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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수필세계
2007년도 상반기 신인상
김은주
김은주는 이미 전북일보, 부산일보의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되고 평사리 토지문학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을 지닌 신진 수필가이다. 문단 경력으로는 아직 짧지만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만으로도 녹록치 않은 창작력을 보여 준다. 그런 터에 『수필세계』 신인상 당선은 그의 끊임없는 자기진단과 확인의 노력이라고 평가 한다. ― 심사평 중에서
요요는 언제나 멀리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회귀 본능이 존재한다. 그 본능 안의 쉼 없는 운동성이 요요를 살아 있게 한다. 나 역시 이제 다시 제자리에 와 섰다. 맨 처음 글을 시작하던 그 순간 그 지점이다. 구월의 밤길을 더듬어 처음 수필을 만나러 오던 그 마음자리 그대로 글을 향해 앉아 있다. 마음먹은 대로 글이 되지 않아 조갈 난 마음이 조금씩 체중을 갉아먹던 경험을 내 글쓰기의 바탕으로 삼을 것이다. ― 당선소감 중에서
2007년도 상반기 신인상 심사평
체화적 구성과 빈틈없이 직조된 문장
심사위원
강 돈 묵 (수필가, 문학평론가, 거제대 교수)
박 양 근(수필가, 문학평론가, 부경대 교수)
한 상 렬 (수필가, 문학평론가, 『수필시대』 주간)
김은주를 『수필세계』 2007년도 상반기 신인상 수상자로 심사위원 전원의 합의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미 전북일보, 부산일보의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되고 평사리 토지문학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을 지닌 신진 수필가이다. 문단 경력으로는 아직 짧지만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만으로도 녹록치 않은 창작력을 보여 준다. 그런 터에 『수필세계』 신인상 당선은 그의 끊임없는 자기진단과 확인의 노력이라고 평가한다.
『수필세계』의 공모전은 한국 수필계의 관심을 끌면서 모든 수필 지망생들이 동경하는 등용문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무분별한 양적 등단이라는 속화를 외면하고 엄격한 심사 절차를 거쳐 수필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함으로써 『수필세계』에게는 권위를, 당사자에게는 자부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김은주는 「겨우살이」를 위시하여 「웃기 돌」, 「육십 촉 전구」, 「자객」, 「경계」 5편과 이미 각종 검증을 거친 「등」, 「빈방」, 「분첩」 등을 참고작품으로 제출하였다. 그 중에서 「겨우살이」는 두 다리가 마비된 어머니를 위해 오빠와 함께 겨우살이 약초를 구하러 산에 가는 줄거리를 바탕으로 자식이 부모에게 갚는 보은의 효성을 체화적 구성과 빈틈없이 직조된 문장으로 엮어내고 있다. 장단이 적절하게 호흡되는 문장마다 신선한 표현이 어우러져 읽는 맛을 줄 뿐 아니라, 어머니의 투병을 바라보는 자식의 눈빛을 투시함으로써 객관적인 관조력과 자아동일시의 구조를 짜낸 점에서 대표 당선작으로서 손색이 없다.
「웃기 돌」은 소재의 의미 부여가 뛰어난 작품이다. 장독의 돌기 같은 웃기 돌이 지닌 희생적인 기능과 더불어 자연에서 자연답게 살아가는 정분이라는 캐릭터에 격조 있는 삶의 양식을 배합하여 작은 물상이 지닌 미덕을 이끌어낸 주제성이 돋보인다. 웃기 돌을 보며 “흰 이를 드러낸 정분 씨가 거기 앉아 있는 듯하다”는 대상과 대상 간의 일체성은 김은주의 상상력이 지닌 지평을 입증하는 구절이라고 할 것이다. 그 외 입원한 친구와 고장 난 전구를 비교한 「육십 촉 전구」에서는 주제와 소재의 결속력이 두드러지며, 「자객」은 병마개와 병따개와의 상관관계를 자객에 비유한 점에서 독특한 착상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지닌 작품으로 탄탄한 구성력도 남다르다. 그리하여 최종 당선작으로는 「겨우살이」, 「육십 촉 전구」, 「웃기 돌」, 「자객」을 결정하기로 한다.
