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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완도읍에서 서남쪽으로 12km쯤 떨어진 보길도는 상록수가 우거지고 물이 맑아 자연경관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으로 더욱 알려진 곳이다. 윤선도 유적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별서정원으로 고산이 직접 조성한 생활공간이자 놀이공간으로 조선 가사문학의 대표적인[어부사시사]가 이곳에서 탄생되었다.고산 윤선도, 그의 나이 51세 때인 조선 인조15년(1637)에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섬에 터를 잡았는데, 그 곳이 바로 보길도이다.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섬의 주봉인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그 후 두 차례의 귀양을 가고 벼슬을 하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섬 여기저기에 세연정,무민당, 곡수당 등 건물을 짓고, 바위 등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을 붙였는데, 이 정자와 대가 모두 25여 개소에 이르며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를 남겼다.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 세연정사적 보길도는 세연정에서 보는 인공정원의 풍경과 동천 석실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어부사시사의 현장인 예송리 해안에서 보는 바다 풍경들이 대단히 아름다운 빼어난 섬이다. 보길도 이곳 부용동은 조선의 시인 고산 윤선도(1587~1671)선생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살던 유서 깊은곳이다.
병자호란의 국치와 추잡한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부용동의 아름다운 절승에 의탁하여 자기구제와 초속적 자유를 얻었다. 부용동은 고산이 51세때(1637년) 들어와 85세(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13년간 살면서 7차례나 드나들었고, 어부사시사 40수와 수십편의 한시를 창작하였다. 고산의 부용동 생활은 격자봉 밑에 낙서재와 무민당을 짓고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었다. 곡수당 지역은 초당,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월하탄이 조성되어 고산이 휴식하던 장소이다. 곡수당 옆에는 서재가 건립되어 고산의 아들들과 제자들이 살던 곳이다. 동천석실은 낙서재 건너편 바위산 험한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쳔여평 공간에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와 한칸 짜리 목조건물인 동천석실이 있다. 이곳은 고산이 책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 세연정 지역은 3천여 평의 계원으로 부용동 입구에 있다. 세연정을 중심으로 조우에 연못 (205여 평)과 계담(600여 평)과 판석재방과 동대, 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아름답다. 또 고산의 유적으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행사인 유상공수를 행하던 낭음계, 용이 승천하는 승용대, 연정이 있었던 조산과 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는 하한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던 혁희대, 석전, 미산 등 경승의 산봉우리마다 고산은 상징적 이름을 붙였다. 부용동 유적은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자연과의 조화성으로 구성된 한국 최고 최대의 별서조경 유적이다. * 판석보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보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 혹약암 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 중의 하나이다. 이 바위는 '혹약제연'이란 효사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 서대 현재는 나선형으로 세단이 남아 있으며, 그 규모는 축단의 한 변이 7.5m정도의 정방형이며, 그 높이는 2.2m에 이른다.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을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 행위를 했던 곳으로 춤을 추며 돌면 정성에 오르도록 나선형 계단을 이뤘다. * 회수담 세연정 동쪽 축단 밑에 계담에서 인공연못으로 흘러드는 터널식 수입구가 있다. 계담쪽에서 물이 들어가는 수구는 다섯구멍이며, 인공 연못쪽으로 나오는 수구는 세구명이다. 이를 '오입삼출'이라 하는데, 이 구조는 아주 독특한데 물막이 석축에 다섯곳의 흡수구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되, 배출하는 구멍은 세곳만 만들어 들어오고 나가는 수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이다. * 비홍교 [보길도지]에는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정자 서쪽, 제방 동쪽 겨우 한 간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에 오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이 연결되어 있어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 사투암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 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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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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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정자에서 내려와 건너왔던 다리인 비홍교의 반대편으로 나오면,
세연정에서 보면 오른쪽 판석보 옆에 위치해 있는 "동대"의 모습으로,
방지의 동쪽 물가에는 돌로된 네모진 단 두 개(동대와 서대)를 나란히 꾸며놓았는데,
가로 6.7m, 세로 7.5m의 장방형으로 높이는 1.5m이며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서대"의 모습으로, 서대는 세로 7.5m, 높이 2.2m의 규모로,
동대와 서대는 아름다운 기녀들과 함께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던 자리라고 합니다.
