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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다섯 나라를 훑어보다!
드디어 떠나다
유럽 여행, 몇 년 전부터 계획하고 별러 왔던 일이다. 처음에는 동남아로 갈까 했지만 동남아는 가 본 사람들이 많아서 기왕에 가는 것 크게 가 보자, 이렇게 얘기가 됐다. 그런데 세계 경제가 요동치는 바람에 환율이 크게 올라 갑자기 부담이 많아졌다. 그래서 긴급회의를 했다. 우리는 모두 ‘그래도 가자. 지금 무산되면 다시 가기 어렵다.’ 이렇게 여섯 집 스물네 명은 유럽 여행에 대한 의지와 각오를 다졌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떠나기 전까지 걱정하면서 설레면서 준비하는 그 기간이 더 행복한 것 같다. 일단 여행이 시작되면 일정과 스케줄에 의해 거의 자동적으로 굴러가게 마련이니까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한 것이다. 새로운 광경과 신비한 모습에 감탄할 준비만 되면 만사 오케이니까. 식구들이 모두 멀리 해외여행을 가는 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솔직히 부담은 된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아이들은 부쩍부쩍 커 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 딱 이 시점에 큰 맘 먹고 세상을 한 번 돌아본다는 것, 매우 값진 추억이 될 것이다.
여행이 무언가? 어디를 가서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다. 현지의 문화와 역사를 몸소 체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행이란 정말 이것이 전부일까? 현지의 현란한 문화에 압도당하여 우리나라와 나를 부정하고 업신여긴다면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여행을 통하여 사람은 새로운 모습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평소 나와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여 낯선 환경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이다. 내 집, 내 나라에만 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던 이것을 우리는 여행을 통하여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행을 다녀오면 더욱 더 나를 돌아보고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되어 나를 더욱 사랑하고 긍정하게 된다.
이번 여행의 동반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김동규, 김미라, 가람(초5), 산(초3), 심재욱, 오영미, 찬(중2), 민우(초4), 임원균, 박순라, 한별(중1), 은결(초5), 임창범, 송귀연, 성재(초6), 수경(초2), 최봉석, 조해양, 지선(중3), 지웅(초5), 추창훈, 홍인재, 재연(초6), 재우(초3). 어른 남자, 가족별, 가나다 순으로 불러본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학년이 초2부터 중3까지 꽉 들어차 있는 것이 이번 우리 여행단 구성원들의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는 걸 말해 준다. 그만큼 우리는 다양성을 확보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보니 지구행성의 아름다운 일몰이 몇 시간이고 계속된다.
정확히 2009년 1월 2일 오후 1시 56분에 우리가 탄 비행기는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기내의 안내 방송이 우리말과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온다. 떠나는 걸 드디어 실감한다. 처음에 우리가 탄 비행기는 뒷걸음치면서 방향을 틀더니 이제 서서히 앞으로 구르고 있다. 갓난아이가 걷기 위해서는 먼저 온몸으로 기듯이, 우리의 비행기 날기 위해서 먼저 온몸으로 구르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비행기를 많이는 아니지만 탈 때마다 이륙의 그 짜릿한 순간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중력을 이겨내기 위해서 그리고 육중한 자신의 몸을 허공에 띄우기 위해서 비행기는 얼마나 많은 힘을 쏟는가. 자신이 가진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찮은 존재가 되고 만다. 나는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엔진을 가동하며 이륙하는 순간 어떤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비행거리 9천km, 속도는 700~900km/h, 소요시간이 11시간이다. 출발한 지 3시간쯤 지났을 무렵, 우리가 탄 비행기는 바이칼 호수 위를 날고 있다. 아, 바이칼! 나 언젠가 바이칼로 가리. 전 세계 얼지 않는 담수량의 20%, 러시아 전체 담수량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바이칼호수. 남북 길이만도 600km가 넘는다. 형성된 지 2500만년이라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그 호수 위를 지금 날고 있다니, 맑은 날 낮에 내려다보았으면 장관이었겠다.