김은주의 수필은 착상력, 문장력, 소재에서 특히 신인답지 않은 노련미도 넘치지만 서경수필의 섬세하면서도 깊이 있는 묘사력과 전통수필의 해학미, 그리고 자연스러운 미적 표현보다는 의식적으로 표현된 문장이 더러 눈에 뜨이고 소재에 대한 사회적 해석과 시각이 부적하다는 점을 인식하면 앞으로의 더 나은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끝으로 『수필세계』 신인 등용의 긍지를 지켜 가면서 분발의 노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하면서 축하의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심사평 : 박양근)
│당선 소감│
가도 가도 길은 존재한다
화단 난간 위에서 아이가 요요를 한다. 동그란 바퀴는 푸른 유월을 배경으로 허공을 떠다닌다. 요요는 아이 발치 더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눈썹까지 올라오기도 하면서 가로로 줄을 눕히니 외줄타기도 거뜬히 해낸다.
신이 난 아이는 좀더 높은 곳에 올라가 한껏 팔을 펴 허공에다 요요를 던진다. 가속이 붙을수록 요요는 줄 위에서 고요하다. 회전력이 극에 달해 순간 조는 것이다. 분명 끝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내 눈에는 정지한 듯 고요해 보인다. 돌아가고 있되 돌아감을 드러내지 않고, 순간 정지한 듯 보여도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경지, 나의 글쓰기도 언제쯤 들뜨지 않고 저런 고요한 상태에 들 수 있을까?
아직도 나의 내부는 아귀가 맞지 않는 문처럼 삐걱거린다. 한껏 회전력을 얻어 고요한 상태에 들려면 아직 그 길이 멀기만 하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도 또 다른 형태의 길이 있고 가도 가도 길은 존재한다.
요요를 지탱하는 것은 손가락에 걸린 줄이다. 튕겨져 올라온 바퀴가 손바닥과 마주친 탄력에 의해 또다시 더 먼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줄과 바퀴가 떨어지지 않고 고요한 상태에 들려면 적당한 속도와 중심을 잃지 않는 평상심 그리고 더 넓은 허공이 필요하다.
요요는 언제나 멀리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회귀 본능이 존재한다. 그 본능 안의 쉼 없는 운동성이 요요를 살아 있게 한다. 나 역시 이제 다시 제자리에 와 섰다. 맨 처음 글을 시작하던 그 순간 그 지점이다. 구월의 밤길을 더듬어 처음 수필을 만나러 오던 그 마음자리 그대로 글을 향해 앉아 있다. 마음먹은 대로 글이 되지 않아 조갈 난 마음이 조금씩 체중을 갉아먹던 경험을 내 글쓰기의 바탕으로 삼을 것이다.
이제 집에 돌아와 앉은 듯 편안하다. 내게 남은 일은 성실히 새벽을 가르며 내게 주어진 밭을 일구어 나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문우들과 나를 추천해 주신 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당선 작품│
겨우살이 외 3편
앞서 걷는 오빠의 손에 긴 장대가 들려져 있다. 장대 끝에는 서슬 퍼런 낫이 묶여져 있고 장대를 움켜쥔 손등에는 힘줄이 튀어나와 겨울하늘 아래 푸르다. 겨우살이를 꼭 구하고 말리라는 오빠의 의지가 힘줄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 쩡쩡한 겨울하늘은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쩍 하고 금이 갈 것 같다. 오빠는 낮은 구절초 두어 개를 꺾어 눕히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오르고 있다. 그 발자국에 도장이라도 찍듯 내가 따라가고 있다.
땅에 닿은 장대가 마른 겨울 산에 길게 홈을 판다. 생채기 같은 그 홈이 내 가슴으로 걸어 들어와 먼지를 일으킨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도통 가늠이 가질 않는다. 봉화 어느 산자락인 것 같은데 가도 가도 참나무 군락지는 보이지 않는다. 두꺼비 등짝처럼 이마에 땀이 돋는다. 고개를 들고 갈색 천지인 산자락에서 눈은 연두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갈 길 잃은 어머니의 두 다리에 힘을 보태 주기 위해 오빠와 나는 겨울바람을 헤치고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겨우살이는 쉽게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어머니 병간호에 지쳐 있던 지난하던 그 여름처럼 나를 또 조급증에 시달리게 한다.
