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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진도 7코스 제2부
고성계곡 입구-죽제산 자연휴양림-첨찰산-첨찰산 상록수림-운림산방-쌍계사
20220802
1.한국 남종화의 굵은 뿌리 깊이 내린 운림산방
제1부에서 이어짐
서해랑길 진도7코스 남은 구간을 이어간다. 길은 단순하다. 죽제산 산림욕장 임도를 따라가는 길, 앞에는 진도기상대레이더관측소 하얀 건물이 보인다. 이 골짜기를 무엇이라 이를까? 궁금증은 길가에 세워둔 표석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 이 골짜기를 예쁜 꽃동산으로 가꾼 이기봉(李起峰)님은 이곳을 꽃메인 화산(花山)이라 이르고 골짜기에 조성한 농원을 흰 물결이 일어나는 '백파녹지원(白波綠地園)'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표석에 자작시와 화산을 노래하는 글을 기록하였다. "오래 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요/ 붉게 붉게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오려는 봄철을 미리 알리는 것이 정말 꽃다운 꽃이리라" 꽃의 역할을 봄철을 미리 알리는 전령사로서 보고 있다. 봄꽃들은 다양한 빛깔로 봄철을 전후하고 한창의 봄날에도 수많이 피어난다. 봄을 미리 알리는 꽃이 있는가 하면, 봄 한 철을 격정적으로 장식하는 꽃이 있으며, 떠나가는 봄철을 아쉽게 작별하며 피워내는 꽃이 있다. 그래서 이기봉님이 얘기한 선구자로서의 매화꽃만이 정말 꽃다운 꽃이 아니라 그 다양한 색채와 생태를 지닌 모든 꽃들이 모두 꽃다운 아름다움으로 제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詩 머리에 '삶음'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삶음이 무엇일까? '삶다'의 명사형 '삶음'을 왜 詩 머리에 적어 놓았을까? 삶을 삶듯이 열정적으로 살고 있음을 뜻할까? 무르익은 삶의 모습을 이렇게 이르는 것일까?
화산골에는 여러 가축들이 방목되는데 시멘트임도를 따라가며 닭과 오리와 염소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땀은 비 내리듯 쏟아지는데 바람은 고요한 적막 속에 있다. 이 무더운 여름날의 적막을 깨는 동물들의 노랫소리가 바람이 되어 몸의 땀을 식혀 준다. 길에는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말오줌때나무가 시야를 밝혀 준다. 죽제산 산림욕장 갈림목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임도를 따라 오르면 후박나무 가로수가 눈길을 끈다. 비취색의 에메랄드를 주렁주렁 달고 후박나무는 무더운 여름을 나고 있다. 후박나무는 긴 여름날 뜨거운 햇볕을 받아 에메랄드 열매를 숙성하여 검은 보석으로 탄생할 그날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 비취색을 흑색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에메랄드 열매의 어떤 성분이 흑색 보석으로 변화시킬까? 생명의 신비요, 생태의 비밀이다.
첨찰산과 진도기상대 갈림목에 이르렀다. 3년 전 첨찰산 산행 때 진도기상대로부터 이 갈림목을 거쳐 첨찰산에 오른 뒤 쌍계사로 하산하였다. 다시 한 번 진도기상대 앞에 가보고 싶지만 힘이 딸리고 시간도 넉넉하지 않다. 그 대신에 첨찰산에 오른 뒤 아리랑비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하였다.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에서 조망이 좋은데 그날은 미세먼지 탓에 풍경이 흐릿하다. 그렇지만 그 방향을 가늠하며 서해 바다의 삼마도와 섬들, 선황산과 벽파진, 용장성터, 해남의 옥매산, 망금산의 진도타워와 울돌목, 해남의 화원반도와 신안군의 섬들을 어림하였다.
봉화골로 하산한다. 산죽이 푸르르고 어제 내린 폭우로 계곡물은 철철 넘친다. 길가에 개쑥부쟁이 꽃이 피어 있다. 가을이 바스락바스락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배롱나무 붉디붉은 열정의 빛을 다독이며 이성의 빛으로 진리를 밝히는 듯 개쑥부쟁이 꽃 연보랏빛이 차분하다. 연보랏빛은 파란색의 차가움보다는 따스하며 불붙는 듯, 붉은 뜨거움보다는 차분하다. 이 색채는 가을의 빛 같다. 가을 꽃의 대명사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다. 쑥부쟁이를 닮은 개쑥부쟁이 꽃 연보랏빛이 가을을 불러온다. 가을빛이 아름답다. 꽃은 앙증스럽게 예쁘다.
