시집 제목『沙月里 비타령』으로 삼았지요. 이때 그녀를 잃고 영영 이별하게 된다면 삶의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죽을 것만 같으며 ‘내 인생이 끝난다’는 절박감에 첫사랑의 열병을 호되게 앓았지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무너진 관계회복을 꾀하고자 두문불출한 채 무려 43일간이나 밤낮 가리지 않고 꼬박 잠을 자지 않은 채 향내가 나는 편지지에다 사랑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연애편지를 썼지요. 그 당시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긴 편지보다 약 1.5m나 더 긴 비공식적으로 최고 장문의 연애편지를 썼던 거예요. 또한 저를 피해 몰래 어디론가 새로 옮겨간 그녀의 근무처를 찾느라고 대전과 충남 지역 미용실과 미용용품을 파는 가게를 샅샅이 뒤져 집요하게 헤맨 결과, 극기야 장시일 만에 찾아냈지요. 보자기에 싼 본편지는 제가 가슴에 품고 곁들여 이 편지의 내용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빙하는 각종자료들을 넣은 커다란 박스를 양쪽에서 든 친구 2명과 동행해 찾아가 그녀에게 전달했지요. 일과 틈틈이 일주일간에 걸쳐 읽은 그녀의 반응은 ‘당신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요.’라는 혈서(血書)였어요.
임애월 : 우와, 정말 어떤 부분에서든 그 열정이 참으로 대단하시네요.(웃음)
한성기 선생은 당시에 정진석 선생님을 ‘시에 미쳐 살고 있는 시인’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어느 정도로 ‘시’에 빠지셨었는지 궁금합니다.
정진석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초등학교 6학년 때 존경하는 명재(明齋) 이동영(李東英)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어요. 20대 문학청년 시절에는 시(詩)를 쓰면 영원히 남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어요. 그래서 우리 문학사에 오래 남을 만한 시(詩)를 한두 편 쓰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각오로 열심히 썼지요. 일상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보든 남의 말을 듣든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하면 시상을 낚으려고 애썼으며 저것이 시의 소재가 되지는 않을까 혹 시구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하곤 했어요.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걷다가도 독서를 하다가도 신문기사를 읽다가도 뉴스를 듣다가도 잠자리에서도 시를 생각하고 자다가 꿈속에서도 시를 썼지요. 삶 자체가 시쓰기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불혹 고개를 넘으면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지금은 그토록 몸살을 앓으면서까지 온몸으로 써왔던 시(詩)마저 다 부질없다는 허탈과 허무를 통감했어요. 그러면서도 차마 절필하지 못하고 오늘도 쓰고 있어요. 왜?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짧은 생애에서 시쓰기조차 그만 두면 인생이 너무 따분하고 외롭고 허전할 것 같아, 아니 이미 문학에 깊이 중독이 들었기 때문에 펜을 놓지 못하고 그냥 쓰고 있을 뿐이에요.
임애월 : 아까 잠깐 말씀하셨는데 한성기 선생님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으시다고요?
정진석 : 한성기 선생님은 저를 시인으로 중앙문단에 소개시켜 주신 천자이시지요. 문학스승이자 인생은인이시지요. 그래서 문하생의 한 사람으로서 이분의 사랑과 배려와 은혜에 다소나마 보답하고자 작품세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 결국 문학평론가가 되었고 학문의 길로 들어서서도 「한성기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지요. 저한테는 선생님의 시와 삶을 종합총정리한 『한성기 평전』을 속히 마무리 집필해 우리 선생님을 기리는 저서로 꼭 발간해야 할 제자로서의 책무와 소임이 개인적인 숙제로 아직 남아 있어요.
임애월 : 「콧구멍에 들어간 조갑지 하나」를 읽으면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는데요...... 지금도 콧구멍 크기가 다르다는 그 부분에서요..... 그런데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데요.(웃음)
정진석 : 생전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어려서 놀다가 작은 조개가 콧구멍으로 들어갔는데 한참 지나 나중에 발견하고선 병원에 가서 꺼내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해요. 콧속의 폭이 다를지는 모르겠으나 육안으로는 저 자신도 콧구멍의 크기가 다른가를 잘 모르겠는데요.