이태 전의 일이다. 칼로 도려낸 것 같은 기억 한 자락이 그 무렵에 있었다. 우환은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드는지 누구보다 건강하셨던 친정어머니께서 무통주사의 희한한 효능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은 봄이 막 끝나 갈 무렵이었다. 그 주사 한 방이면 요통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하니 그 신통함이 의심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식 된 도리로 우리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음날로 용하다는 신경외과를 찾아 맞은 주사가 엄청난 의료사고로 이어질지 누가 알았겠는가? 바늘의 깊이를 잘못 가늠한 탓에 척추신경을 손상시켜 멀쩡하던 두 다리가 완전히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식구 모두 생업을 작파하고 병원과 싸웠지만 과실을 인정하지 않는 병원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다리는 쓰다 남은 튜브 속의 물감처럼 굳어만 갔다. 그 시점에 가장 괴로웠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나였다. 그 많은 딸들을 두고 왜 하필 내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를 평안하게 해 드린다는 것이 종래에는 걷지도 못하게 만들고 말았으니 나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기분으로 그 여름을 견뎠다.
장맛비 속에서도 나는 조갈 난 마음으로 눈만 뜨면 어머니에게 화장실 길이라도 열리길 빌고 또 빌었다. 어머니는 평소의 옹골찬 성격 탓인지 의식은 멀쩡한데 움직일 수 없는 두 다리를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듯했다. 시도 때도 없이 새 나오는 오줌발을 바라보시더니 끝내 곡기를 끊으시고 아무도 병실에 오지 못하게 했다. 식솔이 아닌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일이 더할 수 없이 창피하셨으리라. 어머니와 나 단둘이 있으면서도 한동안은 서로 눈을 맞추지 못했다. 서로의 근심이 얕은 물 속 들여다보듯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나대로는 온몸이 땀벌창이 되도록 간호를 했지만 요령 없이 몸을 일으켜 세우는 바람에 어머니의 겨드랑이는 성할 날이 없었다. 환자복 사이로 푸르게 멍이 오른 가슴팍을 보며 멍보다 더 큰 아픔이 내 가슴에 찍혔다. 약물 과다 투여로 생긴 일이니 세월이 흘러 자정 능력으로 자연치유 되는 길 이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밤마다 어머니의 두 다리가 빠져 나가 버린 빈 바지를 껴안고 먹먹한 가슴을 달랬다. 지루한 장맛비처럼 어머니 얼굴은 내내 어두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병원 생활에 어머니를 잠시라도 기쁘게 해 드릴 요량으로 좁은 침대 옆에 나란히 누워 보기도 하고 간간이 놓는 어깃장도 다 받아 주었다. 그러고 나니 어둡던 얼굴이 차차 가시기 시작했다. 애쓴 나의 시간이 약이 되었던 모양이다.