첨찰산에서는 1960년대까지 지역 주민 생계수단으로 동백나무와 붉가시나무를 재료로 숯 생산활동을 지속하였다고 한다. 첨찰산 봉화골에는 3개의 숯가마터를 복원하여 놓았다. 고단했던 시절 서민들의 생활 모습이 계곡물처럼 흘러내리다가 하얗게 부서진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107호 상록수림으로 지정되고 그 시절 숯가마터에서 생계를 꾸린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갔다. 그들의 삶의 흔적이 복원된 숯가마터에서 웅성거린다. 나무에 불이 타오르고 연기가 흘러간다. 붉은 잉걸불이 바알갛게 빛난다. 뜨거운 잉걸불을 죽이며 숯을 생산하던 벌건 얼굴들은 이 시대 어느 얼굴이 되어 있는가? 제철소와 조선소 노동자들이 그들일까?
진도아리랑비 앞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른다. "갈매기는 어디 가고 물드는 줄을 모르고, 사공은 어디 가고 배뜨는 줄을 모르네.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아라리가 났네./ 오늘 갈 지 내일 갈 지 모르는 세상, 내가 심은 호박 넝쿨 단장 넘어가네.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아라리가 났네./ 놀다 가세 놀다나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놀다나 가세.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아라리가 났네." 진도아리랑비에 적힌 노랫말을 따라 그냥 흥얼거렸다. 삶의 애환이 풀어지고, 우리네 인생의 허무를 체념과 달관으로 승화하는 감각이 느껴진다.
서해랑길 7코스의 종점 직전에 한국 남종화의 뿌리 '운림산방'이 있다. 진도 출신의 소치 허련이 스승 추사 김정희가 타계한 뒤 1856년 귀향하여 첨찰산 아래 초가를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고 당호를 지었다고 한다. <소치실록>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신선들이 산다는 곳처럼 운림산방을 꾸몄다고 한다. 현재 운림산방은 소치고택인 '소치허암'과 소치화실인 '운림산방'을 비롯하여 기념관과 박물관 등의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어 그 규모가 커졌다. 운림산방은 소치 집안에서 경제 사정이 나빠져 팔아 넘겼다가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이 노력하여 운림산방을 다시 사들여 진도군에 기증하여 현재 진도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소치 허련의 삶은 힘겹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 힘겨운 길을 소처럼 걷고 흰구름처럼 흘러서 한국 남종화의 맥을 이었다.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를 스승으로 받들어 남종화의 길을 가면서 관직에 나간 소치 허련은 경주 김씨 추사가 안동 김씨 세도에 몰락하면서 그 뻗쳐오르던 기상은 꺾여서 고향 진도의 첨찰산에 뿌리를 내렸다. 압록강 동쪽에서 그의 작품을 따를 자가 없다고 추사 김정희가 그의 작품을 평가한 것처럼 그는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지는 남종화의 대가이다. 그의 후손들이 소치 화맥을 이어서 현재 한국 남종화 5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운림산방 모두를 어찌 짜장면 먹듯이 후루룩 삼킬 수 있겠는가? 예전에 와 보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른 것이며 기념관 전시물을 감상하는 마음은 감상할 때마다 언제나 새로워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서해랑길을 탐방하며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관람이기에 전시실을 휘리릭 지나치며 짜장면 먹듯이 후루룩 삼켰다. 그 깊이 있는 글과 시 작품, 글씨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기념관의 전시물을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전시관을 빠져 나온다. '도서이정(圖書怡情)',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니 마음이 즐겁다는 그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았다. 길손의 즐거움은 산행과 트레킹과 술인가? 길손의 생활에 예술의 창조적 즐거움이 없다. 부끄럽지만 길손은 달리 어찌할 길이 없다. 그가 남긴 글과 시와 작품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한국 남종화의 깊은 뿌리가 내린 운림산방에서 소치의 행적이라도 조금 알고 그의 업적을 헤아릴 수 있음에 길손은 감사한다.