임애월 : 1989년 세 번째 시집 『모래 위에 쓴 詩』를 상재하시고 1999년 네 번째 작품집 『요령잡이 詩人의 판소리』를 발간하기까지 10년이라는 간극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뭘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판소리를 익히셨나 하고요...(웃음)
정진석 : 허허. 부끄러워요. 솔직히 털어놓건대, 그 사이에 학문(學問)으로 외도(?)했기 때문이에요. 지금 와서 돌이켜볼 때 시나 부지런히 쓸 일이지 감성적인 뇌가 승한 주제에 이성적인 뇌를 요하는 학문으로 엇나가는 통에 공연히 헛고생만 잔뜩 하고 학자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퇴기(退妓)가 되고 말았지요. 학자로서 대학교수도 못 되고 한편 위풍당당한 시인도 못 되었으니까요.
임애월 : 아하,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어요....(웃음)
네 번째 시집 『요령잡이 시인의 판소리』에는 김완하 시인의 지적처럼 조금 느슨해 보이는 작품들이 많던데 그건 그 시집의 제목처럼 판소리 사설을 위한 의도적인 장치였나요?
정진석 : 아니에요. 한동안 시쓰기를 놓고 딴전(논문쓰기)을 피는 바람에 시창작력이 퇴보 내지는 정체상태에 머물러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임애월 : 제5시집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꽃』에는 어머니, 아내, 아이들, 누이, 외할아버지 등 가족들과 화가, 스님, 식당주인, 동네 사람들, 그리고 직장과 문단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실명을 부제목으로 시 쓰기 작업을 하셨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거든요. 총 몇 분이나 되시는지요?
정진석 : 제 시집에 가족을 비롯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시집이나 다 몇 편씩 수록되어 있지만, 특히 제5시집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꽃』은 전편이 사람을 대상으로 쓴 시들만 수록하였지요. 여기에 실린 것은 모두 40여 명이 되는 성싶어요.
저는 문단 새내기 시절을 비롯한 초창기에는 전통적 서정을 중시하여 사람보다는 자연을 중심소재로 삼아 시를 써왔지요. 그렇지만 불혹이 넘어서면서 자연보다 사람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어요. 이 같은 새로운 개안(開眼)은 바로 늦게 낳은 큰애를 키우면서 깨닫게 되었지요. 왜냐하면 문학은 결국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현재는 시를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것을 소재로 하여 시를 쓰려고 해요. 그러면 제가 쓴 그 시를 읽어본 상대방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기쁨을 무척 느끼게 되고 뿌듯한 자긍심을 가지고 새마음으로 한결 더 성실하게 살아가는 성싶어요. 이처럼 제가 쓴 시의 대상자가 기쁨을 느끼는 것을 통해 저도 덩달아 기쁨을 얻곤 해요. 이 맛과 보람에 최근에는 더욱 자연 쪽보다는 사람 쪽을 주관심사로 시를 창작하고 있어요.
임애월 :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진정성의 눈으로 그 내면까지 바라볼 수 있다면 정말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울까요? 저는 지난여름 친한 친구에게 작은 배신을 당했거든요.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이제는 좀 견딜만한데 그때는 정말 속이 많이 상했답니다.(웃음)
정진석 : 그래요. 이 세상에 가족을 위시한 사람보다 소중한 것은 없고 사람보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은 없겠지요. 그러기에 사랑하고 믿었던 상대방이 자기와 맺어진 인간적인 정을 외면하거나 등을 돌렸을 경우에는 그만큼 심적으로 상처가 크고 아픔이 깊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임애월 : 특히 절절한 사모곡 「輓歌·1」에서 어머니는 신이고 총독이며 북극성이자 쉼터라고 하셨는데 600행이 넘는 장시를 읽으면서 저도 가슴이 서늘하였습니다. 어떤 시인은 종교를 묻는 질문에 서슴없이 ‘어머니교’라고 하시던데, 우문입니다만 어머니를 부르면 왜 아직도 가슴이 찡할까요?
