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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저는 매달 넷째 주일에 단에 서고 있는데 오늘은 12월 셋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 넷째 주일은 성탄절 당일(25일)입니다.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날은 담임목사님께서 성탄을 축하하고 일년을 마무리하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순서를 바꿨습니다.
저는 주일낮예배에서 작년에는 전반기에는 주기도문을 강해했고, 후반기에는 십계명을 강해했습니다.
올해는 사도신경을 강해했는데 오늘로 끝이 납니다.
내년부터는 로마서를 강해할 할 예정입니다.
로마서 강해는 약 3년 가까이 걸릴 것 같습니다.
사도신경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영원히 사는 것”을 두 글자로 줄이면 “영생”이 됩니다.
“사도신경 새번역”은 끝이 “영생을 믿습니다”라 되어 있습니다.
“감리교 교리적 선언”은 마지막 조항인 제8조에서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아멘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감리교 교리적 선언을 손질해서 1997년에 “감리교 신앙고백”을 만들어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이렇게 '영생'이 들어 있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 영생은 기독교신앙의 결론입니다.
기독교신앙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믿습니까?
영원히 살기 위해, 영생을 누리기 위해 믿습니다.
감리교 교리적 선언을 해설한 『기독교의 원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감리교의 대표적인 고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책인데 그 책에서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를 해설한 부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영생이 인생의 이상이며 궁극이 되지 아니하고는 인생의 참된 의의를 이해하기 어렵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종교는 희망이다
희망 가운데 가장 큰 희망은 영생의 희망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영생이라는 말을 자기네 이름으로 삼고 있는 이단도 있습니다.
영생교인데요, 정식 이름은 ‘영생교 하나님의 성회 승리제단’, 깁니다.
부천에 본부가 있는데 그 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문제가 있어서 한동안 물의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작년에 부천 영생교에서 코로나 집단 감염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있어서 ‘아, 지금도 존속해 있구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단 종파들이 교회에 주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좋은 말들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다락방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단종파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구원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영생을 위해 오셨습니다.
기독교인이면 거의 다 암송하고 있는 성경말씀, 가장 중요한 말씀,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거기에도 ‘영생’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그 다음, 무엇입니까?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주셨습니다.
아까 한 질문,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를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섰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이 땅에 보내면 태어날 곳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난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먼 나라 애굽으로 피난 가야 한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이 지내야 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만큼 큽니다.
목사님들이 축도를 하실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축도의 원형인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사랑, 그렇게 큽니다.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성도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찬송이지요.
1절,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3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큽니다.
여러분, 축도를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하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동시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기억해야 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제 한 주간 남은 대림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보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중요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탈북민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몇 달 동안 조사를 받습니다.
지금은 그 조사기관이 경기도 시흥시로 옮겼는데 십여 년 전까지는 서울 대방동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 기관 안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이 평화교회였는데요,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나?’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분들, 예수의 ‘예’자도 모르는 분들입니다.
탈북을 해서 중국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전도를 받은 분들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처음 예배를 드리는 분들입니다.
성경 찾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무슨 성경 몇 장, 몇 절입니다”하고서는 그들 가운데 들어가서 성경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가신 분, 반주하러 가신 분들 모두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 본문을 찾은 다음에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무슨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참 지혜를 구하다가 얻은 답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억하게 하자’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지고 만든 간단한 율동이 있습니다.
저는 율동 같은 것에 재능이 없어서 전도사님 한 분을 모시고 가서 10분 정도 그것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짧고 강한 설교를 했습니다.
탈북민들, 그 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하나원이라는 곳에서 남한 정착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옵니다.
사회에 나와서는 나라에서 제공한 임대주택에서 살게 됩니다.
저는 분당에 십여 년 살았는데 분당에 세 군데 그런 임대주택 단지가 있고 150명에서 200명 정도의 탈북민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가면 어디선가 뵌 분 같다고들 합니다.
조사 받는 곳에 있을 때 예배시간에 만나지 않았느냐고 하면 ‘아 생각난다’ 합니다.