운명이 어머니의 고통 한가운데 나를 들게 한 것은 분명 어떤 연유가 있으리라. 그 연유의 실타래를 따라가다 보면 어머니의 등걸에 가장 오랫동안 매달려 젖을 빨았던 내가 있다. 하루 일 속에 다 녹아나 남아 있을 것도 없는 빈 젖을 물면 젖보다 엄마 품속에서 나던 그 시원한 냄새가 좋아 오랫동안 파고들었던 생각이 난다. 자식 일곱을 키워낸 빈 등걸 같은 가슴에 붙어 면목없게도 참 오랫동안 엄마의 체온과 수액을 빨아먹었다. 그럴 때마다 엉덩이를 두드리시며 단 한 번도 마다하신 적이 없다. 내 엉덩짝에 살이 오를 때마다 엄마의 가슴팍은 여위어 갔을 터인데 말이다. 생살 깊이 따뜻한 체온 하나 간직한 어머니는 가지마다 겨우살이 같은 자식을 매달고 힘든 삶의 강을 건너오셨다. 자식들을 위해 추운 겨울날도 뿌리로부터 힘들게 물을 길어 올리는지 아무도 몰랐다. 표도 나지 않는 그 일은 어머니여서 당연히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듯 어머니의 노고를 모르고 있었으니 운명은 개중 빚이 많은 나를 고통의 중심에 서게 한 것 같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참나무 군락지에 닿았다. 말라 버린 참나무 등걸에 손을 올려 놓으며 표피 깊숙이 흐르는 강물소리를 들어 본다. 참나무의 따뜻한 체온이 이 추운 겨울에도 겨우살이를 온전히 푸르게 하듯 오빠와 나의 더운 입김이 어머니의 다리에도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나무 꼭대기마다 연둣빛의 뭉치들이 푸르게 달려 있다. 초록이 되기 이전의 저 미완의 연두는 영원히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 자식들의 미흡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참나무 아래 서서 한숨을 돌리고는 낫으로 겨우살이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참나무에서 겨우살이를 완전히 분리해 내기 위해 오빠의 낫질은 가차없다. 가지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온 겨우살이 모양은 항용 까치집 같다. 어머니가 우리들을 품었던 둥지 마냥 둥글고 푸른 가지 끝에는 투명한 과육이 씨를 에워싸고 있다. 저 연두의 푸른 물줄기가 한 모금 약물이 되어 어머니 핏줄 속으로 들어가야 하리라. 새롭게 세포가 살아나고 또다시 그 기운으로 천근 같은 다리를 옮겨 문지방 길이 훤히 열렸으면 좋겠다.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 한 자락을 가슴에 품고 힘을 다해 겨우살이를 자루 속에 담는다. 깜깜한 자루 속이 비어 버린 어머니 바지 속 같다. 어둠도 한참을 들여다보면 그 곳에 밝음이 있듯이 어둑한 자루 속이 겨우살이 때문인지 연두의 푸른 물이 출렁인다. 환하다.
평생을 어머니는 자식들을 지키고 서 있는 참나무 등걸이셨고 우리는 그 곳에 매달린 겨우살이 자식들이었으니 이제는 우리 속내 우려낸 푸른 물을 어머니께 되돌려 드려야 할 차례인 것 같다.
* 겨우살이 : 단향목, 반 기생식물, 참나무나 오리나무 등 활엽수 나뭇가지에 뿌리를 박고 자라며 약재로도 널리 쓰인다.
웃기 돌
끝물 김치 사이로 봄이 오고 있다. 군내 나는 김칫독을 비우고 묵은 된장독도 작은 곳으로 옮겼다. 갖추 담아 놓은 장아찌 독도 함께 비운다. 두어 달 바람을 치게 한 후 오뉴월 풋것이 성해지면 그때 새롭게 장아찌를 담을 요량이다. 먼지 먹은 뚜껑을 여니 제일 먼저 내 눈을 사로잡는 게 있다. 돌고래의 눈알 같은 웃기돌이다. 일 년 내도록 장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 그런지 새까맣다 못해 햇살 받은 몸이 눈부시다. 들기름을 먹인 듯 반들거리는 웃기 돌은 처음 우리 집에 데리고 올 때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다. 회색 빛깔과 푸석하던 돌의 살갗이 한결 매끄럽고 고와진 것이다. 피안을 건너듯 어두운 장독 안에서 끝없이 부유하려는 내용물을 지그시 누르고 앉아 있었을 시간을 생각하니 웃기 돌의 명상이 승려들의 동안거 못지않게 장해 보인다. 짜고 어두웠을 그 공간에서 돌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떠오른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자신을 가라앉힐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더 크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 가라앉힘은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더 깊고 그윽하게 곰삭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다. 턱없이 떠오르면 부패하기 십상이다. 숨을 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공기이기도 하지만 삭히며 발효를 거칠 때는 공기와의 접촉이 산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가라앉을 수 없을 때는 지그시 눌러 주는 웃기 돌이 필요한 것이다. 돌의 무게와 내용물이 받을 하중 사이에서 장아찌는 맛있게 제 몸에 간장 물을 들이는 것이다. 그 물을 짙게 받아들일수록 장아찌는 더 맛있게 익어 간다. 내 주변에도 공기와 장물 사이를 견고하게 막아 사유의 부패를 막아 주는 그런 웃기 돌 같은 한 사람이 있다. 무심한 듯 아주 선명하게 다가서는 그 사람, 살막금의 정분 씨다.