정진석 : 다 알다시피, 우리 사람들한테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기를 낳아준 생명의 근원이지요. 그러기에 어머니는 한없는 사랑과 애정과 헌신과 봉사로 안식과 평화와 위안을 주고 또한 살아가다가 고난과 역경에 봉착되었을 때마다 정신적으로 위기상황을 초극해내는 데 최후 순간까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대상이 아니겠어요? 우리한테 어머니는 마치 언제 들려도 반기고 들리고 들려도 또 다시 들리고 싶은 고향마을과 같은 대상이지요. 한 마디로 어머니라는 존재는 육체적 고향인 동시에 정신적 고향이기에 누구한테나 영원한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생명의 뿌리인 어머니는 지고지순함 내지는 거룩함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요. 특히 저의 어머니의 경우는 경제적으로 견디기 어려웠을 보릿고개 시절인 60년대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43살에 홀로 되셔서 대전중앙시장 노상에서 거리질서 담당경찰들에게 메뚜기떼처럼 수시로 쫓겨다니시면서 더우나 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진종일 내내 함석다라에 배추와 무가 겨우 몇 포기 담긴 야채를 팔아 우리 6남매를 키워내신 정말 애틋한 모성애 및 삶의 투지가 남달리 대단하고 위대한 분이셨어요. 그러기에 저한테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최고 존경의 대상이자 성모 마리아님 같은 존재나 마찬가지였지요. 15년 전 83세에 작고하신 어머니는 노후의 혼수상태에서는 으레 형제들 중에서 제일 가난한 저를 찾곤 하셨어요. 평소 당신의 고생했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준 것을 고맙고 예쁘게 여기시며 그래도 학교선생인 저를 내심 가장 신임하셨던 성싶어요.
임애월 : 에고, 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 시집에서 특이할 만한 부분은 아드님께서 발문을 쓰셨어요. 물론 아드님(정학수)도 등단한 시인이시고요.
정진석 : 예. 제 아들 정학수는 2009년 월간《문학공간》 출신 시인이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학교 대표로 각종 글짓기대회에 참가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지요.
임애월 :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존경으로 가득 차 있어서 부럽습니다. 부자지간의 정이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진석 : 부모로서 이 세상에서 처음 낳은 맏아들이기에 ‘동자보살’로 여기며 사랑을 듬뿍 쏟아 부었지요. 두세 살 아기였을 유아기에는 제가 출근할 때마다 아빠랑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침마다 떼쓰고 우는 통에 안쓰러우면서도 너무나 사랑스러워 뿌듯하고 짜릿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헤어졌다가 퇴근 후에는 경호원처럼 늘 붙어 지내다시피 함께 놀았지요. 그래서 동네아주머니 중에는 ‘학수아빠는 학수를 위해서 사시는 분 같아요.’라는 말을 할 정도였지요. 이 큰아들을 키우던 시기가 제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지금도 심성이 고운 아들을 선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임애월 : 아버지들은 대부분 좀 엄격하신 편인데, 마음이 참 여린 편이신가 봅니다......(웃음)
작년에 여섯 번째 시집 『雜草를 뽑으며』를 상재하셨어요.
등단 40년이 다 되도록 시집이 6권이면 좀 과작인 편이죠?
정진석 : 그건 그래요. 과작(寡作)인 편이라고 간주될 수도 있지요. 그런데 만약 제가 학생들이나 타인에게 시집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면 아마 10~15권쯤 발간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저는 40년 가까이 교단에 머물면서 학생들에게 제 책을 단 한 권도 팔아본 적이 없어요. 현재 제 노트북에는 10권 가량의 시집을 출간할 수 있는 작품들이 쉬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임애월 : 아하, 그러시군요...... 컴퓨터 속의 작품들은 뒷조사에 나타나지 않아서......그건 미처 몰랐습니다.(웃음)
신익호 평론가는 ‘정진석 시인에게 있어서 詩는 자아성찰의 동행자이다. 치열하게, 성실하게, 지혜롭게 살지 못했다는 자아성찰로, 잡초 뽑기는 시인 자신의 수양과정을 비유했다’고 하셨는데, 마음밭에 자라나는 잡초를 뽑는 일이 곧 시 쓰기라고 해도 되겠는지요?
정진석 : 그래요. 울안 마당 잔디밭에 나있는 잡초뽑기는 젊었던 지난날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뜨겁고 부지런히 살지 못했다는 자의식 내지는 회한으로 말미암아 제 마음속에 쉴 새 없이 돋아나는 잡초들을 뽑아내고 가라앉히는 마음닦기 차원에서 일삼는 행위이지요. 또한 이는 시쓰기와도 직결되는 가벼운 노작이라고 보아도 되겠지요.