얘배 드릴 때 제가 한 설교도 생각나느냐고 하면 고개를 가로 젓습니다.
그때 그분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되지?’ ‘어떻게 살아가지?’ 하는 걱정에 웬만한 아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기억난다고 하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참 좋다고, 그 말씀 잊지 말고, 잊지 않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가서 잘 믿어 영생을 누리라고 당부하곤 했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이 무엇입니까?
지난 달에 말씀드렸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저기 부산에 가면 유엔묘지가 있습니다.
정확한 이름은 ‘유엔평화기념공원’인데요, 6․25 전쟁 때 한국에서 전사한 유엔군들의 유해들의 안장한 곳입니다.
거기에 가면 ‘아, 이렇게 많은 분들의 희생 위에 우리가 오늘의 번영을 누리고 있구나’ 숙연해집니다.
6․25 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전사한 것은 미군입니다.
모두 36,492명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엔평화기념공원에 미군 묘지는 마흔 개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미군은 해외에서 싸우다가 전사하면 그 유해는 고국으로 가지고 가서 안장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미군들이 용감하게 싸우게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나는 비록 이 땅에서 죽더라도 내 몸은 조국으로,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이것을 생각하며 용감하게 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군인은 아니지만 그것을 보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죽지만 신령한 몸으로 영원한 나라로 돌아간다’ 믿으면서 신자다운 삶, 신자의 본분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생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실아나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입니까?
누구나 겪는 일인데 핸드폰의 SNS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엊그제 고등학교 동창생이 이런 유머를 기독동창회 단톡방에 올렸습니다.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만약 집과 자동차를 몽땅 팔아 교회에 헌금하면 천당에 갈까요?” 하고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불었다.
“아뇨”라고 아이들이 모두 다 대답했다.
“그럼, 교회 청소를 매일하면 천당 갈까요?”
“아뇨”
"그럼 내가 동물들을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면 천당 갈까요?“
“아뇨.”
“그럼 어떡해야 천당에 갈 수 있죠?”
그러자 뒤에 앉아 있던 다섯 살 먹은 사내아이가 외쳤다.
“죽어야 갑니다.”
천당 간다는 것과 영생은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말인데요, 정말 죽어야만 영생을 누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좋은 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영생과 연결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나라에서의 삶을 연습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현재적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셨습니다.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도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0장 28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리
“이를 행하라” 이 말씀을 의역하면 “현재적 영생의 삶을 살아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묻는 관리에게도 같은 취지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2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땅에서부터 영생과 연결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영생”이라는 말이 51번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제일 많이 나옵니다.
전체의 5분의 2에 기까운 19번이나 나옵니다.
요한이 기록한 요한1서에도 네 번 나옵니다.
요한은 영생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말씀을 본문으로 택할까?’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 따라 설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달라지지요.
여러 번 살피다가 오늘의 말씀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말은 창세기 3장에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왜 이 말씀을 오늘의 본문으로 택했을까요?
먼저, 현재적 영생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서점에 가면 ‘나는 천국 다녀왔습니다’ 하는 내용을 담은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책들을 살필 때 매우 조심스러워합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그런 책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1987년에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는 책이 니왔습니다.
휴거, 마지막 때 사람들이 들려올라간다는 내용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미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에서 첫 자와 가운데 ‘미’자를 합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미선교회에 속한 사람들, 직장 다니던 사람들, 직장 그만두었습니다.
‘곧 휴거가 될 텐데 일을 해서 뭐해?’
자녀들 학교 나가지 않았습니다.
‘곧 휴거가 될 텐데 공부는 해서 뭐해?’
집을 팔아 다미선교회에 바쳤습니다.
‘곧 휴거가 될 텐데 집이 뭐 필요해?
큰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사회에서는 정통교회와 이단을 잘 구분하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교회도 비난과 조롱을 많이 받았습니다.
역시 1987년에 퍼시 콜레(Percy Thomas Collett, 1902~1988)라는 미국인이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나왓습니다.