감정의 진폭이 커서 끝없이 떠오를 때 매서운 말 한마디로 나를 눌러주는 사람이 정분 씨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글쓰는 사람은 제 감정을 여과 없이 값싸게 방출하기 시작할 때 이미 작가로서의 생명은 끊어진 것이라고. 몇 번이고 곱씹어 봐도 그녀의 말이 맞다 싶다. 이런 말을 수시로 화두 던지듯 하는 정분 씨는 장물에 잘 절여진 웃기 돌 같은 여자다. 가무잡잡한 얼굴하며, 시집을 두 권이나 낸 이력하며, 한우 서른 마리와 동거를 하기도 하고 논농사와 토마토 농사도 팔자로 잘 짓는 여자다. 마당 한가운데 컨테이너 박스 하나를 세우고 골고다의 언덕 같은 그 곳에서 그녀는 매일 밤 글쓰기와 연애를 한다, 해외여행 중에도 줄곧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우리를 유쾌하게 했고 한 방을 같이 쓴 나는 아침마다 요가 포즈로 물구나무선 그녀를 지켜봐야 했다. 올 정초 우리 집에서 전국의 글쓰기 친구들이 한꺼번에 모여 모임을 가졌다. 근 일 년 만의 모임이라 반색을 하며 이야기에 골몰할 때 그녀는 옆에 앉아 졸고 있었다. 지난밤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밤새 보듬고 앉았다가 새벽 기차를 탔다는 거다.
정분 씨만이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삶의 방식이다. 그녀의 철학은 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것이라는 이론이다. 집도 그 집터 근방에서 나서 자란 나무로 짓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같은 기후 조건에서 자랐기 때문에 비틀림이 적고견고 하다는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나무가 단지 집으로 몸을 바꾸었을 뿐 같은 바람을 들이마시고 같은 숨을 내뱉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무에서 집으로 편안하게 옷을 갈아입은 나무 안으로 사람이 드니 편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가 내민 선물은 까만 서리태 한 봉지씩이다. 친구들 머리 수만큼 봉지를 만들어 와 앞앞이 한 봉지씩 나누어 주며 봉지 안에 손을 넣고 콩의 숨소리를 느껴 보라 한다. 한 움큼 콩을 쥐니 알알이 손바닥에 박혀 오는 뿌듯함이 있다. 쥐었던 손을 놓자 미끄러지듯 손바닥을 빠져 나가는 콩들, 지난 여름 정분 씨가 흘렸을 땀이 배어나는 것만 같다. 우리 집 베란다 화초를 쓰다듬으며 정분 씨 자신의 화초는 농사라고 말한다. 도시 속에 있는 우리들이 화초를 키우듯 정분 씨는 이 콩을 키웠을 것이다.
장물에 절여진 새까만 돌을 꺼내 흐르는 물에 씻은 후 볕 좋은 베란다에 널어 꾸덕하니 말려 본다. 그러고 나니 습기를 날린 돌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구부려 독을 씻다 말고 말라 가는 돌들에게 눈을 맞춰 본다. 흰 이를 드러낸 정분 씨가 거기 앉아 있는 듯하다. 내남천에서 데리고 온 돌인데 밀양에 있는 그녀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지금 이 웃기 돌은 수석을 고르는 간택의 손길에서 무늬나 색깔이 마땅치 않아 어설프게 밀려난 돌들이다. 하지만 한 쪽에 밀쳐져 있던 돌들도 웃기 돌로 쓰여지며 아름답게 여물어진 것이다. 사는 일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돌 하나도 다 쓰임새가 있어 이 세상에 왔을 터인데 하물며 사람은 여북하겠는가. 지금도 제자리를 찾지 못해 부유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속에 웃기 돌 하나쯤 가져 보면 어떨까. 일 년 내도록 제 소임을 다한 웃기 돌의 모습은 봄 햇살 아래 참으로 당당하고 곱다. 볕에 그을린 정분 씨의 모습처럼…….
