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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살아갈 궁리
멕시코에 온지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가진 주머니는 얇아져갔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려고 알아보니, 여기는 인건비가 싼 만큼 일을 하고 받는 보수 역시 쌀 수밖에 없는 구조로, 어쩌면 '배보다 배꼽이 클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렇잖아도 학교에서 하는 일이 많아 바쁜데,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해봤자 벌 수 있는 돈은 그저 푼돈에 불과하니, 차라리 일하는 게 돈을 버는 거라는 심정으로 일에 더욱 매진할 수밖에.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으니......
#궁여지책#
멕시코에 온지 두 달이 가까워지면서 내 호주머니는 점점 얇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상황은 아니지만, 나도 이젠 뭔가 살 궁리를 해둬야만 한다는 자각이 아니 들 수가 없는 시점이다.
물론 여태까지도 그런 일을 등한시하며 살아왔던 나는 아니다.
오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인 성당에 가서 교포들 자녀들에게 미술지도를 하겠다고 선전도 했고, 이들의 '토요 미술시장'에 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기도 하는 둥, 나름 돈을 벌기 위한 연구는 늘 염두에 두며 지내왔던 것이다.
그런데 신통치가 않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여기는 물가가 싸서(그건 나에겐 양날의 칼과 같다.) 큰 돈 안 들이고 살 수는 있는 좋은 점도 있지만, 돈을 버는 입장에서는 이익의 폭이 너무 적다는 문제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바르셀로나에서처럼 아이들 미술지도를 한다 해도 그 보수가 너무 적어 시간만 낭비할 것 같고, 그림을 판다는 것도 싼 물가 때문에, 더구나 나처럼 이름도 없는 화가의 작품은 말도 안 되는 헐값에 내놓을 수밖에 없다 보니,
이래저래 고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마냥 생각만 하며 살 수는 없고 내 처지가 그렇지도 못하다 보니, 점점 그 문제가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집 주인 토마스씨와 살아가는 얘기 끝에,
"인야, 나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어떨까?" 하고 물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시작된 일이 하나 있다.
토마스씨와의 얘기는 이렇다.
멕시코에서 돈을 만지려면, 특히 나 같은 사람은 부자들을 상대해야 할 거라는 의견이었고, 거기에는 나도 동의를 했다. 그러자 그는, 비록 자신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나름 부유층과의 인맥은 많으니 그 쪽에 눈을 돌리자며, 멕시코의 '투계 동호회'를 거론하면서, 그 사람들과 연결된 판매 목적의 그림 전시회를 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뭔가 돈벌이를 찾던 나야, 당연히 찬성할 수밖에.
그랬더니 그는,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여기 멕시코시티 '남산(Monte Sur)' 스포츠 클럽을 경영하는 사람을 찾아가자는 것이었다. 거기에 가면 '싸움닭 농장'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사람도 만나고 싸움닭도 구경한 뒤, '닭 그림'을 그려 전시를 하면 투계 동호회원들의 관심을 살 거라면서.
그렇게 둘이 의기투합하고 며칠 뒤, 그의 차를 타고 여기 남산 중턱에 올라 그 클럽 주인과 인사를 한 뒤, 싸움닭 농장에도 들러 300여 마리나 된다는 싸움닭을 관찰하며 사진을 찍게 되었다.
우리의 수탉하고는 조금 다른 여기 싸움닭은, 덩치는 약간 작았지만 날렵하고도 용맹스러워 보였으며 아름답기까지 했는데,
바람이 불어 사진 찍기에 좋은 조건이 아니었지만, 가져갔던 36방 필름 한 통을 다 사용해서 사진에 담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일이 시작되긴 했는데, 그런 나에게도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사실 한국을 떠나올 때 나는, 만약의 경우를 위해 뭔가 궁여지책(아무래도 외국에서 살려면 뭔가 돈벌이용으로 할 수 있는)을 마련한다며 몇 가지 준비를 해온 게 있는데,
어느 날 서울 인사동을 지나다 우연히, '금박지 테로 둘러쌓인 아담하지만 간단하고 이쁜(보기 좋은) 동양화'와 '합죽선'을 사던 외국 관광객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런 재료를 가지고 외국에 나가 간단한 동양화 풍의 그림을 그려넣어 팔아도 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스쳐 관심을 갖게 되었던 일이다.
