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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3일, 7시.
참석자: 이명희, 김태종.
생각씨앗.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올바른 사고란(중략),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변론(설명)하는 것이다.(중략)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것은 진리이다. 그는 진리에 대한 물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에 친구 크리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중이 우리에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염려할 것이 아니라, 오직 정의와 불의에 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을 따라야겠지.(중략)” 그의 말은 계속된다. “인간의 최고의 선은 덕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저 자신과 남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 매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험이 없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답니다.”(중략)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의 생활이 붕괴해 가는 징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그의 시대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구제 불능의 상태임을 보았고, 장차 그리스 정신을 깊이 함몰시키고 말 위기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중략) “우리 도시 국가는 더 이상 선조들의 도덕과 제도로 다스려지지 않고 있다. ···지금의도시 국가는 한결같이 잘못 다스려지고 있다. 율법마저도 거의 구제 불능의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중략) 진지하게 되묻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의문을 갖고 묻는다는 것은 꿈길을 헤매는 듯한 착각 속에서 뒹굴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중략) 물음에 대한 이 철저함, 시대의 위기에 대한 그러한 통찰, 인간 존재의 참된 요구에 대한 인식, 바로 이러한 것들 때문에 제자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열정적으로따르게 된 것이다.(중략)
철학함이란 다름아닌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46~96쪽)
초기 스토아 철학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은 클레안테스이다.(중략) 다른 한 사람은 경마사 출신인 크리포스이다.(중략)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초기 스토아 철학자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출발하였다.(중략) 따라서 철학은 그들에게 인간 현존재에 직접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철학은 “삶을 영위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자는 생활의 의미를 에피쿠로스처럼 쾌락과 향락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일치에서 발견하려고 하였다.(중략) 이렇게 해서 서양 정신사에서 처음으로 인격 개념이 등장하고, 이 개념은 후기 그리스도교 사상을 거쳐 특히 괴테 시대에 이르러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을 스토아의 영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중략)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는 단지 세계에서 야기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세계를 파악하려 한다. 이에 반해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는 도덕 그 자체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기 위해 자연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중략)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의 삶의 이상은 “격정 없는 것”이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의연함”이다.(중략) 공적인 생활에서의 의무를 강조한 이 사상은, 그리스 시대 말기의 진지하고도 엄격한 철학자, 즉 제논의 가장 위대한 공적의 하나이다.(96~100쪽)
(볼테르의 철학 핵심은 이것이다.) “철학은 영혼의 고요를 얻도록 해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호한 자세로 철학함에 임해야 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과감하게 모험을 해야 한다. 철학은 인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데 그 가치가 있다.(235쪽)
철학함이란 대답을 찾아 그 대답을 가지고 조용히 안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철학함이란 곧 항상 새롭게 본질적인 물음을 제기함을 뜻한다.(칸트, 276쪽)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이중의 모습을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내면으로 눈을 돌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계로 나와 현실을 변형시키려는 충동 속에 실재에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는 근세의 철학자들 어느 누구보다 피히테에게서 가장 힘차게 분출되고 있다.(280쪽)
따라서 유한한 인간에 불과한 철학자는 모든 것을 흡사 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듯 고찰해야 한다. 이것이 젊은 셸링이 선택한 참으로 거대한 과제였다.(301쪽)
야스퍼스에게 철학이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근심“이다.(중략)
”인간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불확실하다.“ 인간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며 가장 커다란 위험이다.(중략)