이 책이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퍼시 콜레가 1988년 5월에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교회가 떠들썩했습니다.
저는 그때 언론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취재를 갔습니다.
가서 만나보니 얼굴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왜, 믿음이나 인격이 얼굴에 나타나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이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집회 중에 여러 가지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영어를 잘 하는 침례교 목사님이 통역을 맡았는데 퍼시 콜레의 설교 가운데 성경에 어긋나는 내용이 반복되어서 이 분이 통역을 거부하고 중간에 내려 온 일이 생겼습니다.
기자들이 ‘이거 아무래도 이상하다’하고서 자세히 살폈는데 사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여럿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이분을 퍼시 콜레라고 부르지 않고 ‘퍼시 콜레라’라고 불렀습니다.
그 얼마 전에 콜레라가 퍼진 일이 있었거든요.
지금 같으면 ‘퍼시 코로나’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인터넷에서 ‘퍼시 콜레’를 검색해 보니까 ‘종교 사기꾼’이라고 나오더군요.
그런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목회를 할 때 심방을 가면 ‘책꽂이에 무슨 책이 꽂혀있나?’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제가 신뢰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책꽂이에 꽂아두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저보다 일곱 살 위인, 잘 아는 장로교 목사님이 쓴 책인데요, 그 책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 책을 쓴 다음에 그 분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문서선교 활동을 하려고 하는데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놀랐습니다.
전화를 해도 잘 받지 않고 인사를 해도 마찬가지이던 분입니다.
대인관계가 그래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요.
그런데 먼저 전화를 해서 놀랐습니다.
그 다음에는 목소리가 너무 밝아져서 또 놀랐습니다.
목회도 하고 신학교에서 구약학 교수로 일한 분인데요, 은퇴 후에 자비량 봉사로 인도 등 여러 나라의 신학교에 가서 찾아가서 구약을 가르쳤습니다.
“목사님, 영어로 강의하셔야 할 텐데 목사님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셨으니까 영어 강의가 어렵지 않지요?” 했더니 “영어로 강의를 듣는 것과 강의를 하는 것은 달라요. 어려워요. 그래도 해야지요.” 하더군요.
커피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 늦은 나이에 왠 커피 바리스타 자격증이에요?“ 물었더니 찾아오는 사람들, 만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고 싶어서 애써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담임 목사님께서도 그런 마음으로 커피를 열심히 연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아, 이 목사님, 확실히 천국을 체험을 하셨구나. 그래서 이렇게 변했구나’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영생을 믿는다면 영생과 연결된 삶을 사셔야 합니다.
영생을 훈련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어느 운동 팀 감독은 훈련을 할 때마다 훈련은 실제 경기처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가서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교인은 영생 얻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끼?
영생을 약속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생의 복을 더 하십니다.
그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이 말씀을 본문으로 택한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습니까?
‘133’이라는 숫자 옆에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에 올라갈 때 이 노래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아, 지금 내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 선하고 아름다운 곳,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것 같은 곳, 영생의 복이 넘치는 곳에 간다’하는 마음으로 성전에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용산교회가 그런 곳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사도신경은 어떤 말로 끝납니까?
“아니 목사님, 아까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끝납니다’ 하시고는 또 왜 물어요?”하실지 모르겠는데요, 그 다음에 두 글자가 더 있습니다.
뭡니까?
“아멘”입니다.
아멘의 뜻이 무엇입니까?
‘찬성합니다’ ‘동의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을 가진 기독교용어인데 『표준국어사전』에도 이 말의 뜻이 잘 풀이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자기도 진실로 그 내용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
주일예배에서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아멘”, “나는 진실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교회, 성도의 교통, 사죄, 부활, 그리고 영생을 믿습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저희들에게 사도들을 통해 시도신경, 앙고백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다시 한 번 새롭게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이 더 분명해지고, 더 튼튼해지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당에 오신 주님, 저희들이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약속 받은 자답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귀한 제단 용산교회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영생의 복이 더욱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