세연정(洗然亭) 부근은 윤선도의 원림(甫吉島 尹善道 園林)에서 가장 공들여 꾸민곳으로,
해변에 바로 인접한 동구(洞口)에 인공으로 물길을 조성하면서 연못들을 만들고,
정자와 대(臺)를 지어 경관을 즐기도록 하였다고 하며,
정자의 남쪽으로 나오면 물길을 막은 다리인 "판석보(板石洑)"를 만나게 되는데,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라"고도 불리는 다리로,
세연지(洗然池)의 저수를 위해 만든 둑의 역활을 하는 일종의 보(洑)이며,
건기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이 유지되도록 만든 특징이 있어,
보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고 합니다.
판석보를 건너 세연정(洗然亭)을 따라 연못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세연정(洗然亭) 주변의 정취를 느껴 보며,
조선시대 남인(南人)의 거두로 서인(西人)의 수장인 송시열(宋時烈)에게, 당쟁에서 번번이 밀려 어러차례 귀양살이를 하면서,
지기수양과 함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꿈꾸며 자신만의 세계를 공들여 조성 했슴을 느껴봅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것으로,
윤선도(尹善道)가 지은 오우가(五友歌)를 가져와 봅니다.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로다
동산에 달 오르니 그것 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이면 그만이지 또 더하여 무엇 하리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하도 많다
깨끗하고도 그치지 않은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자마자 빨리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다가 누래지는가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 모르는가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 그로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키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리하고도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한밤중에 밝은 것이 너만 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오우가(五友歌)는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을 다섯 벗으로 의인화하고,
부단, 불변, 불굴, 불욕, 불언의 덕성을 예찬하며,
본인에게 좌절을 안겨준 현실에 무상함을 느끼면서 변하지 않는 자연을 노래한 연시조 입니다.
세연정을 따라 돌아 나오다 보면,
잘 조성되어 있는 대나무와 노거수 동백의 숲도 만나게 되며,
대나무 숲 아래에는,
목을 길게 빼면서 마치 물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거북이 형상의 바위도 눈에 들어 옵니다.
동양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과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며,
정사(亭舍)와 연못을 축조하여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하였던 유적지로,
보길도를 대표할만한 명승지인 보길도 윤선도의 원림(甫吉島 尹善道 園林)인,
세연정(洗然亭) 방문기 입니다.
정원이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하여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에서 동산과 숲의 자연스런 상태를 그대로 조경대상으로 삼아,
적절한 위치에 인공적인 조경을 삼가면서 더불어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며,
중국과 우리나라에선 원림을, 일본에서는 인공적인 정원을 주로 선호 하는데,
부용동이라 한 연유는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여 부용이라 이름했다”고하며,
부용동의 중심이 되는 이곳에 세워진 정자가 "세연정(洗然亭)" 입니다.
연못인 세연지(洗然池)의 물은,
머리를 맞대고 있는 인공 연못 회수담으로 흘러들어 두 개의 연못을 이루는데,
회수담은 흐르는 물을 가두어 저절로 이루어진 세연지와는 달리 사람의 손으로 판 방형(方形)의 인공 연못이며,
가운데에는 둥그런 인공섬을 만들어 두었고,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 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쪽이 살짝 들려진 모습을 하고 있어,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 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곳 별서정원(別墅庭園)은 세연정을 중심으로 조우에 연못 (205여 평)과,
계담(600여 평)과 판석재방과 동대, 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어우러져 조성이 되어 있는데,
정자인 세연정(洗然亭)은 연못한쪽의 섬에 지어져 있어 "비홍교"라는 다리를 건너서 들어가면 만날수 있으며,
정자인 세연정(洗然亭)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의 구조로,
호남식 정자의 전형인 마루 가운데 마루방을 들인 비교적 큰 규모의 정자이며,
연못인 세연지(洗然池) 중앙에 놓인 세연정은,
일반 누각과 다르게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에 창호와 마루를 둘렀는데,
창호는 분합문으로 문을 모두 들어 걸면 사방이 개방된 정자가 되어 주변의 풍경이 정자와 조화를 이룹니다.
세연정(洗然亭)의 현판으로,
세연정은 1637년 윤선도(尹善道)가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로,
세연(洗然)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의미이며,
현판은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는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습니다.