야스퍼스에게 있어 자유는 우선, 그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그때마다 이것이나 저것을 결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중략)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심오한 실존적인 자유”이고, “실존적 선택”이며, “나 자신의 선택”, “현존재 속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결단”이다.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움켜잡는 것,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 정립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고, 그래서 또한 철학함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중략) 왜냐하면 실존 철학은 “그것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될 수 있는 그러한 사유”이기 때문이다.(중략)
그는 거기서부터 마지막으로 포괄적인 세계 질서의 요청에 이른다. 이 요구는 무엇보다도 특히 원자 폭탄의 위협에 직면해서 인간이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중략)
인간은 그가 그 자신에게로 향하려고 노력하고, 그 자신을 이해하려 하고, 그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형성하려고 시도할 때, 더욱더 압박해 오는 한계를 경험한다. 인간은 그의 현존재가 사물의 존재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중략) 야스퍼스는 이것을 “한계 상황”이라고 부른다.(중략) 이 한계 상황들은 “인간 그 자체에 관련되고, 유한한 현존재에게 불가피하게 주어져 있는 궁극적 상황”이다.(중략)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한계상황 속에서 비로소 의식되기 때문이다.”(중략)
인간은 죽음, 고통, 전투, 죄의식, 운명에 대해 긍정해야만 한다. 그가 그것을 매우 진지하게 행할 때, 바로 이 한계 상황을 견뎌내면서 그의 고유한 실존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열린 눈으로 한계 상황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이 한계 상황이 또한 “보다 깊은 철학의 근원”이 된다.(중략)
여기에서 야스퍼스의 철학함의 새롭고 심오한 차원이 밝혀진다. 자기 존재와 자유로의 비약은, 절망에 직면해서 외적인 불가능함을 넘어서서 특별한 경험, 곧 선사되어짐의 경험을 통해 가능해진다. 좌초 속에서 인간은 그가 그 자신에게 마련해 줄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바로 나의 자기 존재의 근원 안에서 나는 내가 나 스스로를 창조한 것이 아님을 의식하게 된다. 내가 오직 나의 근원적인 의지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되돌아 가 본래적인 나에게로 갈 때, 나에게 내가 완전히 내 자신이 될 때, 나는 더 이상 단지 나 자신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내가 충족된 역사적 현재에서 ‘나’라고 말하는 이 본래적인 ‘나 자신’이 분명 나에 의해 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나로 인해 놀란다. 예컨대 그러한 행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 혼자서 그것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을 다시 한번 그렇게 할 수도 없으리라는 점이다. 의욕 속에 내가 본래 나 자신이었을 때, 나는 동시에 나의 자유 속에 나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자신 안에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음”을 경험한다.
선사됨과 주어짐은 -야스퍼스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선사와 주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도 역시 근본 경험의 한 부분이다. 극단적인 좌초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세계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닌 어떤 도움을 만나게 된다. 야스퍼스는 그와 같은 만남을 “초월”이라고 부른다.(중략)
이로써 철학은 자신의 최고의 과제와 마주치게 된다. 그 과제는 “초월로의 비약을 준비하고 상기시키고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그것을 수행하는 사유이다.” “철학은 초월을 맴돈다.”
야스퍼스는 초월에 대한 이러한 기초적 경험을 “철학적 믿음”이라고 부른다.(중략)
철학함에서는, 같은 길에 있는 사람에게는 계시가 완전히 배제된 신앙이 호소해 오고 있다. 그것은 혼미 속에서의 어떤 객관적인 이정표는 아니다. 인간은 각기 가능성으로서의 그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만을 수용할 수 있다. 초월의 관점 아래 현존재의 존재를 밝혀 줄 차원에의 추구가 감행된다. 모든 점이 다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 세계 안에서, 우리는 목표를 알지 못하면서도 철학적인 방향을 잡아 보려고 애쓰고 있다.“(397~406쪽)
(러셀은)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철학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중략) ”내가 이해하고 있는 철학이 해야 할 일이란 본질적으로 논리적 분석과 그에 따른 논리적 종합이다.(중략)
왜냐사면 철학은 분명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유용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의 목표는 “인식”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려운 점은, 사람들이 철학 안에서 “그 어떤 확실하게 윤곽지워진 앎의 상태”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철학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철학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바로 그 불확실성에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 러셀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띤다. “철학적 변화를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마치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것처럼 한평생을 지낸다. 건전한 인간 상식의 선입견, 그의 시대나 그의 국가의 습관적인 견해, 공동 작업이나 숙고하는 이성의 동의 없이 그 자신 안에서 자라난 의견들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러셀에 있어 그 다음의 철학적 과제는 논리학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통로를 발견하는 데 있다.