흰 머리카락 뽑는다
거울 들여다보고
거시기는 그냥 버려두라나
떨궈버려야 할 걸
툭툭 떨구지 못한 죄로
벌벌벌 바르르 떨고 있는 나뭇잎
지나가는 갈바람의 속삭임
당신 차지하기에 앞서
버릴 건 버릴 줄 알아야 해요
채우려는 마음
잡으려는 마음‘멀리하는 마음
샘 부리는 마음
겨울철 하얀 눈 내리는 것은
깨끗이 지워라 뉘우쳐라 고개 숙여라
아직 地上에 1坪도 없는 풍년거지
때 되면 비워야 하련만
차마 놓지 못하고
꼬옥 움켜쥐고 끌어안고 있는 刑罰
이제 나도 저 흐름대로 따라야 하는데
족집게 쥔 손가락 마비되도록
허리 뒤틀리도록
헤집어대면서 뽑고 또 뽑는 철부지
상구 거슬러 몸살 앓으며
다 떨군 11월 나무 바라보고 있다
- 「흰머리카락 뽑으며」 전문
임애월 : 그전의 시집에 비해 여섯 번째 시집 『雜草를 뽑으며』에서는 자기반성이나 회한조의 시어들이 많이 보이는데, 내면에 잠재해 있던 원죄의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외부로 발화되는 자연스러운 현상 같기도 하지만, 읽는 관점에 따라서는 이루지 못한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한 ‘좌절감의 또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거든요. 제가 잘못 읽었나요?
정진석 : 맥을 잘 짚으셨어요. 명의(名醫)시네요. (웃음)
임애월 시인님은 역시 예리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런 면도 없지 않아요.
임애월 : 창작의 기본바탕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데 신익호 평론가는 ‘정진석 시인의 작품은 시인과 화자가 일치해 1인칭 고백체의 어조를 취하면서도 주관적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 관찰자의 시선으로 관찰과 묘사를 생생하게 서술한다. 즉 화자의 감정이 배제되고 제3자가 객관적 시선으로 관찰한 이야기를 전개하며 상황을 보여주는 형태’라고 하였는데 선생님만의 특별한 시 쓰기 습관에 대한 말씀 좀 해 주세요.
정진석 : 젊었을 때는 비를 즐겨 맞았어요. 여름철에 내리는 장맛비를 좋아했지요. 특히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고 마구 사납게 쏟아지는 장대비를 선호했지요.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대전 교외로 나가 야생마처럼 시골길을 걷곤 했지요. 비를 맞으면 옷이 젖는 통에 체온이 내려가 춥지요. 그렇지만 속옷까지 다 젖게 되면 조금도 춥지 않아요. 아마 몸에서 저항하는 열이 생기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비가 그치거나 옷이 젖은 채 실내에 들어가면 다시 으스스 떨리고 추워지기요. 이때 찻집에 들어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커피의 온기가 마치 물이 담긴 유리잔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트리면 서서히 아래로 퍼지는 것처럼 커피의 온기가 온몸에 퍼지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홀한 쾌감을 맛볼 수 있지요. 아무튼 비를 맞고 나면 시가 한두 편 써지곤 했어요. 그래서 우리 문단에서 저를 아는 가까운 문인들은 ‘비의 시인’이라고 애칭(愛稱)해 주었지요. 이제는 나이도 먹은 탓에 감기 들까봐 겁나 건강을 생각해서 비를 맞지 못하고 있어요.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잔뜩 웅크리고 걷다보니, 시상(詩想)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요. 만약 다시 비를 실컷 맞는다면 괜찮은 시(詩)가 한두 편 건져질 것만 같아요. 지금은 비를 맞을 수 없으니까 대개 머리를 감고 난 후에 시(詩)를 쓰고 있어요.
임애월 :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선생님에 관하여 작품세계 및 문학적 특성에 대해서 조사한 바, 초판 편저 김영삼『한국시대사전』(2002. 5. 20 개정판)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더군요.
‘정진석(鄭眞石) 시인은 평소 흰 고무신을 신고 야생마처럼 시골길을 즐겨 걷곤 하는데, 유독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바람에 우리 문단에서 ‘비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의 경향은 자연의 원형파괴에 대한 아픔과 분노를 실향의식(失鄕意識)으로 문명비판(文明批判)함으로써 정감어린 인간미의 수호를 위해 고투하고 있다. 동시에 이 같은 정신적 편력을 구수한 우리말로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서정(抒情)의 세계로 걸러내고 있다. 시인은 특히 문명이나 강자에 의하여 밀려나는 것, 버림받아가는 것, 사라져가는 대상이나 불우한 이웃에 대하여 짙게 연민하고 있다. 따라서 정진석(鄭眞石) 시인은 날로 썰렁해지고 메말라가는 지구에 인정의 꽃씨를 뿌리고자 부단히 땀 흘리고 있는 휴머니스트이자 전통파 시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2677쪽 참조)
‘비의 시인’...... 참 멋진 별명입니다.