2.탐방 과정
제1부에서 이어짐
오른쪽에 출일봉이 솟아 있다. 출일봉 기슭 왼쪽에 고성중학교 건물, 그 맞은편 왼쪽에 고성초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오래 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요 붉게 붉게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오려는 봄철을 미리 알리는 것이 정말 꽃다운 꽃이리라
2006년 11월 이기봉 작시
그런데 '삶음'이란 무슨 뜻일까?
버려진 山野를 칠순말기의 고령의 나이로 수많은 동백과 국화, 코스모스, 개나리, 금장화 등 꽃을 가꾸어 사철 꽃피는 곳으로 조성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꽃 향기에 흠뻑 젖어 정서적으로 메말라가는 많은 분들께 줄거움을 안겨 주기 위하여 生을 노래하노라
왼쪽 죽제산 고성계곡에는 비닐하우스들이 설치되어 있고, 여러 가축들을 방생하고 있다.
죽제산 산림욕장 임도를 따라 올라가는데 중앙에 진도기상대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 참빗살나무인 줄 알았는데 말오줌때나무라고 한다.
벌써 흰 털에 싸인 씨를 먼 곳으로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곧바로 가면 죽제산 산림욕장이고 오른쪽 임도를 따라 오르면 첨찰산 방향이다.
후박나무 에메랄드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후박나무 에메랄드 열매가 이제 검은 보석으로 익어갈 것이다.
첨찰산 산머리를 감아도는 임도가 오른쪽에, 첨찰산과 진도기상대 갈림목이 왼쪽에, 그 왼쪽에 진도기상대 건물이 있다.
왼쪽 임도를 따라 올라왔다. 오른쪽으로 가면 쉼터와 죽제산 정상에 이르는 것 같다.
진도기상대 1.5km 지점이다.
저곳이 어디일까? 고군면 원포리와 지막리 일대인 듯. 섬은 와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왼쪽에 진도기상대 레이더관측소, 오른쪽에 첨찰산 정상의 송신탑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운림산방로로 내려가는 임도, 오른쪽으로 첨찰산과 진도기상대 오르는 길로 이어간다.
진도기상대 1.3km, 남파랑길 7코스 종점 2.6km 지점이다.
중앙에 발포항, 그 왼쪽에 와도, 그리고 중앙 오른쪽에 상마도, 안도, 중마도, 하마도가 늘어서 있는 듯.
왼쪽으로는 진도기상대, 오른쪽으로는 첨찰산 가는 길이다. 첨찰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진도기상레이더관측소 100m, 첨찰산 200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봉화골을 통해 아리랑비로 내려가 사천저수지 앞을 거쳐 운림산방으로 진행한다.
왼쪽으로 아리랑비 1.7km로 내려가는 길이 서해랑길이지만, 오른쪽 첨찰산 0.1km에 다녀오기로 한다.
정상에 봉수대, 그 아래 첨찰산 정상표석이 세워져 있다.
해발 485m 첨찰산 정상표석이 봉수대 아래 세워져 있다. 바다에는 왼쪽에 와도, 중앙에 상마도, 안도, 중마도, 하마도가 늘어서 있다. 날이 맑으면 건너편 해남 땅이 잘 조망될 것이다.
첨찰산 정상표석-헬기장-갈림길-진도기상레이더관측소가 일렬로 조망된다.
바다에는 상마도, 안도, 중마도, 하마도가 길게 남쪽으로 늘어서 있다.
왼쪽에 죽제산이 있고, 중앙에 발포항, 그 왼쪽에 와도, 오른쪽에 상마도, 안도, 중마도, 하도가 길게 줄지어 있다.
오른쪽에 발포항과 와도, 오른쪽 끝에 상마도가 살짝 보인다. 왼쪽 위 건너편은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인 듯.
오른쪽에 죽제산이 솟아 있고, 왼쪽에 선황산, 벽파진은 선황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선황산 건너편은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일대인데 흐릿하다. 옥매산이 분명히 보일텐데 미세먼지 탓에 보이지 않는다.
맨 오른쪽에 선황산, 중앙 앞쪽에 걸어온 고군면 도평리 들녘, 그 왼쪽으로 오일시마을이 살짝 보인다. 정면 중앙에 망금산의 진도타워가 확인되는데 미세먼지 탓에 흐릿하다. 바다 건너편 위쪽으로 해남의 화원반도가 이어지고 있다.
첨찰산 정상은 해발 485m, 정상 봉수대 위에 정상 485.5m라는 표석이 있다.