(중략)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 세상에는 이성적 인간이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그렇게 전적으로 확실한 인식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해 러셀은 매우 비판적이다.(중략) (감각적 인식의 불확실성에 대해) 그것은 불합리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러셀은 이렇게 강조한다. “철학자가 되려는 사람은 불합리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러셀은 이제 “일반적으로 실제의 책상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뒷받침하는 근거들”과 논쟁을 벌인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이 주장은 엄밀하게 증명될 수 없다.“ 전 생애는 꿈이고, 우리는 그 꿈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상상력으로 대상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이 추측은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다.(중략) 따라서 러셀이 외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물음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함의 원리”일 뿐이다.(중략)
러셀은 인식을 두 부류, 즉 면식에 의한 인식과 기술에 의한 인식으로 구분한다.(중략) 면식에 의한 인식 즉 직접적인 인식은 감각 자료들과 내적 감각들이고, 나아가서는 기억들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는 자아도 여기에 속한다.(중략) 기술에 의한 인식은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며 사물과 사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 그들간의 관계 등을 모두 포함한다.(중략)
따라서 윤리적 행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욕망들은 개인의 안녕뿐 아니라 전체의 안녕으로 향해 있다.(중략) 러셀은 거기서부터 구체적인 윤리적 요구를 내세운다.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추구할 만한 가치들이다.”(중략)
“괴로워 소리치는 신음 소리들이 나의 심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이들, 독재자에게 고문당하는 희생자들,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자식들에게까지 증오 서린 부담이 되어져 버린 노인들 – 무의탁, 고통, 궁핍, 슬픔으로 뒤덮여 있는 이 세계, 이 모든 것은 인간 생활의 본래의 모습에 대한 냉소에 찬 풍자 만화나 다름없다.”(중략)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인류의 존립이 인간의 도덕적 숙고에 어느 정도로 고개 숙이는 것을 배울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그러한 단계에 도달했다.” “우리의 시대는 암울하지만, 우리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바로 그 불안들이 지혜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실현되려면 인류는 인류가 처해 있는 이 위험한 시대의 절망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해야 하고, 이제껏 있어 왔던 그 모든 것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인간이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그것은 실현될 수 있다.”(중략) 마침내 그의 정치적 호소는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합류된다. “이 세계가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통찰이다.”(427~432쪽)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정하고 그럼으로써 생각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정하려고 한다. 철학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생각할 수 없는 것에 정의를 내리려 한다.”(중략)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있어야만 한다.”(중략)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새로운 단초를 찾아야만 했다. 이것이 《철학적 탐구》에서 행해진다. 그는 그 책에서 철학적 어려움과 “사유의 혼란”은 언어가 다의적이기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그는 이제 언어 탐구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적 명제가 아니고 일상 언어이다. 일상 언어는 가장 근원적인 현실이다.(중략)
따라서 어떤 하나의 단일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사용되는 언어적 맥락에 따라 각기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중략)
“철학은 언어라는 매개에 의해 마법에 걸려 있는 우리의 지성에 맞선 투쟁이다.”(중략)
비트겐슈타인은 그 안에서 낱말들이 각기 상이한 의미로 나타내는 것을 “언어 놀이”라고 부른다.(중략)
비트겐슈타인이 이해한 철학의 과제는 따라서 언어가 사유에 설치해 놓은 함정을 사유가 피해 가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다.(중략) 철학은 “실제에 있어 ‘순전히 기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낱말들의 사용을 기술하는 것이다.(중략) 비트겐슈타인이 끌어올린 것은 철학의 몰락인 셈이다.(442~446쪽)
위에 있는 내용은 『소피의 세계』를 읽으면서 ‘철학’을 설명하는 내용들을 간추린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놓고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크게 보탠 것이 있다고 하기보다는 각각의 철학에 대한 의미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는 시간이었는데, 앞으로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태도에 관련된 많은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키작은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