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가 끝난 들판이 제법 파랗게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벌써 풍년을 꿈꾸어 봅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서 식물채집과 사냥을 하며 살아오던 우리의 조상들이 드디어 농사짓기에 눈을 돌리자 생활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는데요, 그들은 황야에서 행동반경 수 백 리의 이동 생활을 하면서 거칠게 살아 왔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비로소 안정된 정착 생활을 하였던 것이지요. 이때부터 인류에게는 문명의 기운이 제대로 싹 트기 시작했고, 양식의 저장과 함께 웃음과 눈물 그리고 민속이라는 여유를 만들어 나왔다고 봅니다.
자, 문명을 만들어 내면서 여유롭게 살았던 조상들을 우리는 어디서 뵐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어떤 풍습을 가지고 생활하였을까요?
이 일을 알아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이나 아직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는 습관이 있고, 유형의 유물이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지요.
이 가운데 유형의 유물을 얻는 방법은 아무래도 옛날의 무덤이나 집터 또는 생활 현장을 발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무덤은 시대에 따라 양식을 계속 달리하지만, 죽은 후의 내세를 믿었던 그들은 무덤 속에 피장자와 함께 생활 도구나 명기라는 상징적인 물건을 넣어 주었기에 오늘의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조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이라야 2-3천년 정도였는데, 그저께 10일날 이웃 부산 동삼동에서 깜짝 놀랄 발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무려 8천년전의 무덤과 그들이 사용했던 완전한 모양의 결합식 뼈 낚시바늘과 죽은 사람의 팔목을 장식하였던 팔찌 같은 유물이 3천 점이나 쏟아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유적은 국가사적인 동삼동 패총의 주변 정화를 위해 지난 5월 17일부터 작업을 하던 중 한 지층에서 발견된 것인데요, 이 지층의 형성 시기를 두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을 한 결과 기원전 6천년 경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 지층에서 깨어졌지만 조각이 모두 맞는 토기로 만든 관이 발견된 것이지요. 이런 관이 있는 묘를 옹관묘라고 부르는데, 옹관묘는 주검을 독이나 항아리에 넣어서 땅을 파고 묻는 무덤으로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청동기시대라고 하면 기원전 6백년에서 3백년 전으로 보통 보니까 지금부터 2천 3-4백년 전에 유행하던 묘제인 셈입니다.
이번에 발견된 동삼동 옹관묘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일본의 기원전 3천년보다 무려 3천년이나 더 앞서니 이렇게 되면 동남아시아에서는 가장 오래된 옹관묘로 기록되게됨은 물론 우리의 옹관묘 역사도 6천 5백년 앞당겨져야 하는 중요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런 옹관묘가 울산에서도 여러 차례 발굴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조사도 하기 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남구 황성동 뒷산에서 공장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옹관묘와 토기가 무수히 나왔지만, 여기에 대한 조사 없이 그대로 불도저의 칼날에 날아가고 말았다고 황성동 주민들은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저 울산시의 문화정책을 가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15년 전쯤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더 심각한 일은 고분의 도굴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도대체 고분이란 무엇일까요?
고분은 옛 무덤이란 뜻인데,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를 말합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고분이란 단순히 오래된 무덤이나 바깥 모양이 크다란 봉분을 갖는 무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사회 내부에서 힘이 센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계급분화가 진행된 결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명확히 구분된 상태에서,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성을 과시하며 일반인들의 무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형태로 만든 무덤만을 고분이라고 말합니다.
또 학자에 따라서는 국가의 형태가 이루어지기 전인 부족사회시대에서 국가적 통제가 확립되어 가는 삼국의 건국 시기로부터 화장이 성행하여 고분의 축조가 쇠퇴하는 통일신라 후기까지 이루어진 분묘만을 고분이라고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반인의 무덤 즉 민묘가 고분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고, 이 묘가 자료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을 때 자연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 한 사람의 그림자만 순간적으로 떠올릴 뿐 고분의 이름을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계를 지어놓고 보면 고분의 범주에 드는 것이 대체로 윤곽이 잡혀집니다.
이들을 다시 형태별로 구분하여보면 흙에 묻는 토장묘, 돌무더기를 쌓아 만든 적석총, 지난주 소개해 드린 큰 돌로 표시하여 만든 지석묘, 크고 납작한 돌로 상자처럼 짠 다음 시신을 안치한 석관묘, 돌멩이와 깬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듯 곽을 만든 석곽묘, 조금 전 소개해 드린 옹기나 항아리로 만든 옹관묘, 나무로 곽을 만든 다음 땅에 묻는 토광목곽묘 등 여러 형태로 분류가 됩니다.
울산에는 이들 여러 형태가 거의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오늘은 남쪽에서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적석총과 울산이라는 지명의 근거가 된 우시산국의 터 울주군 웅촌면의 고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려가 있는 북쪽은 남쪽과 달리 날씨가 추우므로 사람이 죽으면 얼어붙은 땅을 파는 것 보다 주변의 돌을 주워 모아 시신을 덮으니 자연히 돌무지무덤 즉 적석총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적석총은 이후 정식 분묘로서의 위치를 다지는데, 발굴된 북쪽의 적석총을 중심으로 구조를 살펴보니까요, 맨 땅위에 조약돌을 네모지게 깔고 그 위에 시신이 들어있는 목관을 안치한 후 돌을 덮은 형태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은 초기의 형태이고, 외형적으로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돌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강 돌 대신 깬 돌을 이용하여 기단과 계단을 만들고 묘역을 구획 짓는 돌담도 생기게 됩니다.