비행기는 해질녘에 서쪽을 향해 날아간다. 일몰 속도와 거의 비슷하게 비행기는 쉴 새 없이 날아간다. 비행기 창밖으로 일몰의 아름다운 순간이 한없이 계속되는 것 같다. 인간의 문명은 해넘이조차도 우리 눈앞에 붙들어 매는구나. 이렇게 계속 가면 하루 종일이라도 해넘이를 볼 수 있겠다. 이륙 8시간 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위를 날고 있다. 1년 전에 러시아 여행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가지 못 했다. 갔더라면 지금 감회가 더 컸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어느 순간 졌던 해가 떠올라 햇빛을 비춘다. 지구 자전속도보다 더 빨랐던 것이다. 마이클 콜린스가 쓴 <플라이 투더문-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우주과학 에세이>에 보면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비행할 때 걸리는 시간이 90분으로 나온다. 시속 28,440km 의 속도로 날아가는 인공위성을 타면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28분 30초면 갈 수 있다.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 궤도 비행을 하면 하루에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열대여섯 번을 볼 수 있다니 생떽쥐뻬리가 어린왕자에서 그린 장면이 실현된 것이다.
한국 시각으로 새벽 1시 10분에 우리가 탄 비행기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몸을 날개를 접고 몸을 내렸다. 구름층을 뚫고 내려와 비행기는 땅을 향해 몸을 기울인다. 파리 시내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 시각은 한밤중이나 여기 파리는 오후 5시이다. 8시간을 번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갈 때 이번에 번 8시간은 사라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 서쪽으로 날아가는 여행을 하면 어떨까? 계속해서 시간을 벌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할 때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으면서 구르기 시작한다. 파리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이어서 브레이크 날개를 잔뜩 세워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비행기는 자신의 돌진력을 현저히 줄이고 드디어 멈춰 선다. 마지막으로 들은 기내 방송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Thank you for flying with us."
파리에 도착한 우리는 원래대로라면 먼저 숙소에 가서 잠을 잤어야 하지만 우리의 현지 가이드께서 오늘 밤 에펠탑 관광을 해 두면 나머지 일정이 수월해진다 하여 우리는 졸리는 걸 참고 에펠탑 관광에 나섰다. 에펠탑! 구스타프 에펠이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철강건축의 본보기로 건설한 탑이라는데 높이가 무려 300m다. 건설 당시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이와 비슷한 구조물이 전혀 없었고 이 탑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나 기자의 대(大)피라미드보다 2배나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파리의 상징물이 되었고 에펠탑 없는 파리는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한 사람의 혁신과 창의가 사회의 인정을 받을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나는 파리의 에펠탑에 올라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우리나라의 서울이 떠올라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우선 파리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에 놀랐다. 프랑스 전체의 면적은 남한보다 5.57배나 넓지만 인구는 1.3배만 많을 뿐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큰 덩치에 비해 아주 조그맣다. 105㎢에 불과하고 인구도 216만 명이다. 가이드 말씀으로는 우리나라 영등포구 면적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면적을 검색해 보니 파리 시내의 면적은 서울의 강서구와 양천구, 구로구와 영등포구의 면적을 합한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파리의 인구가 14년 동안 전혀 늘지 않았다는 것. 두산백과사전에 1992년 통계가 나와 있는데 인터넷 자료(2006년)와 동일하다. 그리고 에펠탑에 올라서 내려다본 파리 시내의 모습은 안온한 느낌을 주었다. 이 느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자명하였다. 바로 크기가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에펠탑에서 내려다 본 파리 시내의 모습. 화면 중앙에 샤요궁이 보인다.
우리의 경우 수도 서울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은 1/5이 넘고, 서울 경기 수도권이 차지하는 비율은 내년에 사상 처음으로 50%를 넘으리라는 보도가 나왔다. 서울의 인구는 지난 50년 동안 800만 명이 증가했다. 나라의 절반인구를 빨아들이는 수도권. 이는 분명히 건강하고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세종시행정수도법안도 백지화하고 온갖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세종시 수정안을 내놓은 정부는 정말 수도 서울을 위하는 정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같다. 서울이나 세종시만 붙들고 있어서는 나라의 균형 발전은 포기해야 한다. 지방균형발전이라는 대전제가 보이지 않는 지금의 우리나라의 상황과 파리의 시내가 겹쳐져 참 더 속이 상하다. 경제규모로 나라의 석차를 매기는 것에 나는 반대하지만 보통 하는 대로 하더라도, 파리가 서울 인구나 면적의 1/5에 불과해도 프랑스는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다.