오른쪽에 선황산과 벽파진, 중앙 왼쪽에 망금산의 진도타워가 흐릿하지만 분명히 가늠된다.
'珍島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 지리산 정상표석의 문장을 모방하였다.
앞에 아리랑비 내려가는 갈림길에서 아리랑비 방향으로 내려간다.
7코스 종점 2.3km 지점이다.
1960년대까지 지역 주민 생계수단으로 동백나무와 붉가시나무를 재료로 숯 생산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지역은 천연기념물 107호 상록수림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진도아리랑비는 전국적으로 가장 웅장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특히 빗돌은 여귀산(女貴山)에서 채굴하여 첨찰산(尖察山)에 세운 것으로, 진도의 제일 명산에서 명산으로 시집을 온 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갈매기는 어디 가고 물드는 줄을 모르고 사공은 어디 가고 배뜨는 줄을 모르네.
오늘 갈 지 내일 갈 지 모르는 세상 내가 심은 호박 넝쿨 단장 넘어가네.
알그닥 짤그닥 짜는 베는 언제나 다 짜고 친정에를 갈거나
청천 안 하늘에는 잔별도 많고 요 내야 가슴 속에는 수심도 많다.
여덟세 두 번 걸이 열두 폭 치마 신작로 다 쓸고 임마중을 가네
놀다 가세 놀다나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놀다나 가세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아라리가 났네
진도아리랑은 예부터 아리랑타령이라 하여 구전으로 불리어져 다른 민요와 같이 그 시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조 말인 1900년대 초부터 진도아리랑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가락은 흥겨운 멋을 간직한 속에 애절한 한이 깃들어 있고 비애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노래로, 후렴 중의 응~응~응~ 소리는 슬픔과 기쁨이 한데 엉켜 있는 것과도 같다. 이 민요의 창법은 판소리와 같이 느낌이 구성진 굵은 목을 눌러내는 듯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특히 종지음의 치켜올리는 생동감은 다른 아리랑과 쉽게 구별이 된다. 가사는 임을 그리는 애끓는 심사와 원망을 해학적으로 엮어진 내용이 많으며 그때마다 창자가 지닌 정서를 전래의 가락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불려지는 극히 서민적인 민요이다. 장단은 세마치이고 선율은 시나위형으로 중몰이 장단에 불려지며 특히 진도아리랑은 가사와 함께 가락에 독특한 흥취가 있어 남도민요의 진수로 일컬어진다.
한민족의 상징인 민요처럼 불리는 아리랑은 곳곳마다 그 특색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진도아리랑은 예향다운 특징을 고루 갖춰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으면서도 부르는 이는 즐겁고 듣는 이는 흥겹기가 으뜸이다. 진도아리랑은 모든 이의 원망도 슬픔도 신명나는 가락과 해학적인 노랫말로 풀어주는 타령 중의 꽃이다. 이 고장 선인들은 비록 살아가는 삶이 고되고 한스러울 적에도 스스럼없이 속마음을 노랫말로 토해내 목마름을 달랠 줄 아는 슬기를 보였다. 우리 군민들은 이 멋과 정서의 뿌리를 널리 자랑하고 오래오래 이어갈 증표로 삼고자 뜻을 모아 여기에 이 비를 세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도의 상징 노래이기도 한 진도아리랑의 조형물 마련에 대한 군민의 바람이 곳곳에서 제기되어 오던 중 1990년 10월 진도아리랑 보존회에서 오백만원을 건비 성금으로 내놓아 이를 계기로 1993년 3월 진도아리랑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뒤이어 군비 3천만원과 군민의 성금이 보태어져 1994년 3월 진도군 임회면 탑립리에서 화강석 석재를 채굴하여 1995년 7월 이곳 첨찰산 남쪽 기슭에 좋은 터를 입지로 정하여 동년 8월 15일 건립하다. 글씨/ 장전 하남호, 각(刻)/ 진도석재사
현재 공사 중이다. 오른쪽에 운림산방이 있으며 서해랑길은 직진한다.
진도 운림산방은 허련의 화실일 뿐만 아니라 소치 허련,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전 허림, 의재 허백련, 그리고 허건의 손자들에 이르는 화맥의 산실이다. 호남을 남종문인화의 고장이라 부르는 근거가 되는 중요한 유적지라 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소치기념관인 제2관을 관람하기로 한다.
