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5)> 태종 1
-이성계의 회한과 죽음
이방원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두번의 난을 거쳐 34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그에건 치명적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정통성 문제였습니다.
지존의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정통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노태우 부인 김옥숙이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이순자에게 평생을 형님대접을 하다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열린 축하연에서
"우린 국민의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니 그전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여 이순자의 속을 뒤집어 버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계승이 아니라 형제들을 쳐죽이고 애비에게 씻을수 없는 불효를 한 채 왕이 된 이방원을 백성들이 곱게 볼 리 없었고, 이방원에게 이런 정통성의
부재는 평생의 약점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이런 정통성 부재의 약점을 씻고자 이성계에게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 둘과 사위
그리고 평생의 벗들을 허망하게 잃은 이성계가 쉽게 이방원을 인정할 리는 만무한 것이겠지요
한편, 이방원은 애비가 힘들게 천도한
한양을 버리고 제멋대로 개경으로 천도를 행해버렸는데, 개경민심이 대부분 이성계에 있다는 것이 이성계에게 마지막 희망을
던져주었습니다.
분노를 아직 씻지 못한 이성계는 다시 권력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했고, 이성계를 신처럼 여기는 지역인 동북면에 나가
있던 조사의란 자가 이러한 이성계의 마음을 읽고 이성계의 복귀를 주장하며 난을 일으키니 이것이 이성계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습니다.
조사의의 난은 직접 출동한 이방원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진압되었고, 이성계는 이와 더불어 무학대사의 죽음 이후 인생의 활기를 잃고
맥없이 지내다 죽으니 그의 나이 74세였습니다. 희대의 영웅 이성계의 말년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담에 이어서~<자료제공 박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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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6)> 태종 2
- 중전 민씨 영광과 불행(1)
타고난 자질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미 여기에
왕이라는 압도적 지위에다 명으로부터 왕위까지 승인 받게 된 방원의 정치적 파워는 막강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방원에게 마지막 남은
과제는 사냥이 끝난 후의 사냥개 처리와 길들이기, 그리고 향후의 왕권강화를 장기포석이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향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공신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는 등 왕권강화를 위한 박차를 가하였는데, 그 중 가장 기가 막힌 것은 중전 민씨 가문의
대몰락이었습니다.
태종의 부인 중전 민씨는 18세에 방원과 결혼하여 시아버지가 왕이 되는 것을 목격했고, 타고난 여장부 기질로
방원이 왕이 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중전 민씨는 민무구, 민무질 두 동생을 남편의 심복으로 만들고 1,2차 왕자의 난에는 꾀를 내어 거사를
성공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등 자신이 직접 후견인이자 참모로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전 민씨는 거사 실패 시에는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각오하고 남편의 왕위 획득에 올인을 한 것인데, 이것이 제대로 성공하여 남편은 임금이 되었고 자신은 국모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그러나 중전 민씨의 허락된 행복은 즉위식이 열린 하루뿐이었습니다. 태종은 왕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여자를
찾았고, 태종의 다소 과도한 밝힘증과 상당히 과도한 중전 민씨의 투기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싸늘히 냉각되어 갔는데, 중전 민씨에게 이는 향후
밀어닥칠 엄청난 불행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담에 이어서~~<자료제공 박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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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7)>
태종 3
- 중전 민씨 영광과 불행(2)
중전 민씨 가문의 불행~~
결론을 먼저
말하면, 중전 민씨의 친동생인 민무구, 민무질이 1차로 남편인 태종에 의해 죽고, 그로부터 6년 후 그 아래 동생들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도 또
다시 남편인 태종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것도 민씨가 중전의 자리에 있는 가운데...
태종의 입장에서 볼 때, 장인인 민제는
보수파의 핵심인물로서 따르는 이가 많고, 처남인 민무구와 민무질은 군사 부분의 실세들, 그리고 대궐의 안주인 왕비, 여기에다 무엇보다 원자가
외가에서 자란까닭에 외삼촌인 민씨 형제와 매우 가까웠고, 나중에 원자가 세자를 거쳐 보위를 이을 경우 민씨 일가의 힘은 통제불능일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민씨 형제들이 죽게 되는 과정은 매우 복잡했는데, 그 중 하나만 보면, 태종이 어느 날 갑자기 선위(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물러앉는 것)하겠다는 쌩쇼를 한 것과 관련해 민씨 형제들이 슬퍼하며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기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 탄핵의
내용이었습니다.
태종은 민씨 가문의 발호와 세자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우려해 민무구, 민무질을 작심하고 죽였고, 6년 후에는 그
동생들이 세자를 충동질해 복수를 꽤하려할 것을 우려해 또 다시 작심하고 마누라 가문의 씨를 말려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황제가 권력유지를 위해 일을 벌이기만 하면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이 발생했으니, 태종으로서는 자신이 벌이는 일
정도는 별 거 아니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튼 중전 민씨는 이방원이라는 독한 놈을 만나 왕비가 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그
대가는 너무나도 혹독하였습니다.
담에 이어서~~<자료제공 박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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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8)> 태종 4
- 양녕과 충령
태종은 정비 민씨와의 사이에서 양녕, 효령, 충녕, 성령 이렇게
4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태종이 중전 민씨 일가를 몰락시키고 많은 공신들을 처치한 이유는 오로지 미래 군주인 세자 양녕대군이었는데, 양녕대군의
탈선이 만만찮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양녕은 어린 시절부터 빡빡한 군주교육을 따라가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열일곱에 이르러서는 최초로 기생을 불러 통하는 등 여색을 밝히기 시작하였습니다.
태종은 초장에 버릇을 고쳐놓으려
여러 시도를 하였으나, 그럼에도 양녕은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을 넘어 장안의 건달들을 궁 안으로 불러들여 놀기까지 하는 등 탈선의 종류와 강도를
점점 높여 갔습니다.
야사에서는 세자의 이러한 탈선이 아버지의 무자비한 숙청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하고, 왕의 마음이 충녕에 있음을
알고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도 하나, 이렇게 볼 만한 그럴듯한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장차
세종대왕)은 어려서부터 영특한 데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 태종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같은 왕자라 하더라도 세자와 왕자의 지위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으니, 세자는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나 왕자는 그냥 종친에 불과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본의 아니게 역모에 휩쓸려 죽어나갈 수도 있는
지위였습니다.
따라서 충녕의 뛰어난 자질은 어디에도 사용할 곳이 없는 쓸데없는 것이었습니다.
실록에는 충녕이 세자에
도전하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을 정도의 도발행위를 여러 번 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를 두고 충녕이 세자의 탈선을 빌미로 왕위를 욕심냈다거나
충녕의 뛰어남을 강조하기 위한 사관들의 아부성 멘트였다는 등의 해석이 있으나,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세자 양녕은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태종에게 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아버지는 뭘 잘했다고 날 나무라십니까”라는 취지의 편지가 결정적
이유가 되어 세자의 자리에 오른 지 14년 나이 스물다섯에 폐위되고, 충녕이 세자가 되었습니다.
충녕대군은 세자가 된지 두어 달
만에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바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입니다.
담에 이어서~~<자료제공 박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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