프랑스 사람은 좋겠다. 넓지 않은 파리에서 에펠탑에 오르면 자기 사는 동네와 집을 거의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산이 많고 면적이 넓은 서울과 단순비교는 무리이지만 말이다. 도대체 눈을 가로막는 고층빌딩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더 높은 빌딩 짓기 경쟁 시대에 파리는 비켜 서 있는 듯하다.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을 다 둘러본 것은 아니어서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파리에서만큼은 인간적인 높이가 편안함과 안락함을 나에게 주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서울로 몰릴까? 다들 서울이 복잡하고 정신 없어서 살기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몰려드는 이유는 뭘까? 그건 바로 서울에는 여러 가지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서울에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지역(서울도 지방의 하나일 뿐이다. 왜 서울 이외의 지역을 지방이라 하고 서울을 중앙이라 생각할까. 우리 모두는 우주의 중심인데 말이다)에는 기회가 적은 것이다. 먹고 살아갈 기회, 교육받을 기회, 문화향유의 기회가 서울과 여타 지역간의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그럴수록 서울은 더 강력한 블랙홀로 바뀌어 거대 공룡이 되어 간다. 규모가 커지면 집적효과가 커져 효율성도 높아지지만 반작용도 만만치 않다. 온갖 폐해가 발생한다. 교통문제, 주택문제, 교육문제, 오염문제, 일자리 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비상사태 발생시 대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자연 재해에 가깝게 폭설이 내린다거나 폭우가 쏟아진다거나 했을 때, 지진이라도 난다면?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끔찍하게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둘쨋날 오전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갔다. 루브르로 가면서 우리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이동오)한테서 생존을 위한 프랑스말 몇 가지를 배웠다. 낮동안의 인사는 ‘봉슈’ 또는 ‘봉쥬르’(안녕하세요?), 저녁인사는 ‘봉수아’. ‘맥시’, ‘맥시보끄’ (고맙습니다. 매우 고맙습니다) ‘빠그동’(미안합니다). 이 말은 파리똥 해도 통한다고 해서 모두 한참 웃었다. ‘어브바’(다시 만나뵙겠습니다). ‘속띠 SORTIE’(출구). ‘뚜알레뜨’(화장실). 여자화장실표시는 F 또는 D, 남자화장실은 H. ‘실브뿔레’(영어의 please에 해당). ‘뚜알레뜨 실브뿔레?’(화장실이 어디죠?), 종업원 부를 때 ‘헤이’ 하고 부르면 안 되고 ‘실브뿔레’ 해야 한다고. ‘라더시올 실브뿔레’(계산서 부탁해요).
‘루브르’는 ‘성곽, 요새’라는 뜻이라 한다. 중세 때 파리를 지키는 요새로 건설되었다가 역대 왕들의 왕궁으로, 이제는 세계의 수많은 유물과 조각 회화 작품을 모아 놓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루브르에는 수많은 소장품이 있는데 그 중 3대 작품에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 섬의 ‘니케’,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꼽는다고 한다. 누가 정해 준 것인지는 몰라도 3대 작품은 좀더 자세히 보리라 생각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찾고 해서 이런 별명이 붙여졌겠지. 루브르 박물관 광장에는 유리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는데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길 찾기 쉽게 하나의 상징물로 세워졌다고 한다.
박물관은 화려함의 극치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정신의 정수라고나 할까. 너무나 넓고 볼 게 너무나 많아서 갑자기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질려하는 것과 같이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인류 예술의 진수들이 여기에 이렇게 엄청나게 모여 있다니 아주 많은 지독한 수집광들이 있었나 보다.
조각작품들, 그림들, 보석들, 온갖 유적들을 모두 꼼꼼히 보려면 1년도 더 걸려야 할 것을 우리는 2시간도 채 못 되어 휘리릭 보고 나왔다. 일정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쉬웠다. 다음에 파리에 또 오게 되면 여기 루브르에서 적어도 3일은 머물며 이른 아침에 늦은 저녁에 같은 작품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가도 느껴보고 싶다.