운림산방에는 소치 선생이 손수 심어서 가꾼 나무가 세 그루 있었는데 일지매와 백일홍, 그리고 자목련이다. 일지매는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께서 소치가 운림산방을 열자 선물한 나무로 알려진다. 그 후 일지매의 2대 나무는 진도읍 동외리 임삼현이 소치 문하에 입문하여 수학한 뒤 소치 선생이 타계한 후에도 26년 간 운림산방을 관리하던 중 산방이 팔리고 당시 의신주재소 엔또 소장이 나무를 일본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임삼현의 子 임순재가 진도읍 동외리에 옮겨 심어 가꾸다가 1995년(수령 187년) 수명을 다하였다. 2대나무가 살아있을 때 뿌리 나누기로 기른 자목 한 그루를 임순재의 子 임태영이 원래 있었던 이곳에 옮겨 봄이면 고아한 꽃을 피우고 맑은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병술년 섣달에 표지석 세움
소치기념관 제1관 전시실로 입장하여 전시물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관람한다.
1대 소치 허련,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 임인 허림, 4대 임전 허문, 5대 동원 허은, 소정 청규, 허진, 허재, 허준
[개설]
남종화는 남종화가로 분류되는 여러 화가들이 구사했던 수묵산수화의 복합적 양식을 일컫는다. 남종화라는 용어는 중국 명나라 만력연간에 막시룡(莫是龍)[1537~1587], 진계유(陳繼儒)[1588~1639], 동기창(董其昌)[1555~1636] 등 문인 서화가에 의해 주창된 남북종론에서 나온 것이다. 남·북종화파의 분류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수묵산수화의 시조라 불리는 당나라 왕유를 남종화의 선구로, 착색산수화를 그린 당나라 이사훈(李思訓), 이소도(李昭道) 부자를 북종화의 선구로 보았다. 이후 같은 기준에 의해 남종화가와 북종화가를 분류하였는데, 실제로는 화풍상의 분류라기보다는 문인과 직업화가라는 화가의 신분에 따른 분류이다. 이 때문에 남종문인화라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남종화는 17세기에 청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로 중국화가들의 문인화 작품이 직접 유입되기도 하였고, 청초에 발간된 『고씨화보(顧氏畵譜)』나 『당시화보(唐詩畵譜)』,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화보를 통해 형식화된 모습으로 유입되어 그 전파가 가속화되었다. 이후 18세기에는 강세황(姜世晃)이나 이인상(李麟祥), 심사정(沈師正)을 비롯한 문인화가뿐 아니라, 김홍도나 이인문 등 화원화가들의 그림에서도 남종문인화풍이 보이게 되었다. 즉, 문인화의 본래 개념인 문인이 여기로 그린 그림에서 특정한 준법이나 구도의 전형이 이루어지면서 형식화되었다. 19세기에는 18세기 조선 남종화의 기초 위에 추사 김정희와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해 본격적인 남종화의 세계가 전개되었다. 이방운(李昉運), 신위(申緯), 정수영(鄭遂榮) 등 문인화가들뿐 아니라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허련(許鍊) 등 여항화가들의 활약이 남종화의 발달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 이후 남종화는 본연의 취지나 정신에서는 멀어지고 하나의 양식으로서 간주되어 명맥을 이어왔다.
[형성배경]
19세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허련은 전라남도 진도 출신으로 31세 때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집에 머물면서 서화수업을 하였다. 문인화를 중심으로 특유의 필치를 구사한 허련의 회화는 당대에도 추사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빼어났으며 당시 화단을 풍미하였다. 허련은 49세 때인 1856년에 진도로 낙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작품 활동을 하였다. 허련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1852~1931],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1987], 방손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 등으로 계승되었고, 이들에 의해 호남화단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내용 및 특징]
호남남종화의 본고장인 진도에서는 허련과 허형의 뒤를 이어 많은 화가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허련의 집안에서만 해도 허형의 아들인 허건과 임인(林人) 허림(許林)[1917~1942]을 비롯하여 허림의 아들 임전(林田) 허문(許文), 허건의 장손자인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허진을 비롯한 여러 후손들이 화업을 잇고 있다. 허건은 그림을 시작한 초기에는 가전화풍인 허련의 화법을 따라 전통회화의 계승에 노력하였으나, 남종문인화를 현대적 화풍으로 승화시켜 특유의 ‘신남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일구어낸 화가이다. 소치에서 미산을 거쳐 내려온 전통 남종문인화의 맥을 이어 허백련과 더불어 현대 호남화단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문하에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동생과 조카, 손자들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화맥을 계승케 하였다. 허건의 문하에서는 도촌(稻邨) 신영복(辛永卜),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 김명재(金明在) 등이 남농의 회화정신을 바탕으로 각자 독특한 화풍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허백련은 남농과 함께 한국남화를 남도의 전통화풍으로 자리 잡게 한 중심인물이다. 허백련은 중국의 전통 남종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남도 특유의 자연환경이나 감성이 녹아든 사의적인 화풍을 구사하였다. 그는 1938년 광주에 정착하여 전통서화 진작과 후진양성을 목표로 연진회(鍊進會)를 결성하여 많은 화가를 길러냈다.