육십 촉 전구
며칠 전부터 몸 구석에 검은 띠를 두르는가 싶더니 끝내 숨이 멎었다.
요 며칠 조짐이 좋지 않았다. 영 희뜩하니 밝지 않고 가끔은 푸르르 떨 듯 빛의 균열이 심하기도 했다. 전류의 영양을 영 받아들이지 못한 듯 어둑하더니 예고도 없이 화장실을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집에 전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탓에 어둠을 더듬어 밤길에 나섰다. 발길에 채는 돌들이 어둠 속으로 금방 나선 탓인지 낯설다. 어둠을 어둠인 채로 단 일 초도 견뎌 보지 못한 문명화된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며 슈퍼로 향했다.
골목길을 벗어나 가로등 아래 섰다. 잠시 빛을 잃었을 뿐인데 가로등의 불빛이 반갑다. 무엇이든 눈으로 확인되어야만 편안해지는 심리는 불 없이는 단 하루도 견디지 않은 세대라 그런 것 같다. 슈퍼에 들러 전구를 고른다. 화장실이라 너무 밝은 것은 좋지 않아 삼십 촉 전구를 썼는데 자꾸 육십 촉에 손이 간다. 촉수가 올라가면 더 오래 버틸 것 같은 안도감과 모든 사물이 더 뚜렷해지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불투명의 육십 촉 전구를 들고 집으로 왔다.
전구에 검은 점이 들 듯 친구 폐에 나쁜 덩어리가 든 것도 순간이었다. 별다른 예고 없이 누웠다는 그녀를 찾아 서울로 올라가니 물 날린 병원 침대 위에 시트보다 더 희뜩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다른 장기라면 수술이라도 해 볼 텐데 폐는 여지가 없었다. 참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필라멘트가 끊어질 듯 불안한 상황을 그저 눈으로 지켜봐야만 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늘 밝음 속에 기거하다 한 순간 빛을 잃어버려 깜깜한 어둠 속에 내몰렸을 때처럼 그녀의 눈빛은 아득하기만 하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가끔 떨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눈빛이 전류가 다해 가는 전구처럼 나를 불안하게 했다. 가끔 만나 보면 기침이 오래갔고 등이 아프다는 소리를 한 것도 같다. 중년이라 다들 찾아오는 증세려니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니 등이 그렇게 아팠던 모양이다. 어떤 일이든 조짐이 있게 마련이다. 그 조짐을 빠르게 읽어내지 못했을 때 불시에 어둠을 만나는 것이다.
갑자기 전구가 나갔을 때 최소한 여분의 전구라도 집에 준비해 두었다면 어두운 밤거리에 나서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다. 불빛이 흔들리고 사물이 흐릿해지는 수많은 사인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전구의 수명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화근이다. 그녀 역시 왜 등이 아픈지 조금만 자신의 몸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처럼 막막한 어둠 속에 서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을 잡아도 온기가 없다. 이미 몸도 마음도 다 방전된 상태다. 눈이 새까만 자식들 이야기에서는 잠시 화색이 돌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식을 끝까지 돌봐 줄 수 없다는 참담함에 그녀는 또다시 싸늘해진다. 잠시 병실에 고요가 다녀간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말문을 닫았을 것이고 나 역시 아무런 도움도 되어 줄 수 없는 현실에 목이 메였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가 뚝 끊어지는 순간은 잠시 천사가 다녀가는 시간이라는데 절박한 마음에 그 천사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먼 길 온 나를 걱정한다. 병실에서 읽던 손때 묻은 시집 몇 권을 내 손에 들려 주며 남겨질 아이들을 부탁했다. 지금껏 그녀는 단 한 번도 일을 떠나 생활하지 않았다. 늘 일의 꼬리를 잡고 원형의 맴을 돌았다. 그 반복된 노동이 그녀 몸을 얼마나 심하게 가격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말이다. 눈만 뜨면 새벽 과일시장에서 질긴 잡초처럼 발품을 팔아대더니만 끝내 빛나는 생을 한번 영위해 보지도 못한 채 삶의 문을 닫아야 하다니 안타까움이 턱에 찬다. 쉼 없이 불을 켜고 있다 보면 남 먼저 심지를 소진하는 것이거늘. 그녀는 왜 그것을 진작 몰랐을까? 잠시 잠깐이라도 스스로에게 관대한 휴식을 주었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늘 남을 먼저 생각하고 염려하는 마음자리다 보니 자신의 일은 뒷전이었던 게 분명하다. 낡은 침대 시트 아래 내 마음을 찔러 두고 돌아서니 눈앞이 깜깜 밤중이다. 필라멘트가 끊긴 전구처럼.