정진석 : 시인님은 진짜 대단한 명탐정이신 성싶어요. 시골에 묻혀 시골간이역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있는 무명시인에 대해서 과분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샅샅이 탐색해 기억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시인님을 만나 행복해요.
임애월 : 이렇게 백마강 강변을 걷고 있노라니 만추의 풍경이 참 여유롭네요. 망국의 회한도 결국은 저 강물 따라 흘러가고 새로운 물결이 주조를 이루는 시대가 도래했는데, 저 산 이름은 왜 부산(?)인가요?
정진석 : 예. 강 건너 저쪽에 있는 작은 산은 한자로 부산(浮山)이라고 불리지요. 전설에 따르면, 저 산은 원래 충청북도 청주(淸州)에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옛날에 심하게 홍수가 났을 때 떠내려 왔다고 해요. 그래서 청주 사람들이 애초 우리 땅에 있었던 것이니까 돌려달라고 요구했다고 해요. 이에 부여 사람들이 옮겨갈 재주가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대요. 그렇지만 도저히 옮겨갈 수가 없어서 아직까지 저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해요.
임애월 : 재미있는 전설입니다.(웃음)
이제 겨울인데요, 저는 겨울이 참 좋던데...... 겨울 시 한편 들려주세요.
정진석 : 글쎄요. 저 자신이 추운 겨울 아니겠어요? (하하)
아, 그래요. 문득 생각나는 졸시 한편 들려 드리겠어요.
하얀 눈 속에 묻는다
밤새 쓴 긴 편지를
맑은 날 햇살 아래서 환했던 것들
혼자 있는 밤 시간에는
다 겉멋으로 여겨지는 빛
어둠 안에서는 맥없이 묻혀버리고 만다
죄다 부질없는 것들
그냥 지그시 눌러두라고
하얀 눈발이 하얀 미소 띠며 날린다
그래 자악작 찢어 불에 태우고
그 재마저 흰눈 속에 파묻어버렸다
지금은 冬柏꽃도 입 다문 한겨울
모든 게 깡깡 얼었다가 풀리는 봄날 되면
아침이슬 산수유꽃 봉오리 간지럽게 찌벅거릴 적
꽃바람 타고 눈웃음이랑 건네리라
내 님 꼬옥 닫혔다가 살짝 열린 봄옷고름 틈새로
눈물로 쓴 사랑 便紙
ㅡ「하얀 눈 속에 묻은 便紙」 전문
임애월 : 춥고 서러운 사랑, 그러나 꽁꽁 언 산맥 그 너머에서 따뜻한 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결코 절망할 수 없는...... 겨울서정이 묻어나는 시 잘 들었습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강건하시기를 빌게요.
정진석 : 하얀 눈이 내린 설국(雪國)의 겨울을 유난히 좋아하신다는 시인님의 하얀 마음밭에 늘 고운 봄햇살이 찾아들고 예쁜 봄꽃들이 가득 피어나 있기를 빌어요. 먼 곳에 있는 저를 찾아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아울러 『한국시학』의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임병호 선생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고 먼 발길 안전하게 살펴가세요.
- 춥고 가난하던 청소년기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꼿꼿하게 지나와 詩의 꽃밭을 아름답게 일궈내시고, 스스로 ‘부여의 으뜸머슴’이 되어 『충청남도의 장날·장터 그리고 고을마다 특산물』 『부여 궁남지 연꽃 사화집』 『아름다운 扶餘 鄕土 사랑 향기로운 百濟文化 사랑』 등의 발간으로 특색 있는 지방문화의 융성을 꾀하고, 전국적인 시낭송회 개최 등 문학행사를 통해 끊임없는 열정으로 삶을 채색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감동스럽다.
이 겨울에도 선생님의 정원엔 하얀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리라 -
<정진석 시인 자선시 5편>
龍山里
이슬을 행주질하고
봄보리랑 눈情 나눈
햇살이 내울 건너
열리는 마을
山 66번지 바람에
밀리고 밀리는 둑새풀이여
참새들은 풀파도를 타고
달구지 길 따라
山寺의 염불 내리고
씻김굿인 양
춤추는 두루미
鶴춤에 고부라졌던 해가
소나무에 걸려
노을가루가 날린다
들녘에 녹아드는 어스름
옥싸라기 뿌리듯
정갓골 청솔바람이
달빛을 흩이고 간다.