이곳은 1637년(인조 15) 윤선도가 51세 때,
처음으로 보길도를 찾아 입구에 세연정(洗然亭)과 연못을 축조 한 곳으로,
물과 바위와 대(臺)와 소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造園)공간으로,
지금까지 부용동원림 중에서도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며,
세연정(洗然亭)의 주인인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학자로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이며,
집안은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였고 고조부인 윤효정은 전라도 해남에 넓은 땅을 가진 대부호이기도 했는데,
8세 때 백부인 관찰공(觀察公) 유기(唯幾)의 양자로 가서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으며,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 하였고,
1616년(광해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 났습니다.
윤선도의 정치 생활은 순탄치 않아,
당파싸움에 휩쓸려 17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19년 동안 세상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았는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보길도에서 은거하였으며,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 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西人)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많은 유배생활을 하다가,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 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으며,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되었고 시호는 충헌(忠憲) 입니다.
보길도는 1631년(인조 15)인 51세 때부터 85세로 죽을 때까지 13년간 머물며,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와 오우가(五友歌)외 31편의 한시를 남기는 등,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훌륭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으로
윤선도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일찍부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주옥같은 시조를 남겼으며,
윤선도는 가난한 백성을 보살피기에 앞장섰는데,
생활이 어려워 세금을 내지 못하고 옥에 갇힌 사람을 대신해 여러 번 세금을 내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산(孤山)은 세연정의 앞에 석축단상인 동대와 서대,
서쪽 산의 옥소대를 끌어들인 거대하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 내었고,
이곳에서 예악(禮樂)으로 자연과 합일을 추구 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연정과 세연지는 인공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인공미가 자연에 잘 녹아 있어,
옛 선비들은 연못을 네모나게 만들고 그 안에 동그랗게 섬을 만들었는데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뜻이며,
하늘과 땅의 형상에 대한 동아시아 전통 우주론의 기본으로,
네모난 연못은 땅을 상징하고 동그란 섬은 하늘을 상징 하는데,
하늘을 품은 땅으로 이는 인간의 몸 안에 마음을 품었다는 옛 선비들의 사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못은 곡지(曲池)와 방지(方池)로 구성 되는데,
동구를 흐르는 내를 돌로 된 보(판석보)로 막아 만든 곡지에는 큰바위들을 점점이 노출시켰으며,
방지에는 한 쪽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고,
연못의 물이 차오름에 따라,
크고 작은 돌과 바위들이 잠기는 정도 에서도 의미를 부여 하였다고 합니다.
보길도 여행의 정점, 보길도 윤선도의 원림(甫吉島 尹善道 園林)
남도답사 일번지를 여행하면서,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에 위치하고 있는, 보길도 윤선도의 원림(甫吉島 尹善道 園林)의 정점인 "세연정(洗然亭)"을 찾았습니다. 윤선도 원림중 하나인 세연정(洗然亭)을 찾으면, 입구에서 먼저 "윤선도 문학관"을 만나게 되며, 윤선도 문학관은 보길도에 대한 설명과 고산 윤선도의 문학 사상을 재조명하고, 후진들의 문화교육의 장으로 활용한다는 목적으로 세워 졌으며, 전시관에는 윤선도가 사용했던 물건들과 시 그의 업적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전시실의 천정은 특이하게 한옥의 천정을 그대로 노출시켜 두었으며, 전시되어 있는 유물등을 통해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알게 됩니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32㎞, 해남반도의 남단에서는 12㎞ 떨어진 외딴섬인 보길도는, 상록수가 우거지고 물이 맑아 자연경관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유적으로 더욱 알려진 곳으로, 보길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격자봉(格紫峰)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계류가 흐르고 있어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이 일대에 정사(亭舍)와 연못을 축조하여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하였는데, 보길도 윤선도의 원림(甫吉島 尹善道 園林)은 명승 제34호로 지정되어 있고, 윤선도 원림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양식을 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정원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의 별서정원으로, 광주에 있는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소쇄원(瀟灑園)과, 정영방(鄭榮邦,1577~1650)이 건립한 경북 영양의 서석지(瑞石池)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별서정원(別墅庭園)에 해당 합니다. 별서(別墅)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으로, 주된 일상을 위한 저택에서 떨어져 산수가 빼어난 장소에 지어진 별저(別邸)를 지칭하는 말이며, 또한 원림(園林)이란 정원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
<세연정>
<예송리 몽돌 해수욕장>
<동천석실>
<망끝 전망대>
<완도-보길도 페리호>
2022-02-09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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