들라크르와, 민중의 선봉에 선 자유의 여신, 1830. 루브르박물관
루브르에서 인상적인 그림 3점. 내 눈을 잡아 끈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바로 들라크르와의 <민중의 선봉에 선 자유의 여신>이다. 억압받고 탄압받는 민중들, 그들의 부상당한 몸과 시체를 딛고 자유의 여신은 나아간다. 젖가슴을 훤히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대지의 어머니를 나타낸다. 그녀의 발은 맨발이다. 맨발로 대지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평소에 평온하기만 할 것 같았던 어머니 신은 분노하면 이렇게 떨쳐 일어선다. 오른손에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가 들려 있고 왼손에 장총이 들려 있다. 가장 근원적인 모성성 앞에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남자들이다. 잘 차려입은 신사도 따르고 허름한 노동자, 부랑자도 따른다. 칼을 높이 치켜 든 이도 있다. 이 그림에 역동성과 발랄함을 부여하는 인물은 여성의 오른쪽에 있는 아이이다. 혁명의 대열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떨쳐 일어선 것이다. 마치 우리의 4․19혁명 때 초등생들도 “언니, 오빠들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라는 펼침막을 들고 거리고 나섰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눈여겨 볼 것은 여성과 아이의 손이 하나는 하늘로, 다른 하나는 땅을 향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동작으로 그림에 힘찬 역동성을 부여하고 또한 이 혁명 사업이 단순히 인간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작업임을 나타낸다. 아니면 민중이 고통받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다른 하나는 파올로 베로네세(1528~1588)가 그린 대작 <가나의 혼인잔치>인데 엄청 크다. 벽면 하나를 이 그림이 다 차지했다. 18평 아파트 넓이와 같은 크기라 한다. 677x994cm이니 한눈에 그림이 다 들어오지 않는다. 파아란 하늘이 그림의 윗부분을 차지하고 아래에 혼인잔치 광경이 묘사되어 있는데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져 난감해하는 순간 물동이에 물을 채우게 하여 그 물을 잔에 따랐더니 포도주가 그것도 이전의 것보다 아주 더 맛이 좋은 포도주가 되어 나왔다는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테마가 상징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어쩜 이리도 그림을 크게 그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장면 장면을 마치 현장에서 보고 그린 것처럼 세부묘사가 치밀하다. 이 그림에는 세 가지 만남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의상으로 대변되는 과거와 현재의 만남, 상하의 구조로 대변되는 천상과 지상의 만남, 안과 밖의 대칭으로 대변되는 인간과 건물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이다. 그림 모나리자는 그 명성에 걸맞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자그마한 그림이었다. 77x53cm의 크기였다. 공교롭게 루브르에서 가장 큰 그림인 <가나의 혼인잔치>와 맞은 편 벽에 걸려 있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벽면 하나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크기가 워낙에 크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런데 <모나리자>도 역시 벽면 하나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모나리자>가 크기는 작지만 대작 <가나의 혼인잔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배치를 한 것 같다. 작아도 아주 크게 대접을 받는 그런 느낌이었다.
샹젤리제 거리. 시민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묻어난다
몽마르트 언덕. 거리의 화가들이 활기찬 분위기를 만든다
루브르에서 나와 차를 타고 콩코드 광장을 지나 알렉산드르3세 다리를 건넌다. 이 다리는 드라마 ‘파리의 연인’ 촬영장소였다고 한다. 다리를 무척 화려하게 꾸몄는데 거대한 조각작품 같다. 보훈병원 앵발리드, 몽빠르나스건물, 로댕박물관 등을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설명을 듣는다.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달팽이 요리였다. 프랑스 사람들이 달팽이를 먹는다고 예전부터 조금은 꺼림칙했는데 드디어 오늘 그들의 요리 달팽이를 먹은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미끌거리지 않았다. 그냥 뭐 우리의 우렁 맛 비슷했다. 나는 먹는 것이 까다롭지가 않아서 뭐든 잘 먹는 편이다. 나 같은 식성은 외국 여행하는 데 매우 유리한 식성이다. 이것도 감사할 일이지.
