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생들 담배를 많이 피워서 큰일이라고 한다. 지금도 외진 화장실에 가면 담배 꽁초 천지다. 서울 어느 학교는 학생들이 안 들키려고 변기에 버린 담배 꽁초로 변기가 하도 막혀서 차라리 화장실에 재떨이를 설치하는 것을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학생들이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학교 바깥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흡연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통계는 이런 걱정을 더욱 크게 한다.
그러나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담배 피우는 학생들은 있었다. 최근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 골목에 담배 피우는 학생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사에게 대드는 학생? 정당한 지도를 하는 교사에게 이유 없이 대드는 학생은 정말 골칫거리가 맞다. 그러나, 정말 그 시절에는 이런 학생이 없다가 요즘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
영화 <친구>에서 "너네 아버지 뭐하시냐?"고 묻는 교사에게 유오성이 "깡팹니다"라고 말했다가 무지 맞는다. 유오성은 학교 안 다닌다면서 몽둥이를 들고 학교 유리창을 몽땅 깨버리고 학교를 나간다. 또 다른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일명 '빨간 잡지'를 보다 걸린 학생을 무지막지하게 패는 선생님에게 이정진이 "저러다 애 잡겠네"라고 한다. 시계를 푼 그 교사가 무자비하게 뺨을 때리는데 그 교사의 손을 잡고는 교사를 밀쳐버린다. 그러고는 "에이 씨, 학교 안 다니면 될 거 아냐"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수십명의 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옥상에서 쌍절곤을 들고 '결투'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
비슷한 흡연과 학교 폭력 장면은 1990년대 또는 20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했음직한 또 다른 영화 <두사부일체>에도 나온다.
그러니까 30년 전 부산 자갈치 시장에도, 20년 전, 10년 전 서울 강남에도 체벌은 있었다는 뜻이다. 학생이 담배 피우고, 싸우고, 교사에게 대드는 장면은 체벌이 금지되고, 학생인권조례가 생기고, 거기에 소위 진보교육감이 당선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장면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최근 가장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교무실 교사 폭행 사건도 진보교육감과 인권조례와는 상관없는 울산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데 소위 보수정치인들은, 보수교육단체는, 조중동 보수언론은 체벌금지 탓인냥, 인권조례 때문이라고, 진보 교육감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휴대폰 사용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울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교사를 교무실에서 폭행해 병원 치료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휴대 전화를 사용하다가 담임 교사에게 뺏긴 학생이 교무실에 찾아와 돌려달라고 하다가 돌려주지 않자 교사에게 폭행을 가했다고 보도되었다.
휴대폰을 둘러싼 교사와 학생의 대립에서 첫 번째 유형은 사용하려는 학생과 이를 막으려는 교사의 갈등이다. 휴대폰은 학생들에게 전화기이자 메신저이며, MP3 플레이어이며 가끔은 오락기, 영화관이 되기도 한다. 또 어떤 학생에게 영어 사전이기도 하며, 어떤 친구에게는 인터넷을 위한 컴퓨터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휴대폰에 집착하는 아이들이 많다. 휴대폰을 '공부를 방해하는 귀찮은 기계'로 생각하는 어른들, 교사들과 대립은 어느 정도는 불가피해 보인다.
두 번째 대립 유형은 교사가 학생지도를 하려고 하면 "야 찍어. 이거 교육청에 신고해도 되죠?"라고 나오는 학생들의 태도이다. 개인적으로 체벌에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학생들이 "선생님 이거 찍어도 돼요?"라고 물어보면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면서,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잘 찍어야 돼"하고 웃어 넘긴다.
