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0장1절-18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사명은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가나안 땅에 만연해있던 각종 죄악과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가 전개되면 될수록 그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시대적 사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사사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적어도 사사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공식을 깨뜨리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위대한 용사 기드온이었습니다. 기드온은 권력의 세습을 주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대중적인 지지와 인기에 영합하여 금 에봇을 만들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이 다시금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남긴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몰살하고 마는 엄청난 죄악을 범했습니다.
아비멜렉에게 권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무죄한 피를 희생시켜서라도 쟁취해야 하는 치명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시대의 이러한 영적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사 돌라와 야일은 소위 ‘소(小)사사’입니다. 돌라와 야일 외에도 소사사는 12장 말미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 소사사들에 대해 말 그대로 매우 간략하게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이전의 사사들과 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전의 사사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데 비해 소사사들은 이들은 스스로 ‘일어나서’ 사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1절)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3절)
1절과 3절에 사용된 ‘일어나다’라는 동사는 ‘능동형’입니다. 즉 그들은 스스로 사사가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3장에서 하나님은 옷니엘이나 에훗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이때 ‘일어나다’와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는 능동이 아닌 수동, 즉 ‘사역형’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사가 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났다면 그것은 시대적 사명을 올바로 인식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권력을 탐했기 때문입니다. 돌라는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 스스로 사사가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의 공포정치가 가져온 사회적 불안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그는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시대의 혼란에서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야일은 서른 명의 아들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을 설명하는 나귀 삼십과 성읍 삼십은 야일의 권력과 위세가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가 지니는 권력이 축재(蓄財)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야일은 자신의 권력으로 재물을 쌓았지만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6절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6절)
이스라엘은 마치 봇물이 터지듯 가나안 땅에 있던 각종 우상들을 하나님 대신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기록된 우상들의 종류와 숫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스라엘의 영적 황폐함이 심해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는 돌라에서 야일까지 약 45년 동안 지속된 평화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북 간의 긴장이 여전히 있지만 수많은 외침(外侵)의 역사를 지닌 이 땅에서 우리는 전쟁이 없는 풍요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OECD 국가들 중에서 우리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에 있는 반면,
고령 인구의 자살률은 최상위층에 있는 부끄러운 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 속에 우리의 정신적, 영적 황폐함은 반비례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고스(Logos)’, 곧 말씀으로 존재하시는 초이성적인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통해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고, 또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성을 내팽개치는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비로소 참된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맘몬(mammon)이 최고의 가치이자 우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는 비이성적인 시대,
다시 말해 이성이 무너져 내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우리의 이성과 양심은 우리 안에 있는 갖가지 탐심으로 인해 마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풍요로움이 주는 위장된 평화를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풍요가 주는 유혹과 탐심에 길들여져 있는 한 우리의 숱한 간구와 기도제목은 허공을 치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3절)
18년 동안의 억압 속에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하나님의 대답은 냉랭했습니다.
그들의 간구가 여전히 자신들의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속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의 한쪽을 ‘다른 신들’에 두고 있으면서 아무리 간절한 내용으로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분별해내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6절)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우리 가운데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겠다는 기도,
곧 순종함 속에서 드리는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물질이 최고의 가치와 기준이 되어 빛의 자녀들까지 유혹에 빠지는 이 시대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의 이성과 믿음이 마비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올바른 영성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꺼이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늘을 살고 이 시대를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