샹젤리제 거리에 왔다. 샹젤리제의 뜻이 ‘천사들의 뜰’이란다. 개선문이 장대하게 서 있다. 파리의 건물들이 그리 높지 않아서 개선문이 장대하게 보이는 것이리라. 이러한 개선문도 서울에 옮겨 놓으면 작아질 거라는 생각을 한다. 관광객이 많은 곳이긴 하지만 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여유가 있어 보인다. 발걸음을 멈추고서 뭔가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아이를 목에 태우고 가는 남자, 그 광경을 찍으면서 천천히 배회하는 나까지 모두 샹젤리제를 한 순간 편안하고 넉넉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다음 행선지로 그 유명한 몽마르트(순교자의 언덕)로 간다. 예수성심성당(사크레쾨르)의 하얀 색 돔과 벽면이 파란 하늘과 청명하게 대조되어 매우 산뜻해 보인다. 언덕 위에 세워진 예수성심성당에서 내려다 보니 파리 시내가 또 한눈에 들어온다. 파리 시내가 평지여서 조금만 높아져도 전망에 매우 유리한 고지가 된다.
몽마르트의 예수성심성당. 흰색과 파란색의 조화가 깔끔하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숙연함과 엄숙함이 더 한다. 예배용으로 조그마한 의자들이 죽 놓여 있고 몇몇 신도들은 간절히 기도를 드린다. 한 바퀴 빙 돌아서 나오는데 종교적 신심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되어 있다.
유럽 성당들의 규모는 매우 크다. 물론 작은 성당도 있지만 역사가 오래된 성당은 대개 매우 크다. 역사와 규모 면에서 일단 인간을 압도해 들어간다. 신 앞에 섰을 때처럼 한 개인의 생명은 하찮게 여겨진다. 그러데 그 생며을 신께서 인정하고 용서해 주고 이끌어 준다는 것, 어찌 아니 큰 은총이겠는가.
그러나 바로 이러한 대규모를 추구하면서 교회는 온갖 세속적인 욕망과 권세를 휘둘렀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섬기는 자의 위치에 있어야 할 교회가 섬김을 받기 위해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고 세속의 정치를 좌우했으니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사원인 ‘절’이 주요 관광지이다. 유럽에서는 교회와 성당이, 특히 성당이 주요 관광 대상이다. 인간의 종교 활동의 본질은 무엇일까? 절대자 신을 향하고자 하는 열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몇몇 종교는 자신이 추구하는 종교적 진리를 절대 진리라고 하며 상대에게 강요하는 걸까? 상대 종교를 존중하면 안 되는 걸까?
센 강의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바라본 노트르담 대성당. 센강의 시테 섬에 있다
센강 선착장에서 유람선에 몸을 싣고 파리를 강에서 바라본다. 강에서 바라보는 경치들이 무척 낭만적이다. 하늘이 붉어지고 반달과 금성이 떠오르고 가로등에 불이 켜지는데 배는 흐르고 흘러서 풍경은 쉴새없이 미끄러진다. 에펠탑에서 던지는 레이저 쇼가 달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간다. 갑자기 웅장한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다. 시테 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황제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의 장례 미사가 거행된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은 무엇보다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노트르담드파리>로 각인되어 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세세한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읽었지만 읽었던 그 순간의 강렬한 기억만큼은 새롭다. 여기에 두산백과사전에 나온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한다.
《노트르담드파리 Notre-Dame de Paris》 프랑스 작가 V. 위고의 장편소설. 1831년 발표.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파리의 노트르담성당의 부주교 클로드 프로로는 그녀가 경비대장 페뷔스 드 샤토페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가 보는 데서 그를 칼로 찌르고 그녀에게 살인미수죄를 뒤집어씌운다. 그리하여 에스메랄다는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형집행 직전에 성당의 종지기인 꼽추 카지모도가 종탑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와서 그녀를 구출해 성당 안으로 도망친다. 프로로는 거리의 부랑배들을 동원하여 노트르담성당을 습격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여 그녀를 관헌의 손에 넘기게 된다. 이윽고 에스메랄다가 교수형을 당하려는 순간 이 광경을 탑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프로로를 카지모도가 등 뒤에서 떠밀어 떨어뜨린다. 그리고 카지모도는 사라진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몽포콘 무덤에서 에스메랄다의 해골을 꼭 껴안고 있는 카지모도의 해골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15세기 노트르담성당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광경이 잘 묘사되어 있고 등장인물도 온갖 계급에 걸쳐 있다. 위고의 대표작인 동시에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노트르담의 꼽추》로 번역되어 있다. <이환>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아주 많은데 최근에 출판된 책 중 눈에 띄는 책이 하나 있다. 《파리의 노트르담》이라는 제목으로 작가정신에서 펴냈는데(42,000원) 장 미셸 파예가 그림으로 당시의 온갖 계급의 의상과 옛날의 건축을 고증을 통하여 생생히 복원해 놓았다는 책 소개말이 이 책을 읽고 싶게 한다.