휴대폰으로 상황을 찍어서 교육청이니, 청와대니 하는 곳에 신고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가 문제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봉건제, 일제군국주의의 잔재가 남아서 조직을 개인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강하다. 옳은 일이라도 조직의 이익에 반하면 나쁜 일이라고 한다. 그 조직원을 왕따 시키고,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개인을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삼는, 이런 패거리 문화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지 못한 이유이고, 내부고발자가 나오기 힘든 이유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휴대폰으로 동영상 또는 사진을 찍어서 교육청이나 청와대에 신고를 하는 것은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학교에서 또는 주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고하게 만든 학교가, 교사가 반성할 일이지 신고하는 학생만을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작 필요한 것은 휴대폰을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장소에서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지 휴대폰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교권을 침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최근 <조선일보>가 '교권의 수호자'를 자처하듯 시리즈로 무너지는 학교, 버릇 없는 학생들을 보도하고 있다. 버릇 없는 학생에 의한 교권침해, 나아가 학생에게 매맞는 교사의 이야기를 연일 주요하게 보도하고 있다. 또 어떤 때는 학교에 와서 난동(?)을 부리는 학부모들이 교권을 침해한다고 보도한다. 그들의 목적에 따라 어떤 때는 교사를, 다른 어떤 때는 학생을, 또 어떤 때는 학부모를 폭력집단으로 매도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교권의 수호자들일까?
불과 얼마 전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들은 교원평가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무능력한 폭력교사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랬던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제는 또 다른 극단적인 사례를 예로 들며 매맞는 교사로 대표되는 교권 침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습게도 조중동에 의해 폭력집단으로 매도된 이들도 대한민국의 교사들이고, 학생들에게 맞으며 교권을 침해당하고 있는 것도 대한민국 교사들이다. 어제는 학생들에게 폭력을 일삼으며 교권을 남용한다고 보도하던 그들이 학생인권조례와 곽노현 서울교육감을 비롯한 진보교육감을 반대하기 위해 학생에게 맞고, 교권을 침해당하는 교사들을 말하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 교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분명히 학교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고 교사들에게 물어보자. "2011년 6월 대한민국에서 ① 교육당국 ② 언론 ③ 학부모 ④ 학생 중에서 교권을 진정으로 가장 많이 침해하는 것이 누구인가?"라고.
교사들은 ① 교육당국 "인간교육이라는 본질을 훼손하고 경쟁만 부추기며 교사를 닦달하는 정부(교육당국)"라고 답할 것이다. 두 번째로 교사들을 폭력집단으로, 무능력자로 매도하는데 앞장 선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 비하면 학부모와 학생은 그야말로 새발에 피다.
보수언론과 당국에 학교에서의 체벌이나 폭력은 단지 진보교육감과 전교조, 인권조례 공격하는 정치적 수단일 뿐이다.
학생지도가 꼭 체벌일 이유는 없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생들을 체벌하지 않는다. 그러나 체벌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생 지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은 교사에게 체벌을 허용하는 것이 무너진 교권을 지키는 길인것처럼 말한다. 자신들이 교권의 수호자인 척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체벌을 옹호하는 것만큼 교사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도 없다. "교사가 얼마나 못 났으면, 교사가 얼마나 무능하면…"이라는 비아냥을 불러오고, "체벌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교사"라는 비난을 자초하는 것이다.
교도관이 범죄자 통제를 위해서 필요하다며 폭행권을 요구한다면 그 얼마나 무능한 교도관인가? 장교가 병사들 군사훈련을 위해 필요하다면서 폭력 허용을 주장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무능력한 군인인가? 체벌이 아니면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주장 역시 교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사를 무능력자로 매도하는 것이다.
내가 존중받아야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긴다. 어린 시절 매 맞고 자란 학생이 커서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실증적인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자신이 학교에서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한 학생에게 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존중해 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은 절차에 따라서 지도를 하든, 징계를 하든 하면 된다. 그것이 체벌일 필요는 전혀 없다.
체벌을 주장하는 보수언론과 보수정치권, 교육당국은 지금 그들이 교사를 폭력집단으로, 무능력자로 만들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폭력이 만연한, 폭력에 너무나 무감각한 한국 사회에서 학교에서부터 폭력을 추방하자. 그 시작이 체벌을 금지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