新아리랑
漁父洞을 찾은
나그네의 발자욱에
자운영 꽃잎이
떨어지고
꽃잎이 떨어져
꽃나무가 아리고
꽃나무가 아려서
江이 저리다
얼마나 쓰라렸던가
李진사에게 소박맞은
玉女의 손등보다
아리었던 이 江을
누가 빗질해 놓았을까
한 스무 한 해 다듬은
새악시 머리순 같은
강자락
그 참하디 참한 江 위로
처녀와 문명을 나르는 뚜쟁이인 양
懷南行 거시길 짊어지고
떠나가는
뗏목배
당신의 마른 呻吟이야
바람에나 헹굴거나
강물에나 풀거나
차라리, 모래톱에 파묻을거나
죽어서 山으로 돌아간 새
산길 가다가
새 한 마리 보았다
날개가 어여삐 외로운 새
혼자서 울고 있었다
안쓰러워 잡아다가
우리 집 새장에 넣고
먹이를 주고
얼러 주어도
새는 울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뜨락으로, 돌담으로 이리 날고
저리 뛰며
재잘거리는 참새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새
어느 날 오밤중 카랑 카랑 들리는 소리
푸지게 울고 있었다
그 이튿날 아침
새는 뜨겁게 죽어 있었다.
離魂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다가, 섬짓했다
나의 영혼이 홑것만 걸치고 떨고 있었다
겨울비가 내리는 대문 밖에서
데리고 들어와 이불 속에 눕혔다
그날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무심코 천장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랐다
나의 영혼은 어느새 내 품을 빠져나가
하필이면 쥐가 오줌 싼 얼룩터에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다
발가벗은 채
아, 그 동안 나를 돌보지 않았구나
현실에만 잔뜩 독올라
대문 밖에서 굶주림과 강추위에 떨고 있는 줄도 모르고
3도 동상에 걸린 영혼을 부둥켜안고
밤새껏 울었다.
雜草를 뽑으며
안에 연기 차오르거나
구름 밀려오는 때는
뜨락 꽃밭으로 나간다
교무실 공기 탁해지거나
닷새場 서는 때는
교정 화단으로 나간다
거기 수없이 나 있는 잡초
얼마나 더 많을까
내 마음밭엔
잡초를 뽑는다
내 가슴 뒤꼍 우거진
뿌리째 쏙 뽑히지 않고
버팅기는 것들
너무 억세서
겁나게 원뿌리 깊이 박혀서
하도 잔뿌리 많아서
어떤 건 줄기 똑 분질러지고
퍽 여려서
어떤 건 밑동 끊기고
성가신 잡초 뽑고 나면
꽃들 좋아라
머리 깎고 깔끔해진 꽃밭
바람에 손짓한다
몸 씻고 개온해진 화단
햇살에 미소짓는다
속 넘보고 할퀴고 빼앗고 갉아먹는 거
뽑고 뽑아도 늘어만 가는
知天命 넘은 내 흰머리칼처럼
며칠 지나면
도로 어지럽게 생기련만
때로 가라앉히고 비우고 싶거나
때로 역겨워 머물고 싶지 않거나
때로 풀리지 않으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잡초를 뽑는다.
정진석 시인 약력
시인․시낭송가․문학평론가․문학박사 (호 : 龍山)
전북 익산(함열) 출생, 숭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한남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79년《現代文學》詩 추천완료, 1986년《月刊文學》評論 당선
시집 『沙月里 비타령』(1981), 『新아리랑』(1983), 『모래 위에 쓴 詩』(1989), 『요령잡이 詩人의 판소리』(1999),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꽃』(2010), 『雜草를 뽑으며』(2015)
편저 『趙南翼의 詩와 삶』(2003)
제1회 大田文學賞 (1989), 제17회 한성기문학상 (2010) 등 수상
현재, 부여시낭송회 대표, 부여시인협회 회장, 부여문인총연합회 대표, 백제시낭송회 대표, 충청남도시낭송인협회 대표, 한국전통시낭송회 대표, 백제시인학교 교장 겸 백제문예대학 학장, 문예지 다수의 신인문학상 심사위원, 한국문인협회 충남지회 부지회장, 향토신문 <부여뉴스> 논설위원, 부여문화원 이사
국제펜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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