[현황]
19세기 허련에서 시작된 진도 남종화의 맥은 현대에까지 이어진다. 진도 출신의 화가들은 허건이나 허백련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으며 호남과 전국 각지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 특히 허백련이 발족한 연진회가 그 발판이 되었다. 허백련의 동생인 목재(木齋) 허행면(許行冕), 제자인 옥산(沃山) 김옥진(金玉搢), 시경(時耕) 박익준(朴益俊), 백포(白浦) 곽남배(郭南培) 등은 국전을 비롯한 여러 전람회에 거듭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성장하였다. 이외에도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치련(穉蓮) 허의득(許義得), 정전(丁田) 박항환(朴亢煥), 우남(又南) 이옥성(李沃城), 연사(蓮史) 허대득(許大得), 당암(堂岩) 이영식(李永植), 우산(又山) 정서진(丁西鎭), 동작(東作) 김춘(金春), 송당(松堂) 강지주(姜知周), 현원(玄園) 곽국환(郭國煥), 야정(野丁) 곽권옥(郭權玉), 우림(芋林) 김정욱(金正旭), 정원(丁園) 김달석(金達錫) 등 수많은 화가들이 활동하여 진도가 한국 남종화의 뿌리임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회화뿐 아니라 서예에 있어서도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영향을 받은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를 비롯한 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임금님 벼루에 먹을 적시던 옛 화사는, 운림산방에서 꽃심는 소치 되었네. - 은휴노부 신관호가 써주다
영광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어연에 먹을 적시다. 소치가 헌종 때 이러한 총애와 영광을 입어서 당시 조부 도위공께서 마음에 두시고 특별히 사랑하셨다. -승지 안동인 김덕균 삼가 쓰다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니 마음이 즐겁다. 치옹노묵 중에서
허치는 아직도 그곳에 있습니까? 그는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그의 화법은 종래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기습을 떨쳐 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다행히 주리의 끝에 의탁하여 후하신 비호를 입고 있으니, 영감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사람을 알아주겠습니까. 그 또한 제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초사 또한 남쪽 지방의 이름난 숙학으로 총림 가운데 흔히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그의 시론을 보건대, 또한 거울과 거울이 서로 비추고 도장과 도장이 서로 부합되는 것을 알겠으니, 참으로 매우 훌륭합니다.
소치기념관 제1관 관람을 마치고 소치화실과 소치고택을 찾아간다.
소치고택 뒤에 소치영정실이 있다.
진도 운림산방은 운림각(雲林閣) 또는 소허암(小許庵)이라고도 한다. 허련의 호 소치는 중국 원나라 말기 사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인 대치(大癡) 황공망(黃公望)[1269~1358]에서 왔듯이, 진도 운림산방의 운림 또한 예찬(倪瓚)[1303~1374]의 호 운림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현재 진도 운림산방에 걸려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 현판은 허련의 방손인 의재 허백련의 글씨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도 운림산방 앞의 연못은 복원되어 한 변 35m 가량 되는 사각형 연못의 중심에는 백일홍을 심은 둥근 섬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등잔이 있는 방이 단아하다.