수명이 다한 전구를 어둠 속에서 돌려 뽑고는 육십 촉 전구를 끼운다. 불이 들어오자 전구를 감싸고 있는 다섯 손가락에 따뜻함이 느껴진다. 예전보다 삼십 촉 더한 빛이 또 삼십 촉만큼 어둠을 밀어낸다. 사방에 널린 사물들이 한결 새뜻해지고 선명해진다. 화장실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낯설기 그지없다. 까짓 것 용을 써 봐도 그녀의 목숨 가까이는 닿을 수 없다. 그녀 생명에 내 손길이 닿을 수만 있다면 수명이 다한 어둠을 몰아내고 삼십 촉 더한 빛을 얹어 줄 텐데, 잠시 전구를 빼내기 위해 올라선 의자가 흔들린다. 중심을 잃은 내가 화장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러나 아픔은 잠시 다시 일어나 전구에 덮개를 덮고 돌아선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다시 갈아 끼울 수 있는 삶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럴 수 없는 그녀의 현실이 내게는 어둠일 뿐이다. 새로 끼운 전구에 밀려 차츰 소멸해 가는 어둠을 바라보며 죽음을 돌려 삶을 밝힐 수 없음에 불빛 아래서도 내 마음은 암흑천지다. 이미 치료는 늦었다. 다만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진 강력한 진통제만이 오늘 밤 어둠을 뚫고 내 눈앞에 환하게 다가온다.
자객
―마개와 따개
자객이 떴다.
푸른 안개도 바람을 가르는 그림자도 없다. 끊어 놓을 듯한 호흡도 꿈틀거리는 맥박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달빛 한줌 등에 업지 않고 월담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은 듯하다. 자객은 그 흔한 검 한 자루 손에 쥐지 않고 무더운 염천을 건너 우리에게로 왔다. 심복 하나쯤 둘 법도 한데 오직 혼자다. 이울어진 빛의 배후에 도사리고 앉았다가 싸늘한 쇠붙이 올가미 하나 달랑 들고 긴 유리병의 목을 따러 하강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숨 줄을 끊어 놓을 듯한 자객의 기세에도 마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병은 긴 목을 빼고 앉아 언제나 목숨은 내놓기 위한 것이라는 듯 일말의 저항도 없어 뵌다. 병은 자객을 만나기 전 냉골의 방에 앉아 긴 참선에 들었을 것이다. 화두타파를 위해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망들을 마개로 꾹꾹 눌러 담으며 올가미 자객을 기다렸던 것이다. 마개는 병의 머리다. 머리는 곧 목숨 줄에 해당한다. 그러다 보니 자객의 출현에 병보다 먼저 놀라는 쪽은 마개다. 불안한 마개와 달리 의연하던 병도 주인 손에 끌려 단두대 같은 탁자 위에 올려지면 그때 비로소 온몸에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것이다.
흐르는 땀이 갯바위에 미역 감기듯 온몸에 감겨드는 여름밤. 아직 마개를 열지 않은 병은 극도로 눌려진 병 속의 기압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 직전이다. 자객은 한 순간도 병의 표정을 놓치지 않는다. 잘 훈련된 자객의 소임은 병의 목을 시원스레 따 주는 것이다.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단칼에 밀폐의 막막함을 열어 주는 것이다. 잠시 옆 탁자로 건너간 자객을 기다리는 동안 성급한 이는 숟가락을 뒤집어 자객을 대신한다. 하지만 시원스레 처단도 못하면서 공연히 마개의 머리에 상처만 낸다. 헛김만 뿜어낸 병의 머리를 보더니 다시 자객이 돌아왔다. 보자마자 마개의 머리에 올가미를 건다.