금박지 테가 있어서 굳이 액자를 할 필요도 없고(하고 싶으면 해도 좋고), 휴대하기도 가볍고 보기에도 이쁜 동양화를 그려 넣어 상품화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던 것으로, 여기 같은 경우엔 그 동양화 대신 '투계'를 그려넣어도 될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나는 한국을 떠나오면서 만약을 위해 일정 량의 재료를 미리 사왔던 것으로(그래서 짐이 더 많았다.),
동양화 기법으로 싸움닭이거나 간단한 동양 식의 그림을 그려 일단 '맛보기' 식으로 전시를 해본 뒤, 반응이 좋으면 일을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길거리나 시장에서 굳이 일일이 사람들을 상대하며 팔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고, 만약 실패를 한다고 해도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여기 '남산(Monte Sur)'에 다녀온 뒤, 나는 역시 한국에서 가져온 먹물과 동양화 붓을 이용해 투계 그림과, 하얀 부채에도 간단한 산수화를 그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게 어떤 결과가 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뭔가 시도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런데 느낌이 괜찮다.
내가 비록 동양화 전공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려온 세월이 있어선지, 일반인들의 시각으로도 결코 어색하거나 질이 떨어지지는 않을(오히려 그들이 좋아하고도 남을) 그림들은 될 것이기에 고무적이다.
물론, 그렇잖아도 여기서 나는 다양한 미술 기법을 실험하고 있는데, 이런 동양화 기법에(먹물을 사용한) 대한 것도 그 실험의 영역에 포함시키기도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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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여기 멕시코 비자를 받으러 나갔다.
그런데 이민청에 가는 길에 미국 대사관이 있어서, 미국 비자 문제도 알아본다며 들어갔던 것이, 기왕에 간 김에 신청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보기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 같이 소득이나 재산은 물론 가족도 없이 혼자 몸으로 떠도는, 믿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겠다는 것으로, 심사도 받기 전에 거절부터 당한 꼴이었다.
차라리 하지 않으니만 못한 결과가 된 것이다.
'그랬지. 그 때,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청해서 일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했다 해도 될까말까 한 상황이었는데, 멕시코에서 신청하기만 하면 그냥 되는 줄 알았던 내 경솔함으로 인해 그렇게 거부당한 뒤, 그 뒤로도 10여 년(비자 자유화가 될 때까지) '입국 부적격자'로 낙인이 찍혀 미국에 갈 수 없게 된 것인데, 그 당시엔 그것마저 모르고 있었지......' 하던 이 인야는, '그 상황이 내 인생 전체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는데, 아무런 현실 감각도 없던 내가 일을 그렇게 망쳐놓고 말았던 건데, 그 순간에도 나는, '앞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이었을 뿐이야. 막연하게......' 하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풀이 죽어 이제는 멕시코 이민청으로 향했는데,
웬걸?
비자를 받기는커녕, 이들의 행정 착오로 일이 틀어져 있어서 새롭게 비자를 신청하느라 두어 시간을 그 건물 2층 3층으로 오르내려야만 했다.
속이 말이 아니었지만,
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들이 하라는 대로 감정없이 움직였다.
그러다 결국 허락을 받아 지장까지 찍었는데, 그런데도 또, 2주 후에나 찾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뭘 어쩌겠는가. 이런 게 싫으면 우리나라로 돌아가면 되는데, 우리 나라에서 안락하게 살 팔자가 못되는 사람이니......
그런 일들이 서글프게 여겨졌고, 일진이 안 좋은 날로 치면서 기분이 영 안 좋은 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엔 학교에 나가 '누드 크로키'를 했는데,
모델이 정지된 포즈를 잡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음악에 맞춰 율동을 하는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접하는 실기라 신기해서 나는 잠시 당황하기도 했는데, 그는 맨 정신이 아닌 마치 마약에 취한 사람 같은 몸짓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기분이 그래서였을까?
어쩐지 서글프고 처절한 몸짓으로 울부짖는 듯한 모델의 포즈에 빠져, 난 오전에 있었던 좋지 않은 기억들은 다 지운 채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밤늦게 아파트에 돌아와 저녁 챙겨먹고 멍청하게 앉아있다.
이놈의 배는 찝찝하게 아프기만 하다.
3 . 14
#집주인 부부#
요 며칠 집주인 부부의 냉전이 결국 말다툼으로 변하더니, 갑자기 집안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한동안 잘 지내는가 싶더니 다시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부부간의 ‘성(性)’에 관한 문제와 가족 간의 돈 문제 등이 얽혀 생긴 복잡한 싸움인 것 같다.