이런 고구려식의 묘제인 적석총이 울산 여러 곳에 있다는 것은 대단한 흥밋거리가 아닐 수 없지요.
바로 지방문화재 기념물 8호로 지정된 은현리 적석총이 그것입니다. 넓은 검단 분지의 서쪽 산자락인 보골봉의 기슭에는 사람 머리 크기에서 그의 두 세배가 되는 돌을 마치 피라밋 모양으로 쌓은 돌무지가 있는데요, 한 변의 길이가 거의 20m, 높이가 6m 정도인데, 더구나 기단으로 여겨지는 아랫부분에는 계단의 모습으로 쌓은 흔적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30여m 떨어진 둘레에는 돌담을 쌓아 묘역을 구분하고 있으니 이 모습이 고구려의 적석총과 너무 닮아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왜 여기에 이런 무덤이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삼국사기에 우시산국이라는 강력한 성읍국가가 등장하는데, 이 우시산국이 있던 터의 중심지가 이곳 부근이고, 따라서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창적인 문화를 이룬 흔적이라는 것이지요. 울산이라는 이름이 우시산국에서 나왔음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우시산국 사람들은 북쪽에서 간섭 없이 흘러와 여기에 정착한 것일까요?
또 하나의 설은 이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를 4세기 무렵으로 보는데 이때만 해도 힘이 약한 신라가 왜구의 침략을 받자 이를 돕기 위해 출병한 고구려군의 한 장수가 죽자 그들만의 묘제를 여기에 이루어 놓았다고 하는 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적석총은 문화재로 지정된 이곳 이외에도 이웃의 운흥사지 입구에도 두 기가 있고, 울산상고 뒤 문수산 자락과 두동면 지잔고개마루에도 있으니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고대사의 의문입니다.
이 적석총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웅촌면 대대리 고분군 역시 성격의 규명에는 아직 의문 투성이인데요,
이 유적은 일찍이 도굴꾼들의 손에 의해 오랫동안 무참히 파헤쳐져 오다가 1991년부터 2년에 걸쳐 일부지역에 한해 발굴된 고분군입니다.
이 고분들은 3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묘지인데, 토광목관묘가 73기로 대부분을 이루었고, 옹관묘 6기를 비롯한 토광묘와 청동기시대의 집터 등 여러 유구가 조사되었고, 출토 유물도 1m가 넘는 쇠칼 같은 철기류 245점을 비롯해 토기, 장신구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무엇보다 다리가 셋 달린 청동제 솥이 출토되므로 이 유적의 중요성이 다시 입증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청동제 솥은 높이 50cm, 지름 40cm의 크기인데, 이것은 중국 전국시대에서 후 한말까지 만들어져 제후나 황제들이 신분의 상징으로 간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솥의 등장으로 이 터에 강력한 왕권에 버금가는 지배집단이 거주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들이 바로 우시산국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 것이지요.
더구나 그 무렵에는 철 덩어리인 덩이쇠가 화폐의 기능이 있었는데, 이런 덩이쇠를 비롯한 많은 철제류가 나오면서 이들이 철을 매개로 멀리 중국까지의 대외 교역을 주도하였던 집단이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고분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물론 적석총이나 대대리 고분군에 묻힌 주체자가 지배 권력층이었음은 두 말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고분의 발굴 현장에 가보면 유골이 없더라도 부장품의 위치와 유구의 방향으로 시신이 머리를 어느 쪽으로 두고 있었느냐를 관찰하게 됩니다.
시신의 머리 방향을 ‘침향’이라고 하는데, 시신을 묻을 때 머리를 어느 쪽으로 두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 민족, 지방, 종교 등에 따라서 다릅니다. 선사시대의 우리나라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두는 동침과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남침이 기본이었으나, 동침이 압도적으로 많은데요, 이것은 해가 뜨는 방향과 햇빛이 뜨겁게 비쳐주는 방향이 다시 생명을 부활시킨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기본형은 그 뒤 고구려, 백제에서부터 북쪽에 머리를 두는 북침으로 차차 바뀌게 되었으나, 울산지역을 비롯한 신라에서는 7세기경까지 동침, 남침이 뿌리깊게 내려왔습니다만, 고구려 등의 석실묘 제도가 동남쪽으로 퍼지면서 통일신라시대 이후가 되면서 북침이 우세해 지고, 그것은 그대로 고려,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침은 북망산천사상에서 나온 방법이랍니다.
고분과 집터는 묻혀있는 박물관입니다. 이런 박물관이 울산에는 무려 477곳이 조사되고 있는데, 이 정도의 숫자는 밀도면에서 전국 최고의 숫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갖는 관심은 거의 무관심에 가깝습니다. 이 무관심은 오늘도 도굴꾼을 불러들여 소중한 울산의 혼이 파헤쳐지고 있습니다.