“뻥”하며 짧은 신음을 토한 병은 체액과 비밀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이제껏 쏟아질 듯 병의 내부를 고스란히 막아서 있던 마개는 한 순간 떨어져 나가 바닥에 뒹군다. 서로가 서로의 압이 되어 주던 사이가 이제 막막한 이별을 맞이한 것이다. 마개와 이별 후 병은 자신의 내부를 아낌없이 토해 내 삶의 곤고한 언저리에 선 사람에게 위안과 용기를 부어 준다. 시원한 술 한 모금이 목젖을 타고 내려가면 고요하던 사람도 왁자하니 목소리가 높아진다. 병은 육즙 흐르는 몸을 곧추세우며 그 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제일인 양 다 들어 준다.
비워지는 병의 수가 많아질수록 선술집 처마 밑, 사람들 얼굴에 노을이 붉다. 사는 일이 영광과 오욕, 채움과 비움의 반복이지만 그 아래 눌려 있었을 보통사람들의 욕망도 마개와 따개의 분리 앞에 같이 터져 오른다. 터져 오른 기운은 마른 곳을 해갈시키고 막힌 곳을 뚫는다. 어디 배설이 육신의 배설만 가능하던가. 끝없이 오가는 술잔 아래서의 정담은 한계에 이른 정신세계에 길을 터주고 또 다른 삶을 모색케 해 준다. 서로 쌓인 회한이 있다면 걸쭉한 한 판 아우라에 시원스레 풀어낼 일이다.
자객은 밤새 여기저기를 다니며 병의 머리를 열어 준다.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해질수록 자객의 몸놀림은 바빠진다. 밤이 깊어 갈수록 선술집 바닥에는 몸을 버린 마개들만 수북이 쌓여 간다. 그 옛날 무장들은 투구 속에 향낭을 넣어 다녔다고 한다. 목이 베어지는 순간에도 상대에게 더 큰 승리의 쾌감을 주기 위함이었다니 베는 자도 베어지는 자도 다 극점을 관통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따개 역시 마개의 목을 시원스레 땀으로써 서로에 대한 존재감을 확인하는 셈이다.
선술집 구석에는 무두인(無頭人)이 된 병들의 무덤만 쌓여 간다. 플라스틱 관에 제 몸을 나란히 꽂고 저 세상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잃어버린 제 머리를 찾을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서로 갈 길이 다름을 알아챈 듯하다. 병은 마개 무덤을 무심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 미련 따위는 없어 보인다. 발에 채여 찌그러지고 오그라진 저 금속 조각들. 마개는 평생 병의 허방을 막다가 이제 막 제 소임을 다하고 꽃잎처럼 떨어져 누웠다. 끝없이 터져 오르는 생의 압력을 안간힘을 다해 막아 섰지만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후줄근한 바짓가랑이를 털며 일어선 마지막 손님이 주인에게 한마디 던진다.
“세상에 막지 못할 것이 무엇이며 또한 뚫지 못할 것은 무엇이오”
선문답 같은 그의 말에 빗자루 든 주인은 그냥 빙그레 웃는다.
검은 골목길이 마지막 손님을 삼킬 때까지 빗자루는 잘린 머리들을 쓸어 담고 있다. 잘그락거리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푸른 새벽기운을 가른다. 자객도 돌아갈 시간이다. 흩날리는 머리카락도, 마지막 그림자도 없이 카운터 위 선반으로 가 젖은 몸을 누인다. 목을 잃고 직립의 잠에 빠진 병들의 행렬이 자객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한 줄기 바람이 인다. 멀리 새벽 여명이 푸른 따귀를 내밀고 있다.
수필세계 신인상에 김은주씨 | ||||||||
2007년도 상반기 신인상을 수상한 김은주 씨(수필사랑문학회 회원)는 경북 경산 출신으로 대구수필창작대학을 수료했으며, 2007년 부산일보와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동시)됐고, 2005년 평사리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심사를 맡은 강돈묵(거제대 교수) 박양근(부경대 교수) 한상렬(수필시대 주간) 씨는 심사평을 통해 "체화적 구성과 직조된 문장으로 신인다운 신선한 필체를 가진 작가"라고 호평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
- 2007년 07월 02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