50이 넘은 남자와 30이 채 안된 여자의 부부관계, 그리고 가난한 안주인 친정집 식구들과의 금전문제로 인한 크고 작은 갈등으로 하루 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닌 듯 싶다.
어쨌거나 그들 관계가 그러다 보니 함께 지내는 내 입장이 곤란하기만 하다.
처음엔 그들을 이해하려고도 했지만 이제는 나도 지겨워 별 관심도 없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부부싸움을 쉽고 잦게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믿음이 가지도 않을 뿐더러 경망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함께 지내다 보니, 공짜를 너무 좋아하고, 돈을 너무 밝히는 것마저도 나에겐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들과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내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어느 시기가 되면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점들이 불거지리라는 건 예상을 했지만,
이렇게 부부싸움에 잦고, 또 하는 행동이 얄팍한 것 같아, 오래 함께 살 생각은 사라진 상태다.
남자는 남자대로 썩 미덥지 못하고, 여자는 내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내 방 청소를 해 주는 건 고맙지만, 부엌에 있는 내 것을(식료품, 비누 등) 허락도 없이 슬쩍하는 등, 내 이맛살을 찌푸리게 한다.
아직 그런 일로 굳이 다투거나 내색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아무튼 남들과 함께 산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
*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라, 아예 아침부터 작정을 하고 동양화 기법으로 부채와 싸움닭 샘플을 그렸다.
그런데 내가 봐도 그럴싸하게 나와주는 것 같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도,
'혹시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내 그림 세계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는 건 아니다.
내 작품 세계와는 너무 동떨어진(돈만을 위해서) 작품성과는 무관한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 몇 점 그리는 걸로 끝난다면 별 거 아니겠지만, 만약 그게 정말 돈과 연결돼 그 돈을 벌기 위해 계속 그런 그림만을 그리려다 보면 내 작품세계(본 그림)에 적잖은 피해가 생길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일에 너무 몰두하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겨우 그 일을 하면서 미리 겁부터 먹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아무튼 그 일도 쉽지만은 않아서,
하루 종일 그리고 밤까지 방에 처박혀 그 일을 했더니 몇 점의 모델이 나오긴 했는데,
그러느라 오늘도 나는 진이 빠져있다.
3 . 16
#종족 보존의 본능#
무슨 꿈인가 시리즈로 수도 없이 이어서 꾸다가 깨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나는 갑자기,
'어딘가 정자 은행을 알아봐 내 정자를 보관해 놓아야 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대로 2 세도 없이 그냥 가는 건 너무 허무한 것 같았다.
아직은 젊으니, 더 늙기 전에 정액을 뽑아 보관했다가 나중에 알맞은(상황에 따라 좋아할 수 있는) 여자의 난자에 인공수정하는......
'근데,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인가?'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아무튼 그랬다.
'책임감없이 여기저기 애를 만들어 놓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나처럼 이렇게 젊음을 무심한 척 보내는 것도 문제이리라.
여자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아무 여자나 상대를 안 하려는 것도, 여자를 까다롭게 고르는 것도 다 '큰 문제'이리라. 아니, 나는 어쩌면 혼자 사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사람(여자)을 이해하는 폭이 좁아져 있고 이미 굳어져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도 이어서 했는데,
'근데, 왜, 새벽에 일어나 생뚱맞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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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알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이래저래 몇 가지 일들이 겹쳐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됐던 것이라는 걸.
학교 벽화 실기실에서의 일이다.
한 여자 애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애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기에 나는 그저 형식적인 대꾸만을 해주곤 했다. 내 쪽에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애가 점점 적극적으로 말도 걸어오고 마실 것도 가져오고 나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농도가 깊어지다 보니, 나는 귀찮아 죽겠는데, 주변에서도 그런 기운을 감지할 수밖에 없었던 듯, 급기야,
"인야, M이 너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모르겠어?" 하고 삐메가 물어왔다.
"글쎄, 그렇지만 난... 관심 없어."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왜? 그만 하면 얼굴도 괜찮고... 나쁠 거 없을 거 같은데......" 하면서 실눈을 뜨면서 나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삐메, 그런 소리 하지 마! 난, 어서 빨리 벽화 공부 끝내고 멕시코를 떠나야 해!" 하자,
"그게 여자하고 무슨 상관이야? 더구나 여자가 널 좋아한다는데!" 하고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그에게,
"시끄러! 아무튼, 나는 관심 없으니......" 하고 아예 대꾸 자체를 하지 않으려 다른 일을 하는 식으로 그 자리를 피하곤 해왔다.
