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문화유산인 조선왕릉 42기 분포도이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40기의 능이 남한에 있습니다
㉠ 제릉(조선 제1대 왕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의 능 : 경기도 개성군 판도면 상도리)
㉡ 후릉(조선 제2대 왕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구 영정리)
남한에 있는 40기 능이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였습니다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능을 관람하기 위해 사릉을 찾아 왔습니다
사릉(思陵 :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릉)을 찾아서 2부 입니다
단종의 친누나 경혜공주 시가인 해주정씨 가족 묘역에 정순왕후를 안장하고 해마다 해주정씨 문중에서
기일에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합니다
그럼 잠시 후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정씨 문중 묘역으로 한번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시대엔 능역(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이 있는 터)에서 십리 이내 모든 사가(私家)의 무덤을 두지 않는다 하였는데
여기 정순왕후 능역 가까이에 몇기의 사가(私家) 무덤이 있군요
해주정씨 문중 묘는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친누나 경혜공주의 시가(媤家)의 가족묘랍니다
조선 제5대 왕 문종과 현덕왕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경혜공주의 삶~
단종은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여운 이로 기억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올라 삼촌에게
왕위도 빼앗기고 목숨도 빼앗긴 그 짧은 삶은 오늘날까지도 두고두고 대중의 동정심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단종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단종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겪었을 한 여인이 있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다.
역사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의 생도 한없이 불쌍하고 가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주는 단종처럼 살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 때도 있다. 공주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세종의 친위기구인 집현전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 이승소(李承召)란 이가 있었다. 세종이 죽기 3년 전에 과거에 급제하고
집현전에 합류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시문집인 《삼탄선생집(三灘先生集)》에 〈경혜공주 묘지(墓誌)〉가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공주는 세종이 왕위에 있을 때인 1436년에 세자 이향(李珦, 훗날의 문종)과 권씨(훗날의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왕이 아닌 세자인 데다가 어머니가 세자의 첩이었기 때문에
출생 당시의 경혜공주는 공주가 아니었다.
세자의 정실부인, 즉 세자빈이 낳은 딸에게는 정2품 군주(郡主), 세자의 첩이 낳은 딸에게는 정3품 현주(縣主)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그것도 출생 직후 곧바로 작위를 주는 게 아니라, 보통은 일곱 살 이후에 작위를 수여했다. 경혜공주는 ‘현주’였다
시작은 비록 첩의 딸로 했지만, 어린 공주의 운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동궁전
즉 세자의 처소인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생활했다.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왕이 되면 공주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살았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동생(훗날의 단종)을 낳자마자 죽는 바람에 궁을 떠나게 됐지만, 이때도 그의 삶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는 정2품 평창군주(平昌郡主)란 작위를 받고 그에 따른 특권과 대우를 향유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열네 살 때부터 경혜공주의 삶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열다섯 살이 되어도 세종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왕실에서는 그의 혼사를 서둘렀다. 만약 세종이 사망한다면
삼년상 동안은 혼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윤달을 제외하고 25개월 동안은 혼인할 수 없었다.
삼년상의 기간은 36개월이 아니라 윤달을 제외한 25개월이었다. 윤달이 있으면 25개월보다 길어졌다. 왕실의 식구들은
보통 10대 초반에 결혼했기 때문에, 삼년상을 치를 경우 경혜공주는 ‘노처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실에서 급히
얻은 배우자는 전 한성부윤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인 정종(鄭悰)이었다. 한성부윤은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공주와 정종은 세종 32년 1월 24일(1450. 2. 6.) 결혼했다. 이때 공주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런데 살림집을 장만하기 전인 같은 해 2월 17일(1450. 3. 30.) 세종이 그만 눈을 감았다. 결혼 직후에 할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살림집 준비는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살림집을 마련한 것은 세종의 소상(小祥, 사망 1주기 의식)이 끝난 뒤였다. 이때 경혜공주의 신분은 공주였다.
아버지가 왕이 된 뒤였기 때문이다. 공주의 불운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삼년상을 끝내고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쓰러진 것이다. 문종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삼년상은 끝내고 눈을 감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지만, 공주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의 삼년상에 이어 아버지의 삼년상까지 치러야 했으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겪었을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의 세조)이
쿠데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공주의 동생 단종은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했다.
이때 공주는 열여덟 살이었다. 운명은 공주의 편이 아니었다. 2년 뒤인 스무 살 때, 공주는 숙부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고
동생이 상왕으로 ‘승격’되는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남편인 정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정종이 귀양을 간 것은, 그가 단종을 감싸고도는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 수양대군의 동생)과 친했기 때문이다.
정종의 유배지는 영월에서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군 일부), 한성 수원 및 김포로 변경됐다.
유배지가 수원으로 바뀐 뒤부터는 공주도 남편과 동행했다.
세조 집권 뒤에 발생한 사육신 사건(1456)은 운명이 공주의 편이 아님을 한층 더 입증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한 이 사건으로
공주의 동생 단종은 상왕에서 왕자급인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상태에서 영월로 유배를 가고, 남편 정종은 전라도
광주로 귀양지를 바꾸게 되었다. 단종은 이듬해에 죽고 정종은 단종이 죽은 때로부터 4년 뒤에 죽었다.