소치(小痴) 허련(許鍊)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 관지(款識)에는 수치(叟痴), 노치(老癡), 칠십노치(七十老癡), 팔질노치(八耋老癡), 석치(石癡), 연옹(蓮翁) 등을 사용했다.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서 ‘허유(許維)’로 개명(改名)하였다.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1568~1662]의 후손이다. 아버지 허각(許珏)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완산 이씨와의 사이에 4남을 두었다. 큰아들 허은(許溵)에게 화업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을 잃은 후 뒤늦게 4남 허형(許瀅)의 재능을 발견하여 화필을 전수하였다.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으나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지는 못하였다. 28세 때인 1835년에 허련은 전라남도 해남 연동에 있는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에 가서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빌려 몇 달에 걸쳐 모사해 보면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그림 그리기에 정진하다가 49세 때인 1856년에 진도로 낙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각처를 유람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허련은 31세 때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집에 머물면서 서화수업을 하였다. 이듬해인 1840년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자 몇 차례나 제주도를 왕래하며 스승을 모시고 그림수업을 계속하였다. 김정희를 통하여 당대의 명사들과도 폭넓게 교유하였다. 허련과 교유를 가진 인사들로는 해남의 우수사 신관호를 비롯하여,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丁學淵)과 민승호(閔升鎬), 김흥근(金興根), 정원용(鄭元容),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민영익(閔泳翊) 등이 있다. 36세 때인 1843년에는 김정희의 소개로 전라우수사 신관호(申觀浩)후에 신헌(申櫶)으로 개명)의 막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고, 39살 되던 해에는 신관호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영의정 권돈인의 집에 머물면서 헌종에게 그림을 그려 바쳤다. 41세 때인 1848년 헌종의 배려로 고부감시(古阜監試)를 거쳐 친림회시 무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42세 때는 대궐에 들어가 헌종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 바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몽연록(夢緣錄)』(일명『소치실록(小癡實錄)』), 『운림잡저(雲林雜著)』, 『운림유록(雲林儒錄)』이 전한다. 허련은 김정희로부터 중국 북송 미불(米芾), 원나라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청나라 석도(石濤)의 화법을 배웠다. 그리고 김정희의 서풍도 전수받아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여 19세기에 김정희를 따랐던 많은 화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총애를 받으며 남종문인화풍을 토착화시킨 화가이다. 허련은 산수, 인물, 매, 죽, 노송, 모란, 파초 및 괴석 등을 모두 잘 그렸다. 산수에 특히 뛰어났고, 모란을 잘 그려 ‘허모란’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하였다. 허련의 회화 중에서 산수는 황공망과 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독필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담채의 독특한 색감에서 개성을 보인다. 인물화의 경우 김정희의 초상을 비롯한 화보풍의 고사 인물을 잘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서울대박물관 소장 「선면산수도」를 비롯하여 「방예운림죽수계정도」, 「방황자구벽계청장도」, 「하경산수도」, 「추강만교도」, 「산교청망도」, 「동파입극도」, 「노송도」, 「노매도팔곡병」, 「모란도」, 「채과도」, 「괴석도」, 「고목죽석도」, 「묵란도」, 「석란도」, 「완당선생초상도」 외 다수가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곳 운림산방은 소치 선생께서 한거하시던 곳이며 유서 깊은 명작의 산실이기도 하거니와 허물어진 옛 터를 다시 손질하여 복원하매 공을 흠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공은 1809년 각(珏) 공의 큰 아드님으로 출생하셨으며 휘는 鍊(초명은 維)이요 자는 마힐이시다. 나이 30에 화격이 뛰어나 헌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848년 무과에 급제 관직이 누진되었는 바 1887년 고종 24년에 선략장군 행룡양위부사과에 제수되었고 곧 통정대부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천수를 다하시고 1893년 9월 6일 86세에 장서하셨다. 공은 소시에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에 사사한 후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서화를 익히셨으니 그 명성은 삼절로 출중하였다. 특히 묵죽, 묵모란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추사께서 공을 말하되 그 인품은 참으로 佳하고 화법은 동인의 누습을 파제하여 압수이동(鴨水以東)에서는 그의 작품을 누를 자가 없다고 극찬하셨다. 공의 유작 중에서 하경산수, 추강만교도, 만산모옥도, 포도도, 산교청망도, 동파입극도, 묵매도, 묵모란도 등을 수절로 치거니와 후세에 남종조로 추앙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공께서 노후에 음풍영월하시고 물외소요하시던 이곳은 길이 예술의 고향으로 그 빛을 더할 것이다.
남화의 굵은 뿌리 깊이 내리시고/ 삼절의 맑은 향기 대 이어 감도는 곳/ 보소서 운림산방의 신묘한 가락을
왼쪽에 서해랑길 진도8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