아무튼 눈썹이 짙은, 20대 중반의 한 여자 애가 나를 좋아하는지, 내가 퉁퉁대는데도 자꾸만 귀찮게 군다.
나는 가급적 그 애와 마주하지 않으려 하고, 나로 인해서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하고.(내가 그아이에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알베르또(Alberto)'라는 삐메의 조수 격인 청년이 있다.
그는 수강생은 아니고,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실기실에 나타나곤 하는데, 잘은 모르지만 큰 벽화 공사가 있으면, 교수와 삐메와 팀을 이뤄 작업을 하는 멤버 같았다. 지금은(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일감이 없어서 그렇지, 일만 생기면 언제든 함께 일하게 될 준비가 돼 있는.
내가 실기실 열쇠까지 갖고 들락거릴 정도가 되다 보니, 실기실에 자주 나타나는 알베르또와도 상당히 친해진 상탠데, 하루는 우연히 삐메의 사생활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사생활'이라기 보다는 '비밀스런 그의 가족 관계'라고나 할까?
결코 삐메가 나에게 직접 밝히지 않았던(여자를 상당히 밝히는 그가 왜 혼자 사는지 궁금하긴 했었는데), 그의 전력에 대해서였다.
그것도 일부러 알려고 그랬던 게 아닌, 삐메가 하도 여자를 밝히기 때문에(툭하면 20대 젊은 여자들과 춤추러 간다는 등, 미팅을 하자는 둥 나를 꼬드기기 때문에) 미덥지 않게 생각하던 참에, 그 날도 삐메가 신이 나서,
"인야, 나 오늘 저녁에 소치밀꼬에(디스코 텍) 가거든? 그래서 좀 일찍 퇴근할 테니까, 문단속 잘하고 가라구!" 하며 룰루랄라 퇴근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꼭 '푼수'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베르또가(그날 알베르또가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아이고, 저 친구.. 여성편력하고는!" 하고 혀를 차기에,
"삐메가 그래?"하고 놀라며 물었더니,
"몰랐어? 인야. 삐메가 여태까지 세 명의 여자와 함께 살았는데, 각각의 여자와 둘 씩의 자식들을 낳아 총 여섯 명의 자식이 있는 아버진데, 지금은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거든!" 하는 것이었다.
"뭐라고?" 나에겐 과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러고 다니니......" 하더니, "그, 제일 큰 애가 아들인데... 열 여섯인가 될 걸?" 하는데,
난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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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최근에 내 주변에선 그런 일이 벌어졌고, 그런 일들이 뭉뚱그려져 나와 연관시켜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이라고 본다.
글쎄, 나에게도 그런 '종족 보존의 본능'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 같다.
더구나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막둥이로 자라서 특히),
결혼을 안했다 뿐이지 만약에 나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이뻐 죽고 말 사람이니까. #
'흠! 이걸 어떡한다지? '삐메'에 대한 얘기가 적나라하게 나와 마치 인신공격이라도 한 것 같은 글인데...... 그렇다고 이 '에세이'를 빼버릴 수도 없고......' 하면서 이 인야는 잠시 하던 일손을 멈췄다. 그러면서, '사실이긴 하지만, 다분히 '삐메'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일이라서...... 근데, 그 친구가 사람은 털털하고 좋은데, 특히 여자 문제가 영 문란해서...... 근데, 한 사람의 '사람 됨됨이'와 '여성 편력' 은 별 게의 문젠가? 그런 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설명해야 한다지? 삐메처럼 분명, 사람은 좋은데 여성과의 관계가 문란해서, 평가절하될 수도 있는 사람이 있는데......'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 인야는, '글쎄, 그건 그렇다 쳐도 자식들이 있는데, 그 자식들에게 아버지 역할도 못(안)하고 아예 남 같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면서는, '허긴 그 시절에도 나는 삐메가 그런 면에선 영 미덥지 못하긴 했었지. 나와 개인적인 인간 관계야 별 이상이 없었지만(성격이 능글능글하고 두리뭉술하면서 화도 잘 안내는 온순한), 내 입장에서는 그의 살아가는 태도나 자세가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어디 이 얘기뿐인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와 비슷한 얘기들이 나오기 때문에, 비단 이번 일 하나 가지고 내 쪽에서 고민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인데...... 그리고 사실 이렇게 고민하다가는 내 멕시코 시절 이야기를 제대로 이어갈 수가 없을 터고...... 그만큼 삐메가 내 그 시절의 이야기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사람이라......' 하면서는, '어쩔 수가 없어. 그냥 밀고 나갈 수밖에.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일부러 삐메를 곤궁으로 처박기 위한 처사도 아닌 나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얘기에 등장한 것이니, 그렇다고 그에 관한 얘기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시절, 멕시코에서는 '삐메' 뿐만이 아닌, 그와 비슷한 사례가 하나 둘이 아니었던 걸로 아니까. 비근한 예로, 함께 살던 '토마스' 씨도 '라우라'와는 20년 정도의 나이 차가 있는 부부관계였던 것만 봐도......' 하고는,