센강은 문학작품이나 영화의 배경이 되어왔다. 그 중 기욤 아뽈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라는 시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청춘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시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르고 /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가네 / 허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 나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 밤이여 오라 시간이여 울려라 /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네 // 손과 손을 붙들고 마주 대하자 / 우리들의 팔 밑으로 / 미끄러운 물결이 /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 밤이여 오라 시간이여 울려라 /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네(이하 생략)’
이 시를 센강에서 유람선을 탔을 때 한번 읊어 볼 걸 그랬다.
6개월 뒤에 만나자던 이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아무런 연락처도 없었던 이들, 마음속으로만 간절한 세월이 9년이었다. 파리의 골목들과 센강에서 유람선을 타는 것은 이들의 애잔한 운명을 달래주는 데 더 없이 적절했다. 바로 우리처럼 그들도 유람선을 타고서 에펠탑을 바라보았고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보았지. 그러나 그들은 풍경에 몰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소중했던 사람이 꿈에도 그리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셀린느는 제시를 위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데 그 노래가 너무나 마음 아프게 서정적이었다. 단순한 선율이 심금을 울린다. 여자 주인공 셀린느가 9년만에 재회한 예전의 하룻밤 사랑을 나눈 그 남자 주인공에게 들려준 노래는 “왈츠 한 곡 들어봐요 Let me sing a waltz”로 시작한다. 이 노래는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세월과 자신의 속마음이 다 들어 있다. 그래서 보는 이의 마음을 더 애틋하게 한다. 그 노래 가사 일부분을 감상해 보자.
파리 센강 유람선에서 바라본 저녁의 에펠탑
왈츠 한 곡 들어봐요
그냥 문득 떠오른 노래
왈츠 한 곡 들어봐요
하룻밤 사랑의 노래
그날 그댄 나만의 남자였죠
꿈같은 사랑을 내게 줬죠
하지만 이제
그댄 멀리 떠나갔네
아득한 그대만의 섬으로……
그대에겐 하룻밤 추억이겠죠
하지만 내겐
소중한 당신
남들이 뭐라든
그 날의 사랑은 내 전부랍니다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어
그날 밤의 연인이 되고 싶어 ~
한식당 ‘권’에서 저녁을 먹었다. 잡채, 갈비탕, 밴댕이 무조림, 김치, 양파조림 등 완전 한국식으로 배불리 맛나게 먹었다. 요즘 웬만한 해외여행지는 한국 식당들이 많이 진출해 있어서 이틀에 한두 번은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도 지금은 별 무리 없이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내일은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간다. 우리의 여정은 스위스 알프스 융프라우요흐,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를 거쳐 이탈리아로 갈 예정이다. 이번 유럽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나라 프랑스를 벌써 떠난다고 하니 참 아쉽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았는데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미술작품들을 꼼꼼히 보고 싶다. 루브르궁전의 서쪽에 인접한 튈르리 공원에서는 조각상들을 보고, 센강에 다리가 많은데 그 다리들의 특징과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노트르담 대성당 안에도 들어가 보면 좋겠다. 파리식물원에서 내가 좋아하는 식물들을 관찰하고, 여러 차례 지나치기만 했던 로댕미술관 안에 꼭 들어가 보고싶다. 할 수만 있으면 오페라극장에서 공연관람도 해 보고 싶고, 몽마르트 묘지에서 스탕달, 베를리오즈의 무덤을 찾아보고 몽파르나스 묘지에서는 보들레르, 모파상, 생상스의 묘지를 확인하고 싶다. 그러나 이제 파리를 떠나야 할 때다. 내일 새벽 프랑스 고속철도 테제베를 탄다고 하니 기대된다.
첫댓글 아들녀석한테 형이 글을 올렸다는 이야기 오늘에야 들었어요. 지난 여행의 감흥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