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 대표의 생가와 선영을 둘러보고 필자는 다시한번 풍수지리에 깃들어 있는 오묘한 사상과 실제를 확인하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박 전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제1 야당의 대표에 올라 입지를 굳히고 대선의 유력주자로 떠올랐다. 특히 필자는 “그가 부친의 후광을 엎고 특정지역의 지지기반으로 승승장구의 출세가도를 달려올 수 있었다”고 쉽게 단언하는 세상사람들의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그 이유를 박 전 대표의 생가와 선영의 음덕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또 풍수타령이냐’고 힐난하며 웃어 넘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전 대표의 출세 요인에서만 그 사연을 찾아 해답을 제시한다면 여기에는 또 다른 역설적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벽에 부딪히게 된다.
박 전 대표가 후광을 입었다는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에 대비될 만큼의 ‘과’가 많았고, 한 지역의 성원을 입었다면 다른 지역의 역작용도 그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여러 요인을 배제한 채 오로지 박 전대표의 생가터와 선영의 음덕이 과연 정치적 위상을 탄탄히 다지며 대권을 꿈꾸는 오늘을 있게 한 에너지의 원천이 됐는가를 냉철하게 따져보기로 했다.
유명인사에 대한 생가터와 선영을 더듬어 보고 답산평을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객관적이면서도 시행착오 없이 정리해 세상에 밝히는 일이 정말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필자의 지적 호기심과 강한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려는 내발적 동기가 없었다면 이번 답산기는 중단됐을지도 모를 만큼 그 과정이 너무 힘겨웠다.
대권 입지자 3명 모두, 생가터가 여느 대통령의 그것 처럼 시골에 있어 내룡해온 용맥을 타고 그 행도를 확인하는데 쉽지 않고, 저항이 많았다는 점이다.
고건 전 총리와 박 전 대표는 생가터가 서울과 대구인 탓에 생가터까지 이어져 내려온 용맥을 살펴서 실측하기에는 대도시라는 특수성으로 제한성이 너무 컸다. 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생가는 일본 오사카이고 4세부터 몇년동안 성장기를 보낸 곳은 경북 포항땅 일우였다는 데에 또다른 어려움이 뒤따랐다.
하지만 필자는 한계상황까지 뚫어야 된다는 일념과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숨가쁘게 뛰며 실체를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사실 박 전 대표의 생가터는 K시의 어느동에서 태어났다는 믿을 만한 정보를 입수하고 그에 따른 답산기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답산기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박 전 대표의 생가는 K시가 아니라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5-2번지라는 정확한 사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대구로 달려간 것이다.
물론 실제 답산을 나서기 전에 생가터를 둘러싼 용세(산봉과 산맥)의 근원과 행룡의 과정을 샅샅이 조사했다.
이번 박 전 대표의 생가터는 실제 답산을 통해 용진혈적과 혈 규모의 대소경중을 분석하는 것에 비해 정확한 생가터의 지점을 탐문해서 찾아가는 일이 더 어려웠음을 밝혀두지 않을 수 없다.
박 전대표의 생가터는 대구시 중구 삼덕동파출소를 찾아서 주소지의 시내 안내도를 익힌 다음 대구경북금융결제원을 찾아가다 보면 그 바로 왼편으로 새로 지은 9층 건물의 1층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그 지점에서 부터 사전에 조사된 지형도와 용맥의 행도 가능성을 되짚어 가면서 역코스를 밟아 옛날 봉산(또는 연구산·連龜山)까지 더듬어 용맥의 흐름을 타고 용맥상의 도상도를 그려가면서 그 만두(봉산 또는 연구산) 부터 생가터 지점까지 용맥을 확인했다.
그 결과 이른바 교구통맥법에 비춰 정확히 3태교구의 혈작으로 이뤄진 대지명혈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내룡한 용맥이나 후룡의 성신(산봉) 또한 후중하며 그 규모도 대단했다.
