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투표권 - 경향신문 [여적] -이중근 논설위원
경향신문, 이중근 논설위원 2015.12.15 21:27 입력
여성 참정권 역사를 더듬어 보면 뜻밖의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으로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한 나라는 1893년 뉴질랜드다. 다음은 호주로 1902년에 참정권을 도입했다. 유럽에서는 북유럽 국가들이 앞장섰다. 핀란드는 1906년 유럽 최초로 보통선거를 실시하면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어 인접 노르웨이가 1913년, 덴마크가 1915년 여성 참정권을 보장했다. 마치 도미노처럼 여성 참정권이 인근 국가로 퍼져나간 것이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 민주주의 전통이 일찍 확립된 국가에서 여성 참정권이 늦은 것은 아이러니다. 영국은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제한적으로 참정권을 부여했다가 10년 뒤 21세 여성까지 확대했다. 1870년 흑인 노예에게 참정권을 준 미국이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1920년이었다. 여성이 노예보다 늦게 참정권을 행사했다.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 행사는 지난한 투쟁의 결과였다. 1789년 8월 프랑스 혁명 중 라파이예트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했지만, 이 ‘인간’에서 여성은 제외됐다. 이에 여성 혁명가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해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분야에 있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여성의 국민 투표를 주장하는 벽보를 붙이다 체포돼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도 오를 권리가 있다”는 절규를 남긴 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신의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 구즈의 죄목은 ‘남성만의 평등을 위한 혁명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기나긴 암흑기를 거친 끝에 1944년에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허용됐다. 올해 프랑스에서 여성과 남성 장관이 똑같이 17명씩인 남녀평등 내각이 탄생하기까지 무려 220년이 걸린 셈이다.
여성 참정권을 허용하지 않던 마지막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지난 12일 여성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다. 유권자 등록 시 남성 가족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제한적인 참정권이지만, 여성 투표율이 82%로 남성보다 두 배 높았다. ‘아랍의 봄’ 이후 탄력을 받은 여성들의 투쟁의 결과다. 투표지 한 장에 스며 있는 가치에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