'아, 내가 이런 일을 한답시고, 이런 식으로 나와 관계가 있던 사람들의 살아간 모습을 다 까발리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으니 어떡한다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전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삶이었을 텐데......' 하다간, '내가 주제넘게, 내 일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원래, 나에게 그런 의도는 추호도 없었는데, 내가 특정한 타인을 볼모로 내 자신의 이야기를 미화시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구나. 그 사람은 전혀 원치 않는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삐메, 미안해. 나는 여성 편력이 심한 니가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결코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어.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인데, 너도 좋은 점이 많은 사람이었거든...... 그건, 내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냥 빈말을 하는 게 아닌, 평생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던 일이야. 다만, 내 글에 니가 그런 역할로 나와서 그렇다는 것일 뿐. 그리고 그 당시에는 이런 일이 있을 줄 모르는 상태로 기록해 두었던 건데,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용서해 줘......' 하면서 다시 자판으로 손을 옮겼다.
*
근데, 왜 이렇게 한국에선 편지가 안 온다지?
정말, 편지 한 통이 안 오네......
한국 사람들끼리 단합대회라도 했나?
마치 자기들끼리 짠 것처럼 편지가 안 오네......
아, 내가 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이유는?
내 속마음을 다른 사람(상대방)에게 진지하게 전하고 싶어서 일 텐데,
그 쪽에서 편지를 해오지 않으니, 나도 멈출 수밖에 없네.
쓰고 싶어도, 주저주저해지네......
아, 오늘 같은 밤엔 편지라도 쓰고 싶었지만, 쓸 사람이 없다.
몇몇 사람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내 얘기만 떠들어댈 것 같아 관두고 말았다.
3 . 17
오후엔 돈을 벌기 위한 동양화를 해야만 했다.
일을 하면서도,
'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내 본 작품을 하면 좋으련만......' 하는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과 정열을 뺏기고 나니, 남는 게 없는 기분이다.
그래도 우선 살아야한다.
3 . 18
#동상이몽#
이 집 주인 '토마스'씨는 뭔가 석연찮은 사람이다.
아침에 그와 '싸움닭 그림 전시'에 관한 얘기를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그가 그 일에 관심을 가져준 건 고맙지만, 그 일의 주체가 되는 나와의 생각이 너무 다른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 그저 예쁘장한 그림을 그려 전시해 놓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려는 생각인데, 그는 뭔가 거창하게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난, 일단 조용하게 그런 전시를 열면서 혹시 그림이 팔리면 다행이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그는 가만히 보면 허풍이 상당히 세고, 또 장삿속도 강해, 내 의도와는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글쎄, 이 일이 제대로 진행이 될까?
내가 최근에 돈벌이용으로 그렸던 그림 샘플인 '싸움닭'과 '부채' 두 개씩을 전시 장소일 '스포츠 클럽' 주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가 가져갔는데,
나에게 돌려준 것은 싸움닭 그림은 제대론데, 부채는 한 개 만을 가져왔다. 그러더니 장황하게 그 전시에 대해 떠들더니, 무슨 일인지 그 부채 하나의 행방에 대해선 아무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게 이상해서 오늘 아침에 물어보니, 자기가 그 친구(스포츠 클럽 주인)에게 선물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는, 그 부채 값은 자신이 나에게 지불할 거라는 말을 덧붙이던데, 나는 그에게 부채 값을 정해준 적도 없고, 그런 일에 대해 그가 사전에 나에게 그 어떤 언지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 그 친구라는 사람이 부채 그림을 좋아했던가 본데, 내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선물을 했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가 자기 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뇌물로 주었던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지만, 나에겐 웃기는 일이었다.
사실 그 그림은, 원래 '보여주기' 샘플로, 말 그대로 잠깐 보여주고 그 쪽의 의견을 들어본 뒤, 좋다고 하면 그런 식으로 더 많이 그려 나중에 전시를 해보자는 의미로 가져갔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팔거나 선물하는 것과 연결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자기 맘대로 선물을 하고는 입 닫고 있다가,
내가 이상해서 물어봐서야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것이니.