지도상에서 확인한 대로 생가터 (대구시 전체)의 근조산은 이른바 앞산(660m)이 틀림 없었고 앞산에서 낙맥 결인 비룡해 대구시내의 주요 지룡을 분지케 한 비파산이 앞산의 품에 안기듯 자태를 뽐내면서 강세의 앞산 용세를 순화시킨 뒤 낙맥해 큰 자락은 두류산을 거쳐 달성공원을 지나 금호강과 신천이 합수돼 감돌아 가는 지점에서 침산을 멈춰 세우고 그 마무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지맥이 평맥과협해서 우선룡으로 비룡 봉산(또는 연구산)을 뭉뚱그려 앉혀놓고는 거기에 길고 긴 여정을 통해 간직해 온 땅의 기운을 응결시켜 숨고르기를 한 다음, 연이어 용맥의 흐름을 우선룡에서 좌선룡으로 변국하면서 교묘히 몸을 틀어 손사룡(동남방-북서방으로 행룡)을 토해 내듯 천심룡으로 내려 보낸뒤 한참뒤에 다시 북쪽으로 머리를 트는가 했더니, 다시 동북방으로 진행을 바꾸고는 무엇에 쫓기듯이 또다시 동쪽으로 회룡한 후 동남방으로 행도를 바꾸고는 살며시 안착해 박 전 대표의 생가터라는 그 편의점 건물로 들어가며 길고긴 행룡을 마무리한다.
산도와 사진에서 보듯 옛 봉산도 지금은 산봉우리의 형세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개발돼 큰 빌딩숲을 이뤘고 내룡한 용맥의 흐름도 도로의 높낮이에 따라 살펴보고 행인에게 물어가면서 그 나아감을 실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날의 일진이 좋아서 였을까. 낯선사람이 나경을 들고 뛰어 다니는 것을 지켜본 대구 토박이 노신사가 나서 필자의 궁금증을 많이 풀어주고 용맥에 대한 진행사항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안내해 줬다.
그 고마움이란 낯선 땅에서 어려움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가늠하기 어렵다.
그 노신사는 “그냥 대구 본토배기 쯤으로 적어주라”는 말만 남긴채 가던길을 재촉했다.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은 게 못내 아쉽다.
특히 그 노신사는 “어쨌든 대구의 양택대지는 달성터를 먼저 들먹인다”고 일러줬다. 그래서 일까. 앞산을 거쳐 비파산에서 내려온 주룡맥은 실제 간산에서나 지도에서도 두류산을 지나 달성공원으로 진행되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봉산이라는 큰 마디는 박 전 대표의 생가터를 결작시키는데 큰 몫을 하고 있음을 굳이 부인할 수 없었다. 그 맥이 좌선으로 크게 진행해 끝 마무리를 하는 것에 이르러 우선수로 굽이쳐 흘러오던 물길이 중구지역에서 유별나게 감돌아 환포한 것도 예사로운 혈증이 아닐 수 없다.
대구시의 근조산이 앞산(사실은 후룡의 성신)인 듯이 보이지만 산도에서 확인되 듯 그 본원 역시 팔공산(1192m) 이다.
팔공산의 힘찬기상을 안고 흐르는 용맥이 남쪽으로 진행하다 금호강 상류에서 도수과협으로 인상적인 낙맥과 결인을 한 뒤, 다시 크게 비룡해 성암산, 병풍산, 동학산, 봉화산, 삼성선에서 북으로 방향을 틀어 비슬산 등을 세우고 성불산을 앉힌 후 그 후중하고 크게 날개를 펼쳐 개장한 앞산을 드높이 세워 대구시의 전역에 땅의 생기를 공급한다. 이는 대동여지도에도 소상히 그려져 소개돼 있다. 이산봉과 앞산에서 학산공원으로 분지된 맥락에 솟은 도덕산 및 삼성산에서 수성구 쪽으로 내려와 우뚝 세워진 대덕산을 직선으로 이으면 중구의 삼덕동이 상층 중심에 위치한다. 그리고 수성구에 소재한 삼덕동 역시 그 쪽을 중심 삼아 보면 삼각형의 상층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삼덕동으로 이름지은 것일까.
어쨌든 박 전 대표의 생가터는 용진혈적에 3태교구의 대지에 속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다는 게 간산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