정종은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렇게 부모도, 동생도, 남편도 모두 잃은 공주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내놓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바로 공주 신분과 자유인 신분이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그는 남편이 죽은 뒤 전라도 순천부의 노비가 되었다. 한 나라의 공주가 하루아침에 관노비로 전락한 것이다.
당시 그에게는 여섯 살짜리 아들 정미수(鄭眉壽)와 배 속의 딸이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으로 떠났다.
순천부사 여자신(呂自新)이 진짜로 노동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수령 집무실인 동헌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킨단 말이냐?”며 호통을 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그를 점입가경의 파멸로 몰아세우던 운명의 신은, 벼랑 끝에서 갑작스레 상황을 종결지었다. 임신하고 애 딸린 공주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여론을 우려한 수양대군(당시는 임금)이 공주를 사면하고 한성으로 부른 것이다. 한성으로 돌아온
공주는 두 아이를 왕궁에 맡기고, 자신은 비구니가 되었다. 남편 잃은 후궁을 포함한 왕실 여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비구니 사찰이 한성에 몇 곳 있었다. 그는 그곳 어딘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수양대군의 손자인 성종이 재위할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동생 단종도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경혜공주는 그에 못지않은, 어쩌면 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왕실에
삼년상이 겹치는 상황 속에서 그의 결혼 생활은 꼬였고 동생 단종도 비운에 빠졌다. 그는 숙부가 동생과 남편을 차례로
죽이는 것을 목도했고, 한때 노비로 전락했다가 사면된 뒤에는 비구니로 일생을 마쳤다. 공주란 위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자리처럼 여겨진다. 실제로도 경혜공주는 한때 모든 것을 다 갖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왕실의 연이은 비극 속에서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한과 설움을 안은 채 세상과 이별했다.
그의 비극은 단종의 비극 뒤에 가려져 있지만, 어찌 보면 그의 비극이 훨씬 더 서글프고 참혹한 것인지도 모른다 (퍼온 글)
국장의 예를 갖춘 능을 조성할 신분이 아니였다 합니다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은 1455년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으로 강등되고~
사육신 사건(1456년, 세조 2)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며~
1457년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순흥(順興 : 현 영주)에서 또다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단종은 서인(庶人)으로 강봉되지요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신분도 왕후에서 왕대비로~
1456년 왕대비에서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으로 강봉(降封)되고~
1457년엔 노산군부인에서 서인(庶人)의 신분이 되지요
왕실에서 쫓겨나 동대문 밖 숭인동 정업원에서 궁핍하게 생활하다, 1521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지만, 폐비가된 송씨를
왕실에서 장례를 치를 수도 없는데다, 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친정 아버지마저 역모로
하옥된 후 곤장 100대를 맞고 영원히 원방의 관노가 되었으며, 그 가족들도 역시 같은 곳에서 관노비가 되었지요
세조실록에 의하면, 1457년(음력 10월 21일) 금성대군(세조 동생) 이유(李瑜)와 순흥부사(현 영주) 이보흠(李甫欽)이
또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처형을 당할 때
친정 아버지도 교구형을 받게되어 풍비박살난 친정에서 조차 딸 장례를 치를 겨를이 었었다고 합니다
단종이 상왕으로 강등되어 쫓겨난 수강궁(壽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시가의 해주 정씨 가족묘에 왔습니다
해주 정씨 가족묘에서 내려다본 정순왕후의 정자각과 비각 입니다
앞쪽 묘는 경혜공주의 아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의 손자인 해녕군(海寧君) 정원희(鄭元禧)의 묘이며
뒷쪽이 정미수의 묘 입니다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의 묘(오른쪽)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의 묘에서 바라본 정순왕후의 릉 입니다
전통수목 양묘장으로 가다 뒤돌아 보고~
홍살문 앞쪽 쉼터에서 전통수목 양묘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나 왔던길 홍살문 앞쪽 쉼터를 뒤돌아 보고~
지나 왔던길 또 뒤돌아 보고~
사릉 재실 입니다
우량한 춘양목들이 묘목되고 있는 양묘장 입니다
우수한 춘양목 씨앗을 받아다 발아시켜 키우는 묘목장 입니다
전국의 우량한 종자 씨앗을 받아다가
비닐하우스에서 발아시켜 모종으로 키우고 있는 곳이랍니다
양묘장에서 홍살문 앞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출입문을 통하여 사릉 능역을 벗어 날려고 합니다
정순왕후 능역 밖 매표소와 주차장 입니다
정순왕후 릉인 사릉에 올적엔 경춘선 사릉역에서 약 2.0km를 걸어 왔지만 갈때는 금곡역으로 1.5km를 도보로 간답니다
매표소에서 사릉 왼쪽 담장을 끼고 금곡역으로 가고 있습니다
사릉 재실 출입문 입니다
사릉 재실 입니다
폐위된 제15대 광해군 묘 답사를 갈려고 하는데 짓궃은 날씨에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하지 않아 준비한 우산도 없습니다
도로변 주택 처마밑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마을버스편으로 금곡역에 왔습니다.
금곡역에서 20~30분 기다렸다가 비가 그치게되면 흥선대원군 묘를 재방문을 할까 하였는데 그칠줄 모르는 빗줄기 입니다
사릉(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릉)을 찾아서 관람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