물론 그 부채 하나는 거기서 전시해 주는 대가로 내가 그 친구라는 사람에게 선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과 사는 지켜야 할 것 아니던가.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다 해놓고 그깟 돈 몇 푼 나에게 지불한다더니(그렇다고 내가 그 돈을 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인데), 꿀 먹은 벙어리다.
비단 이 일 뿐만이 아니다. 가만히 보면 보통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 전시는 그가 나를 위해 제안을 했고 힘을 써주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나는 어떻거나 전시가 끝나면 최소한 뭔가 감사의 표시를 하리라고 맘 먹고는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가 그 전시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데에는 날 돕겠다는 의도도 분명 있기는 하지만, 그 이면엔 그 스포츠클럽에 고객을 유치하는 성과를 그 주인에게 보여주면서 뭔가 자기 잇속을 차리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난번에 싸움닭 농장에 갔을 때도 느낀 거지만, 내 보기엔 그 친구는 이 토마스씨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는 그 친구에게 뭔가 약점을 잡힌 듯, 그래서 이런 전시라도 열어 뭔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하는 비굴한 처신이 내 눈으로도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는 또, 나를 어르는 듯 나는 전혀 관심에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뭐, 그 스포츠클럽에 회원증을 팔면 거기에 따른 코미션을 나에게도 주겠다고 하는 둥 뭔가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는 어느새,
내 전시에 여기 멕시코에 있는 한국 대사를 비롯해, 여기 아파트와 학교가 있는 '소치밀꼬(Xochimilco)' 구역 장(長)도 초대하고, '법원'의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기가 아는 사람도 초대하겠다는 등의 계획까지 갖고(꿈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일이던가 말이다.
그러니까 그는(무지로), 그 전시를 마치 내 대표작을 선보이는 전시로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싸움닭'을 그려 팔려고 멕시코에 온 것도 아니고, '싸구려 부채 그림'을 그려 파는 화가' 역시 아닌데, 내 '화가'로서의 이름과 명예를 다 걸고 대내외적으로 떠들면서 그런 전시를 하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한국 대사가 그런 그림 전시하는데 올 리도 만무할 뿐더러, 내가 무슨 낯으로 그런 그림을 전시한다고 대사까지 초대할 터무니 없는 행동을 할 사람으로 여겼는지,
그저, 이쁘장한 그림을 그려 호구지책으로 싸게 팔 목적의(내 원래 그림과는 다른, 그리고 작품성에 대한 고민 같은 것도 없이, 서명까지도 다른 식으로 하게 될, 그렇다고 내가 사람들을 속인다거나 사기를 치는 것과는 다른 개념으로 봐야 하는) 전시를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의 상상력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니, 그에게 팍 질려버린 상태다.
참,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고, 나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그였다.
정말, 이건 완전 '동상이몽'이다.
그러니, 그 일이 제대로 되겠는가 말이다.
결국, 이 일도 물 건너간 꼴이다. #
'그렇게 그 일도 흐지부지 끝났었지. 말도 안 되는 일이어서...... ' 하던 이 인야는, '그래도 그 집에서는 나올 수 없었어. 나에겐 상당히 현실적인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집이었으니까. 그 '토마스'씨도 허풍이 세서 그렇지, 그렇다고 막무가내는 아니었으니까.' 하면서 이번에는 다시 책장에서 '멕시코' 앨범을 꺼내, 그 시절의 사진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
겨우 이 집에서 한 달 반 정도 살았는데, 다른건 다 접어두고라도 이집 주인의 허풍과 정직성이 마음에 걸린다.
그들이 나를 택해 이 집에 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우선적으로 나에게 요구한 게 ‘정직’아니었던가 말이다.
집값이 싸고 또 학교가 가깝고, 집안 살림을 함께 사용할 수 있어서 좋긴 한데, 집 주인의 인간성이 영 걸린다.
오늘도 학교에서 지친 몸으로 돌아와, 어제 사다놓았던 세 쪽의 닭고기에 온갖 야채를 넣고, 쌀도 조금 넣어 압력밥솥에 고아 먹었다.
그런 뒤 언뜻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던가 보았다.
일어나보니 자정이 넘어, 다시 잠 자리에 들었는데 배에 통증이 고개를 들었다.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결국 일어나 앉아 있다.
졸다가 다시 누웠다가 또 깨었다.
그렇게 밤을 지샜다.
3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